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빅터와 딸기생크림케이크 (2)
빅 피터팬 Big Peter Pan 유년기
“이사 가자.”
아침 식사 자리에서 메두사가 그렇게 선언했다. 지난 일의 연장선인 모양이었다. 레이디는 ‘이사’라는 생각에 들떴는지 벌써부터 몸을 들썩이고 있었는데, 오르카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의 이사 과정이 어떤지에 대해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결국 따라가는 구나.’ 정도의 생각이 전부.
그렇게 제각각의 반응을 보이는 나이프에게 백모래는 해맑게 첨언했다.
“A국으로 갈 거야!”
“그거 옆나라 아닙니까?”
“그렇지?”
“-우리 여행가는 거야?”
그때, 랩터에 대한 걱정과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와 설렘의 갈등 속에서 빅터가 자그맣게 목소리를 더했다. 오래 참았다 싶었다. 빅터는 새로운 자극을 좋아했고, 또 설렘을 참지 않았으니까. 결국은 그에 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행보단 이민이겠지, 바보 빅터.”
“애초에 합법이 아니니까 둘 다 아니다, 꼬맹이들아.”
그렇게 다들 기분이 들떴는지, 왁자지껄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에 뭔가 더 공지를 하려던 메두사는 한숨을 쉬었고, 그대로 해산 명령이 떨어졌다. 아, 둘은 빼고.
“오늘 저녁에 출발할 테니까, 다들 짐 챙겨 둬! -아, 세월이랑 가리는 따라오고.”
“네.”
“넵, 보스!”
“이사다, 이사~”
-그게 뭐 어쨌든, 빅터와 오르카는 그들의 방에 들어와 짐을 싸기 시작했다. 가방도 없이 그저 종이가방과 상자 몇 개만 가져온 상황이지만 그들의 물건을 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일단 사시사철 후드티나 셔츠를 입고 다니니 옷가지도 별로 없었고, 그들의 옛날 교재는 들고 갈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당장 들고 갈 것은 필기도구와 현재의 교재, 마음에 드는 책 몇 권과 옷 정도. 오르카는 작은 상자 하나로 간단하게 채비를 끝내고 빅터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빅터는 짐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제 그림이며 숙제의 기록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빅터, 정리 안 해?”
“나 예전에 숙제한 거! 일기장 볼래?”
“아니, 그건… 한 달 전에도 봤으니까.”
“그랬나? 다시 봐도 재미있는데!”
“그보다, 빨리 정리해야 할 거야.”
“아직 11신데 뭐. -헉, 점심 준비해야 해!”
…결국, 빅터는 짐을 반도 정리하지 못한 채 방을 뛰쳐나갔다. 요즘 들어 메두사에게서 요리를 배우는 통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르카는 대신해서 짐을 싸주기로 결심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디 보자, 빅터의 스케치북, …내 건 왜 챙겼지? 숙제로 쓰곤 했던 일기장. 이런 오르카 자신의 얘기가 절반을 차지하는 통에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이 둘은 굳이 가져갈 필요가 없어 보이니 버리기로 하고 고이 쌓아두었다.
옷은 더 거르기가 쉬웠다. 색이 바래고 늘어진 하얀 후드티만 두고 가면 되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빅터는 언젠가부터 마음에 들었는지 원색의 후드티를 주로 입고 다녔다. 메두사가 쓸 일이 있을 거라며 검은색을 챙겨준 것은 절대로 입지 않았지만, 그래도 챙겨야겠다 싶어 상자에 꾹꾹 눌러 담았다.
필기도구는… 그냥 전부 버리고 가는 편이 낫겠다 싶을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다 몽땅이 되어버린 연필, 잔뜩 갈라진 지우개, 지우개 똥이 묻은 통에 얼룩덜룩한 자. 결국 오르카는 빅터의 필통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넣기로 하고 치워두었다.
그리고 일련의 정리를 마쳐두었으나-
“내 일기장-! 스케치북! 두고 갈 뻔했다!”
“…설마 가져가려고?”
“응! 나중에 우리가 커서 보면 엄청 재밌지 않을까? 항상 들고 다닐 거야.”
출발하기 직전에, 볼 안에 먹을 것을 욕심껏 넣어둔 햄스터라도 된 마냥 가득한 상자를 다시 찾아들고 올라온 빅터에 의해 허사가 되었다. 빅터의 말은 평범한 어린아이의 상상에 부합했으나, 오르카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관점이었다.
그래서 문득, 이미 출발해버린 차 위에서 후회가 들었다.
“나도 챙겨올 걸 그랬을까?”
“형아는 안 챙겼어?”
“그냥… 뭐.”
