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늑대(1)

030. 아무 때나 키스 하려 들지 말랬지.

한숨을 쉬며 템페스토는 의자에 앉았다. 다행히 체온이 더 이상 떨어지는 건 어찌어찌 막았지만. 마력 보충제, 기력 회복제를 줄줄이 달고 누워있는 여자는 하루가 다 지나도록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처음에 봤을 때는 어디서 시체를 주워온 줄 알았다. 온몸은 얼음장 같고, 마력은 거의 남아있지도 않아서 숨만 겨우 붙어서는.

요새 좀 잠잠하나 했더니만 또 이렇게 반 시체 꼴로 올 줄이야. 하지만 생각해보면 뭐, 별수 없나? 이 여자 앞으로 들어오는 의뢰들이 좀 까다로운 것들이어야지.

"이러다 사람 잡는다니까."

물론 그녀가 사람은 아니지만. 피가 모자라면 수혈을 하면 되는 일이고, 심장의 마력이 고갈 나면 마력을 들이부으면 그만인 것을. 눈앞의 여자에게는 어느 것 하나 먹히는 것이 없었다.

"도대체가 뭐 얼마나 대단한 비밀을 숨기고 있길래, 목숨이 간당간당해도 눈 하나 끔뻑 안 하는지."

당장에라도 이 비밀 많은 여자의 심장에 마력을 콸콸 들이붓고 싶어졌다. 그럼 눈에 띄게 상태가 좋아질 텐데.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살려야 하는 내 입장도 좀 생각해 달라고.

"내가 인간을 살리는 의사지, 괴의 살리는 의사가 아니라니까."

물론 조금 괴짜라는 소리는 듣지만. 그나저나...

머리칼을 꼭 닮은 보랏빛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너무 예쁘게 생겨서 진짜 섬뜩하네."

이런 인형이 있었다면 종일 쳐다봐도 질리지 않을 텐데. 이렇게 생긴 여자가 웃고, 떠드는걸 가장 가까이서 보는 느낌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이런 여자를 혼자서만 독점하려 드는 늑대가 조금 얄미울 정도로. 어디까지나 그녀가 인간이었을 때의 가정이지만 말이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템페스토에게 괴이는 실험용 쥐 그 이상, 이하도 아니였다.

늑대만 아니였다면 진즉에 실컷 해부해보고 박제라도 시켜뒀을 텐데.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양념 만드라고라처럼 말이다.

템페스토가 입맛을 다시며 만드라고라가 담긴 접시를 쳐다봤다. 간장에 넣어 숙성시킨 살아있는 만드라고라를 흰 쌀밥과 함께 먹으면 그렇게 맛있다던데.

"...... 배고파..."

"그러니까 말이야. 나도 배고프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내 팔자에도 없는...... 응?

템페스토가 화들짝 놀라서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언제 깨어난 건지 모를 여자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니, 잠깐! 너...!"

벌써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런 몸 상태로 도저히...

템페스토가 당황한 얼굴로 팔을 뻗었다. 그러자 별안간 오싹거리는 한기와 함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검은 머리칼 사이에서 번뜩이는 붉은 눈과 마주했다.

하아아아...

마치 누군가 귓가에 대고 한숨을 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몸 전체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온몸에 뱀이 기는 것 같은 환각이 보였다. 순식간에 몸을 타고 올라온 뱀이 기다란 혀를 내밀어 그의 목덜미를 핥아 내리는 것 같았다. 식은땀이 등 뒤를 훅 적셨다.

"아... 이런..."

그래, 벌써 일어날 리가 없다 했는데. 섬찟한 환각에서 깨어난 템페스로가 식은땀을 흘리며 제게 엉겨 붙는 여자를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바라봤다. 풀려버린 동공에 이성이라고는 한 자락도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 깨어나기도 전에 본능이 먼저 굶주림에 움직이려는 모양이었다.

"굶주린 건 알겠는데, 이건 좀 위험한데 아가씨..."

당장에라도 한입에 삼켜버리고 싶을 만큼 달큰한 향이 퍼졌다. 저도 모르게 목뒤로 침이 넘어갔다. 템페스토가 곤란한 표정으로 눈길을 돌렸다. 예쁜 아가씨가 저돌적이기까지, 이 자식 이거 괜찮은가 몰라.

뻣뻣한 손에 겨우 주사기가 잡혔다.

"... 내가 이래 봬도 남의 것은... 건드리지 말자는 주의거든?"

특히나 당신과 루시안은 절대로.

이레시아의 몸이 움찔 떨렸다. 링거줄로 주사기가 꼽혀 들어간 까닭이었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끈 떨어진 인형처럼 몸이 축 늘어졌다.

"아가씨, 빨리 정신 차려."

다시 잠의 수렁에 빠진 그녀를 내려다보며 템페스토가 못내 입맛을 다셨다.

"아니면 너, 내 방에서 계속 못 나가."

