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채햄] 낙하이론 (落下理論)

낙하이론 (落下理論)

w. 주인장

《2022 계간꿀른 겨울호 : poem》에 실렸던 동명의 글의 리네이밍 버전입니다.

또 시작이다.

아직 밤인가 싶을 정도로 어두운 새벽에 눈을 뜬 형원은 암만 눌러도 켜질 생각을 않는 난방기에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내리 꽂는다. 물론 세게 쳤다가 고장이라도 난다면 더 곤란해질 게 안 봐도 비디오였기에, 주먹을 날리려다가 그냥 그 위를 톡 하고 쳤을 뿐이다. 일하러 나가기까지 그래도 40 분 정도 남았지만, 이 날씨에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면 씻는 데에만 꼬박 30분이 넘게 걸릴 것이 뻔했다. 형원은 잔뜩 인상을 쓰고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며, 자줏빛 타일이 깔린 욕실 안으로 들어선다. 세면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시퍼런 칫솔 위로 치약을 대충 짜내고서 치열을 가로질러 칫솔질을 한다. 그와 동시에, 잠깐 레버를 올려 샤워기 물줄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이내 잽싸게 손을 빼 버린다. 분명 손을 타고 흐르는 건 평범한 수돗물인데, 얼음 안에 손을 담궜다 뺀 것처럼 얼얼한 통증이 스민다. 문득 이전에 냉동 창고에서 일했던 기억이 빠르게 스쳐지나가자, 온몸을 부르르 떨며 오늘 안으로 집주인에게 전화하겠노라 다짐한다.

머리만 겨우 감고 나온 자신을 대견스레 여긴 형원은 세월의 흔적이 담겨 후줄근해진 운동화에 제 발을 끼워 넣는다. 원래 하얀 것이었던 신발은 여기저기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이리저리 쓸리기도 하여 원래 형태가 무너진 회색의 것이 되었다. 이번 달 안으로 새 운동화를 꼭 사야지, 이번에 산다면 하얀색이 아닌 아이보리색으로 사리라 다짐한다. 그래야 때가 타더라도 티가 덜 날 테니까. 신발의 앞코를 현관 바닥에 툭툭 두드리면서 패딩 주머니 안에 자신의 짐이 잘 들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그의 몸에 오래 밴 습관이다. 한손씩 번갈아가면서 그 속을 헤집으며 현관문을 열다가, 낯익은 네모난 곽이 잡히지 않아 허겁지겁 몸을 돌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파란색 담배갑을 낚아채 듯 집어든다. 이놈이 없으면 고된 오늘 하루의 시작과 끝을 제대로 지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1월의 새벽 공기는 시리기 그지없어서, 그 공기가 제 살을 에다 못해 뼛속까지 파고든다. 형원은 몸을 웅크린 채 부르르 떨며 계단을 오르고선, 건물을 벗어나 익숙하게 담배 한 대를 입에 문다. 휴대폰으로 확인한 시간은 새벽 5 시 30 분. 인력 사무소까지는 정해진 시간까지 무사히 갈 수 있겠구나 생각한다. 500 원짜리 싸구려 라이터로 어렵사리 담뱃불을 붙이는데, 순간 터져 나오듯이 피어오른 작은 불의 아지랑이 사이로 시꺼먼 옷을 입은 남자가 제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요즘에는 남녀 불문하고 모두 몸조심해야 하는 세상인데, 행여나 저 남자가 저를 해치기라도 한다면, 내가 갚아야 하는 빚은?

가뜩이나 온가족이 흩어져서 아버지라고도 부르기 싫은 작자가 싸질러 놓은 빚 갚기 바쁜데, 나까지 없으면 그건 그것대로 못할 짓이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담배를 문 채 숨을 집어삼키며 불을 붙이고서 고개를 돌리는데, 멀리서 다가오던 남자가 형원과 두 걸음 정도 떨어져 서서는 그의 주머니에 있던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문다. 껄렁해 보일 법도 한 포즈인데도 단정함을 잃지 않은 남자가 주머니를 뒤적이는 움직임이 갈수록 부산스러워진다. 남자는 작게 욕지기를 내뱉더니 형원에게 다가왔다.

“저기요.”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악의라고는 담겨 있지 않았다. 물론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는 듯했으나, 형원은 그것이 제게로 향하는 것이 아닌 걸 알면서도 머리털이 절로 쭈뼛 서는 것이었다. 형원은 남자를 향해 굳이 몸을 돌리지도 않고, 곁눈질로 가볍게 그를 슥 쳐다볼 뿐이었다. 사람의 첫인상은 대개 그 사람의 외관을 보고서 정하기 마련이다. 두툼해 보이는 검은색 가죽 자켓을 입고서, 옅게 붉은 기를 띠는 입술에 물린 자신의 것과 같은 두께의 담배, 그 위로 잘 뻗어 있는 콧대와 생각보다 선한 눈매,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맑은 눈동자. 진한 눈썹과, 바람에 흩날리긴 했지만 제법 잘 정도된 앞머리, 그리고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검은색 머리카락.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호감형의 앳돼 보이기까지 하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방금 전까지 긴장한 것이 우스워질 정도로 형원은 남자에게 살가운 말투로 응한다.

“네?”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아, 네. 여기요.”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싸구려 라이터가 그의 손에 들어가자 원래의 가치보다 더 제대로 빛을 발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고 볼이 홀쭉 패일 정도로 담배를 빨며 불을 붙이고서는, 다시 형원에게 ‘감사합니다’라는 정중한 말과 함께 라이터를 돌려주고 두 걸음 정도 떨어져 선다. 형원은 받아 든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어 두고서, 잔열이 남은 그것을 괜히 만지작거린다.

‘여기 사세요? 저도 여기 사는데. 지금 집에 오시는 거예요? 피곤하시겠다. 저는 지금 일하러 가요. 날씨가 많이 춥죠?’