일기 안에는 그날의 기록이 들어있다.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그날의 기억이란- 모든 감각의 향수를 불러온다. 그때의 소리와 온도, 그리고 냄새까지 떠올릴 수 있도록,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기록이니까. 그리고 오르카 역시 자신의 기록을 남기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아니, 차라리 없는 게 나을까. 악당의 생활 속에서 변해가는 자신을, 그리고 변해갈 자신의 변화를 기록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오르카가 고개를 저을 때였다.
“괜찮아!”
“?”
“내 일기장 안에는 형 얘기가 더 많으니까, 같이 보면 형도 기억날 거야.”
아,
그러고 보니 빅터의 일기장이 곧 오르카의 기록이나 다름없었다. 오르카는 싫어도 자신의 기록을 언젠가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구분할 수 없어서, 결국 애매하게 웃어버렸다. 어쩌면 빅터가 자신의 거울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본디 거울이란 속이 투명하지 않다. 다만 비치는 모든 것을 모방하되 자신의 본질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모든 일을 겪고도 한결같음을 유지하며 한 가지 목표를 생각할 수 있는 빅터는 오르카의 그럴 수 없는 부분을 조명한다.
-그래, 난 네 거울이 참 두렵다.
“자, 도착! 다들 내리세요.”
그런 상념도 자시, 목적지에 도착한 나이프는 각자 차에서 내려야 했다. 이제부터는 다른 차에 타야 하는 모양이었다. 커다란 운송차 모양의 차의 운전수 자리는 비어있었고, 한 쌍의 남녀가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수는 있다고 하셔서 저희만 왔습니다. 차째로 댁까지 가시면 될 겁니다.”
“사기가 아니라는 증거는?”
“그러니 저희가 동행하지 않습니까?”
“그래~ 메두사, 무려 머리가 같이 가준다잖아. 믿을 만하겠지.”
과연, 저번에 봤던 바로 그 조폭이다.
전형적인 조폭의 대부 같은 차림을 하고 있는 남자는 그 카리스마가 무색하게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참 한결같은 모습에, 오르카는 도리어 흥미를 잃고야 말았다.
“그럼 이제 타면 됩니까?”
“그래! 가자, 모두.”
그렇게 몇 번의 대화 끝에, 나이프는 차에 올랐다. 차 안에는 오토바이 한 대가 기대어 서 있었는데, 그 외에도 앉을 자리가 제법 잘 되어 있어서 맨바닥에 앉을 염려는 없었다. 그중에서도 백모래는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아 담요를 덮었다.
오르카는 그리로 걸어가면서도 오토바이에 눈길을 줬다. 백모래가 정체를 묻는 말에도 조폭은 그저 자신의 귀가용이라는 말만 뱉을 뿐이었다. 그에 눈을 돌린 오르카는 빅터가 눈을 반짝이는 것도 모른 채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 이후는 길고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빅터는 이미 맨바닥에 담요 한 장을 깔아둔 채 곤히 자고 있었다. 그 팔을 베고 누운 오르카는 어쩐지 움직이는 차 위에서 자려니 쉽게 되지 않아 몇 번이나 뒤척이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어떤 대화가 들려왔다.
“…그런데 말이야,”
“네, 네?”
은근하게 운을 띄우는 백모래와 그에 잔뜩 겁을 먹은 듯한 조폭의 목소리였다. 백모래는 누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소리를 죽이지도 않고 말했다. 그 덕에 이 공간의 모두가 그것을 들어야 했다.
“내가 지난번에 외출했을 때, 히어로에게 제법 오래 쫓겼거든.”
“아이고, 그런 일이….”
“그런데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어.”
오르카는 그것이 결코 재미있는 얘기가 아니리라는 것이라는 것에 뭐든 걸 수 있었다.
백모래의 어조는 절대 그것이 아니었다. 그를 이미 깨달았는지, 조폭은 벌써부터 두 손을 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엎드려 빌 수 있을 것 같은 자세였다.
“우릴, 공항에서 봤다고 하던데.”
“예, 예에….”
“우린 나름 변장했고- 평범하게 수색하기만 했단 말이지. 뭐, 폭탄은 좀 터트렸지만.”
“ㄴ, 네, 그렇죠.”
“그런데 ‘사진’이라고 했어.”
“-흡,”
아, 그 부분에서 오르카는 백모래가 어떤 점을 심문하고자 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정보의 유출을 의심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때 정보를 흘린 건 그쪽밖에 없거든. 폭탄을 얻으려고 말이지.”
“…”
그 와중에 옆에 누워있던 빅터가 움찔대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미 깼는지, 일어나려는 몸짓을 보이자 오르카는 그 상체를 눌러 도로 눕혔다. 잠꼬대하기엔 상황이 나빴다.
