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위송연] 전지적 곰돌이 시점
첫업로드: 2020.09.27. 포스타입
일, 월, 화, 수, 목, 금, 그리고 오늘 토요일. 오늘은 내가 생전 처음 보는 짙은 남색의 소파에 둥지를 튼 지 딱 7일째가 되던 날이었다. 왜 '되던' 날이냐면, 30분 전에 그 자리에서 쫓겨나 거실 바닥으로 팽개쳐졌기 때문이지.
화가 날 법도 하지만 집주인 커플의 애정 행각을 한낱 객식구인 내가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너그러이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 내가 이 집에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려면 일단 내 소개를 먼저 해야 할 것이다.
나는 허도에서 가장 커다란 기념품 가게의 터줏대감이었던 거대 곰인형이다. 지난주 일요일까지만 해도 난 차갑고 널따란 매대에 앉아 눈앞을 오가는 무수한 인간들의 호들갑을 무료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의식이 있다면 움직일 수 있는 몸을 같이 줬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게다가 대부분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가득한 가게에서 독보적으로 커다란(키만 해도 무려 130cm가 넘는다!) 크기는 오히려 인간들을 부담스럽게 만들었는지, 좀처럼 데려갈 사람이 나타나질 않아 복슬했던 털에는 조금씩 먼지가 끼고 누렇게 손때만 타기 시작하는 터였다. 아니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날 봐! 얼마나 푹신하니! 어서 데려가란 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자유를 찾아 가게 문을 박차고 세상을 향해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때마침 내게 다가오는 한 연인을 발견한 나는 서둘러 털매무새를 다듬고 얌전하게 눈을 빛내었다. 인형이 몸단장을 어떻게 하냐고? 다 방법이 있다. 하여튼 귀엽다, 보드랍다, 푹신하다 등등 온갖 찬사를 늘어놓던 이는 나만큼이나 눈을 반짝이며 가장 중요한 한 마디를 내뱉었는데…….
"갖고 싶다~"
"그런 거 있어봤자 자리만 차지하고, 빨래하기도 힘들어."
뭐라고? 지금 옆에서 애인이 날 갖고 싶다는데 기껏 한다는 말이 "빨래하기 힘들다" 고? 저거 아주 글렀네, 글렀어. 오늘 또 이렇게 한 쌍의 연인이 깨져갑니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원하던 사람은 몹시 실망한 낯빛으로 "나 갈래." 하며 예상대로 냉랭하게 돌아섰고 다른 이는 황급히 그를 뒤쫓았다. 그래, 여기 앉아있으면 일주일에 서너 번은 꼭 저런 커플이 지나가지. 떼잉쯧. 그러게 말이나 잘하면 좀 좋아. 거 다른 사람들은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던데. 고깝게 듣지 말어! 이게 다 나 잘되자고 하는 소리인가? 당신들 헤어지지 말고, 응? 알콩달콩 선물 주고받으며 행복하라고 바쁜 와중에 신경 써주는 거지. 그 참에 거대 곰인형 좀 집에 들이면 더 좋고. 어? 아주 말이 안 통한다고 말이야, 아까 너~ 그래 너 그렇게 살면 안되는 거란 말야~ 알아?!
"완전 크다~"
"너보다 크겠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딱딱한 매대를 벗어나는 데에 또 한 번 실패하고 열심히 구시렁거리고 있을 때, 내 눈앞에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또 다른 커플이 나타났다. 얼른 입을 닫고 조신한 자세로(글쎄, 다 방법이 있다니까?) 내다본 곳에는 자그마한 체구에 회색빛 머리를 발랄하게 땋아내린 예쁘장한 여자와, 반대로 키도 덩치도 무지 크고 인상이 강렬한 검은 머리의 남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오, 자네들 외모 합이 좋구만 그래? 내가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고 두 사람이 정말 잘 어울려서 그래~ 보기 드문 미남미녀 커플의 등장에 흐뭇하게 미소 짓던 내게 다가온 여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의 손발을 조물거리기 시작했다. 푹신하지? 부드럽지? 막 데려가서 햇볕 잘 드는 곳에 놓고 기대어 앉고 싶지? 얼른 데려가!
"살까?"
"그래도 돼요? 차까지 어떻게 가져가."
"내가 업고 가면 되지. 포근하고 좋네. 소파에 두자."
"진짜?"
"응."
"으응, 나 진짜 자기 밖에 없어."
