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14] 등의 불씨

타닥이는 불씨의 백색소음이 눈의 집을 채운다.

※ FF14 주요 퀘스트 <제7 성력 스토리: '희망의 등불'>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며,

원작과 묘사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일부 장면 구성을 큐님이 도와주셨습니다! 감사해요 큐님 짱!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시녀가 방을 나서자 왕의 침소에는 두 인영만이 남아 있었다. 에오르제아의 희망이라 불리는 젊은 모험가 메리아와 울다하 왕조의 제17대 왕 나나모 울 나모였다. 테이블을 둘러싼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메리아는 나나모 울 나모라는 이름이 늘 익숙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도 눈앞의 또래 여성이 멋대로 집을 뛰쳐나온 ‘리리라 아가씨’로만 느껴졌다. 무의식 중에 가출 소녀로서 깊은 동질감을 느끼고 있어 그랬을까. 하지만 더 이상 리리라는 없다. 나나모는 어디까지나 울다하의 여왕으로서 자신을 불러낸 것이다. ‘상대의 의도에 맞추어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랑하는 언니의 가르침 중 하나를 떠올리면서 메리아는 답답한 마음을 꾹 눌러 담고 여왕의 말을 기다렸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 부른 건 아니다. 그대에게 미리 할 말이 있느니라.”

  울다하의 정세는 몰려든 난민들과 야만신의 위협으로 늘 불안정했다. 최근에는 텔레지 아델레지의 수상한 움직임까지 더해져 온 국가가 내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다. 자신을 불러낸 이유가 무엇일지는 짐작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여왕에게는 무엇보다도 믿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한 것이라고 메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응, 들어줄게. 우린 친구니까.”
  목소리를 들은 나나모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여왕의 눈망울이 그 어느 때보다도 터질 듯이 먹먹했다.

  “그대에게는 고마운 마음뿐이구나.”
  깊은숨을 내쉰 후 나나모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표정에서 더 이상 물결처럼 일렁이는 감정은 엿볼 수 없었다. 그 대신 국가와 백성들을 깊게 사려하는 여왕의 얼굴이 있었다.

  “…짐은 울다하 왕조의 막을 내리려 한다.”

  이야기가 끝나자 메리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나모의 문장마다 그가 얼마나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렸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난해하고 섬세한 정치 화제에 쉽게 의견을 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하지만 애써 넘쳐흐르는 생각들을 다듬어 보았다.

  “이걸로 모두가 행복해지면 좋겠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을 테지. 곧 새 사회의 기틀이 자리 잡힐 것이야. 그리되면 지금의 왕국보다도 안정적으로 번영할 것이니라.”
  “…왕국이 없어지면 나나모 님은 어떻게 할 거야?”
  “글쎄….”

  여왕의 눈이 먼 곳을 그리는 듯 깜박이더니 조명을 받아 빛났다. 그 모습에 메리아는 잠시 첫 만남 적의 리리라 아가씨가 되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리리라가 웃었다. 아직 앳된 목소리에 부풀기 시작하는 기대가 서려 있었다.

  “상황이 허락된다면, 짐도 그대처럼 모험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메리아의 얼굴에도 기대 어린 웃음이 환히 피었다. 소중한 친구에게 모험의 꿈을 안겨준 것이 기뻤다. 만약에 그런 날이 찾아온다면, 나나모에게도 자신이 경험했던 에오르제아의 곳곳을 소개해주고 싶었다. 미래를 꿈꾸는 두 아가씨의 따뜻하고 즐거운 목소리가 방을 채웠다. 각자의 작은 희망이 싹튼 여왕의 침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웠다.

  “후후. 사사간 대왕 나무에서 그대와 만난 것이 마치 엊그제 일처럼 느껴지는구나. 앞으로도 그대를 믿겠노라, 영웅이여.”

  하지만 잔에 든 술을 입에 머금은 순간, 나나모가 괴로운 표정으로 자신의 목을 감쌌다. 발악하듯 허공을 휘젓던 팔이 중심을 잃고 기울어지는 몸과 함께 쓰러졌다. 그가 의자에서 굴러 떨어져 바닥을 칠 때까지도 메리아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지 못했다.

  “…나나모 님?”
  “…나나모?”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나나모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메리아는 그 자리에서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사선을 넘나들어 이 자리에 온 모험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정적이 무엇을 뜻하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지켜보는 바로 눈앞에서 나나모가 숨을 거두었다.



