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빅 피터팬

5. 빅터와 초코칩쿠키 (1)

빅 피터팬 Big Peter Pan 유년기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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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를 만드는 건 쉬운 편이다. 빵처럼 발효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스콘처럼 함부로 주물럭거리면 안 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저 재료를 다 때려 넣을 뿐이라고 빅터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빅터의 철학대로 완성된 초코칩쿠키는 늘 호평이었다.

그리고 빅터가 그런 쿠키를 만드는 날은 주로,

 

“또 그 연구소 놀러 가게?”

“응! 마일로 형 보러 갈 거야!”

“빅터한테 시달리는 그 사람도 참 불쌍해….”

“엑, 내가 뭘, 누나! 형도 나 좋아해!”

 

연구소에 놀러 가는 날이었다.

빅터는 저를 사고뭉치 취급하는 레이디를 보며 입술을 비죽였다. 진심으로 그에게 폐 한 번 끼친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빅터의 의사 표현이었다.

 

시원한 가을날이 오면서, 나이프의 세 아이들은 마일로와 제법 많이 친해졌다. 그것은 빅터의 노력이 다분히 들어간 결과였는데,

 

콩콩콩-

‘다, 당신 뭐예욧!’

‘나와서 놀자~’

 

연구소 지붕에 올라타 창문으로 그를 내려다보고는 놀고 있을 때 훌쩍 데려오고,

 

‘여긴 또 왜 따라와요!’

‘담배는 건강에 안 좋대요!’

 

정원 구석의 흡연 구역에 있는 그를 그대로 둘러업어 데려오고,

 

‘이젠 시간도 칼같이….’

‘가자!’

 

매번 일정한 시간마다 그를 찾아와 창문을 두드리니, 그도 포기하고 제 발로 찾아오는 것이다. 이젠 연구소 옆쪽 숲의 평범한 나무 터가 그들 나름의 비밀 장소였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세 사람은 나름 평안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고, 빅터의 모자란 상식을 알게 된 이후에는 그 상식을 채워주었으며, 그래도 오르카나 레이디라는 어린애를 챙길 수 있는 정상적인 어른이었다.

하지만 그의 제일 중요한 역할이라 한다면,

 

“오늘은 무슨 주제야?”

“어디 보자… 음, 바이러스.”

“에, 재미없어 보여.”

“일단 만화책이면 좋다고 읽을 거면서. 아, 오르카는 이거 읽겠니? 세계여행 만환데, D국 편이래.”

“나도 여행!”

 

바로 제대로 된 만화책을 보급하는 것이다. 결국 빅터는 오르카가 바꿔주는 만화책을 희희낙락하며 받아냈다.

 

네 사람의 배치 역시 늘 같았다. 마일로는 잘린 채 밑둥만 남은 나무 둥치에 걸터앉고, 빅터는 레이디와 함께 잔디에 드러눕듯이 엎드린다. 오르카는 늘 그 옆에 가지런히 앉았다. 비가 올적엔 위에 이미 천막을 놓았으니 돗자리를 까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곳은 네 사람의 아지트였다. 오늘은 레이디가 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 쿠키!”

“…내가 이걸 좋아한다지만, 꼭 가져올 필요는 없다니까.”

 

그때, 빅터가 후드에서 후다닥 쿠키 봉지를 꺼내 마일로에게 들이밀었다. 투명한 봉지에 한가득 들어있는 초코 쿠키는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공중에서 흔들렸다. 마일로는 머쓱하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런 사양의 몸짓을 하면서도 손은 솔직하게 봉지를 챙겨 들고 있었다.

 

빅터는 처음 제 쿠키를 마일로에게 건넸던 날을 선명히 기억한다.

 

‘이번엔 뭐야? …쿠키?’

‘내가 구웠어! 먹어볼래?’

 

눈이 뽑힐 듯 놀라더니 그 자리에서 쿠키 한 봉지를 다 해치웠었지. 그땐 정말로 빅터가 진심으로 뿌듯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 뒤로 마일로의 말버릇이 함께 베이커리를 열자는 말이 되었고.

그 뒤엔 뭐… 어느 순간부터 이미 가시가 누그러진 마일로는 빅터에게 반말도 허용했고, 오지 말라고 거부하는 일도 없어졌다. 빅터에겐 의미 없는 말이라 진작에 포기했는지도.

 

아, 그러고 보니 거리가 좁혀진 계기가 또 하나 있었다. 난데없이 출신을 밝힌 것.

 

‘C국 실험체였다고?’

 

그때 마일로의 눈은 마치 ‘그’ 나라에서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냐는 눈빛. 그 어이없다는 눈길에 빅터는 반쯤 발끈해서 주장했었더랬다.