“-너 같은 애들이 히어로에게 정보를 털었을까?”
“아… 아닙니다! 절대! 절대 그런 일 없어요!”
“그럼?”
어느새 백모래의 손에는 딱 맞는 칼이 들려 있었다. 오르카는 저 단도가 어디서 난 건지 알 수 없지만, 꽤 여러 번 사용해본 익숙함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분위기는 아슬했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았다. 일단 운전수는 여기 없었고, 지금 깨어있는 멤버 중에 백모래의 살인에 신경 쓸 사람은 빅터와 오르카뿐이었으니까. 그들 사이에 오르카처럼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기색 같은 건 없었다.
“그건 제가 알고 있어요. 이 사람이 직접 명령했으니까요.”
“야!!”
“왜요, 당신네 조직도 아닌데 싸잡혀서 죽기 싫은걸요.”
그때, 그 옆에 있던 여자가 난데없는 배신을 선언했다. 당신네 조직도 아니라는 말대로, 지킬 의리는 없어 보였다. 조폭은 앞에 백모래가 있는 것만 아니었다면 당장에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씨근덕거렸으나, 백모래의 반응을 기다리느라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흐음~ 그래서, 맞단 말이지.”
푹,
곧 살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금속이 조폭의 배에 날카로이 파고들었다. 장난감처럼 보였던 단도는 사람의 살을 가를 수 있을 정도로 날이 서있었다. 오르카는 차라리 눈을 감았으나….
“보, 보스!”
빅터는 끝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피 냄새가 난다며 뭐라 불평을 하던 메두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빅터를 바라보았다.
‘쟤 왜 저래?’
그리고 레이디가 눈짓했다. …이해도 못 할 말을 호소할 수도 없으니 말할 자신도 없다. 오르카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걱정스러운 눈으로 빅터와 백모래 사이를 연신 번갈아 쳐다보았다. 백모래가 고이 그 요구를 들어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온 백모래다. 일종의 지름길을 쓰는 것처럼 맘 편하게 살인한다는 소리다. 그걸 굳이 빅터가 말린다고 해서 들어줄 리가 없다.
지금처럼 ‘본보기’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죽이지 말자, 보스”
“그래.”
“뭐?”
그러니… 뭐?
“빅터가 말하는데 들어줘야지, 안 죽일게.”
“…?”
트럭 안에 있는 모두의 얼굴이 해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만큼 지금 백모래의 행동이 말이 안 됐다는 소리다. 애초에 죽이지도 않을 거였는데 빅터의 부탁 탓인 것처럼 생색내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빅터는, 어쨌거나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고마워!”
“고맙기는. -너희 둘은 빅터한테 고마워하도록 하고, 음, 내릴래?”
어차피 국경은 넘었고, 안내역은 록산느 쪽이고.
알아서 돌아가라는 말에, 오르카는 이게 더욱 잔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상처 입은 맨몸으로, 국경을 걸어서 돌아가는 게 어디 보통 일이겠는가. 살아남았다는 것에 기뻐하던 조폭의 얼굴은 이미 표백된 것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오토바이, 네 꺼지? 어차피 돌아갈 생각이었잖아. 좀 더 일찍 출발한다고 생각해.”
“네, 네… 알겠습니다.”
“그래, 돌아가 봐. ‘본보기’는 충분히 됐을 거야. 아, 선물 가져갈래?”
백모래답지 않은 자비로운 말이었다. 오르카는 곧 멈춘 트럭 위에서 그가 오토바이를 끌고 내려와 출발하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어야만 했다. 백모래는 더럽다는 메두사의 잔소리에 못 이겨 핏자국 위에 수건을 깔았고, 그것은 아주 일상적인 풍경이라 분위기는 다시 평소처럼 돌아왔다. ‘록산느’라 불린 여자만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릴 뿐이다.
그렇게 빅터가 잠이 들고, 오르카 역시 고른 숨을 뱉을 시점. 백모래가 입을 열었다.
“세월, 폭탄은?”
“이제 와서요? 이미 터진 지 한참 됐죠.”
“세월, 폭탄?”
깨어있는 어른들의 대화에, 록산느와 레이디의 시선이 메두사에게 향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그에 메두사는 간단히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가면 그 조직은 이미 궤멸해 있을걸. 그럼 우두머리 혼자 살아남아서 뭐 하겠어? 그대로 죽거나, 다른 조직에 들어가서 개처럼 구르거나지. 그리고- 우리가 안겨 준 선물도 사실은 폭탄이고.”
이게 진짜 ‘본보기’야.
레이디는 아,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록산느는 소름이 돋았다는 듯 멀쩡한 얼굴을 어루만졌다.
