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24)

028. 반 헬

록하트 산맥은 거대하니 마음 먹고 숨어들면 그들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었다.

"인간의 삶은 이제 끝났어. 뒤돌아봐도 돌아갈 수 없어."

"흐윽... 흡...!"

"인간의 삶은 모두 잊고 이제부터는 괴이로써 살아가도록 해."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프리실라가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 모습이 아이린과 닮아 설핏 웃음이 지어졌다.

"아무리 엿 같아도 살아. 프리실라. 그게 널 이런 구렁텅이로 처박은 신에게, 이것 밖에 못하냐고 비웃는 인생이 될 테니까."

내뱉어 놓고도 손 끝이 움찔거렸다.

이건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일까,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일까?

"...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네 동생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부스러진 모래 사이에서 작은 통신 아티펙트가 반짝였다.

'프리실라 언니!"

아티펙트를 통해 들렸던 아이린의 마지막 목소리가 떠올랐다.

'언젠가는 네 동생도 다시...'

그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것을 챙겨 들었다. 아티펙트에 담긴 마지막 음성을 동아줄 삼아 부서져 흐트러진 마음을 추슬렀다.

까맣고 징그러운 오물들은 그녀에게 맡긴 채 프리실라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그녀라면 카일이 모든 죗값을 치르고 나서도 끔찍한 고통 속에 살게 해줄 것만 같아서. 거칠게 난동 부리던 살의가 위로 받는 것 마냥 서서히 가라앉았다.

"... 마님... 부탁드릴게 있어요..."

"네가 원한다면 아이린은 우리가 맡기로 하지."

괴이로 인해 연고 없는 고아를 맡아 주는 것 역시 '플리티나'에서 하는 일이니까.

아이린을 데리고 간다는 말에 안심이 된 모양인지 프리실라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 안엔 작지만 어딘가 후련한 감정 또한 담겨있었다.

그녀는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동생에게 전해줄 말이 있나?"

전해줄 말. 어쩌면 마지막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말. 프리실라가 저도 모르게 작게 실소했다.

"... 마님, 제가 말씀드렸던가요?"

엉망이 된 드레스와 이마에 한줄기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조차 눈이 멀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프리실라는 입을 열었다.

"마님... 진짜 예뻐요."

이레시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와아. 언니 진짜 예쁘다.'

아이린이 처음 그녀를 보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누가 자매 아니랄까 봐.

"인간이 아닌 것처럼 예뻐요."

"인간이 아니니까."

"... 그럴 것 같았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당신이라는 분께는 이기지 못할 것 같았거든요.

"... 잘 부탁드릴게요."

프리실라가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작별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제는 얼굴에 연민의 흔적들을 지워내고 단호한 눈빛으로 둘을 응시했다.

"가. 한 번이라도 멈추어 뒤돌아보는 순간, 목을 칠 테니까."

자비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말투에도 프리실라는 그녀를 향해 마지막으로 깊게 고개를 숙였다. 노쇠한 메두사 역시 마찬가지로 길게 인사를 전한 뒤 함께 뒤돌았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광산의 저 끝을 향해서 티파의 마지막 메두사들이 녹아들었다.

그녀의 눈으로도 더 이상 어둠 속의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이레시아는 긴 시간 동안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녀의 등 뒤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다가올 때까지.

"여전히 멋대로군."

이레시아는 천천히 몸을 돌려 늑대를 올려다봤다.

"다 잡은 물고기를 놓아줬다고 이를 건가?"

그녀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늑대는 불만이 가득하다 못해 심기 불편한 얼굴이었지만 섣불리 그렇다고 대답하지는 못했다.

그 역시 이 상황에서 그녀가 내린 판단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혹시나 프리실라가 다시 인간들을 습격한다면 어쩔 셈이지?"

"그럴 거라고 생각해?"

늑대는 이번에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프리실라의 복수는 끝났어. 카일이 그 마지막 대상자인 거고."

복수의 칼을 그녀에게 넘기고 떠났으니 이제 더는 인간을 헤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아이린의 마지막 목소리가 담긴 아티펙트를 챙겨갔으니 더욱 그러겠지.

뭐가 됐든, 이제 다시는 볼 일 없는 여자다.