 

‘진짜야! 그래서 나 XX년생인데 이만큼 크댔어! 힘도 세!’

‘와- 그거 대단하네-’

‘이익, 진짜라니까!’

‘그만하자, 빅터.’

 

결국 폭주해서 모든 비밀을 털어버리려는 빅터를 적절히 막는 것은 오르카의 역할이었다. 그때는 레이디도 멀거니 강 건너 불구경하듯 쳐다봤으니까. 하지만 빅터는 억울했다. 믿어주지 않는 걸 뭐 어쩌겠는가!

 

‘상상이 정말 디테일하네.’

 

…이런 종류의 반응이라서 더 화가 났는데.

빅터는 입술을 비죽이며 회상을 끝냈다. 이제는 더 이상 서로 묻지 않고 묻어둔 문제였다. 그 이후로 빅터를 정말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곤 하며 쿠키를 한 줌 준다는 게 좀 못마땅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빅터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기로 맘먹은 지 오래였다.

 

그보다 오늘은 더 중요하게 신경 쓸 일이 있었다. 마일로가 쿠키를 먹을 동안 만화책을 읽으며 발이나 동당대던 빅터가 물었다.

 

“마일로 형, 형은 혼혈? 흉내…? 제품을 개발한댔지?”

“모방이야, 빅터.”

“…? 어.”

 

사실, 빅터는 부탁할 것이 있었다. 마일로의 전공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가 일하는 캐리엇 연구소는 생명과학과 관련되어, 돈이 되는 모든 제품을 개발하는 곳이었다. 역시 부서가 여러 개로 갈려 있는데, 그 중 마일로가 담당하고 있는 것은- 혼혈을 모방하는 것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혼혈의 아름다운 특징이나 귀, 꼬리 같은 특징부터 복잡하게 말하면 우월한 신체 능력까지. 아직 갈 길은 한참 남았다지만 방향성만은 확실한 연구였다. 물론 빅터로선 그것까진 알 수 없다. 다만 하고 싶은 게 하나 생겼을 뿐.

 

“그럼 나 귀 만들어주라!”

“…뭐?”

“꼬리도 좋아!”

 

그것은 바로 혼혈적인 특징이었다!

 

사실 빅터는 한 가지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바로 혼혈다운 특징이 없다는 것.

 

바로 옆에 있는 오르카만 해도 범고래 문양이 선명하다. 앞머리에 있는 범고래의 눈 문양과 검은 공막도 그렇지만, 검은색의 바깥쪽 머리카락 밑에 흰색 머리카락이 깔려 있는 것은 일견 신비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걸 시크릿 투톤이라고 하던가. 언젠가 미용 광고에서 봤던 말을, 빅터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레이디는 어떤가? 레이디도 머리카락으로 나비 혼혈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본인은 애벌레 상태라며 그리 좋아하지 않아도, 그만한 자기주장이 없었다. 게다가 가끔씩 레이디가 성인이 될 때쯤 완벽히 날개를 펼칠 나비 머리카락을 상상하면… 너무나 부러워지는 것이다!

 

그에 반해 빅터는, 본인이 말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혼혈로 봐주지 않았다. 지금도 마을에 가면 영락없는 순수 인간 취급이라 혼혈 특유의 바가지(?)도 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빅터는… 자신이 흑표범 혼혈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당당하게 주장하고 다니고 싶었다!

 

그런 얘기를 들은 마일로와 오르카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아니, 자연스럽게 고양이 귀를 달고 싶다는 인간은 봤어도 혼혈이 혼혈 티를 내고 싶다는 건 처음 들어 보는데….”

“좀… 쓸데없는 이유 아닐까.”

“하지만 정말로 갖고 싶어!”

 

빅터는 두 손을 꽉 모아쥐고 말했다. 게다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간절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에 마일로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응?”

“여기서 잠시 기다려봐. 가져올 테니.”

“!”

 

그리고는 연구소로 돌아가 제 자리에서 한 가지 시험관을 들고 오는 것이다. 아무 색도 없는 투명한 시약은 평범한 시험관에 들어 있어 실험 중에 나왔다는 티가 팍팍 났다. 하지만 그에 아무런 불안도 느끼지 못한 빅터는 눈을 반짝거렸다. 정작 본인 일이 아닌 오르카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시험관과 빅터를 번갈아 볼 뿐이다.

 

하지만 빅터는 오르카의 눈빛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저거만 있으면 나도 혼혈처럼 귀랑 꼬리가 생기는 거야!

