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25)

029. 우상의 황혼(The Twilight of the Idols)

이레시아는 이제는 위장이 쥐어뜯기는 것 같은 고통에 잠시 숨을 골랐다.

평범한 슬라임 같은 하등 괴이가 아니였다. 표면이 어떤걸로 뒤덮인 지는 몰라도 닿는 것은 모조리 녹이려 드는 것 같았다.

적어도 집 한 두 채는 부숴버릴 파괴력을 가진 이그니스도 통하지 않았다.

저것도 현자의 돌의 힘인가? 그렇다면 아예 흔적조차 남지 않도록 날려버리는 건 어떨까.

"콜록...!"

이레시아가 잔기침과 함께 다시 한번 피를 뱉어냈다.

어차피 사제가 현자의 돌을 가지고 떠났고, 메두사들은 죽었으니 더는 그녀가 신경 쓸 일은 없었다.

저 붉은 슬라임이 마지막 남은 두 메두사를 먹어 치운다면 조금은 어정쩡한 뒤처리가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왜 나는 갈등하고 있지?

... 아, 그래.

뿌득. 이가 갈렸다.

신을 모시는 사제가 신인 척 멋대로 인간을 괴이로 바꾸고, 그 죽음에는 무관심한 게 화가 나서였다.

그 남자가 정말 사제는 아닐 테지만.

그 여자의 삶을 빼앗고 죽음 속에 살게 하는 자태에 화가 나서, 그 죽음 속에서라도 살라고 말했건만. 그 조차 빼앗는다는 말에 화가 나서였다.

하여간 성가신 여자. 죽음의 앞에서 죽지 못하고 살아 돌아와 산지옥을 걷는 그 자태가 자꾸만 눈에 밟혀서... 네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지.

살기 위해서 계속해서 이 지옥 속에서 발버둥 치는 자신처럼 그 여자도...

"내가 아까 뭐라고 충고했더라..."

아무리 엿 같아도 살라고. 그게 널 이런 구렁텅이로 처박은 신에게 이것 밖에 못하냐고 비웃는 인생이 될 거라고, 했던가? 하, 웃겨. 누가 누구에게 충고를 해? 나부터도...

"그러지 못해서 아등바등하고 있는 것을..."

입가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하지만 그래. 그렇게 잘난 척 충고를 던져줬는데.

"... 다 떠넘기라고 해놓고서, 저런 것에 습격 받게 하는 건 너무 모양 빠지는 일이잖아."

화아아아악!!!

그녀의 주변으로 살갗을 태우는 것 같은 커다란 검은 바람이 일렁거렸다.

"이레시아?! 멈춰!"

남은 것 이상의 마력을 태워내는 이레시아를 보고 늑대가 답지 않게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귓가가 뜨거운걸 보니 이미 고막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아가 흐려지는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봤다.

이거, 천장이 조금 무너지는 정도로는 안 끝날 것 같은데. 늑대씨가 어련히 잘 하려나?

그래. 아직 그는 충분히 힘이 남아있을 테니까 괜찮겠지.

나는 뭐... 조금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테니까. 이레시아의 주변의 바람이 강하게 불어닥쳤다. 붉은 주술진이 열리며 허공을 찢어발기듯 사정 없이 수식이 터져 나왔다. 날아갈 것 같은 풍압에 늑대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무어라 그가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더는 들리지 않았다.

들어봤자 잔소리일 테니 어쩌면 듣지 못하게 된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붉은 입술이 뒤이어 느릿하게 달싹였다.

[8급 광역 물리 공격 주문 - 우상의 황혼(The Twilight of the Idols)]

얼마 남지 않았던 마력이 모조리 뽑혀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더는 짜낼 마력이 없다는 듯 심장이 쪼그라드는 고통이 느껴졌다.

[마력이 부족합니다. 수식을 재 정렬합니다.

마력이 부족합니다. 수식을 재 정렬합니다.

마력이 부족합니다. 수식을 재 정렬합니다.

.

.

.

강화 수식 : 확인]

수식의 향연이 어지럽게 이어졌다. 그러다 마침내 생명력을 대가로 억지로 짜낸 수식의 끝에 불씨가 붙었다.

"...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What doesn't kill me makes me stronger)."

그러니까 이건, 그녀가 지금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 마법이었다. 지금 몸 상태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컨디션이 조금 더 좋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이 정도면 뭐. 저 키메라 한 마리와 광산 하나 쯤이야 어렵지 않게 망가트려 주겠지.

"메르세데스(Mercedes)."

손 끝에서 정신 없이 수식들이 피었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멍청한 이레시아.

모양이 빠지건 말건, 그냥 죽게 내버려 둬도 될 텐데. 머리는 그렇게 말하는데 몸은 그러지를 못하나보다.

이러다가 제 명에 못 살지.

아, 이미 몇 십번이나 제 명에 못 살았구나, 나...

이레시아가 저도 모르게 실소하며 마지막 수식어를 내뱉었다.

[블레이저...!!!]

심장이 뽑혀 나가는 통증과 함께 거대한 마력을 압축시킨 섬광이 손끝에서 터져나갔다.