"그거야 말 안 해도 알지~"
그라췌!!! 뭘 좀 아는 젊은이들이구만!!! 애정 어린 포옹을 잠시 주고받은 두 사람은 이내 직원을 불러 계산을 마쳤고, 나는 자동차의 뒷좌석에 여유로이 앉아 이 완벽한 한 쌍에게 ― 내적인 ― 박수갈채를 아낌없이 쏟아내었다. 그리고 길지 않은 시간을 달려 그들의 보금자리에 도착하자마자 코인 세탁방의 아주 커다란 세탁기와 건조기를 빙글빙글 거친 다음에야 남자가 예고했던 대로, 짙은 남색의 소파 한 켠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처음 며칠은 평범하게 지나가는 듯했다. 나를 마음에 들어 했던 아담한 여자(남자가 연아, 이유야, 하고 부르는 것을 보아 이름이 '연', '이유'인 듯 하다)는 저녁을 먹은 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날 꼬옥 끌어안은 채 시간을 보내었고, 남자(여자는 이 남자를 항상 '자기야', '전 실장님', 아니면 사랑을 가득 담아 '여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름이 뭐야?)는 그 옆에 덩그러니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연은 내게 단단히 반했는지 가끔 침대에까지 날 데려가서 팔다리를 편히 걸친 채 잠들기도 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며칠 동안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남자는 관심을 빼앗긴 것이 분했는지, 틈이 날 때마다 괜히 나를 툭툭 건드리고 점점 불만을 표하기 시작했다.
"걔가 그렇게 좋아? 일주일 내내 걔만 안고 있네."
"응, 자기는 단단한데 얘는 푹신한 재미가 있어요."
"뭐?!"
"그냥 느낌이 달라서 신선하다구요~ 그렇게 충격 받을 것까지야."
연의 짓궂은 대답에 남자는 크게 상처 받은 듯 허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야 물론 사랑하는 이들의 사이에 끼어든 것에 대하여 약간의 미안함과 무안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좋다는데 어쩌겠는가? 인형이 제 발로 도망갈 수도 없고. 태그는 세탁한다고 사자마자 떼어 버려서 환불도 안 될 텐데. 이거, 나의 매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아주 제대로 만나버렸구만. 인간들은 이런 관계를 천생연분이라 하던가? 하하하. 우쭐해진 나는 보송한 털을 한껏 부풀리고 복실한 자태를 뽐내었다.
남자와 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시간은 흘러 오늘, 토요일. 늦은 아침을 먹은 연은 다리 사이에 나를 끼고서 그와 볼 만한 영화를 고르는 중이었고 막 설거지를 마친 남자는 나를 사이에 두고 연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거 볼까요? 쌤들이 재미있다던데. 아니면 저것도 괜찮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신나게 화면을 넘기는 여자와 달리, 꼭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여전히 골이 나있던 남자는 연이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척 나를 꾸욱 찍어눌렀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엄지와 중지를 동그랗게 모아서 나의 이마를 툭,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힘있게 후려치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나만큼이나 놀란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조금 과장된 표정으로 장난스레 실장을 원망했다.
"왜 때려요?"
"그냥, 얄밉게 생겼어."
"우리 실장님 이제 곰인형까지 질투하네."
"알 게 뭐야~ 얄미우니까 한 대 더 때려야지."
어어, 또? 이 아저씨 나 또 쳤어 방금? 와씨 곰인형 서러워서 살겠나; 동네 사람들~ 여기 이 사람이 곰인형 잡아요~! 아이고 곰인형 죽네에!!! 아니~ 아저씨 나 뭐 하나만 물읍시다. 내가 댁보다 푹신한 게 내 잘못임? 누가 그렇게 몸 관리 열심히 하랬나, 왜 죄없는 곰인형은 잡고 난리래? 와 진짜 어이가 없어서ㅋㅋ
"곰인형 주제에 남의 애인이나 뺏고 말이야."
"얘는 그냥 폭신했을 뿐이라구요~ 들으면 억울하겠다."
그러니까!
"일주일째 자리 뺏긴 내 생각도 해줘."
"자기 생각은 항상 하고 있지."
"생각만 하고 안아주기는 얘만 안아주잖아."
"삐쳤어요?"
"응, 나 한번 삐치면 오래 가니까 빨리 풀어줘야 할 걸."
"와 무서워라~ 그럼 오늘은 내가 특별히 자기 커피까지 내려줄게요!"