고작 1년 전, 아스퍼와 달래, 당아와 놀 때마다 놀림당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했다. 달래가 무슨 혼혈이 귀도 없냐고 신기해하다가 결국 혼혈이 아니지 않냐는 말로 빅터를 몇 번이나 골탕먹였던 것이다.

 

“자. 시약이다. 아직 5분짜리이긴 한데….”

“에- 5분? 너무 짧아!”

“그러니까 실험 중인 거다. 더 길었으면 이미 여기저기 팔고 있지 않았을까?”

“그건 그렇네. 힘내봐!”

“이봐….”

 

한숨을 푹, 내쉰 마일로는 뚜껑이 닫힌 시험관을 보며 희희낙락하는 빅터를 영 철없는 아이 보듯이 하다가, 이내 다가와 빅터의 긴 머리카락을 잘랐다. 딱 한 가닥. 그마저도 시험관에 들어갈 만한 크기로 잘린 머리카락을 챙기자 빅터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뭐?”

“내 머리카락 먹어? 쥐야?”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거 완성되려면 유전정보가 필요하거든?”

“유전… 정보?”

 

어려운 말이 등장했다. 유전이야 뭐 TV에서도 자주 나오는 단어고 백모래에게도 배웠지만 유전 정보는 무어란 말인가? 그것과 머리카락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빅터로서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르카도 거기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는지, 묘하게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 얘네 초등학생 수준이었지.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마일로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설명했다.

 

“끄응… 너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리 줘봐.”

 

그리고 빅터의 손에 들려 있던 시험관에, 머리카락을 넣자-

 

“우와!”

 

먹물이나 부은 것처럼 전체가 새까맣게 물드는 것이다. 아주 나중에는 먹물 그 자체가 된 것처럼 새까맣게 된 시험관은,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투명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빅터는 그게 마냥 신기해서, 몇 번이나 감탄사를 외치며 다양한 각도에서 시험관을 바라보았다. 마일로 입장에서는 유난스럽기도, 또 뿌듯하기도 한 태도였다.

 

“머리 위에 뿌리면 되는 거야.”

“X리포터의 폴X주스!”

 

삐끗,

…라고 빅터가 외치는 것까진 예상 못한 모양이었지만.

 

하필 빅터는 요즘 들어 X리포터를 열심히 읽는 중이었다. 이제 막 어린 마법사의 모험 이야기에 이입해 2권을 읽은 빅터에게 마일로의 시약은 폴X주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폴X주스가 무어냐, 그것은 원하는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마법의 물약이다. 다만 그것을 정성들여 완성해도 준비물이 필요한데, 그것은 변신하고자 하는 대상의 머리카락! 잘못해서 고양이의 털을 뽑아오는 바람에 반 정도는 고양이로 변해버렸던 등장인물을 떠올리며, 빅터는 그것을 단숨에 뒤집어썼다. 액체였던 것이 순식간에 기화했다.

 

-그리고 연구소 근처의 숲, 그 구석진 자리에서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

 

뵤잉,

“…?”

 

빅터의 검은 정수리 양옆에 솟아난 귀여운 귀는 복슬복슬한 솜털이 가득해, 실체감이 넘쳐났다. 게다가 귀와 머리가 이어진 부분은 어떤가, 홀로그램 같지도, 끊어진 양 어색하지도 않게 이어져 있는 두피의 느낌이 귀 밑둥까지 이어져 있었다.

쫑긋쫑긋, 귀엽게 움찔거리는 기다란 귀는…

 

…잠깐, 기다란 귀?

 

“토끼 귀?”

“이거 왜 토끼 귀야?!”

“왜, 귀나 꼬리면 된다며. 수인화 시약 모델 중에 아직 표범은 없어서 무리라고.”

“내 정보를 가져간다며!”

“그거야 그냥 색 맞추기지….”

 

검정 머리에 분홍 귀 있으면 어색하잖아.

 

순식간에 환상이 깨진 빅터는 그 자리에 엎드린 뒤 왜 표범은 없는 거냐며 땅을 쳤다. 마일로는 이렇게 떼를 쓰는 빅터에게 익숙해졌다는 듯이 허허 웃고 있었다. 오르카는 옆에서 빅터를 달래느라 여념이 없었고.

 

괜찮다. 넌 그러지 않아도 멋진 신체 능력을 갖고 있지 않느냐, 내 것보다는 흰 공막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 은회안 쪽이 더 멋있다….

그런 류의 달램을 몇 분이나 했을까, 빅터는 제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래도 신기한지 연신 귀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은 덤이었다. 그에 눌리긴 하지만 그런 감각은 없는 것이, 빅터의 신경과 이어져 있는 신체 부위보다는 장난감 인형 같았다.