요컨대, 빅터가 그를 살리든 말든 그는 비슷한 결말을 맞이할 예정이었다는 것. 그나마 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과연 그것을 감사해할지는 알 수 없었다. 백모래는 애초에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걸로 빅터에게 생색을 낸 것이다.
“…저도 죽이려는 건 아니죠?”
“왜? 너는 우리한테 잘못한 게 없잖아.
”그래도….“
”오히려 록산느는 영입하고 싶은 쪽인데, 어때?“
동물과 소통할 수 있는 특기는 희귀하잖아. -뭣보다 내가 고양이들이랑 얘기해보고 싶거든!
계절이 넘어가, 어느새 초여름이 되었다.
착착착,
오르카는 책을 읽으며 옆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소음을 받아들였다. 이런 걸 백색소음이라고 하던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듣기 좋은 소음은 책을 읽는 데 도움이 될지언정 절대 방해가 아니었다. 따라서 오늘도 오르카는 새로 구한 집의 제법 큰 책장에서 얻은 책을 독파해나가고 있었다. 판타지 소설이나 읽는 빅터는 이해하지 못할 순수문학 소설이었다.
그렇다면 빅터는 어디 있는가. 그야… 곁에 있는 게 당연하다. 그것이 바로 옆이 아닐 뿐이지. 한쪽이 다른 곳을 가면 다른 한쪽이 쫄래쫄래 따라가는 관계는 어디 사라진 게 아니다.
그러니까, 7살의 빅터는 이 부엌 안에 있었다. 정확히는 가스 불 앞에.
“이렇게?”
“그래, 잘하네. 우리 빅터.”
“히히-”
한창 요리를 배우고 있는 빅터는 오늘도 메두사 대신 밥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준비는 함께했지만, 조리는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식사와 베이킹까지 섭렵한 빅터는, 이제 기본적인 식사 정도는 전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오늘은 김치볶음밥인가.
“빅터, 그렇게 하면 눌어붙잖아.”
“하지만 그게 맛있어.”
“그건 그렇지만, 적당히 하자. 나중에 설거지하기 힘들어.”
“응!”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제 맘대로 하는 것이 빅터답다고 생각하며. 오르카는 다시 책장을 넘겼다. 이것까지 읽고 그동안의 독서 감상문을 쓸 계획이었다.
환경이 바뀐 뒤에도 두 아이는 착실히 배워가고 있었다. 이 나라의 초등 교육과정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고 했던가. 덧셈과 뺄셈을 배우고 나서는 분수를 배우고, 알파벳을 배우고 나서는 단어를 외우며, 또 글을 배우고 나서는 이 나라의 각종 지역명과 지리를 배우는 것이 그것이었다.
물론 빅터는 그것을 배우는 것도 질색했고 독서 감상문도 질색했다. 어디서 들어온 말인지는 몰라도 덧셈뺄셈만 알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고 했는데(높은 확률로 출처는 라드다), 오르카로서는 기함할 소리였다. 언젠가 백모래에게서 도망쳐서 살겠다고 당당하게 말한 아이가….
어쨌든, 그래도 빅터는 진도를 놓치지는 않았다. 나머지 두 아이인 오르카와 레이디는 잘 듣고 있는데 혼자만 튀기가 싫었던 모양. 사실 그것만 해도 장한 일이었다. 백모래는 딱히 누가 더 어리다고 해서 맞춤별 진도를 만들지 않는 스파르타식 강사였으니.
진도는 오르카에겐 쉽고 빅터에겐 어려운, 레이디에게 딱 맞는 난이도로 계속되었다. 그래서일까, 빅터는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요리에 집착하는 것이다. 빅터가 유일하게 탁월 이상의 칭찬을 듣는 과목 아닌가.
“나 요리사 할까?”
“그래그래. 나이프의 요리사 하자.”
“응!”
하지만 그래서 뭘 하겠는가. 어차피 나이프는 악당. 빅터가 양지에서 요리할 일은 없을 확률이 높다. 오르카는 잠깐 비관적인 생각을 하며 자연스럽게 꿈을 컷 당하는 빅터를 생각했다.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오늘은 빅터가 요리하네?”
“라드, 내가 하는 건 싫다는 소리야, 지금?”
“아- 아니, 하하, 누님이 하는 것도 좋죠, 당연히!”
빅터는 타고 난 요리사였다. 처음엔 기본 레시피로 잘 배우나 싶더니, 맛이 부족하면 각종 향신료를 쓰거나 레시피를 마음대로 변형해서 더 나은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메두사도 몇 번 ‘빅터 레시피’를 따라서 해봤으나, 그 손맛이 느껴지지 않아서 이제는 포기했다. 현재 나이프의 식사 절반은 빅터가 담당하고 있었다. 선호도가 누굴 가리키고 있는지는 확실했다.