짤막한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입김처럼 퍼지다가 입 안에서 맴돌기 시작했으나, 그저 담배 연기만 길게 뱉어내는 것으로 대신한다. 일단 정해진 시간까지 출근해야 하는 것이 급하기도 했고, 남자의 무표정이 지금 제 뺨을 감싸는 공기처럼 날카로웠기에 선뜻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형원은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면서 남자에게 인사를 할까 말까 수십 번 고민하다가, 그냥 걸음을 떼기로 한다.

순간, 주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이 그에게 말을 걸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히 그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외모를 가졌기 때문이니까. 형원은 어깨를 한번 들썩이며 털어 내고서 버스에 올라탄다. 스스로가 정신 차려야지 하고 생각이 들 때마다 버릇처럼 통장의 잔고와, 청산해야 할 금액과,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과 주고받은 카톡 내용을 확인한다. 그러면 그제서야 자신의 처지가 현실감 있게 와닿고, 다른 잡생각은 사라지게 된다.

그래, 내 주제에 무슨. 내 처지에 무슨.


평일 새벽부터 인력 사무소로 가서 현장을 배정받으면 그곳에서 아침 7 시부터 일을 시작한다. 고등학교도 자퇴한 본인이 할 수 있는 일 중 그나마 돈이 되는 것이 건설 현장에서의 노동이었다. 오전 7 시부터 오후 6 시까지 작업을 끝마치고 나면, 오후 7 시부터 밤 11 시까지 나이트클럽에서 오픈 청소를 하고 주방일을 돕는다. 그렇게 막차를 타고 겨우 집으로 돌아오면 자정이 막 지나 있고, 간단히 청소를 하거나 빨래를 하고 나면 새벽 1 시 정도가 된다. 그것도 단번에 잠에 들어야 그나마 3 시간 정도 잘 수 있었고, 어쩌다 가끔 잠을 설치는 날이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을 들라 하면, 주말 이틀 동안은 푹 잘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처음 일을 하면서부터 주말을 비워 둔 것은 아니었다. 산더미 같은 빚과 장남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주 7일을 꽉꽉 채워 일하던 형원은, 그간 모았던 돈을 병원비에 모두 탕진한 뒤로 그냥 주말을 비우기로 했다. 마음은 불편했으나, 몸이 아파서 헛돈 나갈 일은 없었으니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이제 막 20 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는 나이인 형원은 행여나 함께 일하는 중년 남자들에게 밉보이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부러 더 열심히 몸을 움직이곤 했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 나서는 모습에 형원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이들은 점심 시간에 아들뻘 되는 그와 함께 식사를 해 주었고, 짬을 내서 담배를 피우러 갈 때면 작업반장 몰래 형원을 불러다 쉴 시간을 주곤 했다. 저를 챙겨 주는 그들을 향해 양 볼이 봉긋하게 올라올 정도로 해맑게 웃는 형원이지만, 딱 한 가지 불편한 때를 꼽자면 저에게 ‘여자친구’의 존재를 물을 때뿐이었다. 잡담을 할 때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물어오는 그 질문에 이제는 이골이 날 지경이었다. 나이가 들면 외로움을 많이 탄다고들 하지만, 집에 버젓이 부인분도 계시면서 자신의 연애사가 뭐 그리 궁금한 건지, 형원은 억지로 웃느라 얼굴에 경련이 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젊은데 데이트할 시간도 없어서 어쩌냐.’

‘여자친구는 있어? 뭐하러 젊어서부터 이렇게 고생을 하나. 연애도 하면서 재밌게 사는 게 남는 거야.’

‘정 외로우면 내가 참한 처녀 하나 소개해 줄까?’

그래, 차라리 남들처럼 여자친구를 사귀는 평범한 남자였다면 스스로가 이렇게 위축되는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저 수염 자국이 그득한 아저씨들에게 ‘아, 저는 남자 좋아해서요. 이왕이면 좋은 남자 분으로 소개해 주시면 좋겠어요.’라고 말할 배짱도 없는 형원이다. 그저 입에 발린 ‘괜찮아요.’, ‘감사한데 마음만 받을게요, 아저씨.’ 라는 말밖에 뱉을 수 없는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질 뿐이다. 해가 어둑어둑하게 질 때까지 온몸을 혹사시키는 작업과 지긋지긋한 아저씨들의 헛소리를 견뎌 내고, 근무 일지에 오늘치 근무 시간을 적고 나면 이 흙먼지 구덩이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 형원은 다음 출근지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오늘따라 유독 더 눈에 잘 들어오는 남녀로 짝지어진 커플들을 애써 무시한다.

스스로가 여성을 만나 보려고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쩌다가, 아주 가끔, 호감을 느끼는 대상이 여성이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쩌겠어. 호감이라고 느껴져도 그뿐이고, 연애 감정을 가지고 만날 때 당연시되는 가벼운 스킨십조차도 못하겠는데. 애초에 여성에게 그런 종류의 호감을 갖게 되는 것도 한손에 꼽힐 일이긴 했다. 형원은 연한 회색 구름이 깔린 쥐색의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쉰다.

버스를 타고 30 분 정도 가면 이 지역에서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몰린다는 번화가가 나오고, 버스에서 내리고서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유흥가로 들어서면 자신이 일하는 나이트 클럽이 나온다. 형원은 매번 일하러 갈 때마다 ‘클럽도 아니고 나이트 클럽’ 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피식 웃곤 한다. 다소 올드한 이름에 걸맞게 허름하지만 으리으리한 궁전 같은 건물, 그 입구 위에는 촌스러운 빨간색으로 번쩍이는 간판, 그리고 그 아래로는 멀리서 봐도 덩치가 꽤 커 보이는 장정 두 사람.

