[커미션] 바탕색
모멸(@Contempt_ff14)님 작업물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진 것이다. 남자의 눈동자에 얼핏 애정이 어리는가 싶으면, 곧 광증이 되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만다. 마치 사랑이란 존재를 처음부터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성찰하지도 않는 존재. 언제까지고 본능에 시달리며 지배받을 인간의 군상. 제 주인은 영웅이 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인간의 형상을 뒤집어쓴 한 마리의 짐승에 훨씬 가깝겠지. 입김이 절로 나오는 위병소에 도착했을 때조차 그는 항상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려 애쓰고 있었다. 피 냄새가 느껴지는 거겠지. 그 피 냄새를 쫓아가 양껏 베어 물고 싶은 건 아닌가? 물끄러미 모리오르의 창백한 얼굴을 시선으로 덧그리고 있노라면 제 몸에 잔뜩 힘을 준 위병소 기사가 모리오르 앞에 당도한다. 긴장으로 수축한 근육, 떨리는 손발, 꽉 깨문 입술에서 느껴지는 긴장감. 모리오르에게 겁먹었군. 제법 담백한 생각이었으나, 그가 어찌 생각할지 알 수 없다. 약한 자에게 동정을 가질 정도만 되었더라도 동떨어진 감각은 느끼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렇담 독 바른 혀로 자신을 핥아도 나쁘지 않았을 터인데. 혀가 아리고, 뼛조각 하나도 건지지 못하리란 외로움에 허덕이며 도망칠 필요도….
상념에서 깨어난다, 지레 겁먹어 잔뜩 줄어든 근육 탓에 걸음걸이가 이상해진 위병소 병사가 저 옆으로 자리를 비켰다. 위병 근무를 며칠 함께 할 뿐인데, 하기야 피 냄새를 풍기는 인간을 겁먹지 않는 건 그의 친우 비슷한 존재뿐인가. 친우보단 주인에 가까우나 주인조차 고삐를 잡지 않아 제 손으로 끈을 쥔 놈이. 혼란으로 흔들려 결국 무엇도 남지 않도록 스러지지 않아야 내가 덜 외로워질까. 그렇다면 나는 네 곁에 남는 편이 나았나? 주인이란 이름으로 너를 부르고, 너의 검은 것들을 받아먹으며 허기짐에 익숙해지고? 그 허기짐이 아쉬워지는 날이면 너와 가지 못한 바다 위에 오르는 상상을 하며. 우스운 가정이다. 설령 그것이 허락되었대도 내 쪽에서 거절하고 싶은 일이거든. 낮게 웃었다.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너의 가장을 볼 때면 무엇도 떠오르지 않기에.
그런다고 인간이 될 수는 없지, 모리오르. 우리는 태생부터 비틀린 까만 점일 뿐이거든. 까만 점을 원으로 빚어낸들 결국 형체를 갖지 못하는 건 똑같잖아. 발버둥 쳐 나아지는 것도 없거늘. 그렇게 인간이 되려 했으면 통 안에 널 아주 작게 잘라 비집어 넣었어야지. 천성이 곱지 못해서 당신을 위로할 자신이 없어서. 언 돌바닥을 밟고 걸어가던 모리오르가 처소에 들어가기 전, 딱 한 번 뒤를 돌아보았는데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었다. 아마 우리 여정이 이어지는 내내 이 꼴을 하고 있으리란 걸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함께 경계 근무를 설 뿐인데도 말이지. 코웃음 치고 싶었으나 모리오르의 얼굴이 문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이미 세계에 헌신하고 있는데도 아쉬운 게 남은 모양이군, 나의 주인은.
주인의 표정에서 어렵지 않게 내려앉은 외로움을 읽는다. 동시에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강렬히 스치는 분노를 읽었다. 당신은 결코 인간적인 영웅이 될 수 없으리라.