 

“이건 나랑 안 이어져?”

 

그리하여 빅터가 그런 질문을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일로는 예상했다는 듯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줄 아냐. 이건 말 그대로 그냥 따라 하는 거야. 머리 위에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찰흙 붙인 거나 다름없다고.”

“에에….”

“뭐 원하는 게 많아! 보일 때 그럴듯하면 됐지! 어, 그런 사람들의 환상 때문에 내가 지적을 몇 개나….”

 

끄으윽, 소리를 내며 쓰러지려는 마일로를 빅터가 받아 무릎 베개를 해주었다. 그마저도 땅바닥에서 그러고 있는 자신이 수치스러운지 눈을 꼭 감고 있는 것이었다. 이 젊은 연구원은, 결국 빅터의 억지에 따라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부분이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럼 나 그것만.”

“뭐?”

“표범 귀랑, 음, 시간 길어지는 거! 이거 너무 짧아.”

“표범이야, 샘플을 구해줘야 말이지. 시간은 지금도 늘려보고 있는 중이니까 그만 말해….”

“필요하면 내꺼 줄게!”

“오냐….”

 

히히, 빅터가 결국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웃음을 짓는다.

빅터는 이 사람이 좋았다. 싫은 척하면서도 결국 들이대면 받아주는 사람이. 오르카처럼 격하게 받아주진 못해도 지긋한 말장난이나 할 수 있는 사람이.

사실 빅터가 아이이기 때문에 마냥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린아이에겐 그만큼 많은 만남이 필요한 법이니까. 백모래, 메두사, 오르카, 레이디, 세월은 한 집 식구가 아닌가. 이제 그 선을 넘어난 사람이라고 해봐야 빅터에겐 구멍가게 할아버지나 카페 사장 정도밖에 없었다. 그러니 신기한 것을 공부하고 다양한 것을 알고 있는, 또 다른 세상을 만나게 해주는 마일로가 어찌 반갑지 않을 수가.

 

“나 그럼 또 학교 얘기해줘!”

“학교 얘기 이젠 지겹지도 않냐. 음, 중학교 때 얘기해줘?”

 

또한, 빅터는 그 어린 날의 아이들과는 또 다른 세계를 알아가고 있었다. 원래는 빅터가 소속해 있었을 ‘평범’에 대한 이야기. 저 밖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 그것은 TV에서 보는 것만큼이나 재미있고 다른 나라의 이야기 같아서 빅터의 흥미를 끌었다.

 

“…”

 

누군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응? 록산느 새 날아왔는데? 얘 무전기 안 가져갔었나….”

 

평범한 간식시간. 웬일로 마일로를 찾아가지 않은 빅터는 호두와 초코칩이 와삭하게 박힌 르뱅쿠키를 와작와작 먹으며 메두사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마일로의 얘기이거나 다음 날의 숙제를 줄여달라는 조름이었는데, 한 번도 들어준 적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새가 날아든 것이다. 그것이 록산느의 새라는 것을 깨달은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제 발목에 묶인 쪽지를 내밀었으니까. 평범한 새 중에 그런 새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메두사는 자연스럽게 그 쪽지를 받아 들었다.

 

“‘국경 국도 부근, 보스가 쫓겨요.’라고…?”

“에, 저번처럼?”

 

빅터는 이사 오기 전의 시가지에서 있었던 귀여운 추격전을 떠올렸다. 그때의 백모래와 빅터는 고작 몇 명의 히어로들과 참 한가로운 추격전을 했더랬다(물론 이건 히어로의 입장도 들어봐야 알겠지만).

 

이번에도 그러려나?

빅터는 마지막 남은 쿠키를 합, 입에 집어넣고 오르카 앞의 탁자에 늘어졌다. 긴장감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포즈였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메두사는 진지해 보였다.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오르카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는 것이다.

 

“당장 가리한테 연결해서 연결 시도해보라고 해. 라드는 출발할 준비 하고. 난 보스가 동행한 조직 쪽에 연락해 볼 테니까-”

“네, 메두사 님.”

 

결국, 고작 몇 분 만에 다 함께 라드가 운전하는 봉고차에 모여 몸을 싣게 된 빅터와 오르카, 가리는 메두사 앞에 나란히 앉았다. 가리는 그 와중에도 무슨 기계를 꾸준히 만지고 있었는데, 빅터는 그게 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 가만히 노려보다 애써 고개를 돌렸다. 함부로 만지려고 했다가 호되게 혼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일단 협조해주는 조직 쪽에서 시간을 끌어준다고는 했으니까, 그리 위험한 상황은 아닐 거야.”