형원이 오늘도 익숙한 그 풍경을 눈에 잠시 담고서는 나이트 클럽 건물 옆 골목으로 들어가 담배를 한 대 빼어 물고 막 불을 붙이려는데, 불쑥 자신의 앞으로 라이터 하나가 작은 불꽃을 피운 채로 들이밀어진다. 형원이 놀란 눈을 하고서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늘의 바쁜 하루 때문에 잠시 기억 속에서 잊혔던 그 남자였다. 남자는 여전히 라이터를 든 채로 형원을 빤히 바라보다가, 눈썹을 들썩거리며 라이터를 형원의 담배 쪽으로 갖다 댄다. 검게 그을리는 담배에 형원이 급하게 담배를 빨아들이며 불을 붙이고서는, 고개를 대충 까딱거리며 인사를 한다. 남자는 자신의 담배에도 불을 붙이고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연기를 내뱉는다. 뿌옇고 길게 뻗어 나가는 연기를 보다가 형원은 자신도 모르게 뜬금없는 말을 꺼낸다.

“저 여기서 일해요.”

남자는 그제서야 형원에게 호기심이 생긴 듯, 다소 놀랐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기현이 놀랄 만한 것이 당연했다. 이 어린 남자는 늦은 새벽에 봤을 때만 해도 분명 초면이었고, 이곳에서 일한다면 저와 비슷한 기수의 놈일 텐데, 이런 순둥한 얼굴은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으니까. 하다 못해서 교육받을 때에도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형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기현은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인 후 남은 연기를 뱉어낸다.

“여기서 일한다고?”

“네. 그쪽도 여기서 일하세요?”

“여기서 무슨 일하는데?”

“저요? 저… 그냥… 뭐, 청소하고, 과일 썰고, 뭐.”

기현은 그제서야 잔뜩 경계하고 있던 눈을 풀고 ‘아’ 하며 형원에게서 고개를 돌린다. 형원은 그게 내심 아쉬운 것이다. 매일 같이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저렇게 저를 빤히 쳐다봐 준 사람은 오랜만이었으니까. 하다못해 그 공사장 아저씨들만 해도 저에게 시선을 오래 두지 않았는데. 형원은 오늘 새벽부터 늦은 저녁 시간에 걸쳐서 이 남자를 만난 것을, 우습게도 어쩌면 우연이자 인연일 것이라 믿어 본다. 생각해 보면, 새벽에도 집 앞에서 만났으니까 같은 건물에 살면 진짜 운명인 거 아닐까 하는 풋내기 같은 생각도 해 본다. 형원은 자신의 손에서 담배가 반절 넘게 타 들어 가는 건 생각도 하지 않고, 저 남자에게 뭐라고 더 말을 걸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남자가 막 걸음을 떼려 하자 급하게 입을 연다.

“몇 시에 퇴근하세요?”

“글쎄. 모르겠는데.”

“저는 11 시에 퇴근하거든요.”

“그래. 고생해.”

형원은 남자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손에서 담배를 툭 떨구고서는 한참을 발로 짓이긴다. 그 남자에게 서운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지독한 외로움 때문이었다. 지금의 자신이 감정적으로 단단하지 못하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늘 헤실헤실 웃고 다니고, 혼자서 씩씩한 척이나 듬직한 척 다 하고 다녔지만, 이리저리 흔들려 홀씨가 몇 개 남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저 남자가 저렇게 미련없이 몸을 돌려 떠나는 것에도 괜한 허탈감이 고개를 들고, 사무치게 쓸쓸해지는 것이겠지. 형원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서 빠른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이 캐비닛 문에 걸려 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우스꽝스러웠다. 단정한 흰색 셔츠 위로 붉은 벨벳 재질의 조끼를 입은 꼴은 언제 봐도 적응되지 않았다. 저를 포함한 세 명이서 이 드넓은 실내에 있는 테이블들을 닦고, 그 위를 정리하고, 스테이지 위까지 청소하고 나면, 두 명은 홀에 남고 형원은 다시 주방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주방에서 메인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남자를 도와 과일을 썰거나 음식을 세팅해서 내놓는다. 가끔 홀이 바쁠 때는 형원이 직접 서빙 하는 일도 있었으나, 그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형원은 이곳에서 일하는 시간이면 매번 자신의 귀를 틀어 막고 싶다는 생각을 하거나, 차라리 자신의 귀가 멀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요란했다. 바깥에서 들리는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음악 소리도, 주방에서 칼을 든 채 시도때도 없이 음담패설과 상스러운 욕을 내뱉는 남자도. 이곳에서의 4 시간보다 공사장에서의 11 시간이 훨 낫다고 생각해 온 형원이었다.

깔끔하게 썰어 놓은 키위, 바나나, 멜론, 오렌지 같은 것들을 접시에 예쁘게 담아 내고서 홀에 있을 놈들을 부르는데 얼마나 바쁜 건지 대답이 없다. 형원은 오늘이 그 흔치 않은 날 중 하나인가 보다 생각하면서, 옆에서 인상을 찌푸리고 안주를 만드는 남자를 향해 ‘잠시 홀에 갔다 올게요.’ 하며 공손하게 말한다. 어차피 돌아오는 대답은 쌍욕일 것임을 알지만 저 성질머리에 대들었다가는 멀쩡히 집에 가긴 힘들 것이라 짐작한다. 형원은 자신의 귀에 꽂히는 살벌한 말들을 애써 한 귀로 애써 흘려보내고, 주방을 나서 주문서와 테이블 번호를 번갈아 확인한다. 자칫하다 손님과 부딪히거나, 이곳에서 일하는 덩치들과 부딪히기라도 한다면 저만 곤란해질 것이 뻔했기에 예민하게 주변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주문하신 과일 안주 나왔습니다. 맛있,”

“야, 이 새끼야. 뭔놈의 과일을 동남아 가서 직접 따 왔냐?”