이미 양껏 몸을 낮추고 있는 짐승에게 더 엎드리라며 목줄을 쥐어보았자, 목을 물어뜯길 일밖에 남지 않을 테니까. 어렴풋이 느끼던 불쾌감을 양껏 맛보았을 때 너의 표정이 어떠했는가. 시기, 질투, 분노, 비통, 모든 감정이 뒤엉켜 눈물 한 방울도 떨구지 못하던 나약한 짐승. 참으로 딱한 인생이었으나 태어난 이상 어쩌겠는가. 우리는 늘 살아남아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났는데. 예상했던 것처럼, 위병소 교대 근무 시간이 되었음에도 병사는 찾아오지 않았다. 끝의 끝에서 겨우 발을 질질 끌며 걸어온 남자의 표정은 투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으나, 우리는 어렵게 그 남자가 모리오르의 살기에 기가 눌려 눈치를 보고 있단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인간은 본능적인 이질감에 두려움을 느낀다. 저도 몇 번이나 보았던 풍경이기에 모를 수가 없지.
“이만 갈게.”
모리오르는 최대한 담백하게 말을 꺼냈다. 제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이라면, 멋대로 인간 목에 손을 올리지 않기로 티티아와 약조하지 않았던가. 그자가 알려주었다. 네 손짓 한 번에 죽을 이 말에 매번 휘둘릴수록 너는 후회하게 되리라고. 평소 모리오르답지 않게 잘 버티고 있군. 주인을 잘 만난 덕에 인내심이란 건 조금 학습한 모양이지. 다만 그자를 죽이지 못한 건 아직 아쉬웠다. 너도 한 번 전부 쏟아부으면 내 감정을 이해할 것 같았는데. 애석하게도 주인을 해치우지 못한 이상 처분은 달게 받아야 하지 않을까. 모리오르가 주먹을 딱 여섯 번 꽉 쥐었다 놓았을 때 그는 언 땅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마물의 사체를 발견하였다. 방금 제 손으로 때려죽인 것조차 잊어버린 모양인데, 도움을 받은 상인은 감사 인사를 내뱉기도 전 비명을 지르며 위병소로 내달렸으므로 이 기이한 소문이 도는 지 얼마 걸리지 않으리라 짐작했다.
‘모리오르.’
이리 불러도 당신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야 들리지 않을 테니까. 여행을 떠난 직후였더라면 이 말에 고개를 돌아보았을지도 모르겠군. 주인, 나의 망가진 주인, 세계의 인형아. 몹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저를 내버려 두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증오스러웠다. 아니, 세계를 증오한 것이겠지. 자유로운 몸도 갖추지 못한 자가 무엇을. 피가 묻은 주먹을 털고 인계받은 오두막에서 잠을 청하려 해도 잠들지 못할 정도로 예민해진 몸이 거슬리는 모양이다. 피부가 따가워, 홀로 그리 중얼거리는 게 을씨년스러운 밖과 퍽 잘 어울렸다.
“내가 뭘, 왜 그런 표정으로.”
인간이 마물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이, 세상을 뒤져도 나오지 않을 테니까. 우리의 세상에선 존재하지 않을 거야. 매일 마물이 사람을 습격하고, 너는 그것을 맨손으로 때려죽일 수 있는 큰 짐승이잖아. 인간을 이해해도 읽지 못할 거야. 너는. 영원히.
그리 속삭이고 있노라면 너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딱딱한 침구에 머리를 쿡 처박고 만다. 어둡고 차가운 곳만이 우리의 보금자리지. 그래. 모리오르는 고요하게 잠든 채였다. 창문 새로 몇 불청객이 서성거리는 것도 같았으나 위병소를 급습할 정도로 배짱 있는 놈들은 없는 모양이군. 금방 횃불이 다른 방향으로 돌아갔다. 프레이는 눈을 감았다 뜨며 밤을 지새운다. 그러곤 불안정한 제 주인을 잠시 생각했다. 너는 우리가 완전히 떨어진 채 살아가길 바랐을지도 모르지만, 애초 나는 네 일부이자 거대한 의지 중 아주 작은 파편일 뿐이니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취할 수 없단 걸 알고 있을 텐데. 그래도 정녕 아쉬웠나. 너의 이해자, 그래 이해자처럼 보이는 그를 두고서도 이 밤을 불안에 떨며 잠들어야 할까. 이제 네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강인한 적들도 자취를 감춘 이후인데도. 프레이는 주인이 정녕 영웅에 걸맞은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지부터 생각하기로 했다. 저 그림자 끝에 걸린 너는 어떤 모양이었지? 울며 도망치던 때는? 배신감에 치를 떨 때는? 네가 잔악해지던 순간은 언제였지? 훔쳐볼 수 있는 기억 파편을 든 채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애초 신체라곤 없는 미약한 의지 조각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너를 읽고 어지럽혀진 속내를 가라앉히는 게 고작이니까. 그 속내마저 내게 보여주지 않을 때는 별수 없는 일이지만.