이렇게 가녀리고, 아름다운 게 옆에 있는 건 참 곤란했다. 진심으로 그녀를 박제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전에 어서 정신을 차려주면 좋을 텐데.

+++++

"지금 장난해?"

... 진짜 죽여버릴까?

루시안이 이번 티파의 도시 건에 대한 보고서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히아센은 어쩐지 등 뒤로 삐질 땀이 흐르는 기분으로 주위를 살폈다.

루시안, 히아센, 가브리엘, 유랑, 기타 몇 명의 간부들이 둘러싼 테이블 맨 끝에는 늑대가 앉아 있었다.

티파의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의 간부 회의 때문이었다.

그 사이에서 늑대는 심드렁하게 앉아 있었다.

"그 난리를 피워놓고 정말 보고서가 이게 다라고?"

"메두사는 섬멸, 가짜 현자의 돌은 실종. 그게 다인데 뭐가 이렇게 오래 걸리지?"

"메두사를 섬멸했으면 그걸로 끝일 것이지, 광산은 왜 반파를 만들어 놨는지를 설명하란 말이야! 티파의 영주가 얼마나 노발대발하고 있는 줄 알아?! 그 광산에서 나오는 광물이 얼만데!!"

"하이스턴 왕가의 재산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라고 하던가?"

"지랄하지 말고. 누가 너한테 왕가 재산 설명하랬어? 고작 메두사를 잡는데 섬광이 말이 돼? 누구 미쳐 돌아가는 꼴 보려고 그래? 시발, 아주 그냥 광산 하나가 아니라 도시 전체를 날려버리지 그랬냐?!"

결국 루시안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딴 불친절하고 대충 대충인 보고서가 세상에 어디 있어! 간부 자리에서 잘리고 싶어서 작정했지?"

"... 뭐가 됐든 메두사만 없애면 된 일 아닌가?"

늑대가 결국 삐딱하게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나보고 뭘 더 어쩌란 건지.

"가짜 현자의 돌은 도대체 뭐야 그럼?"

"어떤 미친 사제가 현자의 돌을 만들려고 미쳐 날뛰고 있는 모양인데, 놓쳤어."

예의 그 붉은 머리 남자를 떠올리자 늑대의 얼굴이 구겨졌다.

"잘한다, 잘해. 니 관자놀이에 구멍도 그 사제가 냈디?"

답지 않게 이마에 커다란 상처를 달고 있는 늑대를 보며 루시안이 비아냥거렸다.

"어. 아파. 그래서 나 좀 쉬어야겠어."

"아프긴 개뿔이..."

늑대가 뻔뻔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안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쫓았다. 아니, 잠깐...

"야! 진짜 간다고? 아니, 저 미친 놈! 야! 아직 안 끝났어...!!!"

뒤에서 소리를 지르던 말던 늑대는 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루시안은 기가 차다 못해 황당해서 입만 뻐끔거렸다. 옆에서 짐짓 유랑이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내버려 둬, 루시안. 쟤 아프대."

"지랄, 아프긴 개뿔! 지나가는 개가 웃는 소리 그만 지껄여!"

그리고 그만 좀 웃어! 안 그래도 둘이 똑같이 생겨가지고!

루시안이 유랑에게 성질을 냈다. 난장판에, 개판에,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플라티나의 간부 회의가 늘 이렇지 뭐. 항상 육두문자를 내뱉으면서 화를 내기 바쁜 루시안과 사람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늑대, 맨날 실실 웃으며 깽판 칠 궁리만 엿보는 유랑. 그리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로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는 간부들. 역시 언더(Under)에 더 이상의 미래는 없어. 히아센이 눈치를 슬슬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루시안. 쥐 새끼가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데."

"히아센 반 루베르토."

히아센이 움찔거리며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하여간 유랑 저 악마 같은...

"회의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딜 내빼려고?"

루시안이 도도한 고양이처럼 다리를 꼬며 그를 불러세웠다. 불길한 예감에 히아센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나, 난 몰라! 난 마님이 시키는 대로 잠깐 보모 일을 한 게 다란 말이야!"

"누가 뭐래?"

루시안이 구겨진 서류를 도로 집어 들며 물었다.

"쥰 말고, 같이 데려온 꼬마는 누구야?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아이린 오르테즈?"

"할아버지는 광산에서 실종됐고, 언니도..."

루시안이 고개를 들자 히아센이 반대로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숙였다.

"같이 실종됐어. 광산에서..."

"흐음..."

그렇단 말이지? 루시안이 눈을 가늘게 뜨자 등 뒤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혹여나 이레시아가 메두사를 살려준 것도 모자라, 그 둘을 살리기 위해 광산을 무너트렸다는 걸 알면 보나 마나 또 처벌을 받을게 불 보듯 뻔했다.

어쩌면 또 지하 감옥에 구금될지도 모르지.

벌써 3일 내내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그런 곳에 갇히게 둘 수는 없었다.

게다가 프리실라의 이야기가 세간에 알려진다면 아이린은...