이래서 홀에선 일 못 하겠다 하고 주방으로 들어왔던 거였는데. 형원은 자신의 앞에 이미 만취한 지 오래인 듯한 남자를 향해 애써 온화하게 웃어 보인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대체로 이런 상황에서는 둥글둥글하게 취객을 진정시키고 저만 빠지면 상황은 종료되곤 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이 도착하기 전부터 화가 나 있는 상태였던 건지, 아니면 정말 안주가 늦게 나온 것에 화가 난 건지, 욕지기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가만히 서서 약 2 분 동안 말 같지도 않은 말을 계속해서 듣고 있자니 슬슬 속에서 끓어 오르는데, 그게 숨겨 보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았나 보다.

“이 씨발, 야, 꼬와?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손님.”

남자가 낡은 소파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켜 형원의 멱살을 막 쥐려고 할 때였다. 형원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뺀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앞에 뻗친 팔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술에 취한 남자의 어깨를 한손으로 잡아내려 다시 자리에 앉힌 이는, 오늘 자신과 불을 나누었던 남자였다. 괜히 일이 커졌으나 마땅히 저가 할 일이 없어, 형원은 적잖이 당황한 눈을 하고서 제 옆에 선 남자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금방이라도 테이블을 엎어 버릴 것 같던 취객은 언제 그렇게 불같이 화를 냈었냐는 듯, 그저 입을 다물고 조용히 맥주를 잔에 따를 뿐이었다. 여전히 불량한 눈을 하고, 들리지도 않게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리면서.

기현은 형원에게 다시 주방에 가 있으라며 눈짓하고서, 형원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저런 악질의 취객은 저보다 약해 보이는 이가 혼자 있을 때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에 섣불리 형원을 혼자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홀 끄트머리에 있는 주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형원이 몸을 돌려 저보다 약간 작은 기현을 내려다본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저를 올려다 보는 눈에 형원의 괜한 기대가 다시 사그라든다.

“고맙습니다.”

“웬만하면 저런 인간들은 상대해 주지 마. 피곤해.”

“야, 유기현!”

형원이 마저 말을 꺼내려는데 주방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낯선 이름을 외친다. 그 소리에 형원의 앞에 있던 남자는 몸을 기울이더니, 표정을 밝히며 주방 안으로 들어선다. 남자의 밝은 얼굴에, 형원 자신도 모르게 제법 귀여운 얼굴이라 생각한다. 형원이 기현의 뒤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서자, 주방에 있던 남자는 뭐 하다 이제 들어오냐며 형원에게 또 험한 말을 내뱉는다.

“왜 애한테 뭐라 그래.”

“씨발, 나는 여기 짱박혀 있는데 저 새끼가 기어나가서 안 들어오잖아.”

“밖에 진상 새끼한테 걸렸더라.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적당히 해라, 인마.”

“븅신. 하기사, 그거 못 한다고 주방 들어온 새끼한테 무슨.”

형원은 싱크대에서 그릇들을 씻으면서, 온갖 소음 속에 기현의 목소리만을 귀에 담으려 애쓴다. 어차피 남자의 욕지기는 그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임이 뻔하기에 귀에 담을 필요조차 없었다. 저를 데려다 준 유기현이라는 남자는 저 개차반과 친분이 있는 건지, 주방에서 한참 동안 대화를 주고받고 나서야 자리를 떠났다.

대충 대화 내용은 그랬다. 개차반놈은 너랑 나랑 비슷하게 들어왔는데 왜 나는 여기 주방에 짱박혀 있고 너는 이리저리 작업 뛰러 다니냐며 신세 한탄을 했고, 유기현이라는 남자는 크게 맞장구를 쳐 주지도 않고 그저 개차반을 조용히 다독이기만 했다. 본인이 왜 이 다 쓰러져 가는 나이트 클럽의 주방에 짱박혀 있는 건지는 개차반 본인만 모르는 건가 싶었다. 일주일만 있어도 왜 여기 있는지 알겠던데.

형원은 설거지를 마무리하면서 유기현이라는 사람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말이 많은 것 같지도 않고, 함부로 감정을 내 보이지도 않는 듯한 남자에게 호기심이 생겨 버렸다. 형원은 주방에 걸린 시계를 슥 보고는, 당장이라도 음식물 쓰레기통에 던져 놓고 싶은 조끼를 벗으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하고서는 재빨리 주방을 벗어난다.

평소 같았다면 망설임 없이 이 건물을 벗어나 막차를 놓치지 않게 뛰어서라도 버스 정거장으로 향했을 형원이지만, 오늘은 평소답지 않게 건물 출구까지 느릿느릿하게 걸어 간다. 혹시나 유기현이라는 사람을 한 번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나가는 문까지 느리게 걸어 봐야 1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기에, 형원은 내심 아쉬운 마음을 담아 건물을 나가기 전에 내부를 한번 더 둘러본다.

아, 그래, 가야지. 못 보면 내일이라도 보겠지. 정신 차리자. 여기서 집까지 택시비가 얼만데, 네가 지금 버스 놓칠 걱정은 안 하고.

“조심히 가.”

형원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린다. 어디에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유기현이라는 남자는 바지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형원의 앞을 느리게 지나간다. 기현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형원의 코끝에 남자의 체향인지 향수 냄새인지 모를 기분 좋은 달큰한 향이 스친다. 순간 멍해지는 감각에, 저에게 잘 가라며 인사를 해 준 것이 꼭 환상이었던 것처럼, 미련없이 사라진 남자의 뒷모습을 찾다가 형원은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는 건물을 나선다.