  “너희들…, 다 뭐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발을 내디뎠지만 메리아에게는 친구의 몸을 안아 올릴 여유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소녀는 그의 마지막 체온을 쓸어볼 겨를도 없이 침소에 들이닥친 텔레지 아델레지의 일당들을 노려보았다.

  “모험가…, 네가 폐하를 시해하였느냐! 이 방에는 나나모 폐하와 네놈밖에 없었다! 변명은 통하지 않아!”

  이상했다. 우연치고는 그들이 방에 몰려든 타이밍이 너무나도 좋았다. 둔감한 자신이 보기에도 마치 대본대로 흘러가는 한 편의 연극 같은 상황이었다. 텔레지의 입에서 명확한 의도를 가진 헛소리가 흘러나왔다. 메리아는 기가 찼다. 한 가닥 남아 있던 이성의 끈이 조금씩 닳아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내가 나나모 님을 죽였다고?’
  영웅의 얼굴이 점점 분노로 일그러졌다. 동시에 등에 짊어진 자신의 무기를 손에 쥐어 빼들었다.

  “…웃기지 마!”
  그러나 이를 드러내려는 순간, 메리아의 눈앞에 푸른 옷을 입은 거대한 사내가 나타났다.

  “무기를 내려라, 영웅이여.”
  “일베르드!”

  그는 다름 아닌 새벽의 동맹이자 에오르제아 통합 조직인 크리스탈 브레이브의 간부 일베르드였다. 메리아는 얼굴을 보자마자 그를 향해 달려가 호소했다. 머릿속에는 일 초라도 빨리 상황의 중대함을 모두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일베르드, 큰일이야! 나나모 님이 암살당했어! 어서 새벽의 모두와 라우반 국장님에게 알려줘야 해! 여기 이 녀석들이 나를 암살범으로 몰아갈 생각이야!”

  하지만 메리아의 절박한 외침에도 사내는 태연한 얼굴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당장 에오르제아의 안정을 무너트린 텔레지 일당들을 붙잡아야 할 판국에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린 듯한 그 태도에 메리아는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으로서는 도무지 일베르드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눈썹을 밀어 올렸다.

  “일베르드?”
  어떤 역사에서든 배신은 가장 절박한 순간 찾아오는 법이다.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을 마지막으로 메리아는 일베르드에게 힘으로 제압당해 구속되었다.



  텔레지 아델레지는 나나모의 죽음에 분노한 라우반의 검에 허무하게 처단되었다. 그것은 응당한 심판이었으나 축하의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혼비백산하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모두가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을 빠져나간 후에도 여왕 암살의 주모자로 지목받은 새벽의 혈맹 일원들과 메리아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여전히 절규에 몸부림치며 고향 동포에게 칼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왕궁 한복판에서 이어지던 사투는 일베르드의 일격이 라우반의 육중한 몸을 튕겨내면서 잠시 멈추어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라우반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이용해 자신의 검으로 메리아의 구속구를 끊어내며 말했다.

  “너희가 나나모 님을 암살할 리가 없다. …분명히 음모가 있어.”

  메리아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분위기를 살폈다. 국장의 편에 서 가세해야 할까? 민필리아와 현인들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켜야 할까? 그 짧은 찰나 동안에도 머릿속이 폭발할 것 같았다. 싸우는 것 이외의 문제들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그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적확한 판단을 내릴 자신이 없었다. 단순히 적을 베고 쓰러트리는 것이라면 문제없지만 스스로의 행동 하나하나가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는 사고 회로가 굳고 만다. 역시 자신은 타고난 바보다. 본국에 남아 있었다 한들 결코 부모님 뜻대로 현인이 되지는 못 했을 것이다.

  당황한 나머지 생각이 마비된 메리아가 망설이는 사이 라우반이 지시를 내렸다.

  “도망쳐라…. 여길 벗어나서 너희가 결백하다는 걸 세상에 증명해! 그리고 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라! 너희 말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서 가!”

  그의 말에 민필리아가 곧장 걸음을 쉽게 떼지 못하는 메리아의 손을 잡아끌어 달렸다. 메리아는 왕의 산책로를 달리면서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엄격하지만 친근한, 언제나 든든했던 라우반의 등이 조금 걱정스럽게 느껴졌다. 비단 잘려나간 팔 때문만은 아닌 기분이 들었다.