“완성!”
“바보 빅터, 드디어 완성이야?”
“나 바보 아냐, 레이디 누나!”
“한 번 바보는 영원한 바보랬어. 세월이.”
“세월!”
“이걸 또 나한테 떠넘기네….”
어느새 2층에서 내려온 레이디와 세월이 상 차리는 걸 도우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의 메뉴는 김치볶음밥이라 따로 차릴 건 간단한 반찬밖에 없었다.
“맛있는 냄새~”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양이 털을 잔뜩 묻힌 백모래가 등장했다.
“윽, 고양이 털! 보스, 그건 좀 떼고 와요.”
“맞아. 보스, 밥에 묻어.”
당연히 요리 조가 기겁하며 돌돌이를 꺼냈고, 백모래는 슬퍼하며 저만치 구석에서 고양이 털을 뗀 후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제 보스를 제법 자연스럽게 대하는구나, 빅터.
오르카는 조금 새삼스러워졌다. 이사 전까지만 해도 백모래를 볼 때마다 뚝딱대는 면이 있던 빅터는 이제 조금은 백모래를 대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백모래가 봐줘서 그렇지, 그동안 그 태도 때문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했던 오르카로서는 다행이었다.
오르카는 더 이상의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머리를 잠시 흔들고, 그릇에 밥을 옮겨 담는 것을 도왔다. 일단 밥을 나눠준 뒤 수북이 남은 것을 가운데에 놓을 요량인 듯싶었다. 아직 성장기가 되지 않은 오르카 대신 빅터가 후라이팬을 옮기고, 밥을 담은 그릇을 든 오르카가 그 뒤를 따랐다.
빨간 후드티와 평범한 검은 바지를 입고 있는 빅터.
사이즈가 그대로인 새 옷을 입은 빅터는 전의 옷과 똑같은 핏, 똑같은 체격이었다. 그야 당연하지, 빅터는 크지 않으니까 말이다. 당장 나이를 먹는지조차 의문이었다.
그에 반해 오르카는 밑단이 짤막해진 바지를 입은 채, 새로운 바지를 언제 장만할지를 의논 중이었다. 그때마다, 오르카는 빅터가 성장을 갈취당했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는다, 빅터.”
“응!”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되기 전, 앞다투어 퍼부어지는 인사. 빅터는 그것이 마냥 기분 좋다는 듯 활짝 웃고, 메두사는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이 평범한 나이프의 점심 식사였다.
“빅터, 오늘은 뭐할 거야?”
“음….”
그리고 식사의 대화 주제는 대개 빅터의 일정이었다. 그들 중 딱히 설명할 일정이랄 것이 있는 사람이 빅터뿐이었기 때문이다. 레이디와 세월은 집에서 둘이 놀거나 가끔 밑의 마을로 놀러 가는 게 전부였고, 메두사는 집에서 드라마를 보거나 백모래와 함께 일을 본다. 백모래는 그냥… 고양이랑 놀았다. 그에 록산느도 가끔 꼈고.
“가리 형은?”
“자겠지.”
“엑, 라드 형은?”
“나? 요 근처에 차 보러 갈 건데.”
아, 가리가 집에 박혀 사는 히키코모리라는 걸 말했던가. 라드도 집에 박혀 있다가 며칠씩 아지트를 비우곤 하느라 물어볼 일이 별로 없다. 오르카? 당연히 빅터와 함께 움직인다.
-어쨌든, 그에 비해 빅터의 일정은 늘 새롭고 유동적이다. 산에서 놀다가도 마을에 찾아가 카페 탐방을 하기도 하고, 버스를 타고 뺑뺑 돌며 주변을 구경하는 일도 잦았다. 요즘은 산 너머 바다에서 놀다 들어오는 것에 맛을 들인 모양이었다. 오르카는 빅터가 바다를 찾아갈 거라고 예상했다.
“오랜만에 산 탐방할 거야! 멀리까지!”
“아, 요 주변에? 내가 차 끌고 돌아다닐 때 보니까 볼 거 없던데.”
“빅터, 나도 갈래.”
“누나도? 좋아!”
라드가 경고했지만, 빅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하긴, 요즈음의 빅터는 심각할 정도로 심심해 보였다. 맞춰주는 사람이 그나마 오르카나 레이디, 라드밖에 없는데 밖은 놀 곳이 별로 없다. 자리 잡은 곳이 뒷산을 근처에 둔 시골이었으니까. 심지어 아직 특별히 친해진 주민도 없었다. 지난 집 근처의 구멍가게 할아버지처럼 말이다. 빅터의 응석을 받아주는 좋은 할아버지였는데….