주머니에서 구겨지다시피 접힌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 택시 기사에게 건네고, 한참 지나 오천 원권 1 장과 동전 몇 개를 거슬러 받고서야 택시에서 내린다. 가게에서 잠시 뜸을 들인 사이에 막차를 놓쳐 버린 것이 아쉽지도 않았다. 택시 안에서 도심의 불빛들을 보면서 형원이 생각한 것이라고는 ‘조심히 가’라는 네 글자뿐이었다. 누군가로부터 다정한 인사를 받은 게 얼마만인지도 가물가물했다. 그의 따뜻한 안부 인사도, 기분 좋은 향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도, 모두 한 겨울의 꿈만 같았다. 어쩌면 새벽에 마주친 사람도, 가게에서 만난 사람도 모두 꿈은 아닐까 하는 멍청한 생각도 해 본다. 그리고 형원은 온기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자신의 현관문 손잡이를 잡으면서, 그간 자신이 얼마나 일상에 지쳐 있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이런 작은 우연들에 금세 마음이 동해져 버린다니. 배려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사소한 행동들에 금세 마음이 쏠려 버린다니. 형원은 습하고 어두운 집에 들어서자마자 외투만 대충 바닥에 벗어 던져 놓고서 이불을 대충 펴고 그 위에 쓰러지듯이 누워 버린다.

아, 맞다. 보일러.

내일도 이 혹한기에 찬물로 씻어야 하는 거지 같은 인생이면서 설렘이 다 무슨 소용이겠냐. 내일은 꼭 일어나자마자 집주인에게 보일러를 고쳐 달라고 얘기하겠노라며 씁쓸한 혼잣말을 내뱉고서 잠에 든다.


지난 2 주가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형원은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려 꽤나 애를 썼더랬다. 우선 유기현이라는 남자의 성향을 알 수도 없었을 뿐더러, 정작 자신에게 연애는 커녕 누군가에게 마음을 쏟을 여유도 사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쓸쓸한 다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유기현이라는 사람과는 생각보다 자주 마주치곤 했으며, 간단하게 말을 섞는 시간들도 늘어났다.

저보다 나이가 한손 넘지 않게 많은 사람. 동네가 훤히 내다 보이는 이 건물의 옥상에 살고 있는 사람. 우연이 만들어 낸 그와 함께였던 순간들이 늘어갈수록 혹시나 하는 우스운 기대를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집주인이 드디어 보일러를 고쳐 준 덕분에 뜨끈한 물로 씻고 나온 형원은 출근 준비를 모두 마치고서 현관문을 열기 전에 작게 더운 숨을 내뱉는다.

설마 오늘도. 에이, 설마. 오늘 또 마주치면 내가,

한껏 마음을 다잡으며 현관문을 열고서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꼭 형원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저 멀리서 저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기현이 보인다. 형원은 건물 앞에 우두커니 서서 기현이 걸어오는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다가, 그가 제 앞에 가까이 다가와서 ‘출근?’ 하고 입을 떼고 나서야 형원은 말을 툭 내뱉는다.

“나 오늘 형 집 놀러가도 돼요?”

형원은 괜한 민망함에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한 대 입에 물고 시선을 돌리며 담배에 불을 붙인다. 붉게 타 들어 가는 담배가 꼭 제 속 같다고 생각한다. 혹시나 내가 집에 놀러가도 되냐 물은 걸로 부담스러워 하면 어떡하지. 형이 헤테로라서 날 밀어내면 어떡하지. 야, 아니야. 보통 좀 친한 사이면 집에 놀러 가고 그러잖아. 형이랑 말도 편하게 하는 사이면, 그 정도는 괜찮잖아. 그 정도는 욕심 좀 내도 되잖아.

“형원아, 나 불 좀.”

형원이 노심초사하며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맥락을 무시하고 내뱉어 버리는 기현의 말에 형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입에서 담배를 빼낼 생각도 못하고 다시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막 라이터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기현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형원은 그저 제 코앞에 다가와 턱을 치켜 들고 있는 기현의 두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기현의 시선은 모호했다. 그가 물고 있는 담배의 끝을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저를 보고 있는 건지, 긴가민가 하면서도 형원은 괜히 후자에 손을 들어 주고 싶은 것이다.

그런 녀석의 속을 알 리 없는 기현은 형원의 불을 자신이 물고 있는 담배로 옮겨 붙이고 나서, 첫 모금을 뱉어 내기 위해 시선을 떼어낸다. 형원의 표정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 수많은 사인들을 다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것은, 어차피 스스로도 감당 못할 마음인 게 뻔했으며, 그것은 형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넘겨 짚었기 때문일 것이다.

너랑 나랑 그렇게 돼서 좋을 게 뭐가 있겠어. 좋은 건 그저 잠시일 뿐이야. 결국엔 서로에게 짐만 될 뿐이지. 결국 서로의 삶에 지쳐버린 걸 서로를 탓하면서 그렇게 끝나게 될 게 뻔해.

“오늘은 좀 힘들겠는데.”

눈 앞에 자리한 나즈막한 담벼락에 적힌 낙서들을 눈에 담으면서, 기현은 애써 무심하게 말을 내뱉어 본다. 자신의 귓가로 형원의 아쉬움 섞인 탄식이 흘러 들어왔으나, 부러 더 깊게 들이 마신 담배 연기로 속을 어지럽히며 청각을 차단해 본다.

“알겠어요. 다음에 보면 되죠. 갔다 올게요, 형.”

‘갔다 올게요’ 라는 말에 기현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다. 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아주 간만에 들어 보는 인사였다. 저가 몸 담고 있는 곳에서는 그 누구도 쉽게 약속과도 같은 인사를 하지 않았다. 가면 가는 것이고, 오면 오는 것이다. 어떻게 갔다 오겠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을까. 별안간 시비가 붙어서 칼부림이 날 수도 있고, 길을 걷다가 사고가 날 수도 있는데.

기현은 형원의 인사를 곱씹으면서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라간다. ‘갔다 오겠다’ 라는 말은 듣는 사람의 기대감을 부추긴다. 지금의 기현이 그랬다. 어차피 자신이 그의 퇴근을 기다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잘 알고 있음에도, 매번 듣는 그 인사에 괜한 기대감이 생기는 것이었다.