  ‘국장님…. 괜찮을까?’

  곧이어 혼자 자리를 비웠던 산크레드가 합류하며 혈맹의 전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산크레드의 제안으로 일행은 나나모의 침소 난로에 숨겨져 있는 비밀 통로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메리아는 또 다시 끔찍한 암살 현장으로 향하는 것이 내심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일어난 일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틈도 없이 곧바로 추격자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기척을 느낀 그 순간이었다.

  “다들 먼저 가! 여긴 내가 맡을게!”

  이다가 한 발짝, 앞으로 발을 내딛더니 동료들을 등지고 전투 태세를 취했다. 다른 현인들은 그의 돌발행동에 잠시 얼어붙었다가도 마치 예상한 일인 것처럼 하나 둘 씩 납득하였다. 임무에도, 사람에게도, 조직에서는 우선도가 매겨지는 법이다. 긴급 사태인 지금 조직은 가장 우선순위가 높은 조직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다의 모습을 보고 깨달은 것이었다. 파트너의 결단에 파파리모가 수긍의 미소를 띄우며 무기를 들었다.

  “…할 수 없지. 나도 같이 놀아줄게.”
  “이다, 파파리모!”

  아이러니하게도 이에 수긍하지 못한 이들은 이 자리에서 가장 보호받아야 할 두 사람뿐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민필리아의 표정을 보고서 메리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맹주인 민필리아를 안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험가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어 쇠격자로 봉쇄된 복도 너머에 남겨진 두 사람에게 소리쳤다.

  “이다, 파파리모! 뒤따라올 거지?”
  “물론이지! 꼭 따라잡을테니까~!”
  “메리아는 탈출로를 확보하는 일을 도와줘.”
  “약속이야! 어기면 꿀밤 백 대야!”
  “백 대는 너무 많아~! 아하하.”

  이번에는 기어코 약속을 받아낸 영웅이 망설이는 맹주의 손을 붙잡았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음을 이해한 민필리아는 세 사람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지하 수로에 도착한 뒤에도 긴장의 끈은 이어졌다. 지금은 멸망한 실디하 양식의 오래된 터널을 이루는 벽돌 냄새가 꼭 벗어날 수 없는 파멸을 예견하는 것처럼 도망치는 이들의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등 뒤에서 추격자들이 물길 위를 첨벙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은 두 현인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돌연 산크레드가 메리아의 정수리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마디가 굵고 커다란 손은 그대로 그의 머리를 꾹꾹 쓰다듬었다. 분위기와 맞지 않는 행동에 메리아가 퉁명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산크레드가 입을 연다.

  “긴 술래잡기가 되겠는걸. 메리아는 이길 자신 있지?”
  “……싫어. 무슨 소리야?”
  “하하, 이미 알고 있으면서. 모처럼 옛날 생각이 났는데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어 아쉽네.”

  산크레드는 손을 거두고는, 들고 있던 등불을 민필리아에게 건넸다.

  “여긴 우리한테 맡기고 가. 나중에 다시 만나자. 그때는 우리 아가씨의 기분도 풀려 있길 바랄게.”

  메리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힘없이 늘어진 흰 손끝이, 입술과 목소리가 다 같이 떨려 왔다.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며 절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나도 싸울 거야! 그리고 여기서 기다려야 이다와 파파리모가….”
  “그 두 사람은 오지 않을 거예요.”
  “야, 야슈톨라…?”

  단호한 말이 두 사람을 갈라세웠다. 발화자인 야슈톨라는 평소처럼 이성적이고 침착한 얼굴을 메리아에게 향했다. 메리아는 너무나도 평소와 다름없는 야슈톨라의 태도에 이내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약속이라는 허술한 구실로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어떤 미래의 가능성을 잔인한 단어의 나열이 뇌리에 끌어올린 것이었다. 메리아는 언제 눈물을 쏟아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집을 부리는 것 처럼 야슈톨라를 꿋꿋이 마주 보았다. 그러나 야슈톨라는 그의 기대를 무너트리려는 듯 여전히 냉정했다.

  “지금은 어리광 부릴 상황이 아니에요. 어서 가세요.”
  “싫어, 싸울 거야!”