그러고 보니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던가.
“오늘 설거지 당번이 레이디랑 세월이었던가?”
그렇게 빅터를 대화 주제로 한 언제나의 점심시간이 끝나고, 빅터는 바로 숙제하러 뛰어갔다. 메두사처럼 요리를 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설거지를 피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 와중에 두 명만 해당하는 설거지 당번에 걸리지 않은 오르카는 터벅터벅 계단을 올랐다.
어쨌든 빅터와 동행하려면 나도 어서 숙제를 마쳐야겠다.
-어차피 제 숙제를 마친 뒤 빅터의 숙제를 반은 도와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자의 발걸음이었다.
“재미없어… 빅터, 나 좀 태워줘.”
“에, 알았어.”
오르카는 빅터가 결국 레이디를 덥석 들어 올려 목마를 태워주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레이디는 정해진 수순처럼 빅터의 머리채를 잡았고, 빅터는 아야야, 아프다는 소리를 하며 앓았다. 결국 두 사람은 어부바로 포즈를 바꾸는 것에 동의했다.
두 사람은 그동안 특이한 관계를 쌓았다. 정말로 누나와 동생의 관계 같다고 해야 할까. 동생을 바보 취급하는 누나와 정말 조금은 모자란 동생 말이다. 거기에 착하다는 말도 붙이자.
“자, 출발!”
…그러니 지금처럼 레이디가 빅터의 등에 올라타 마음껏 휘두르는 거겠지. 곧 나뭇가지 위에 날렵하게 올라탄 빅터와 오르카는 바닥 아닌 바닥을 딛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혹은 옆으로. 길을 잃기 딱 좋은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걱정하지 않았다. 어쨌든 끝내주는 회귀본능을 갖고 있는 빅터는 매번 이런 모험을 하면서도 길 한 번 잃지 않고 집을 찾아온 전적이 있었으니까.
수많은 나무를 헤치고 지나갔으나 숲은 숲이었다. 그 와중에 어떤 물류창고를 발견하기도 했고, 노루를 발견하기도 했고, 토끼를 쫓아가겠답시고 빠르게 달렸다가 멀미가 난 레이디를 붙잡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빠른 빅터의 발걸음으로 꽤나 멀리 왔음에도 특별히 보이는 것은 없-
“우와아….”
아니, 있었다.
지극히 현대적인 건물에 깔끔한 외관, 직원들이 오갈 수 있게 잘 조성된 조경까지. 옥상에는 TV에서나 봤던 태양광 발전이라도 하는 건지, 푸르고 빛나는 전지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당하게 달려있는 푸른 간판.
‘캐리엇 생명과학 연구소.’
뭔가가, 연상되는 이름이었다.
사실 이제 그것은 어릴 적의 일이라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메두사와 백모래가 뭔가를 챙기고 불을 질렀다는 사실만은 선명한데, 그것은 메두사와 함께 연구소의 터를 확인하러 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혹시나 남아있을 저들의 흔적을 찾아 없애기 위해.
물론 그건 어린 오르카가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주로 메두사가 남아있는 서류를 폐기했고, 오르카는 주변을 구경하며 그들의 흔적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의 풍경은…
깜깜했다.
‘메두사, 콜록, 님, 재가 날려요.’
‘잘 가리렴, 오르카. 마시면 안 좋아.’
그 참혹했던 현장은 숯과 재로 가려져 더는 보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꼬릿하게 살이 탄 냄새가 가시지 않아 코를 괴롭혔다. 날리는 검은 가루는 어떻고? 그날따라 세게 부는 바람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오르카는 연신 검게 탄 나무와 숯과 재가 나부끼는 그 기괴한 현장에 오래 남아있고 싶지가 않았다.
심지어 잊었다고 생각했던, 좋지 않은 기억이 다시 오르카를 덮치듯 찾아왔다. 밤새 고함치듯 들려오는 고통에 찬 신음소리, 우악스러운 손길에 끌려가는 자신, 고통스러운 인체 실험, 우는 빅터….
“형, 형?”
“아, 빅터….”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런 일들이 다시 반복된다면?
“빅터, 이름 왠지 익숙하지 않아? 캐리엇.”
“어! 진짜 그래!”
아, 그제야 정신이 든 오르카는 그 이름이 낯익다는 것에 새삼스럽게 놀랐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TV의 뉴스 헤드라인에 등장하던 이름이 아니던가. 옛날엔 히어로로 왕성히 활동했던 사람. 지금은 한 기업의 총수라고 했던가. 그 사람이 투자한 연구소인 모양이었다.