그녀 주위의 거대한 바람이 폭발하면서 긴 머리칼이 흩날렸다.

콰과과과광!!!!!!!

광산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와 함께 이레시아의 의식은 거기서 끊어졌다.

+++++

"... 황혼."

노을 속에서 자신을 몇번이나 난도질해서 죽인 그녀의 신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노을을 등 진 탓에 얼굴이 까맣게 그늘져 있었다. 그럼에도 입가에 지어진 미소에 눈이 박혔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도 하지. 알고 있니?"

그 물음에 자신이 무어라 대답했는지는 기억 나지 않았다. 그러나 딱히 중요하지 않다는 듯 그녀의 신은 노을 속에 사그라드는 태양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노을을 썩 좋아하지 않는단다, 아가."

꿀을 발라 놓은 듯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머리칼을 꼭 닮은 속눈썹이 보였다. 마치 태양과 같다 하여 금색의 왕이라고 불리우는 그녀의 왕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거든. 아, 금색의 왕이 저무는구나... 하고."

언젠가처럼 바람에 실타래처럼 흩날리는 금발을 올려다봤다. 마주치는 시선에 그녀의 신은 사르르 미소 지었다.

"그러니 네게... 이 황혼과 닮은 재밌는 수식 하나를 알려줄까 해."

... 당신은 태양과 같다 했으면서, 왜 내게는 그런 태양을 집어삼키는 황혼을 말하는 건지 물었다. 그녀의 왕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로 또 다시 웃었다. 분명 단 한 줄도 읽을 수 없는 속내였는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알아차렸더라면, 우리의 끝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

온갖 상처를 단 채 늑대는 무너진 광산을 뒤로 하고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몇번을 그 욕지거리를 뱉은 건지 모르겠다.

멍청한 여자.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레시아는 눈을 뜨지 않았다. 얼음장처럼 체온이 계속 떨어지고 숨소리는 끊어질 듯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허튼짓을 못하게 더 단단하게 말렸어야 했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는 것을 봤을 때부터 말렸어야 했는데, 그 작은 머리통으로 제 생명을 갉아먹는 짓을 하고 있을 줄이야.

"커헉...!"

"큭."

또 다시 간헐적으로 피를 토해내자 늑대가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살폈다. 그렇게 피를 뱉어내고도 또 뱉을 피가 있는 건지.

"멍청한! 그러니까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고통이란 걸 모르는 건가?

이런식으로 계속 한계를 넘나들다가는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언젠가 회복도 하지 못할 정도로 힘을 써버리고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는 이들을 수두룩하게 봐왔다. 그리고 늑대는 그걸 절대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죽이는 게 아닌 이상, 다른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다른 건 절대...

"... 내가 용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고통에 잠식당해 열이 오를 붉은 눈이 가늘게 떨렸다. 거대한 한기와 영혼까지 먹어 치울 것 같은 집착이 이레시아를 둘러싸고 있었다.

"넌 아직, 아무것도 내게 증명한 게 없어."

왜 네게 그 여자와 같은 냄새가 나는지, 왜 하필이면 그 여자와 똑같은 선녀의 샘으로 떨어졌는지.

"넌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다고."

그런데도 이렇게 허무하게 죽겠다니.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걸 알지만,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목에서 긁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설마,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

"... 죽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

죽기 직전의 나비처럼 파르르 눈꺼풀이 떨리더니 다시 붉은 눈이 숨어들었다. 안겨 있는 몸이 시체처럼 차가웠다.

쿵... 쿵...

심장이 불쾌하게 뛰었다. 죽었나? 아니, 이렇게 쉽게 죽을 여자가 아니지.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지. 자신의 손에 죽는 게 아닌 이상, 다른 건 절대...

늑대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는 어느새 칠흑 같이 거대한 문 앞에 서 있었다. 두꺼운 쇠사슬로 몇 십겹이나 칭칭 묶인 문틈 사이로 붉은 안개가 사납게 비집고 나오려 들었다.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듯 발버둥 치고 있었다.

이윽코 그의 손이 굳게 닫힌 빗장 위에 닿았다.

우우우웅...!!

걸어잠궜던 거대한 댐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이레시아를 닮은 붉은 마력이 그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바닥을 드러낸 이레시아의 몸에 마력을 막 채워 넣으려는 순간.

끼이익. 쿵...!

열렸던 댐의 문이 다시 거칠게 닫히며, 거대한 힘이 다시 늑대의 심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의 손 위로 차디찬 손이 맞닿았다. 죽은 듯 닫혀있던 속눈썹이 다시 열린 것도 그때였다. 피로 얼룩진 입술이 소리도 내뱉지 못한 채 작게 달싹였다.

"... 하, 지마..."

그는 심장이 어디론가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그런 것을 바라보듯 늑대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 절...... 대, 로..."

"........................"

"... 용서, 안... 할 거니까......"

마자 구명줄을 붙잡는 것처럼 잡혀버린 손을 내려다보며 늑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기분이 돼버렸다.

누가... 누굴 용서 안 한다는 건지.

정말이지, 사람 속 뒤집어 놓는 데는 일가견 있는 여자였다.