"우리가 할 일은 끝났어. 나머진 저 남자를 추궁해서 가짜 '현자의 돌'의 위치를 알아내면 되는 일이야."

그는 눈매 좁히고 진의를 파악할 생각으로 이레시아를 예리하게 뜯어보았다. 그의 손이 이마에서부터 흘러 볼을 타고 내려온 피를 닦아냈다.

"너는, 처음부터 그 여자를 구할 생각이었나?"

"글쎄... 어떨까."

그녀는 말을 흐리며 그의 눈을 올려다봤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판단 아닌가? 아니면 그녀가 어쩌든 간에 목을 자르고, 그 꼬맹이에게 내가 네 언니의 목을 쳤다고 말해줬어야 했나?"

아이린을 언급하자 늑대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그걸 원하는 거면 지금이라도 가서 그 꼬맹이의 남은 혈육들을 도륙하고."

"... 아이린에게는 뭐라고 설명할 셈이지?"

"글쎄."

제 피가 묻은 그의 손을 붙잡으며 이레시아가 중얼거렸다. 그런 거까지 내가 신경 쓸 필요 있나?

"어련히 자기랑 히아가 알아서 하겠지."

그나저나,

"이번에는 내 말을 잘 듣던데."

절대로 프리실라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는 명령.

프리실라의 목에 겨눈 검을 치웠을 때는 혹시나 늑대가 달려들면 어쩌나 조금 걱정도 됐는데...

"내 늑대에게도 조금은 인내심이란 게 생겼나 해서 얼마나 대견하던지."

붉게 빼든 혀가 그의 엄지손가락에 묻은 제 피를 핥아 올렸다.

"대견하거든 상을 줄 것이지 이건 뭐 하는 짓이지?"

늑대가 인상을 찌푸렸다. 흐음, 안 넘어오네?

"아까워서."

지금 좀 어지럽기도 하고.

이레시아가 샐쭉하게 웃으며 그의 뺨 위에 손을 얹었다. 얌전한 개처럼 늑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게 조금 귀엽게 보여서 붉은 눈이 휘어졌다.

이제 정말 쉬어야겠다. 억눌러둔 굶주림이 엄한걸 먹어 치우려 들기 전에.

"돌아가자. 늑대씨."

"벌써들 돌아가면 섭섭하지."

"?!"

둘 사이를 난데없이 끼어드는 목소리에 이레시아와 늑대가 흠칫 놀라 전광석화처럼 뒤돌았다.

"내 계획을 잘도 여기까지 망가트렸네?"

카일이 쓰러진 옆에 하얀 로브를 쓴 인영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있던 거지? 아니, 그것보다...

인기척을 느낄 새도 없이 나타난 남자를 보며 늑대는 온몸이 오싹거림을 느꼈다. 마치 그의 생존 본능이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평범한 괴이 역시 아니었다.

그리고 같은 것을 느낀 것인지 이레시아 역시 남자를 매섭게 노려봤다. 이렇게 가까운 지척의 거리인데도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느슨하게 늘어트렸던 신경줄이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 옷차림새... 네가 사제인가?"

사제라고?

늑대가 눈앞의 남자를 뜯어보았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어떻게 봐도 십 대 중반을 갓 넘은 것처럼 작았다. 그러자 사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인간 주제에 훑어보지 마, 재수 없게."

"?!"

사제가 손가락을 부딪히자 늑대의 왼쪽 관자놀이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늑대씨?!"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뺀 늑대는 피가 줄줄 흐르는 눈을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큭...!"

"오? 생각보다 빠르네?"

피라미가 아니었어?

사제가 조금 의외라는 눈을 했다. 늑대가 당장이라도 씹어 죽일 얼굴로 노려봤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한쪽 눈이 날아갈 뻔했다.

"너 이 자식..."

"아, 미안.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사제가 두 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리며 항복 표시를 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내가 꽤나 공을 들인 일이었다고. 내 집에 있는 실험체들도 모조리 태워버리고, 더군다나 반지까지 가지고 가게 하다니. 내가 그거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 반지?"

"그래. 록하트를 조각내서 만든 귀한 반지란 말이야."