“그럼 대규모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거 아니에요, 누님?”

“그건 아닙니다. 히어로 쪽이 워낙 소수라서. 오히려 히어로 쪽이 일방적으로 밀리며 쫓아오는 상황- 이런.”

“왜, 가리? 무슨 일이라도 있어?”

“서장이 납신다고 하는데요.”

 

서장? 오르카는 그 낯선 단어가 곧 단체의 수장을 의미하는 것을 이내 떠올렸다. 문맥상 히어로 조직의 서장을 말하는 것 같은데, 듣기만 해도 강할 것 같은 설정이었다. 강력한 신체 능력을 갖고 있거나, 무기를 잘 쓰거나, 아니면-

 

강대한 특기를 갖고 있거나.

 

“서장이면 아마 빙결 관련 특기였을 겁니다. 도로를 얼려서 붙잡아 버리면 도주는 불가능. 결국 접전을 벌여야 할 텐데 아마 협조해주던 조직 쪽은 도망가겠죠. 의리를 바라는 게 더 이상하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빨리 도착해야 한다는 거네.”

“아이, 재촉은. 앞으로 10분 뒤엔 도착합니다!”

 

가리의 설명이 빅터의 귀를 반쯤 타고 흐르려다 막힌 채 튕겨 나갔다. 결국 빅터가 이해한 내용은 ‘서장이 왕짱 세다’ 정도. 오르카가 그걸 이미 예상했는지 차라리 포기하라며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빅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잡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도와주던 다른 조직이 도망가면 보스만 혼자 남는 건가. 그럼 이대로 보스만 잡히면 베스트 아냐? 근데 그럼 안 된댔어. 메두사 누나도 지금 이 생활이 편하다고 했고, 세월은 나이프가 아니면 갈 곳이 없다고 했다. 라드도 지금은 이곳이 아니면 돈 나올 구석이 없다고 했고, 가리도, 록산느도…

빅터는 새삼 깨달았다. 백모래는 빅터의 공포이기도 하지만 나이프의 구심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그 말도 안 되는 사랑이라는 목표로 모인 집단이지만 의외로 똘똘 뭉쳐 있는 집단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집단을 이끄는 백모래가 사라진다면 나이프에게 남는 길은 해체뿐. 빅터가 원하는 ‘가족끼리의 독립’은 불가능한 것이다.

 

보스… 혹시 의외로 대단한 사람?

 

“자, 도착!”

“여기서 서쪽으로 10분쯤 뛰어가면 현장이 있을 겁니다. 다녀오십시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 벌써 도착이었다. 가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메두사와 오르카가 딴생각이나 하고 있는 빅터를 잡아끈 것이다. 빅터는 그 자신에 비하면 현저히 느린 두 사람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달려 나갔다. 결국 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얼음의 대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폐쇄된 건지 관련인 외에는 아무도 없어 보이는 뻥 뚫린 고속도로. 그 가운데에 차 여러 대가 얼어붙어 묶여 있었는데, 그 안에 사람이라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흑백의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춤을 추듯 히어로를 피해 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빅터는 저 사람이 백모래와 록산느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눈에 띄는 두어 개의 시체.

 

“…”

 

빅터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대장이 쓰러지던 장면과, 아이들의 시체가 교차로 눈앞을 지나가며 빅터를 아프게 했다. 심장이 북처럼 울리는 것을 도통 진정시킬 수 없어서, 빅터는 그리 달리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빠왔다.

 

“형아, 저거… 시체지?”

 

그런데도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되짚은 질문. 오르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이상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메두사가 먼저 치마의 섬유를 풀어내며 현장에 뛰어든 것이다. 결국 오르카 역시 짧은 몸을 이끌고 그에 합류했고, 빅터는 어정쩡하게 걸어 나갔다. 아까와는 달리 그들을 따라갈 수 없는, 현저히 느린 속도였다. 제대로 싸울 준비조차 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에 비해 메두사와 오르카는 준비라도 해 온 것처럼 날아다녔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두 사람은 실험을 통해 완성된 강화 인간이며, 특히 오르카는 싸움을 배웠으니까.

 

하지만, 빅터가 묻고 싶은 것은…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

 

형도 싫다며, 형도 무섭다며….

하지만 그 작은 몸으로 누구보다도 앞에 서서 싸우고 있었다. 백모래를 위해. -사실 백모래를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은 빅터도 같은 입장이니 어쩔 수 없다는 걸 안다. 빅터가 놀라는 부분은, 오르카가 시체를 보고도 새삼 놀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너무나 익숙해졌나 싶어서.

 

[가리입니다. 히어로 추가 지원 가고 있습니다.]