기현은 옥상에 자리한 제 보금자리에 들어가기 전에 난간에 기대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문다. 형원을 마주치기 전에는 늘 여기서 담배를 태웠었는데, 녀석과 마주친 이후로는 줄곧 건물 앞에서 담배를 태우게 되는 것이다. 그것 또한 같은 것이었다. 늘 퇴근하고서 집에 가까워질 때면, 오늘도 네가 서 있을까 하는 우습지도 않은 기대를 하게 되는, 그런 것. 네가 먼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형, 내일 봐요.’ 하고 퇴근하니까. 기현은 담배를 태우다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본다. 여기서는 보이지도 않는 반지하, 그리고 거기서 잠을 청할 너. 그래, 그게 너와 나의 거리였다. 기현은 서서히 밝아 오는 하늘에 고개를 들었다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서 굳게 쳐진 커튼으로 인해 어둑한 자신의 집으로 들어간다.


기현은 보통 새벽 6 시쯤에 잠에 들어서 오후 1 시쯤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난다. 밖이 밝으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기 때문에 달아 놓은 커튼이지만, 그 마저도 빛을 완전히 차단하지 못하는 탓에 조만간 암막 커튼 하나 사야지 하고 생각하는 기현이다. 프레임도 없는 매트리스에서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키고 나면, 머리 맡에 놓인 담배갑을 집어다 한 대 빼어 문다. 패딩 점퍼를 대충 걸치면서 집을 나서고 자신만의 흡연 스팟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1 시가 지나면 골목에 사람들이 나다니기 시작한다. 한 손 가득 장 본 짐을 들고 돌아가는 파마 머리를 한 아줌마, 어슬렁거리며 골목 산책 중인 흰머리 지긋한 할아버지, 서로 꼭 붙어서 조잘조잘 수다 떨며 지나가는 할머니들, 이제 막 학교를 마친 건지 책가방을 메고 뛰어 가는 초등학생들. 기현은 평화로운 그 모습을 표정 없는 얼굴로 쳐다보다가 끝까지 다 타 들어 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다. 이렇게 한 대를 다 태울 때마다 매번 그냥 담배갑을 들고 나왔어야 했다며 속으로 후회하는 기현이다.

그런 날이 있다. 스스로가 이 평안에 잠식될 것 같은, 그런 기분 더러운 날. 기현은 깍지를 끼고서 팔을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켠다. 다시 집안으로 들어서서 매트리스 위로 몸을 누이자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집주인의 전화일 것이고, 그 내용은 월세 언제 낼 것이냐는 것이겠지. 기현은 전화가 끊길 때까지 휴대폰을 뒤집어 두고 있다가, 전화가 끊기자마자 은행 앱으로 들어가서 집주인의 계좌로 이번 달 월세를 송금하고서는 휴대폰을 바닥에 툭 던져 버린다. 메시지 알림이 온 것도 같은데, 출근할 때 확인해도 상관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냉장고를 뒤적거린다.

형원은 오늘치의 건설 현장 노동이 끝난 뒤에, 휴대폰을 들어 밀린 알림들을 확인하다가 자리에 멈춰 서서 얼마 전에 도착한 문자 메시지 내용을 확인한다.

[오늘 영업 안 하니까 나오지 마라]

형원은 잠시 오늘치 급여를 계산하다가, 오히려 잘 됐다 싶은 마음에 미련 없이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겠다, 불타는 금요일 저녁에 기분 더럽게 주방에 있는 개차반놈의 욕도 안 들어도 되니 오히려 기분은 좋았다.

그런 날이 있다. 생각지도 못한 평온함이 찾아오는, 그런 기분 좋은 날. 형원은 평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버스에 올랐고, 창가에 스쳐 지나가는 야경들을 보며 새삼 새해가 밝았음을 실감하다가, 버스에서 내리고서는 콧노래까지 불러 가며 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한참 오르막길을 걸어가던 형원이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저가 살고 있는 건물을 막 나서는 기현이 보인다. 기현은 걸음을 재촉하려다가, 저를 향해 볼록한 볼을 방싯거리면서 웃어 보이는 형원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늦춘다. 추위에 발갛게 상기된 녀석의 양 뺨과는 반대로 하얀 얼굴 위에 헝클어진 검은 머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형, 지금 출근해요?”

“어. 빨리 들어가. 춥다.”

“알겠어요. 형, 조심히 갔다 와요.”

저 인사말. 나를 압박하는 듯한 저 단어들. 내가 꼭 그러길 바란다는 듯한 말투. 기현은 인사를 마치고도 자신의 앞을 지키고 있는 형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더 헝클어트린다. 자신의 손짓에 맞춰 흔들리는 머리칼에 형원이 작게 눈을 찌푸리는 것까지 기현은 눈에 담는다.

“그래, 갔다 올게.”


그래, 꼭 그런 날이 있다. 평안에 잠식될 것 같은, 그런 기분 더러운 날.

요 근래 들어 조용하다 싶었다. 기현은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 문자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서는, 정해진 장소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봉고차에 올라탄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크게 긴장이 되는 건 아니었으나,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에 작게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조심히 갔다 오라는 네 말만 아니었어도 긴장 같은 건 하지 않았을 텐데.

기현은 발치에 채이는 연장들이 걸리적거려서 미간을 작게 찌푸리고서는 그것들 중 하나를 집어 든다. 저 같은 하급 조직원에게는 오히려 이런 깽판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야경들이 제법 정신없다고 생각하는 기현이다. 자신이 탄 차에 있는 이들 중, 운전석에 탄 남자와 조수석에 탄 남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모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새파랗게 어린 철부지 양아치놈들일 테니 당연했다. 저놈들이 대충 형원이랑 나이가 비슷할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자, 기현은 코로 깊게 숨을 내뱉으며 다시 화려한 네온사인이 즐비한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그래야 현장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이윽고 봉고차가 어둑한 골목에 멈춰 서고, 기현은 잔뜩 쫄아 있는 놈들에게 ‘챙겨서 나와’ 하며 한 마디 던지고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걸음을 옮긴다.