“벌써 아침이야.”
한참 상념에 잠겨 네가 깨어난 줄도 몰랐다. 정확히는 정신을 빼앗기듯 의식을 놓고 있었던 탓에 가깝겠지만. 모리오르는 피로 한 점 묻어나오지 않는 얼굴로 태연히 아침이 왔음을 알렸다. 그와 같은 숙소를 쓰고 있는 이도 없거늘, 누군가 있는 것처럼 조용히 읊조리는 버릇은 누구에게서 온 걸까. 언젠가의 친구? 부러 흐린 기억은 되짚지 않았다. 되짚을 수 없을뿐더러 덮어두고 싶은 건 망령이라도 있는 법이지. 허탈한 웃음과 함께 바깥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모리오르의 뒤를 따랐다. 오늘은 눈보라가 꽤 치겠어. 새벽 눈구름으로 자욱해진 하늘의 모양을 바라보던 그 역시 그리 중얼거렸다. 오늘 등의 기름을 충분히 넣어두어야겠다. 이왕이면 야간 순찰은 내가 나가야겠다. 모리오르는 홀로 계획에 빠진다. 상념에 빠진 채로 잘도 눈밭을 걷는다.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깊이 쌓여있었는데. 갑작스레 연일 눈이 왔다나, 평소에도 눈이 자주 오는 이슈가르드에서도 예외적일 정도로 폭설이었다나. 저 난간 밑으로 떨어뜨릴 이가 없으니 이런 시련이라도 주시는 모양이지. 한 번 빈정거리곤 모리오르의 눈동자를 보았다. 곧 정신을 차리겠군. 위병소에 도착하자마자 어젯밤 보았던 위병은 척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오늘 근무 시간은 11시까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도적 떼를 만날 걱정은 없겠어. 이런 눈밭에 털어먹을 게 무어 있다고 도적이 나타나겠냐마는. 이런 곳일수록 행상인들이 귀중품을 챙기기도 하니 올지도 모르겠군. 프레이는 꽤 주변 환경을 후하게 평가해 주었다. 모리오르 역시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겠지, 어쩌면 아무 생각이 없을지도 모를 일이나 티티아의 말은 꽤 귀 기울여 들었으니 반복해서 들은 사실 정돈 기억하고 있을 터다. 도적 떼를 놓칠 정도로 허술하지도 않으나,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간 분명 그들의 재판 때 불리하게 작용할 테니 어느 정도 자비를 두어야만 하겠어. 어려운 일이군.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게 가장 힘들지. 마물은 죽여 전리품을 챙기면 되는 것이고, 사살 예정인 범죄자는 시신을 인도하면 그만. 그러나 적당히 위협하여 체포해야 하는 인간은?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모리오르에게 손속의 자비란 어딘가 이해의 영역에서 묘하게 비틀어지곤 했으므로. 그들이 나타나지 않길 비는 게 훨씬 낫겠군. 태평한 생각을 이어가며 벽에 기대섰다. 주인 역시 단조로운 일정에 맞추어 주변을 순찰하고, 위병소 망루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길 반복하며, 위병소 일지에다 오늘 있었던 자잘한 사건들을 늘어뜨리는 게 고작이었다. 예상해 보면 위병소 일지에는 이리 적지 않았을까. 이상 없음, 특별한 징후 보이지 않음. 짧은 문장만 늘어뜨려 놓을 주인을 잠깐 상상하다 창문 밖으로 시선을 둔다.