 

그때, 무전이 한 번 들려왔다. 평소라면 오르카의 무전기를 공유했겠지만, 이번에는 각각 따로 받은 것이다 보니 빅터도 무전을 들을 수 있었다.

과연, 가리의 말대로 지원을 온 히어로들이 합류하는 바람에 인원수는 거의 4대 30이 되어 가고 있었다. 빅터는 그 와중에도 소극적으로 공격을 피하기만 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깨달을 때도 되었다. 지금 빅터가 두려워하는 건 다만 시체뿐이 아니었다.

 

-자신의 힘으로 다른 이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

 

그것은 아이들이 죽은 이후의 일종의 트리거였다. 빅터가 그들과 자유롭게 대련을 주고받을 때 자연스럽게 노렸던 약점들이 그대로 치명타가 되어 죽은 토막 난 시체들이 자꾸만 떠올라서, 그만….

 

그때, 메두사가 한 사람을 제압해 한 구의 시체로 만들고선 소리 높여 외쳤다.

 

“빅터, 정신 차려!”

 

그리고 얼결에 쥐어지는 주먹. 배운 것 그대로 정확하게 배 한 가운데를 올려 치는 강인한 팔. 그것에 히어로는 속절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 싸움을 배우던 시절과는 다른, 빅터가 스스로의 의지로 행하는 첫 폭력의 순간.

 

빅터는 울먹이고 있었다.

 

“저 검은 머리 잡아!”

“애 쪽이야, 큰 쪽이야?!”

“큰 쪽, 멍청아!”

 

그 후는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오르카와 메두사가 여유롭게 한 명의 히어로를 상대할 때 빅터는 한 번에 서너 명을 때려눕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육중하지만 날렵하고도 가벼운 몸은 공중에 뛰어오르고도 사뿐하게 히어로의 어깨를 짚은 채 공중제비를 할 수 있다. 그 사이에 비보잉을 하듯 휘두른 발목에 목이 걸려 넘어진 히어로는 기절했는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빅터가 떠 있는 공중에 총구가 조준되었으나, 빅터는 그것을 보고 몸을 비트는 것만으로도 피할 수 있는 동체시력을 갖고 있었다. 결국 결과는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총이 부서지는 것.

그때, 4개의 손이 한 번에 다가와 빅터의 사지를 봉인하려 했다. 마치 곤충처럼 3쌍의 팔을 갖고 있는 히어로였다. 빅터는 바로 아래로 슬라이딩하고는 그 뒤로 돌아가 순식간에 팔을 모아 잡았다. 그 히어로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였다. 그대로 앞으로 엎어진 히어로는 뒤집힌 곤충처럼 팔을 퍼드덕대다가 머리를 맞고 기절했다.

 

신기하게도 모든 싸움이 툭, 탁, 퍽, 이 세 번의 효과음 안으로 끝났다. 순식간에 자리가 정리되며, 히어로들은 슬슬 부상자들을 뒤로 옮기고 있었다.

 

“보스, 이쪽으로 뛰어요!”

 

그렇게 히어로들의 인원수가 충분히 줄자, 록산느가 신호했다. 다섯 명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달렸으며, 쓰러진 히어로들을 수습해야 했던 히어로 측은 그들을 쫓아오지 못했다. 그럴 전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강대한 특기자인 서장조차 특기의 페널티로 쓰러져 있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이프는 유유히 고속도로를 벗어났다. 봉고차에 오른 백모래는 태연하게 얼굴의 피를 닦으며 불평했다.

 

“아아~ 헬기는 다른 조직을 알아봐야겠어. 이번에야말로 얻나 싶었는데.”

“이번에 동행한 곳은 어떡하게요?”

“어쩔 수 없이 이별해야지. 아, 그 김에 헬기를 가져올까?”

“대체 어디 둘 건데요. 애초에 그 문제 때문에 빌리려고 한 거면서.”

“음~”

 

빅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듣지 못한 채 차의 구석에 구겨져 앉았다. 기분이 축 처졌다. 자신의 주먹에 얼굴이 일그러지던 히어로의 얼굴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으니까. 오르카는 그런 빅터의 기분을 기민하게 눈치챘는지, 기꺼이 빅터의 무릎 위에 앉아 품에 안겨 왔다. 따끈한 온기가 닿자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 기분이었다.

 


달칵,

저녁을 먹고 들어온 빅터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폭 엎어져 이불을 둘러쌌다. 마치 한 마리의 굼벵이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참으로 볼품없는 모습이지만, 치고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자책, 공포, 원망, 또 죄책감… 그 모든 감정들이 빅터를 괴롭혔다. 빅터가 감당하기엔 너무 거대한 자극이었고, 스트레스였다.