형원은 집에 도착하고 나서 노곤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간만에 따뜻한 물에 몸을 갖다 대고 있으니 그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하마터면 씻으면서 졸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면서 새 잠옷으로 갈아입고, 오랜만에 대청소를 시작한다.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모두 쏟아 붓고 세제를 넣은 뒤 동작 버튼을 누른다. 청소할 때 환기는 필수지, 하며 혼잣말까지 던지면서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바닥을 쓸고 닦은 뒤에, 다시 걸레를 빨고 집에 보이는 몇 안 되는 가구들 위에 쌓인 먼지를 모두 닦아 낸다. 먼지가 가득 묻은 걸레를 깨끗하게 빨아 널고, 잘 쓰지도 않는 주방으로 가서 상한 음식들을 추려서 버린 뒤 얼마 없는 식기를 차곡차곡 정리해 선반에 넣어 둔다.

간만에 깨끗해진 집을 둘러보다가 창가에 앉아 있는 고양이를 발견하고서는 밥그릇에 물을 받아 창가에 놓아주며 다음에는 고양이 캔이라도 몇 개 사다 놓아야지 생각하는 형원이다. 이불을 바닥에 깔아 놓고 그 위에 누워 휴대폰을 가지고 놀다가, 세탁기가 동작을 완전히 끝내고 나면 건조대에 축축한 옷가지들을 널어 놓는 것으로 청소를 끝낸다.

형원은 외투를 챙겨 입고 담배갑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집을 나서 계단을 올라간다. 이렇게 부지런히 청소를 하고 나서도 고작 9 시라는 게 괜시리 기분이 좋은 것이다. 형원은 막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말고, 자신의 뒤에 놓인 계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괜히 조심스럽게 그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라간다. 옥상과 가까워질수록 그의 공간에 들어선다는 생각이 뚜렷해져 은근한 긴장감이 피어 오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옥탑에 특별한 것은 없었다. 초록색 페인트가 칠해진 바닥과 벽, 자신의 허리보다 조금 더 높은 듯한 난간, 평상 하나 없이 휑한 공간 구석에 놓인 아령들, 그리고 굳게 잠겨 있을 것이 뻔한 도어락이 설치된 문. 그것들을 형원은 천천히 눈에 담다가 재떨이가 놓인 곳에 가서야 담배에 불을 붙인다.

아침에 기현에게서 들은 대답에 아쉬웠던 건 사실이었다. 추스리려 애썼던 마음이 추스려지지는 않았기에 이번 기회를 틈타 기현을 떠보고 싶기도 했고, 그냥 집에서의 기현은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고, 더 나아가서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 싶기도 했다.

형원은 축축한 자신의 머리를 괜히 헝클여 본다. 저를 보며 머리를 헝클이던 기현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 또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차라리 그 얼굴을 눈에 담았더라면 미련이 남진 않았을 텐데. 기현은 또 평소처럼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서 제게 인사를 해 줬을 텐데. 평소와 다른 그의 말들에 기대가 사그라들지 않는 것이다.

형원은 거의 다 타 들어 간 담배를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 놓고, 새 담배를 입에 물어 불을 옮겨 붙인다. 자신의 손가락 위로 새벽의 기현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도 하다. 선하다고 생각한 그 두 눈과 시선이 얽혔을 때 자신의 감정에 확신이 들었는데, 형은 정말 아무런 의도도 없었던 걸까. 그런 걸 아무 의도 없이 할 수가 있나. 형원은 멍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펼쳐진 도심의 야경을 눈에 담는다. 형원은 그제서야 기현이 보는 하늘과 자신이 보는 하늘이 달랐음을 인지하고, 자신이 드디어 그가 마주하는 하늘 아래 있음을 실감한다.

자신이 보는 하늘은 어둑하지만 이제 막 빛이 피어 오르려고 하는 것이었고, 기현이 보는 하늘은 형형색색의 화려한 빛이 수놓아져 있지만 곧 사그라들 칠흑의 그것이었다. 형원은 어느새 희미해진 자신의 담뱃불을 확인하고서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꺼 버린다. 내가 형의 세상에 들어갈 수 있을까. 형이 내 세상에 들어올 수 있을까. 우리 세상이 한데 뒤섞일 수는 있을까. 혼자서는 해답을 내놓을 수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다가 이내 담배 연기와 함께 사라진다.

기현은 터덜터덜 차로 돌아와서 트렁크에 자신이 챙겼던 연장을 던져 놓는다. 제 주변으로 고통에 신음하는 녀석들이 바닥에 주저 앉아 있거나 차에 기대어 있었고, 그들은 모두 구급차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기현은 자신의 머리를 대충 위로 쓸어 올리면서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었음을 알릴 실장의 목소리를 기다린다. 팔뚝이 욱신거리는 것도, 허벅지가 베인 것도, 입술이 터진 것도, 기현에게는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 아니었기에 해산 명령만 떨어진다면 곧장 집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우는 소리를 내는 녀석들을 비집고 지나가, 차에 기대 서서 담배를 하나 빼어 물고 불을 붙인다. 단숨에 피어오르는 라이터 불꽃 뒤로 은은하게 형원의 동그란 눈이 비쳤던 것 같기도 하다. 기현은 담배 끝을 향해 내리 깔아져 있던 시선을 올려 골목 끝으로 보이는 야경으로 시선을 옮긴다. 선명하던 야경이 이내 담배 연기 사이에 가려 새벽과도 같은 희뿌연 빛을 내다가 다시 선명해진다.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들이 마시고 내쉬면 그 언젠가 본 적이 있던 것 같은 늦은 저녁의 구름 낀 하늘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듯도 하다. 그렇게 한 대를 다 태워갈 즈음이 되어서야, 구급차가 도착하고 실장은 아픈 녀석들부터 챙기기 시작한다.