히어로가 투자한… 그렇다면 안심해도 되겠지.
애써 좋지 않은 기억을 치워낸 오르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삐까뻔쩍해…”
“그보단 그냥 깔끔한 거 아냐? 그래도 정원은 마음에 든다.”
레이디는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정원에 발을 들였다. 연구소에서 일하는 연구원들을 위해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그곳은 조경수와 조경목, 그리고 아름다운 색색의 꽃으로 체계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어쩐지 참으로 인공적인 정원. 오르카는 그곳에 과연 들어가도 되는지에 대해서 고민했으나, 이미 빅터는 레이디를 따라서 들어가고 있었다.
정원은 미로처럼 크고 무성했다. 일부러 길을 잃도록 만들었나 싶게 말이다. 언뜻 문이 있는 것도 같았지만 아이들의 관심을 끌진 못했다. 그것 말고도 볼 것은 많았다. 아름다운 장미 덤불, 아름다운 분수, 중앙으로 가면 갈수록 높아지는 덤불 담장….
그 가운데에 사람이 있었다.
“…누구십니까!”
“안녕하세요! 빅터예요!”
“레이디.”
“…오르카입니다.”
깡마르고 퀭한 인상의 수더분한 남자는 회색 머리칼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데다가 창백하기까지 해서 마치 귀신같은 인상을 주었다. 심지어 깜짝 놀라 성을 내는 표정이 예민해 보여서 오르카는 뜨끔했으나, 역시 빅터와 레이디는 당당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다. 상대가 말을 잃을 정도로 뻔뻔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이런 점이 닮은 걸까.
“여, 여긴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어떻게 들어오셨죠?”
“현장 체험학습.”
“…입니다!”
거기다 레이디의 뻔뻔한 거짓말까지. 빅터는 눈치껏 입을 다물고 자신감에 찬 얼굴을 했다. 그 당당한 모습에 남자는 잠시 혹하는 모습이었다. 이게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확신하는 모습에, 오르카는 빅터의 쓸데없이 자신감 있는 모습도 오히려 상대를 속이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습득했다. 하지만…
“아잇, 저희 연구소는 아직 덜 지어져서 방문객을 받지 않고 있거든요! 사람을 뭘로 보고!”
“그냥 있길래 들어왔는데…. 그럼 안 되는 거예요?”
“당연히 안 됩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당신은! 애들 데리고 나가욧!”
“나 현장 체험학습하고 싶은데.”
의외로(?) 기억력이 좋았던 남자는 아직 연구소가 방문객을 받기엔 완공이 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결국 실랑이를 하는 두 남자의 모습을, 오르카는 멀거니 쳐다보았고 레이디는 무시했다.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구경하겠다는 의지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아직 안 된다니까요!”
“그럼 정원에만 있는 건요?”
“-아니, 애초에 연구소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그리고 결국 등을 밀려 정원의 길을 빠져나가는 빅터. 하지만 미로 정원 자체가 워낙 꼬여 있는 바람에 나가기만 해도 한참을 걸릴 태세였다. 결국 빅터는 답답했는지, 그 남자를 들쳐 업고 레이디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레이디를 품에 안은 빅터는 폴짝폴짝 담장을 뛰어넘어 마침내 연구소의 담장 위에 훌쩍 섰다. 오르카 역시 가볍게 그 뒤를 따랐다.
여러모로 놀라운 균형 감각이었다. …남자는 기겁한 모양이지만.
“히이익…! 당신, 혼혈입니까?! 이거 놔요!”
“이름이 뭐예요?”
“마, 마일로! 마일로니까요!”
턱, 빅터는 담장에서 내려오고 나서야 두 사람을 풀어주었다. 졸지에 연구소 밖으로 나오게 된 남자는 다급하게 시간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그리곤 빅터에게 언성을 높이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짓이에요!”
“? 나가라면서요. 나와서 얘기하려고요!”
“~! 보통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거든요?! 혹시 정신연령이 7살짜리라도 되십니까?”
“!”
이건 의외다. 빅터가 단순히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어도 빅터의 정신연령을 똑바로 맞춘 사람은 여태 없었던 것이다. 오르카와 레이디는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에 마일로조차 뜨끔한 표정을 짓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진짜라는 말은 아니겠죠…?”
“진짠데요!”
“…”
하지만 홧김에 뱉은 말을 진짜라고 믿을 리가. 결국 그의 시선조차 매우 모자란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그리곤 한숨을 푹, 쉬며 오르카에게 말하는 것이다.
“얘야, 형아 데리고 들어가라. 여긴 오면 안 되는 곳이야.”