남자의 으름장을 가볍게 흘려넘긴 현명한 연은 잠시 나를 품에서 떼어놓고 커피를 타겠다며 부엌으로 사라졌다. 드디어 우리 둘만 남았군, 필연의 숙적이여. 운명의 시간이 왔다. 자, 이제 어쩔 텐가. 날 내다 버리기라도 할 건가? 애인이 날 이렇게 좋아하는데? 기세등등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나를 깔아뭉갠 채 반쯤 누워있던 남자는 내 몸을 번쩍 들어 소파의 반대쪽으로 던져놓았다.
게다가 자리를 바꿔놓은 것으로는 모자랐는지 다시 나를 노려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면 어쩔 건데? 쳐봐! 쳐봐! 내가 두 번이나 맞았는데 세 번은 못 맞겠냐? 아 쳐보라고~ 아이고 곰돌이 죽네~ 여기 사람이 곰인형 친대요~ 따가운 눈총으로는 영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몸을 일으킨 남자는 결국 무서운 기세로 나의 멱살을 잡고……!
철퍼덕.
순식간에 몸이 들리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더니 나는 곧 소파 아래로 내쳐졌다. 심지어 바로 아래도 아닌, 연에게서 멀리 떨어진 차가운 거실 바닥으로. 차라리 한 대 더 때리지,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용히 앉아있던 나를 자리에서 끌어내려? 내가 뭘 어쨌다고! 으아아아!
구겨진 자존심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팔다리를 버둥거렸지만 이 상황에서 거대솜뭉치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저 연이 제자리로 돌아와 실장의 무례한 행위에 분노하고 나를 안아 제자리로 돌려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마침 따끈한 잔 두 개를 들고 거실로 돌아오는 연이 눈에 들어왔다. 믿고 있어, 연!
"곰돌이 왜 저기 있어요?!"
"몰라, 저기가 좋대."
저, 저 사기꾼 같은 놈이 이제 나까지 모함하네? 조금만 기다려라, 연이 너를 가만 두지 않을 테니!
"흐음, 그럼 끌어안고 있을 게 없는데."
"나 있잖아? 너만의 전위 인형."
"자긴 푹신하지 않다니까요."
"대신 따뜻하지. 잘생겼고. 먼저 키스도 해줄 수 있는데."
"그건 그래."
"그러니까 얼른, 연아."
"어린애도 아니고……. 알았어요. 자!"
나의 모든 기대와 예상은 대차게 빗나갔다. 연은 낮은 테이블에 커피 두 잔을 내려놓은 다음 남자에게 활짝 팔을 열었고 남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그 작은 품에 얼굴을 묻고 실실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에 마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울부짖었지만 행복에 겨운 그들의 귀에 나의 비참이 들릴 리가 없었다.
"커피 다 마시고 데이트 좀 할까."
"나가게요?"
"아니, 집에서. 네가 잘 때도 쟤만 껴안고 있어서 이번 주는 아무것도 못 했잖아."
"아직 날이 밝은데~"
"커튼 치면 어두워져."
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입맞춤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식어가는 커피와 쓰러져있는 나를 버려둔 채 방 안으로 사라졌다. 이럴 순 없어. 돌아와! 돌아와서 다시 날 소파에 앉혀놓으란 말이야!! 목청을 높여 애타게 불러보아도 나를 어루만져주는 것은 초가을의 잔잔한 햇살뿐이었다.
그렇게 혼자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몇 분을 외로이 흐느꼈을까. 나는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 둘이 좋아 죽겠다는데 내가 거기 끼어서 뭐 하겠나. 먼지 안 쌓이게 세탁이나 꼼꼼히 해주면 됐지. 인형 주제에 무슨 호의호식을 누리겠다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질투, 기대, 배신감, 슬픔, 외로움. 이 모든 헛된 감정들을 놓아주자 마음이 맑아짐을 느끼며,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쏟아지는 햇살 속에 몸을 내맡겼다. 그래그래~ 착한 내가 봐줘야지 어쩌겠어. 그리고 이참에 나도 낮잠이나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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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도?
근데 너보단 아닌 듯.
※ 이것이 드림 통합의 날 ※ 날조 100% ※ 내드림 + 남에 드림(ㅋㅋ) 지금 이곳, 이슈가르드의 오래된 술집에는 두 명의 유명인이 앉아 나란히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짙은 머리색의 엘레젠과 밝은 머리색의 엘레젠. 오랜 친우 사이에, 서로 각자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그러한 두 남정네들. 다른 이들에게는 유명인이고 동경하는 이들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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