기현은 담배를 아스팔트 바닥 위로 내팽개치고서, 대충 먼저 가 보겠다 말을 던져 놓고서는 유유히 택시를 잡아 탄다. 택시 기사는 자신의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저를 흘끔거릴 생각인지, 룸미러를 통해 저를 계속해서 곁눈질하기에 간단히 으름장을 놓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택시비를 대충 건네 준 뒤 택시에서 내리고 나서야 온몸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돈다. 기현은 익숙하게 자신의 집을 향해 계단에 한 발 디뎠다가, 꼭 무언가에 이끌린 듯이, 무언가가 저를 잡아 당기는 듯한 기분이 들어 계단에 올려 뒀던 다리를 내리고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간다. 반지하에 위치한 한 개의 문 앞에서 잠시 서 있다가, 고개를 숙이고서 그 문을 두드린다. 이윽고 조심스럽게 열리는 문 뒤로 기분 좋은 비누향을 풍기는 형원이 보이고, 녀석은 웃는 얼굴이 아닌 짐짓 당황한 얼굴을 한 채 기현을 가만 바라보고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만 벙긋거렸다가 다물어 버린다.

그래, 이게 나야. 다른 녀석들과는 다른 눈을 하고서 나를 바라봤던 너는 내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겠지만, 이게 나야. 너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네가 이 꼴을 보고도 나한테 뭔가 바라는 듯한 눈을 할까 궁금해서. 그리고 할 말이 있어서.

“나 왔어.”

기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터진 입술을 당겨 올려 형원을 향해 선하게 웃어 보인다. 이만하면 충분히 조심히, 잘 갔다 온 것 같다고 스스로 생각해 본다. 형원은 잠시 당황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서는 기현을 자신의 집 안으로 끌어들인다.

“아, 이러려고 청소했던 건 아닌데.”

형원은 기현을 뒤로 하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다가, 신발장에 멍하니 서 있는 그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그제야 기현은 어색하게 신발을 벗고 형원의 공간에 발을 디딘다.

“기다려 봐요. 약이,”

“됐어. 불만 꺼 줘.”

기현은 어색해 하던 기색을 지우고, 그대로 방바닥 위에 대자로 뻗어 누워 버리고서는 눈을 감는다. 밝은 형광등 불빛이 감긴 눈꺼풀을 통과하는 게 느껴지다가, 이내 저를 배려하겠다는 듯이 그 불빛이 사그라든다. 아직도 자신의 주변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형원의 맨발바닥 소리가 신경 쓰여 기현은 피식 웃으면서 손을 휘적거린다.

“안 졸리냐? 그냥 자.”

자신의 머리맡으로 아까보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들린다. 자박거리며 맨발이 장판에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자신의 옆으로 이불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다가 잠잠해지면서 좁은 공간이 정적에 휩싸인다. 그 정적은 먼저 깬 것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연 형원이었다.

“…그,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예요?”

“그렇다 치자.”

“…형.”

“왜.”

“근데 왜 우리 집으로 왔어요?”

“인사하려고.”

“인사?”

“네가 조심히 갔다 오라며.”

“에?”

“그래서 왔다고 인사하려고 했는데.”

“와…. 형 되게 섬세하네, 보기보다.”

“뭐, 그런 건 아니고.”

고요하게 이어지던 대화가 잠시 끊기자, 형원은 곤히 눈을 감고 있는 기현을 실눈으로 슬쩍 쳐다봤다가 결심한 듯이 눈을 감고 말을 이어 갔고, 기현은 이어지는 형원의 말에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떠 올린다.

“형, 진짜 내가 조심히 갔다 오라고 해서 온 거예요?”

“응.”

“왜요?”

“갔다 오라며.”

“그럼 내 생각 나서 온 거 맞죠, 형?”

형원은 되돌아오는 답이 없는 것에 답답해서, 번쩍 눈을 뜨고는 고개를 돌렸다가 기현과 눈이 마주친다. 언제부터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는지도, 두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형원은 빠르게 뛰는 심장에 맞춰 괜히 가빠오는 숨을 가다듬으면서, 다시 천천히 되묻는다.

“…내 생각 나서 왔어요?”

“응.”

기현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형원이 고개를 돌리자 기현이 나지막이 입을 연다. 나는 너처럼 열심히 살 생각도 없었다. 삶에 미련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네게 섞여 들어가면서 이 지긋지긋한 삶에 조금이라도 애착을 가져 보려고 해. 이런 나를 견딜 수 있을까, 네가. 너와 내가 섞일 수 있을까.

“너는, 괜찮겠어?”

“네?”

“오늘 봤잖아.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아까 늦은 저녁에 했던 그 물음들을 형원은 다시 끄집어내 본다.

내가 형의 세상에 들어갈 수 있을까. 형이 내 세상에 들어올 수 있을까. 우리 세상이 한데 뒤섞일 수는 있을까.

“괜찮아요.”

형원은 다시 고개를 기현 쪽으로 돌리고서, 방바닥 위에 얌전히 놓인 기현의 손을 가만히 바라본다. 누구와 나누기에도 버거운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손을 잡고 나아 간다면 그나마 버틸 만하지 않을까. 그렇게 함께 나아가다 보면 어느덧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지 않을까.

“손잡아도 돼요?”

기현은 다시 눈을 감으면서 팔을 뻗어 형원의 손을 쥔다. 제 손보다 크고 마디가 굵은 손이 제 손을 굳게 맞잡아 온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서로의 온기를 느끼면서, 둘은 간만에 편안한 긴 밤을 유영한다. 창밖으로는 그간의 버석했던 겨울을 위로라도 해 주듯, 뒤늦은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자. 그냥 너랑 나, 둘만 생각하자.

서두르지도 말자. 그저 서서히 서로에게 스며들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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