“…”
그리고 오르카는 잠시 침묵하다 빅터를 올려다봤다. 빅터는 영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그야, 정원을 탐색하는 빅터의 얼굴은 새로운 놀 곳을 찾은 듯한 흥미진진한 기색이었다. 그런데 다시는 오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언짢을 수밖에. 하지만 오르카는 마일로의 의견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빅터, 레이디, 가자.”
“응.”
“…응.”
결국 오르카의 재촉에 빅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레이디는 얌전히 대답하며 발을 돌렸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마일로의 모습이 점점 더 멀어져갔다. 그에 반해 빅터의 얼굴에는 더 놀지 못한 미련이 남았다.
하지만 다시 들어가 보진 못하겠지. 지금이야 새 단장으로 어수선할 시점이라 가능했지만, 나중엔 그게 힘들지도 몰랐다. 오르카는 벌써부터 빅터를 달랠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내일도 가야지.”
“뭐?”
“아까 그 사람, 재미있었어. 또 놀러 갈 거야!”
빅터는 아직 미련을 놓지 않은 모양이었다. 요즘 들어 에너지가 남아돌다 못해 그걸 해소하지 못해 안달인 빅터다운 모습이었다. 결국 마일로는 그의 또 다른 먹잇감이 된 것이다….
오르카는 설득을 포기했다. 그저 조용히, 그 마일로라는 연구원에게 묵념을 보내기로 할 뿐이다.
“특기가 환영?”
“엉야. 하루에 최대 6시간밖에 못 쓰지만, 직접 만져보면 다 들통나지만…. 돌아다니는 차의 모양을 잠깐씩 바꾸는 데에는 쓸만하지.”
“우와아아- 그렇게 도망치는 거야? 짱이다.”
“크핫핫, 그래, 이 몸이 그런 대단하신 몸이다 이거야.”
“그런데 왜 개털 됐어?”
“…”
*
“형, 그럼 정보 조작은 어떻게 해?”
“내 특기는 똑같이 따라 하는 겁니다. 메시지든, 목소리든, 공식 문서든….”
“공식 문서는 뭔데?”
“…거기부터 설명하자면 할 게 끝도 없이 많습니다만.”
“그럼 어려워, 안 들을래.”
“그러십쇼, 그냥.”
*
“동물이랑 말하는 거? 어울린다.”
“다들 그래요. 그러니까 제 능력을 두고도 액세서리로 데리고 다녔겠죠? 뭐, 그런 면에서 여기가 제일 나아요.”
“액세서리?”
“이런 귀걸이 같은 거 말이에요.”
“에, 누나는 그렇게 작지 않아. 귀에 걸면 찢어질걸?”
“…됐다. 그만 말할래요.”
조용한 바의 개인실 안, 도금인지 진짜 금인지 모를 온갖 장식품들과 최신식일 게 분명한 전자제품, 게다가 개인 냉장고까지 딸린 이곳에 그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처음부터 혼자였던 듯 아무도 없는 그 방 안에는, 사실 그와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시체로 가득했다.
그, 캐리엇을 앞에 두고 벌벌 떨며 보고하고 있는 이는 말한다.
“…해서, 정찰을 온 것으로 보입니다. 새로운 인물도 보였으나, 마을 소녀인 것으로 보이고….”
“그래? 그것도 조사하도록. 집도, 가족관계도 제대로 된 게 아무도 없는데 이걸 보고라고 할 수 있나? 그 꼬마마저도 나이프면 어쩌려고?”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
“입에 발린 사과는 집어치우고. 다음엔 결과로 보여주지 그래.”
“알겠습니다.”
“살고 싶다면 그 쓸모를 더 증명해야 할 거다.”
가봐.
그의 짧고 굵은 한 마디에, 보고하던 부하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후다닥 방을 벗어났다. 그마저 마뜩잖다는 듯, 캐리엇은 혀를 차고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 순식간에 피로 물든 손이 하얗게 닦여나갔으나 선명한 핏줄이 남아 있었다. 매끈한 유리로 덮인 테이블 위로 흰빛이 반짝인다.
“좀 더 이름을 쌓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미끼를 물었군.”
들어줄 이 없는 독백이 마치 독액을 머금은 것 같아, 희뿌연 연기처럼 흩어진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게도, 그 내용은 나이프에 대한 선명한 의도를 담고 있었다.
마치 그가 나이프를 유도한 것처럼.
그렇다면 그 미끼는 연구소일까, 굳이 연구소를 미끼 삼은 이유가 있는가. 나이프에게 미끼를 던져 어떤 이익을 취하려 하는가… 그것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틀렸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이프가 그 미끼에 낚인 건, 분명한 우연이라는 것.
아직 ‘히어로’ 캐리엇은 모르고 있을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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