+++++

플라티나의 지하 1층.

넓은 공터 위의 워프가 번쩍 빛을 냈다. 늑대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잔디 위를 걸었다. 그가 걷는 자리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자국을 남겼다.

"... 드디어 죽었어?"

공터 한쪽에서 들리는 휘파람 소리에 늑대가 걸음을 멈추었다. 넘실거리는 살의를 품은 눈으로 늑대가 뒤돌았다. 그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남자가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유랑."

"우와, 지독한 꼴이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그와 똑같이 생긴 쌍둥이 동생의 시종일관 웃는 낯짝이 보였다.

유랑 세이노 아벨록트.

금색으로 얼룩진 눈 빼고는 거울처럼 똑같이 생긴 그의 쌍둥이 동생이었다.

"... 템페스토는?"

"뭐야, 그 여자 살리게?"

그대로 가만 두면 진짜 죽어버릴 것 같긴 하지만.

플라티나의 치료사를 찾는 물음에 유랑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냥 죽게 두지? 너 그 여자 싫어하잖아."

"만드라고라 해부실에 있나?"

"어? 너도 들었어? 그 미친놈 요새 만드라고라 능지처참하잖아. 문밖으로 끼에엑! 하고 소리 소리가 아주...... 어? 야!"

제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돌아서 가버리는 그를 유랑이 불러세웠다. 그러나 그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더는 돌아보지 않았다. 유랑의 얼굴 가득 짜증이 뒤섞였다.

"나 아직 말 안 끝났거든? 야, 형!"

".............."

"아씨! 야! 그냥 죽게 놔두라고!!"

유랑이 씩씩거리면서 소리쳤다.

"어차피 언젠간 죽여버릴 괴물을 왜 그렇게 싸고도는데?!"

"... 언제 죽일지는 내가 정해."

단지 오늘이 그날이 아닐 뿐이었다.

"아니 시발! 어차피 죽일 거 언제 뒤지던...! 야!!"

등 뒤에서 한참을 유랑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게 들렸다. 늑대는 공터를 지나 템페스토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로 들어섰다.

템페스토의 방에 가까워질수록 이상하리만큼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맞닿은 몸이 내뱉는 실낱같은 숨결이 끊어질까 봐 내딛는 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그와 동시에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마치 바닥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 속이 좋지 않았다. 만약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숨이 붙어있다고 해도... 이번에야말로 정말 손 써볼 새도 없이 죽어버리면...?

이미 새하얗게 질리다 못해 창백하게 변해버린 안색에 심장이 계속해서 엉망으로 뛰었다.

"일어나."

음울한 눈이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 내 손으로 죽여버리기 전에 죽으면, 안 되는 일이잖아."

"이 미친 새끼가 뭐라는 거야?!"

그때 별안간 벼락 같은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손이 늑대의 머리통을 가격했다. 뒤통수에 얼얼한 통증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웬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새빨개진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템페스토."

템페스토 이클라이엠.

플라티나의 치료사인 그는 어디서 들은 것인지는 몰라도 줄곧 늑대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던 모양이었다.

"부상자를 안고 있으면 빨리빨리 튀어올 것이지 세월아 네월아! 죽일 셈이냐 진짜?!"

보라색 머리칼이 잔뜩 헝클어진 템페스토가 늑대의 팔을 질질 끌었다. 방으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만드라고라가 접시 위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옆에는 포크와 나이프가 나뒹굴었다.

"키에에......."

소리를 지르는 만드라고라의 위로 돔 커버를 덮어버린 템페스토가 어지러운 방안을 뒤적였다.

"일단 거기 침대에 눕혀!"

템페스토가 청진기와 비커 사이에 굴러다니는 물약들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늑대는 이레시아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저 새끼가 정신 못 차리지?

템페스토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늑대의 목으로 날카로운 매스를 들이밀며 템페스토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이레시아 내려 놓으라고, 이 개자식아."

템페스토가 이레시아를 든 손을 거칠게 떼어내 침대 위로 눕혔다.

마력 보충제를 섞은 링거를 손목에 연결하고 가위로 피범벅이 된 옷을 잘라냈다. 템페스토가 까맣게 변해버린 팔목을 보고 혀를 찼다.

"도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거냐?"

발목은 또 왜 이래? 낫다 말았어.

템페스토는 식염수로 상처 부위를 닦아냈다. 늑대는 멍하니 서서 그것을 쳐다봤다. 그게 못내 신경에 거슬렸다. 이레시아도 이레시아지만, 그 역시 여기저기 중상을 달고 있는 환자 꼴이었다.

"야, 병균! 꼴도 보기 싫으니까 씻고 오든가 해!"

템페스토가 늑대에게 수건을 집어던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템페스토가 결국에는 폭발한 표정으로 늑대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 멍청한 늑대 자식이.

"내 말 안 들려?"

이레시아도 이레시아지만, 늑대 역시 상처가 작지 않았다.

"살려줄 테니까, 그딴 얼굴 하지 말고 씻고 오라고."

이 여자보다 니 송장 먼저 치우기는 싫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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