  메리아는 부산스러운 손동작으로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가 얼굴을 덮으며 눈두덩이를 꾹 문질렀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이 새어 흐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파르르 떨리던 두 손이 피가 몰려 붉어질 만큼 힘껏 주먹을 쥔다. 빛의 전사는 몸을 말고 고개를 떨군 채 물에 잠긴 발끝을 바라보며 악을 썼다.

  “내가 다 불태워버릴게! 조금만 시간을 벌어줘. 나 싸울 수 있어! 그래, 차라리 지금 당장 왕궁째로 부숴버리고 이다와 파파리모를 데리러 가자!”

  씩씩,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이 분에 받힌 그것은 최근의 산크레드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찰나의 순간 그는 눈앞의 장면에 무언가를 깨달으려 하였으나 곧이어 벽을 때리는 야슈톨라의 목소리에 무의식을 뺏겨 결국은 실마리를 놓치고 만다.

  “메리아! 지금은 전투가 아니라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훨씬 중요해요. 당신이 알피노를 찾아서 사건을 해결해 줘요.”

  메리아는 도무지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비참한 기분이다. 동료의 안전조차 지켜낼 수 없는 자신이 어떻게 에오르제아의 영웅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것인지 무력한 상황 속에 자격지심이 들었다. 순간 뇌리에 고향에 두고 온 언니가 떠올랐다. 떨쳐내지 못한 무력함과 미숙함 탓에 또 다시 손 안의 것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다는 분한 마음이 되살아났다.

  “…메리아, 어서 가요.”

  따뜻한 온기가 메리아의 손을 그러쥐었다. 민필리아였다. 메리아는 자신을 재촉하는 그 손에 끌려 다시 앞을 향해 달려야 했다. 그곳에 남은 두 사람의 목소리가 완전히 정적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모험가는 몇 번이고 등 뒤를 돌아보았다.



  강하게 물을 차는 소리만이 텅 빈 통로 안을 울렸다. 어느 한 명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무기력한 침묵 속에서 마침내 두 사람의 눈앞에 수로의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몇 걸음만 더 달리면 바깥의 빛에 손이 닿을 거리에서 민필리아가 발을 멈췄다. 지금, 분명 빛의 음성이 귓가에 들렸다. 별의 인도에 그는 자신의 역할을 깨닫고 입을 연다. 맹주의 얼굴은 사명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여기 남겠어요. 당신은 먼저 가요.”
  “…뭐? 싫어!”

  메리아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이 민필리아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민필리아는 마주 선 채로 그런 그의 시선을 눈에 담았다. 앳된 얼굴에 어떤 감정이 떠올라 있다. 다정함에서 비롯된 두려움이다. 젊은 철부지 청년의 여린 마음씨가 그대로 민낯에 드러났다. 민필리아는 그 표정을 단 한 번 이전에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메리아가 산크레드에게 빙의한 아씨엔 라하브레아와 맞서 싸우던 순간이다. 초월하는 힘을 통해 그 기억을 엿본 민필리아는 그 전율과 공포를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그날의 전투는 모험가를 에오르제아의 영웅으로 승격시켰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고통스러운 후유증으로 남았음을 ‘새벽’의 다른 이들보다도 민필리아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동료들을 소중히 여기는지도, 이 조직이 얼마나 의미 깊은 보금자리인지도.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메리아를 감싸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민필리아는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언어로 호소했다.

  “제발! 당신은 우리의 희망이에요…! 우리 ‘새벽’의… 에오르제아의… 희망 그 자체라고요!”
  “…. 그럼 내 희망은…?”

  메리아의 눈이 일그러졌다.

  “내 희망은 너희들이야. 이제 죽은 친구의 시신을 수습하는 건 싫어…. 더는 소중한 것들을 잃고 싶지 않아.”

  울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온 뒤 일대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이상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차가운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두 사람이 명백히 대립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영원과도 같은 힘겨운 한때가 지나가고 민필리아는 자신의 팔에서 메리아의 손을 떼어내 양손으로 감싸쥐었다. 떨리는 손끝에서 선명하게 따뜻한 체온이, 살아있는 이의 고동이 느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민필리아의 결심을 더더욱 굳세게 하였다.

  “…‘희망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어요. 당신이 있는 한 ‘새벽’은…, 우리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불을 밝힐 수 있어요.”

