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루디가 안드레이 앞에서 처음으로 금발로 돌아왔을 때.
내가 처음 볼 적부터 여태까지 그녀는 푸른색 머리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끔 일 덕에 머리색이 바뀌는 일이 있긴 했다만 며칠 뒤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었던데다, 푸른색이 제 원래 머리색처럼 잘 어울렸기에 크게 신경을 쓴 적은 없었다. 물빛처럼 짙고 아름다운 푸른색은 어딘가 신비한 느낌을 주기도 했으므로 이제는 그 푸른색마저 그녀의 일부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사람의 머리카락에선 푸른색이 나올 수 없으니 원래 머리 색은 따로 있겠지 싶으면서도 궁금해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녀를 애정했고,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녀의 외관은 꽤나 특별한 편이었다. 왼 뺨 위로 길게 그어진 상흔이 그러했다. 물론 나는 그녀가 자기 스스로 경멸하는 그 흉조차 사랑했다. 그 흉진 자리를 바라볼 때마다 그녀의 불행했을 옛 시절들이 안쓰러웠다. 모든 시간의 그녀를 보듬어주고 싶어주고 싶을 정도로. 그럼에도 그것이 싫진 않았다. 그럼에도 살았다는 흔적처럼 보여 되려 마음에 든 편이었다. 어쩌면 이미 세상을 떠난 옛 연인을 겹쳐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매번 그런 생각을 애써 밀어내며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렇게 마음 깊이 애정하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만 내버려 둘 수 있을까. ... 내심 부정할 순 없겠지만서도, 반짝이는 취옥빛 눈동자를 애써 마주보며 사근히 미소지어 보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마음 가득히 찬 사람을 다시 떠나보내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 외모가 꽤나 많이 달라져 있었다.
백금색 머리카락과 아직 모습이 다 지워지진 않았지만 한결 희미해진 흉터. 날 보며 사근히 미소짓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 심장이 순간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 사라진 줄 알았던 기억이 가슴 한구석에서 되살아난다. 그녀에겐 마음 가득히 미안할 뿐이다. 자신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사랑스러운 여인은 나를 보며 어떤 경멸의 표정을 지을까.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참아 보려는 시도도 않은 채로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품에 쏙 들어오는 따스함에 무너져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분명 그녀인데도 내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심장이 미친 듯 고동치고 불규칙한 숨이 새어나온다. 그녀만큼은 내게서 떠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슨 일이에요?"
"..."
"... 안 어울려요?"
"아닐세,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있자고, 뒷말을 삼키며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하는 채로 울먹이기만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말에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아무 일도 아니다. 아무 일도 아니어야만 했다. 살포시 팔을 둘러 등을 토닥이고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마다 눈물이 울컥이며 새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어깨로 완전히 묻었다. 그녀에게 이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보면 죽고 싶어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 이 따스한 체온으로 다른 이를 떠올리는 것은 죄악이었으니 빨리 억눌러야만 했다. 사실은 꽤나 혼란스러웠다. 상처가 깊은 줄은 알았다만 이렇게나 아물지도 않고 있었나.
"떠나지 말아주게..."
통증에 새어나오는 신음처럼 말을 뱉었다. 애원이었다. 그렇게나 애정하고 있었다. 내심 나를 떠나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번엔 정말 무너져내릴 것 같아. 그녀가 간절했다. 그 마음 가득한 애정과 따스한 다정을 원했고, 그녀가 나를 바라봐주며 생글 미소지어주길 바랬다.
떠나지 말아달라느니, 사랑한다느니 하는 말들을 몇 번이고 뱉었다. 이젠 손끝이 덜덜 떨려 옷자락을 겨우 붙잡는 것이 전부일 지경이었다.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이제 그녀는 내게서 떠나버리겠지. 이 죄악은 이미 들켰을 것이 분명했으니.
"떠나지 않아요."
그녀는 나를 품에 폭 안고선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리 속삭였다. 찰나 귓가를 간지럽힌 말이었지만 가슴 깊이 남았다. 이 품이 내게는 구원이구나. 그럼에도 내 곁에 있어 주겠다는 건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것일까, 온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뜻일까. 그녀는 이제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선, 눈가를 손끝으로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그럼에도 울컥이며 새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괜찮다는 듯 생글거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괜찮다고, 사랑한다고 몇 번이고 안심시키듯 말해주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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