"땀은 왜 그렇게 흘리는데?"

"어어? 나, 시선 공포증이 있어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는 자식이 무슨 놈의 시선 공포증.

루시안의 눈썹이 크게 한번 꿈틀거렸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늑대의 말마따나 현장에 다시 파견된 조사단 역시 메두사는 더 이상 없는 걸로 결론 지어졌고, 사실 그보다 중요한 건.

"사제에 대한 보고나 이어서 해봐."

도대체 어떤 놈이길래, 플라티나가 자랑하는 비밀 병기를 저런 식으로 앓아눕게 했는지 들어 봐야 했다.

"나도 자세한 건 아직 몰라. 그 보고서에 적힌 대로 이곳저곳에서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 밖에는..."

"생김새는?"

"붉은 머리에 십 대 중반의 남자라고 들었어."

"십 대 중반?"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가 일순 좁혀졌다.

"... 인간이야?"

"아니."

그 여자가 섬광까지 사용한 건 그 때문이었군. 조금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또 다른 건?"

"자기 이름이 '반 헬'이라고..."

가명인게 분명하지만. 히아센이 입수한 사제 세례 목록에는 이런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루시안이 쿡쿡 쑤셔오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계속 신경 쓰이네. 테레사와 클레어라...

"히아센, 쌍둥이 여신의 신전에 대해서는 계속 알아봐."

"안 그래도 그러고 있어. 진전은 없지만..."

끝나지 않는 철야 생각에 히아센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러나 루시안은 시종일관 무심한 표정이었다.

어쩌겠어. 네가 철야면 나도 철야인 것을.

"유랑 너는,.."

루시안이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불쑥 왔다. 반사적으로 루시안이 손을 들어 입술을 가로막았다. 날카로운 고양이 같은 눈매가 더 매서워졌다.

제발.

"아무 때나 키스 하려 들지 말랬지."

지금 회의 중인 거 안 보여?

"빨리 끝내. 나 심심해."

입술을 가로막은 손 위로 유랑이 우물거렸다. 진짜 질린다는 얼굴로 루시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니 형이 개판 5분 전으로 만들어놓고 나간 회의에서 너까지 이렇게 개판으로 굴 거야?"

"늑대는 원래 갯과 동물이야."

"아니까 닥쳐. 알고 싶지 않았어도 알게 돼버렸으니까 제발 좀 닥쳐."

안다구?

유랑의 눈이 반달처럼 휘면서 샐쭉 웃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루시안의 눈이 꿈틀거리기도 전에 입술을 가로막은 손이 치워졌다. 채 몸을 피하기도 전에 그가 덮쳐들었다.

놀란 루시안이 파드득 떨며 그를 밀어내려 어깨에 손을 올리자 유랑이 그녀의 목과 허리를 끌어안았다.

"하아."

간부들 사이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들 하나둘씩 서류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브리엘 역시 묵묵히 서류를 챙겨 들고는 묵례를 한번 하고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늑대도 미친 놈이지만, 유랑도 못지않은 미친 놈이었다. 저 쌍둥이의 눈에 띈 두 여자가 불쌍해질 정도로.

그리고 역시 이 회의는 개판이야. 히아센이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더니 다시 슬금슬금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신이 도망칠 기회를 줬을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빼는 게 상책이었다.

+++++

"하아..."

성에 찰 때까지 헤집어대던 입술이 떨어진 건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아까보다 더욱 강한 힘으로 가슴팍을 밀어내는 손에, 그가 이번엔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는 게 맞는 표현일 테지만.

색색 거리는 호흡을 내몰아 쉬며 루시안이 유랑을 노려보았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거칠게 닦아냈다.

"이, 이 미친 개새끼가...?!!"

이미 손안에서 구겨질 대로 구겨진 서류뭉치를 그에게 집어던졌다. 회의 시간 그 30분을 못 기다리고 결국 이따위로 굴어?!

루시안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부글거리는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유랑은 납작 기는 자세로 루시안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윽.

"당장 안 떨어질래?!"

제 품에 얼굴을 묻고 꼼짝도 안 하는 유랑의 머리칼을 줴뜯으며 루시안이 윽박질렀다. 떼어내려 할수록 허리를 옥죄는 힘이 점점 강해졌다. 저도 제가 잘못한 줄은 아는지 죽어도 고개는 들지 않은 채.

결국 점점 옥죄는 힘에 숨쉬기도 힘들어지자 루시안이 헐떡거리는 호흡을 정리하며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시발. 아니 시발. 욕하지 말자. 욕하지 말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내리누르며 루시안이 자기 최면을 걸었다.

의자에 앉아 등치는 산만한 남자를 품에 안고 있으니 커다란 늑대 한 마리를 들쳐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아, 늑대 부족이지 참.

정신 차리자. 나는 태생이 귀족 중에서도 혈통 좋은 고위 귀족이고, 이 새끼는.

"... 시발 새끼야."

루시안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안 되겠다. 도저히 좋은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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