프리실라를 인간의 모습으로 바꾸어주는 그 반지를 말하는 듯싶었다.

"그러니 결국... 티파의 안 주인을 죽이고 록하트를 훔친 건 역시 너라는 소리군."

"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 그걸로 재밌는 일을 한번 해보려고 했는데, 잠시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설마하니 그 여자가 가짜 '현자의 돌'이 가진 힘에 동화해 버릴 줄이야. 사제가 질식할 것 같은 살기를 흘리며 카일을 향해 물었다.

"내가 분명 네 아랫도리를 어떻게 놀릴지는 상관 없으니, 제대로 숨통이 끊어진 시체들만 유기하라고 했을 텐데."

하여간, 머저리 같은 인간.

"사, 살려ㅈ...... 아아아악!!!"

쉬이이익...!

사제가 독을 잔뜩 품은 눈으로 중얼거리자 카일이 육체가 순식간에 녹아 내렸다. 듣기에도 끔찍한 비명소리가 광산 안을 울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카일의 몸은 고약한 냄새를 뿜는 액체가 되어 옷가지를 빼고 흘러내렸다.

마치 고름에 절어있는 시체를 농축해놓은 것만 같은 악취가 흘렀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아서 늑대는 턱이 아프도록 이를 악물었다.

카일은 검붉은 빛의 걸쭉한 슬라임처럼 꾸물꾸물 서로 한데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한순간에 인간이었던 것이 괴물로 변모했다. 히아센이 조사했다던 그 괴기한 모든 소문이 사실이었다. 늑대와 이레시아가 긴장감에 몸을 바짝 굳혔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가서 그 돌연변이 여자를 끌고 와. 재밌는 실험체를 이대로 놓칠 수야 없지."

사제는 검붉은 액체를 향해 명령했다. 그러자 꾸물텅 소리를 내며 그것이 프리실라가 사라진 방향으로 움직였다.

안돼.

이레시아의 얼굴에 다급함이 번졌다.

"Egnis(이그니스)...!"

이레시아가 그것의 앞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광산 안에 거대한 불기둥이 솟구쳤다. 그러나 사나운 불기둥 속에서도 그것은 타오르는 기색 하나 없이 꿈틀거렸다.

"... 통하지 않아?"

이레시아가 당황한 기색으로 뒤로 물러섰다. 평범한 키메라 따위가 아닌 모양이었다.

"어라..."

사제가 턱에 긁적거렸다. 하얀 로브 속에 가려진 눈이 좁혀들었다.

"인간이 아니구나! 너."

"... 그러는 너도 마찬가지이지 않나?"

"음... 어디서 만난 적 있나, 우리?"

"너 같은 꼬맹이를 내가 어디서 봤겠어."

이레시아가 방금 전 사용한 마력으로 다시 바르르 떨리는 손을 주먹 쥐며 신랄하게 대답했다.

"이상하다. 분명 낯이 익은 냄새가 나는데, 너무 희미해서 잘 모르겠단 말이야..."

사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 이름은... 음... 그래. 반 헬이야."

"... 반 헬?"

"네 이름은?"

"..........."

이레시아가 살의를 가득 담은 눈으로 사제를 노려봤다. 혹여나 공격해 올 것을 대비해 남아있는 마력을 바닥까지 끌어모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흠, 알려줄 생각이 없구나?"

사제의 몸이 공중으로 가볍게 떠올랐다.

"뭐, 상관없겠지. 나를 계속 방해할 생각이면 또 만날 테니까. 내가 급한 일이 있어서 여기 오래 있기가 힘들거든."

사제가 키득거리며 이레시아와 늑대를 번갈아 쳐다봤다.

"내가 만든 현자의 돌은 걱정하지 마. 여기서 실패했으니 다른 곳에서 유용하게 써먹어야지."

아무쪼록 잘 살아남아서 다시 봐.

사제는 그 말을 끝으로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사라지자 마자 이레시아는 입을 틀어막고 참고 있던 핏덩이를 토해냈다.

"우욱?!"

"이레시아!"

이레시아는 저릿거리는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여전히 꾸물텅 거리고 있는 붉은 것을 응시했다.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저것이 프리실라의 뒤를 쫓게 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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