  시선을 들자 출구의 빛을 등진 모험가의 얼굴이 두 눈에 새겨졌다. 그 모습을 본 민필리아의 얼굴에 희미하지만, 잔잔하고 따뜻한 미소가 확실히 떠올랐다.

  “약속할게요. 절대 여기서 끝나지 않겠다고. 당신이 혼자 슬픈 기억을 떠안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해요. 저뿐만이 아니에요. 모두가 당신이 밝힌 등불을 이정표 삼아서 제자리를 찾을 거예요.”

  형체 없는 마음은 언어로 빚어 전할수록 민필리아의 안에서 강한 확신으로 형태를 갖추었다. 이 사람이라면, 메리아라면 틀림없이 가능하다는 확신이었다. 이윽고 빛의 전사에게 가장 전하고 싶은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희망을 잃지 말아요. 반드시 돌아갈게요. 그러니까…, 살아야 해요. 메리아, 살아서 꼭 에오르제아를 구해주세요.”

  메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납득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반발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어떤 말도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떠난 이들이 되돌아오지 않듯이.

  어린 영웅은 입을 꾹 닫은 채 그저 괴로운 얼굴로 ‘새벽’의 맹주를 바라보다가 한 발짝 다가서 그의 등을 양팔로 안았다. 모두에게 희망을 이어받은 두 사람이 십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온기를 확인했다. 잠시 후, 빛의 전사는 민필리아의 품을 벗어나 천천히 뒷걸음쳤다. 등을 돌리기 전까지 시선을 주고받고는 마침내 출구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가 사라진 후, 희미한 별빛만이 혼자 남은 민필리아의 뺨을 상냥하게 어루만졌다. 싸움은 이제부터다. ‘새벽’의 맹주는 영웅에게 받은 온기를 상기하면서 각오를 굳혔다.



  수로를 빠져나오자 낯익은 사막의 건조하고 싸늘한 밤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소리 내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메리아는 입을 꾹 닫았다. 흐느낌이 새어날까 숨조차 눌러 담았다. 저도 모르게 굵은 물방울이 눈가에 한가득 차올라 매달렸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지면을 박차는 발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몇 번이나 주문처럼 되뇌인다.

  ‘아직 울면 안 돼.’

  알피노를 만나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친구들을 구해야 한다.
  오직 그 생각만이 모험가의 신경을 지배했다.



  오르슈팡은 자신의 벗과 그의 동료들을 위해 용머리 전진기지의 응접실에 ‘눈의 집’이라는 이명을 붙여 주었다. 동료와 거점을 모두 잃은 ‘새벽’의 손님들이 조금이라도 기운을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의 배려가 무색하지 않도록 눈의 집에는 실의에 빠진 알피노가 의자에 앉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자신의 미흡함을 모르고 오만에 빠져 동료를 위험에 몰아넣은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으며, 조부님의 뜻을 이어 지키고자 했던 에오르제아가 자신의 부산물에 의해 혼란의 어둠 속에 내던져진 것이 죄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앞이 막막하다. 태어나서 처음 떠안은 강렬한 좌절, 그리고 무력감이 그를 옥죄었다.

  “내 탓이야….”

  입술 사이로 전례 없는 한탄이 새어 나왔다. 알피노 르베유르가 동료들 앞에서 이렇게까지 약한 모습을 내비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누구도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침묵 속에서 오르슈팡이 선수를 쳤다. 모두가 주저하는 전장의 최전선을 가장 먼저 밟은 기사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알피노 공…. 그래서 이대로 ‘부러진 검’이 될 셈입니까? 정말로 당신한텐 아무것도 안 남은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 곁에는 아직 동료가 있어요.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아주 좋은 동료들이지요.”

  그러자 여태 잠자코 지켜보던 타타루가 뒤이어 입을 열었다.

  “아, 알피노 님…. 저…, 저기….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잖아용! 이, 이슈가르드로 가용!”

  메리아가 타타루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타타루는 알피노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주근깨 어린 오밀조밀 둥그런 이목구비가 이따금씩 분한 마음을 내비치다가도 또다시 어른스럽게 감정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 언젠가, 함께 싸우고 싶다는 염원으로 고향을 찾았던 때처럼.

  “민필리아 님이 말씀하셨어용! ‘새벽’의 등불은 절대 꺼지지 않는다고! 메리아 님, 알피노 님…, 그리고 제가 있는 한 눈 속이든 구름 속이든 그 불을 다시 밝힐 수 있어용!”

