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의 추억, 11월 편
플로이드 리치 드림
* 트친이랑 1년 장기 프로젝트(https://1yearcollabo2.creatorlink.net) 하는데 써서 냈습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rRgTMs_bGuI
“아기새우야, 이거 쿠키 맞아?”
“예?”
낡은 기숙사에 놀러 온 플로이드를 위해 마실 걸 가져온 아이렌은 그 질문에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가 가리킨 것은 게스트 룸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쿠키 단지. 정확하게는 단지 안에 있는 각종 잡동사니였다. 고무줄, 클립, 작은 종이 집게에 고리가 부서진 열쇠고리까지. 통일성 없는 구성의 잡화(雜貨)들은 아무리 봐도 과자같이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도 굳이 쿠키냐고 물은 건, 이 모든 게 들어있는 곳이 쿠키 단지이기 때문이겠지. 왜 요즘에는 아주 특이하게 생긴 과자들도 있지 않던가.
아이렌은 들고 온 주스를 내려놓고 급히 그의 손을 막았다.
“아뇨! 먹으면 안 돼요!”
“아니, 먹는다고 한 적은 없고. 혹시나 해서 물은 거니까.”
제가 애도 아니고, 무작정 입에 넣을 리가 있나.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 유난 떠는 아이렌을 보며 황당해한 플로이드는 얌전히 잡동사니만 든 쿠키 단지를 주인에게 넘겼다.
“근데 왜 쿠키 단지에 이런 걸 넣어 둔 거야? 보관함 없어?”
“마음먹으면 보관함 정도는 살 수 있지만, 따로 하나 사는 것보단 있는 걸 쓰면 되겠다 싶어서요. 게다가 이 쿠키 단지, 귀엽지 않나요?”
아이렌은 한 손으로 들기엔 크지만 두 손으로 드니 작아 보이는 쿠키 단지를 쓰다듬었다. 처음 보는 브랜드 로고가 찍힌 새하얀 단지에는 하늘색 물방울무늬가 큼직하게 박혀있어, 확실히 깜찍한 느낌이 들었다.
손에 든 단지 뚜껑을 직접 닫은 플로이드는 아이렌이 가져온 사과주스를 홀짝이며, 원래 저 안에 들어있었을 쿠키에 관해 상상해 보았다.
“무슨 쿠키였어?”
“여러 가지 쿠키가 섞인 단지였어요. 초콜릿 쿠키랑 아몬드 쿠키랑 코코아 쿠키도 있었고…….”
“그래? 맛있었어?”
“네! 가격이 조금 비쌌는데, 이 정도로 맛있다면 비싸도 이해가 된다 싶었어요.”
“그렇게 맛있는 거면 나도 하나 주지.”
그 말은 ‘그렇게 맛있었냐’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아무래도 아이렌은 그걸 진지한 푸념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제 자리에 쿠키 단지를 가져다 놓은 아이렌은 멋쩍어하며 상대의 옆에 앉았다.
“죄송해요, 다음에 또 구매하게 되면 선배 몫도 하나 살게요.”
“응? 장난이야. 장난. 과자 정도는 내 돈으로 사 먹으면 되는 거고. 아기새우는 진짜 농담이 안 통한다니까? 아하하.”
하지만 그런 바보 같을 정도로 진지한 점이 아이렌의 재미있는 점이지. 원래 바보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평소에는 상당히 영민한 편인데 제 앞에서만 고장 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가.
쩔쩔매는 아이렌에게 머리를 기댄 그는 쿠키 단지를 빤히 보며 질문을 이어갔다.
“어디서 산 거야?”
“그게 말이죠……. 사실 인터넷에서 구매했는데, 구매 사이트 주소를 잃어버려서 또 먹고 싶어도 재구매를 못 하고 있었어요.”
“엥? 그래?”
“예. 웹사이트 주소가 바뀐 건지, 인터넷 기록을 뒤져봐도 안 뜨더라고요. 사이트 이름도 기억나질 않고. 쿠키 단지에는 로고만 있지 이름은 없고.”
그런 경우 있지. 인터넷이라는 건 편하긴 하지만, 이렇게 주소가 조금만 바뀌어도 추적이 힘들어지니까. 말도 없이 이사 간 사람을 찾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거 아니겠나.
아이렌은 기억 속 잠들어있던 쿠키 맛이 문득 떠오른 건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좀 아쉽다니까요. 포장도 예쁘고 내용물도 맛있는 이런 쿠키, 흔하지 않은데.”
그렇게나 아쉽다는 건가. 대체 얼마나 맛있는 쿠키고, 얼마나 찾기 힘들길래.
순식간에 강렬한 호기심에 휩싸인 플로이드는 쿠키 단지에 있는 브랜드 로고를 머릿속에 똑똑이 새겼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주말의 아침.
전날 밤늦게까지 과제를 한 후 새벽이 되어서야 잠든 아이렌은 오래간만에 달콤한 늦잠을 자며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꼬붕! 얼른 일어나랏!”