 

그때의 대장이 된 것마냥 주먹을 휘두른 것에 대한 자책, 이러다 언젠가 백모래와 같은 인간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하필 그런 자리에 자신을 데려간 메두사에 대한 원망, 그리고 결국은… 폭력을 사용한 자신에 대한 실망. 메두사의 살인은 이제 그 거대한 감정의 틈을 끼고 들어오지도 못했다.

 

내가 악당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버려서.

 

빅터는 종종 애니메이션을 본다. 그 속에는 늘 선역과 악역이 등장하며, 악역을 보통 선역을 물리치고 심각하게는 죽음까지 몰고 간다. 그리고 오늘의 빅터는 악역의 편에….

 

“아.”

 

오늘, 백모래는 빌런이고 빅터는 그와 어쩔 수 없이 함께하는 피해자라는 전제가 깨졌다. 어떻게 봐도 두 사람은 함께 엮이는 악역이었다. 그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퍼서, 빅터는 물 먹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빅터.”

 

그때, 오르카가 방에 들어왔다. 어쩌면 빅터의 마음을 제일 많이 이해해주고 있을 사람이었다. 빅터는 단숨에 이불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오르카가 그 옆으로 타박타박 걸어와 앉았다. 그리고는 짧은 첫 마디를 뱉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빅터.”

 

마찬가지로 내 잘못도 아니고.

마치 그런 합리화가 들리는 듯한 말이었다. 그 옆에서 빅터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빅터의 손을 오르카가 꽉 쥐었다.

 

“…여기 있으려면, 어쩔 수 없어.”

“…”

“지금이 아니어도 언젠가 그랬을 거야.”

 

맞는 말이다.

빅터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백모래가 위협용으로 빅터를 써왔던 것처럼, 언제든 이런 싸움에 빅터를 내세울 일이 생길 것이고, 그때마다 폭력은 불가피하겠지. 빅터는 그때마다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 두려웠다. 빅터는 그것을 한 마디 단어로 뭉쳤다.

 

“하지만, 나 너무 슬퍼.”

“우리 둘 다 처음이라서 그래. …익숙해질 거야. 너도, 나도.”

“난 그게 무서워!”

 

이런 폭력이 당연해질까 봐, 너무 익숙해질까 봐.

빅터의 말에, 오르카는 차마 할 말을 잃은 듯한 얼굴이었다. 어쩌면 공감하고 있는지도. 어쩌면 이미 늦었는지도. 그런 얼굴을 하는 오르카의 얼굴을 차마 보기가 싫어서, 빅터는 돌아 누워버렸다. 그렇게 침대에 엎어진 빅터를 오르카가 뒤늦게 달랬다.

 

“하지만, 빅터. 오늘도-”

“…”

“네가 때려눕히지 않았다면 보스가 그를 죽였을 거야.”

“!”

“그렇게 생각하면 괜찮지 않을까.”

 

정말 아무렇게나 주워섬긴 게 아닐까 싶은 두서없는 말이다. 애초에 폭력을 쓰지 않고 해결한다면 베스트가 아닌가. 하지만 폭력을 쓰지 않고 해결한다는 말에도 맹점이 있었다. 그것도 그럴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두 아이는 도덕과 양심을 배웠지만, 그것을 따를 능력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남아있는 방법이라고는 폭력밖에 없었다. 그러니 두 아이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이 자세한 생각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한 빅터지만, 어떠한 결론을 본능적으로 느꼈고, 그것은 나름의 합리화가 되었다.

 

어쩌면 오르카의 말을 서두로 한, 스스로의 스스로를 위한 자기합리화였다. 그 끝에서 빅터가 원하는 단어는 단 한 가지였다.

 

“나… 아직 착해?”

“…응, 빅터.”

 

빅터, 넌 아직 용서받을 수 있는 착한 아이야.

 


 

“…이상해.”

“응? 뭐가?”

 

오늘은 마일로가 특별히 가져온 기본 상식 만화책을 읽으며 뒹굴거리던 빅터였다. 같이 와준 오르카 역시 주변에 굴러다니는 세계 여행 수필을 읽으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세계 여행 TV 프로그램에서나 나오던 내용을 빠르게 활자로 읽는 것이 퍽이나 즐거운 모양. 덕분에 책에 몰입하고 있던 오르카 대신 마일로의 말에 대답한 것은 빅터였다.

 

“바보 빅터는 들어도 모를 것 같은데-”

“레-이-디- 누나!”

 

오늘은 레이디도 이곳에 와있다. 원래도 로맨스 소설을 좋아했는데, 마일로가 가져오는 로맨스 만화에 더욱 흥미가 생겼는지 매일같이 출석 도장을 찍고 있었다.