위병소의 첫날, 그리고 둘째 날, 셋째 날까지 아무 일 없이 흘렀다. 의뢰 내용으론 꽤 다급하게 요청했던 모양인데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고요함에 교대 근무를 서기 위해 방문했던 위병들마저 고개를 갸우뚱 할 정도였다.
“이상한 건 맞아.”
모리오르는 그러면서도 말을 흐렸다. 이 시기쯤 자생하던 마물이 있었던가? 이슈가르드 인근의 마물 수첩을 살펴보는 입매가 진중했다. 위병소의 위병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지만, 이 남자는 꼭 이런 감만은 지독하게 잘 들어맞았으므로. 다량 발생하는 몬스터 사이로 ‘정예 마물’로 구분되는 게 보일 때면 모리오르의 감정이 요동치던 걸 떠올리니 한숨이 샌다. 불안감과 목을 긁는 갈증 탓에 마물 사냥에 나서게 될지 모르겠다. 위병소를 지키는 건 아니지만, 아니 비슷한가? 그가 강한 마물의 기운이 잘 느낀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모험가란 이들은 시시각각 목숨을 위협받는 일이 많으니, 어렵지 않게 감이란 걸 익히는 법이니. 다만 그런 마물들 모두가 모리오르의 시선을 잡아끄는 건 아니다. 어중간한 존재는 이제 타는 목을 채워줄 수 없기에, 되레 고통스러워질 뿐.
“사파트…….”
‘피 냄새라도 맡았습니까?’
“프레이.”‘……예.’
줄곧 곁에 있었음에도 목소리가 닿는 순간은 몇 없다. 아주 잠깐의 에테르가 허락했을 때 정도.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의 표정은 사지를 오가는 군인의 얼굴이다. 저런 표정으로 제게 할 말이라면 딱 하나 아닐까. 홀로 그 마물을 ‘사냥’하고 싶을 때뿐. 목숨은 하나인데 기생하는 이들까지 신경 써야 하는 인생이란. 무던하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불안감과 고통으로 휩싸인 얼굴, 감추지 못한 들뜸이 향하는 대상이 마물이라니. 그를 지켜보는 제 마음은 안중에도 없이 한없이 뒤틀린 속을 부여잡은 얼굴을 보았다. 대꾸조차 하지 않으려 했거늘,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어떤 말과 행동을 전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아주 잠시 당신의 껍데기를 뒤집어쓰던 당시를 제법 그리워하는 구석이 있단 걸 알고 있는 이상 더더욱. 한숨 소리에 잠깐 움츠러드는가 싶던 기색이 추위에 씻겨 내려간다. 확장된 동공 속의 열감. 그래. 타는 듯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데 짐승이 어찌 참겠는가. 만류하는 이들을 모두 다 떨쳐낸 네가 불안정하게 뜀박질했다.
저 설원에서 달려 나가는 당신을 어찌 붙잡을까. 살고 싶어 발버둥 치는 자의 발자취가 소복한 눈 위에 찍힌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당신을 따라가고 뒤꽁무니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지웠다. 들을 가치 없는 말이지. 모리오르. 이건 누구도 덜어줄 수 없는 본능이니까.
‘도륙하진 마시고요.’
“나도 알아…”
‘안다는 사람이 대검을 역수로 잡습니까?’
“아. 아니야. 가서 제대로 잡으면 돼…. 할 수 있어.”
제대로, 할 수 있어, 프레이. 너도 내 대검술을 오래 봤잖아. 대검술이라 명명해도 좋을지 잘은 모르겠으나, 당신이 그리 생각한다면 그리 생각하도록 두었다. 마구잡이로 표면적을 넓히려 휘두르는 막무가내 검술도 있는데 당신이라고 명명하지 못할 것 무엇 있나. 뻔뻔해지는 구석이 나날이 느는 것 같지만 나이를 먹는 것이라고 하자. 죽은 망령이 어째 생명의 순환을 읊조리느냐 하면은 영웅이라 불리는 어리석은 작자의 아집인 탓이라 하자. 어떤 핑계를 대든 달라지는 건 없을 터나.