하지만 그 여유로움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제 몸을 거세게 흔드는 그림 때문에 부스스하게 눈을 뜬 아이렌은 졸음에 취한 채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림. 주말부터 무슨 일이야? 평소엔 아침 식사 차릴 때나 일어나면서.”
“그 녀석이 왔다고, 그 녀석!”
“그 녀석이 누군데…….”
“플로이드, 그 녀석 말이닷!”
“뭐?”
손님의 이름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든 아이렌이 상체를 벌떡 일으킨다. ‘으악!’ 튀어 오르듯 일어난 파트너를 보고 깜짝 놀란 그림은 꼬리를 바짝 세운 채 침대 밖으로 도망쳤고, 당황한 아이렌은 자느라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댔다.
“갑자기? 연락도 없이?”
“그 녀석이 언제부터 연락하고 찾아왔냐고.”
“너, 선배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연락 정도는 하실……, 거야. 아마.”
정작 본인도 확신은 할 수 없는 걸까. 말끝을 흐린 아이렌은 뒤늦게 스마트폰을 확인해 보았다. 부재중 전화는 없음. 메시지는 몇 건 와있긴 했지만, 플로이드가 보낸 건 아니었다.
‘전화도 없으셨는데, 뭐지.’
혹시 연락도 없이 와야 할 정도로 급한 일이 생긴 걸까. 언제나 최악의 상황부터 생각하는 아이렌은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위기감을 느끼고 그림에게 다가갔다.
“지금 어디 계셔?”
“게스트 룸에 있다고.”
“알았어. 금방 갈 테니까, 가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해줄래?”
“이 몸이 왜 그런 귀찮은 짓을……!”
아니, 그게 뭐 힘들다고 거절하는 거야.
아이렌은 고개를 획 돌리는 그림을 반쯤 뜬 눈으로 보다가, 마른세수하며 거울을 살펴보았다.
“아, 그래. 내가 해야지. 너한테 뭘 맡기려고 하다니. 나도 잠이 덜 깼구나.”
“잠깐, 그게 무슨 소리냣!”
“그거야 네게 뭘 부탁하기엔, 좀 미덥지 못하잖아?”
반은 진담, 반은 농담이 섞인 그 말은 그림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야기를 꺼낸 자신이 한심하다는 듯 자조적으로 말하는 아이렌 탓에 귀찮음 같은 건 까맣게 잊고 만 그림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갔다.
“딱 기다려라고! 이 몸이 가서 말하고 올 테니!”
‘역시 단순해서 좋네.’ 제 미끼에 걸려들어 말을 전하러 가는 그림을 보며 몰래 웃은 아이렌은 최대한 사람 꼴로 나서기 위해 세수하고 온 후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단장했다.
“으으, 꼴이 영 엉망인데.”
어차피 화장은 안 하니 그건 다행인가. 일단 머리만 새로 묶고, 옷은…… 갈아입고 가면 시간이 걸릴테니 일단 내려가서 얼굴이라도 비춘 후 갈아입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헝클어진 머리카락만 단정히 빗어 하나로 묶어 올린 아이렌은 서둘러 아래층으로 향했다.
“어라? 선배, 그림은요?”
게스트 룸에 들어가니 보이는 건 플로이드 뿐. 먼저 내려간 그림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소파에 늘어지게 앉아 천장만 보던 갑작스러운 손님은 히죽 웃으며 방문 너머를 가리켰다.
“방금 나갔어. 부엌으로 갔을걸?”
“그래요? 그림이 뭐라고 하던가요?”
“아기새우가 곧 내려온다고 하던데.”
“말은 전하고 갔구나…….”
그럼 됐다. 제가 바란 건 딱 그 정도지, 손님에게 다과를 내어주며 접대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으니까. 오히려 제대로 말을 전하고 간 점에서 진심으로 장하다고까지 느끼고 있다.
아이렌은 전혀 조급해 보이지 않는 플로이드의 눈치를 보며 서로의 거리를 좁혔다.
“이런 아침부터 무슨 일로 오셨어요? 연락하시고 오셨으면 마중 나갔을 텐데.”
“아기새우야, 나 클립 하나만 빌려줄래?”
“예?”
“클립 말이야. 클립. 하나 빌려 줘봐.”
묻는 말에는 답하지 않고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아이렌은 엉뚱한 소리를 하는 플로이드를 빤히 보다가,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 저랬다면 ‘대체 왜 저러냐’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상대는 플로이드 리치 아닌가. 제멋대로인데다가 지나치게 솔직하고, 변덕스러운데다가 충동적인.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니까, 뭔가 제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저런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우리라.
“자, 잠깐만요.”
클립이라면 분명 잡동사니 모아두는 곳에 있을 터. 물건은 늘 제자리에 두어야 성이 차는 아이렌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쿠키 단지를 열었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건 그간 모아온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아니었다.
“어라?”
단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여러 종류의 쿠키였다. 언젠가 제가 먹어보았던, 원래 이 단지에 담겨있는 쿠키 말이다. 게다가 이 고소하고 달콤한 향을 보아하니, 이건 모형도 환각도 아닌 모양인데. 이게 어찌 된 걸까.