  타타루의 두 눈에 끝내 눈물이 맺힌다. 그럼에도 그는 울지 않기 위해 애쓴다. 뒷짐을 진 채로 벽의 그림자에 기대어 서있던 메리아의 시선이 생각에 잠기는 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나모와, 라우반 국장과, 현인들과, 민필리아의 마지막 장면들이 차례로 머릿속에서 흘러갔다. 그들의 마지막 말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메리아는 주마등이라도 보는 듯이 가슴이 괴로웠지만 더 이상 슬픔도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다른 무엇인가가 메리아의 마음속에 싹을 틔웠다. 그것은 조그맣고, 미약하지만, 처절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작은 폭발이었다. 영웅의 가슴속에 불씨가 피어올랐다.

  “…이다와 파파리모가 뒤따라 오겠다고 했었어.”

  무거운 정적을 깨고 모험가의 입이 열렸다. 메리아가 알피노 앞으로 다가섰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말문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거침없이, 목구멍 안에 눌러 담았던 감정들을 여과 없이 토해냈다.

  “산크레드가 다시 만나자고 했어…. 야슈톨라가 사건을 해결하라고 했어…. 민필리아가 살아서 에오르제아를 구해달라고 했어….”

  메리아는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떨어트린 채였다. 에오르제아의 희망이라 불리는 영웅이 어깨를 움츠리며 애원하는 모습은 마치 제 발이 저려 자신의 치부를 고백하는 아이처럼 애처로웠다.

  “알피노…. 나, 모두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
  “메리아 님….”
  “우리의 싸움은 이제부터야.”

  고개를 든 모험가의 눈에 난로의 붉은 빛이 일렁였다. 금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더 이상 그 얼굴에서는 망설임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잖아. 그러니까 네가 나를 도와줘. 내가 뭘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내게 알려줘.”

  곧은 시선에 불꽃의 윤곽을 담으면서,

  “지금 이 일을 해낼 사람은 너뿐이야.”

  메리아는 떨리는 두 손을 모아 쥐었다. 할 수 있는 한 어른스럽게 보이게끔.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자신을 감출 수 있게끔. 그리고 스스로 의지를 다잡기 위해서.

  “…알겠네.”
  그러자 알피노 또한 영웅의 의지에 답했다.

  “한 걸음씩 나아가세. 이번에는 동료들과 함께.”
  소년의 깊은 눈동자에도 다시, 빛이 깃드는 것이 보였다.

  한결 누그러진 분위기 속에서 메리아는 알피노, 타타루 그리고 오르슈팡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러면 가슴 한 켠이 뜨겁고 단단해진다. 이어서 나란히 면면을 맞대는 이 순간까지 그들이 무엇을 듣고 느끼고 생각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영웅은 이 자리에 선 모두가 같은 마음을 공유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 아직 끝이 아니다. 문제는 산더미 같더라도 제 옆에는 여전히 믿을 수 있는, 소중한 친구들이 남아있다. 메리아는 비로소 하이델린 님의 말속에 숨겨진 의미를 알게 되었다. 신은 분명 자신이 어둠에 맞설 수 있는 강한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정했다.’
  이대로 성에 찰 때까지 강해질 것이다. 만족할 때까지 어른이 될 것이다. 그전까지는 절대로 샬레이안에 돌아가지 않을 테다.

  ‘바보.’
  역시 산크레드가 틀렸다. 피아노와 책이 알려주지 못한 것들을 지금은 손 틈 사이로 빠져나간 것들이 사무치도록 알려주었다. 철없는 말괄량이 아가씨는 상처와 아픔에게서 두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용기의 가치를 배우고 있었다.

  문득 메리아의 눈앞에 또 다른 친구들의 미소들이 떠올랐다. 즐거운 추억 한 켠에 밀어둔, 먼저 긴 잠에 든 친구들의 미소가.

  ‘문브뤼다, 그라하. 나도 너희처럼 어른이 되어볼게. 내 영혼을 바쳐서라도 남은 동료들을 지킬게.’

  타닥이는 불씨의 백색소음이 눈의 집을 채운다. 샬레이안에서 온 젊은 불씨들이 다시 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신들에게 사랑받는 땅, 에오르제아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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