“프레이, 저기.”
남이었다면 눈보라에 묻혀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을 텐데. 나는 당신의 일부이니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거대한 비취색 용이 설산 근처를 배회하며 날고 있었다. 인간의 공포심을 즐긴다고 하던 용인가. 몇 마리 잡아내지 않았던가? 그득한 욕심으로 가득한 용의 배를 가르고 겨우 몇 시간 갈증을 해소했던 지난 몇 번의 경험을 되짚으려다 긴장감으로 동공이 샐쭉해진 모리오르의 얼굴을 본다. 넌 이럴 때조차 짐승 같지. 생명의 죽음은 네게 잠깐의 유예를 줄 뿐이고. 홀로 중얼거리듯 토해낸 말은 네게 닿지 않는 모양이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색한 웃음을 덧그리는 남자는 없다.
“구름바다를 떠돌다가 잠시 내려온 모양인데. 쇠뇌가 없어.”
‘하늘을 나는 용을 사냥하기엔 제격이긴 하지.’
“비스마르크를 떨어뜨리기도 할 정도로 단단한 것도 있으니까. 편할 텐데.”
‘그때 당신 비에 흠뻑 젖고도 좋다고 웃었었지.’
“젖으면 머리가 식잖아.”
갈증도 가라앉으면 좋을 텐데. 그리 고요한 목소리가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막 안착한 용의 목을 뜯어내기 위해, 그리고 어리석은 인간들을 위한 영웅 행세를 위하여. 영웅은 용의 목을 떨구었다. 핏발이 선 채 죽어버린 용의 머리를 든 영웅. 시민들은 찾아온 안정에 기뻐하였다……. 시답지 않은 문구 속에 담긴 모리오르는 참으로 용맹한 인간처럼 보였다. 위병소 근무 일지에 적히기엔 참으로 거창한 문장이었는데 당연히 모리오르가 적어낸 게 아니었다. 마물 토벌의 증거로서 근무지 이탈을 상쇄하려는 겸 잘라 온 용의 머리가 거대한 마물이었던 탓이지. 모리오르는 그들이 무엇을 말하든 큰 불만을 내놓지 않았다. 그저 흐린 얼굴로 고개를 주억이고 있을 뿐. 이전처럼 큰 실수로 재판장에 불려 온 것도 아닌데, 왜 저리 겁먹는지. 여전히 알 수 없는 작자다. 위병소 근무는 예상보다 괜찮은 수확으로 끝이 났다. 또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됐는지 제가 건넨 충고 몇 마디는 들어먹지도 않고 얇은 옷차림으로 위병소를 나선 모리오르의 짐은 올 때처럼 가벼웠다. 보온 마법이 걸린 옷이라도 추위를 전부 막아주는 건 아닌데. 이런 곳에선 꼭 어리숙하게 굴었다. 인간 사회에 녹아들지 못한 모난 돌임을 이렇게 증명할 필요는 없는데. 모리오르는 다시 허공을 보았다. 눈이 내린다. 눈이 그치지 않는다. 마물 몇 마리가 더 근처를 배회해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누군가 들었다면 기함할 소리였으나 그의 귀까지 마물 소식이 들리려면 꽤 주변 인간들의 희생된 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아주 잠깐 들끓는 속에서 벗어날 권리가 네게도 있지 않나, 너의 일부로서 지독히 당연한 게 아닌가. 이리 말하는 걸 보면 나도 너의 일부이니 어딘가 모난 구석이 있는 거겠지.
누군가 죽음의 땅에서 언 채로 눈을 감아도 상관없었다. 네가 아주 잠시라도 그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뭐든 상관없을 일이었으니. 모리오르. 당신은 짐승으로 태어나 모난 조각까지 얻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정하진 않더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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