어쨌든, 다시 빅터로 돌아오자. 그는 배를 깔고 엎드려 만화를 보고 있는 레이디의 옆구리에 파고들며 나름대로 엄청난 항의를 하고 있었다. 그에 성가셨는지, 레이디가 책을 팔락거리다 팍팍 빅터의 등을 두드렸다. 결국 언제나 그랬듯, 지는 것은 빅터 쪽이었다.

 

“아니. 빅터 얘기긴 하다만은.”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빅터라는 말에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오르카. 언제나 그랬듯 끔찍하게 빅터를 챙겨주는 모습에, 빅터는 다시 꾸물꾸물 오르카에게 기어가 무릎께에 누웠다. 성인이 어린애의 무릎 배게를 받고 있는 이상한 광경에, 마일로는 이미 적응을 마친 상태였다.

 

“다른 샘플과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가공했는데 몇 가지 성분이… 아니다, 애들한테 할 얘기는 아니지.”

“? 빅터의 피에서 뭔가 이상한 게 나왔습니까?”

“빅터는 우리랑 똑같이 먹는데.”

“응? 나 문제 있어?”

 

먼저 서두를 열었고, 이제 막 입을 열려던 마일로는 뒤늦게야 상대가 초등학교에 다닐 나이의 어린애라는 걸 체감한 기색이었다. 그에 황급히 입을 닫았으나… 이미 아이들은 걱정 겸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기색이었다. 결국 반쯤은 후회하는 기색으로, 마일로는 입을 열었다.

 

“아니, 기능은 확실한데 말이지.”

“그럼 나 줘!”

 

그리고 그 말에 제일 먼저 낚인 것은 빅터였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드디어 혼혈적인 특징이 생긴다! 나도 동물 귀 생긴다! 귀 4개 된다! 따위의 생각이 빅터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만큼 바라왔던 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빅터를 말린 것은 레이디의 호기심이었다.

 

“마일로가 얘기하잖아. 조용히 해봐.”

“읍, 으읍….”

“…뭐, 어쨌든. 그동안 샘플을 받아오기만 해서 내가 직접 가공하는 건 처음이란 말이지. 그런데 그동안의 샘플이랑 좀 다르다고 해야 할까, 뭐랄까.”

“…?”

“글쎄, 과정은 다 똑같이 했는데 말이지. 뭐가 문젠지…”

“???”

“…이렇게 말해서 뭔 소린지 알긴 하냐…?”

 

세 아이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그에 마일로는 세게 현타가 온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다. ‘내가 애들한테 뭔 소리를…’ 이라고 하는 걸 보면, 후회가 막심한 듯했다. 빅터는 마일로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지직-

그렇게 마일로가 곤란해하던 때, 갑자기 노이즈음이 들려왔다. 오르카가 들고 있는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빅터는 제일 먼저 달려가 귀를 기울였다. 익숙한 록산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 어린이들. 집에 돌아오도록 해요.]

 

무슨 일일까? 가리가 나이프에 들어온 이래로, 그가 준 무전기는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다. 해봤자 빅터의 장난 전화 정도. 그마저도 압수당하는 바람에 오르카의 무전기를 함께 사용하게 된 빅터는 무전기의 무도 손대지 못하게 되었다.

뭐, 빅터가 무전기를 쓸 줄 몰라서 같이 써야 했겠지만 말이다.

 

‘어려워! 안 쓸래!’

 

…라며, 어깃장을 놓던 빅터를 보며 머리를 짚던 메두사가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어쨌든, 빅터는 후보군을 뽑아보았다. 저녁 시간? 한참 남았다. 빼먹은 숙제? 이제 와서 그런 걸로 혼내기엔 너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또 보스가 쫓기나?

배운 대로 버튼을 몇 개 조작하며 대답을 보내는 오르카를 보며, 빅터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빅터를 보며, 마일로가 슬쩍 고개를 들고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이제 가는 거야?”

“응! 록산느 누나가 불러.”

“감사했습니다.”

“난 남을래~ 어차피 같이 가지도 않을 거고.”

 

과연, 레이디는 이미 용건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빅터는 제 추측에 확신을 더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오르카를 안아 들었다. 두 시간여의 거리를 빠르게 주파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그렇게 빅터와 오르카는 마일로에게 바이바이, 인사를 남기고 급하게 자리를 떴다. 마일로 역시 마뜩찮은 눈빛을 겨우 감추며 손을 흔들었지만- 빅터가 알 리가 없었다.

 

“쟤네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참, 모르겠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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