어리둥절해진 아이렌은 제가 들고 있는 쿠키 단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지금 보니, 제가 평소 쓰던 쿠키 단지와 분명 같은 것이었지만 여기저기 자잘한 상처가 없는 등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짠~! 놀랐어?”
쿠키를 확인한 아이렌에게 다가온 플로이드는 뿌듯해하며 상대를 뒤에서 껴안았다.
품에 쏙 들어와 안긴 아이렌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쿠키 단지와 플로이드를 번갈아 보았다.
“새로 사 오신 거예요?”
“응.”
“어디서요? 파는 곳 찾았어요?”
“응!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검색해서 찾아봤지. 보물찾기 같아서 재미있었어, 아하하.”
세상에, 그걸 어떻게 찾았지.
자신은 해내지 못한 걸 간단히 해낸 상대를 존경스러움을 담아 올려본 아이렌은, 단지를 내려놓고 냅다 몸을 돌려 플로이드를 마주 안아 주었다.
“감사합니다, 선배. 정말 기뻐요.”
아, 웬만하면 침착하는 유지하는 아이렌에게 이 정도면 꽤 격렬한 애정 표현 아닌가.
한 손으론 제 허리를 꼭 감아쥐는 팔에 가볍게 손을 얹고 다른 손으로는 자그마한 머리통을 쓰다듬은 플로이드는 흡족히 웃었다.
“정말 좋은가 보네, 아기새우야.”
“당연히 좋죠. 그런데 그렇게 기뻐 보여요?”
“그렇지만 말이지. 아기새우는 보통 뭔가 선물해 주면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라던가 ‘안 주셔도 괜찮다’같이 김빠지는 소리부터 하잖아? 그런데 이렇게 바로 고맙다고 하는 거 보면, 정말 기쁜가보다 싶어지고?”
‘아’ 갑자기 허를 찔린 아이렌은 더는 웃지 못하고 표정이 굳어버렸다.
확실히, 가진 걸 주는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뭔가를 받는 건 부담스러워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나 심하게 사양했던가?
잠깐 제 과거를 되짚어 본 아이렌이 습관적으로 대꾸했다.
“죄송…….”
“그러니까, 아기새우는 너무 습관적으로 사과한다니까. 이게 죄송할 일인가?”
“그거야, 이건 반성해야 하는 거니까요. 적당히 사양할게요.”
“흐응.”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아니, 아이렌이라면 할 땐 하는 여자니 해낼 수도 있지.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간다지만, 제게 거짓말은 하지 않는 아이렌이지 않던가.
자신의 아기새우를 믿기로 한 플로이드는 더는 캐묻지 않고 머리만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그런데, 원래 쿠키 단지는 어디 갔어요?”
“그거? 저기 숨겨뒀지. 나중에 꺼내 가.”
“아하, 그럴게요.”
플로이드가 가리킨 찬장을 슬쩍 본 아이렌은 선물 받은 쿠키 단지를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선배도 하나 드세요. 얼마나 맛있는지 궁금해하셨잖아요.”
“아니, 난 이미 먹어봤으니 됐어.”
“예?”
“14일이 쿠키데이인가 뭔가 하는 기념일이라 하나 사면 하나 더 주는 행사를 하더라고. 그래서 내 건 방에 따로 있어.”
앙증맞은 크기의 각양각색의 쿠키 중, 초콜릿 칩이 박힌 쿠키를 집어 든 플로이드는 냅다 아이렌의 입에 쿠키를 넣어주었다. 순식간에 입에 들어온 쿠키를 얼떨결에 씹은 아이렌은 입 안에 퍼지는 기분 좋은 단맛에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감정이 훤히 보인다는 건 이렇게나 좋구나. 언제나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는 아이렌이기에, 이렇게 무방비한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것만 봐도 쿠키를 사 온 보람이 느껴진다.
어째서 아이렌이 제가 제멋대로 굴고 즐거워하는 것만으로도 그리 기뻐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아진 플로이드는 나긋나긋한 어투로 상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이건 아기새우 혼자서 다 먹어. 알겠지? 물범이가 훔쳐먹으면 꼭 말해. 쥐어짜 줄게♡”
그 한마디에, 순식간에 입술 앞에 놓인 귀 끝이 빨개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귀만 붉어진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목부터 정수리까지 온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아이렌은 입 안의 내용물을 전부 삼킨 후, 말미잘 속에 숨어드는 열대어처럼 플로이드의 품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선배가 최고예요.”
“흠~ 그렇지? 내가 최고지? 그렇지?”
“당연하죠.”
“내가 제일 좋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고작 쿠키 하나로 이렇게나 좋아하다니. 제 아기새우는 얼마나 소박한가.
하지만 그런 걸로 기뻐하는 아이렌을 보며 어깨가 으쓱해진 자신도 어떻게 보면 좀 바보스러울지 모르겠다. 제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진 건지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그는 평소보다 더 따끈하게 느껴지는 아이렌을 숨이 막혀 올 정도로 꽉 안아 주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