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보존림, 셔우드

4. 배낭 가득히 담아놓은,

- 공방 내부.

“그 정도는 좀 도와주셨어야죠. 그걸 그냥 모른 척하고 도망치셨다고요?”

도망쳤다기보다는 피했다는 말이 맞겠구나, 쉘비. 주문서를 정리하던 모르가나가 ‘그러고도 보호자냐’며 불만을 표했지만, 셔우드는 그렇게 대꾸한 채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도톰한 나무판을 둥그스름한 팔각형으로 다듬는 데에만 집중했다. 귤색 머리카락에 가려지지 않은 왼쪽 눈은 어느새 슬쩍 감아버린 채로. 그러면서도 창밖을 향해 몸을 완전히 돌리고 서 있던 탓에, 안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에 휘말린 톱밥이 창문을 바라보는 자리에 앉아있던 모르가나에게도 약간 날아갔다. 모르가나는 투덜거리며 조금 더 옆으로 의자를 옮겼다. 한결 덜하다고 생각할 무렵, 거센 바람이 들이닥쳐 탁자 위에 고이 놓여있던 도안하며 그 위에 걸쳐진 연필, 모르가나가 잠시 내려놓았던 주문서 몇 장, 귀퉁이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구겨진 종이의 산까지 모두 벽 쪽으로 날려버렸다.

여전히 무언가를 지켜보는 듯 창밖만 바라보던 셔우드는 구겨진 종이가 굴러가는 소리를 듣고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잡으려던 도안과 연필이 날아간 탓에 짜증이 나 들고 있던 도장을 내던진 모르가나도 보았고. 내던진 도장을 다시 주워 든 모르가나는 인내심을 상실했는지 더 많은 불만을 표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날아가는 것 중 손에 닿는 것만 잡아서 있어야 할 자리로 도로 모아두고, 나머지는 나중에 주워 담으려는 모양인지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냥 선을 연결해 주던가, 아니면 스마트폰을 사주던가 하자고요.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자료조사를 서적만 가지고 다 해요? 심지어 앱타티니윤 학생이? 사장님 시대에 비해서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데… 아니, 또 눈 피하시네.”

“굳이 그걸 그렇게 상기시켜야만 했나.”

“상기시켜야지, 그럼 어쩔까요? 옛날 옛적 그 시절처럼 낡은 책 하나하나 뒤져가며 일일이 필사할까요?”

“이쪽은 구시대적인 삶을 선호해서 말이다.”

“구시대적, 그래요. 구시대적인 삶도 나쁘지는 않죠. 그런데 요즘 세상은 검색하면 온갖 자료가 쏟아져 나오는 곳이거든요. 그런데 굳이 그렇게 해야 할까요? 굳이? 진짜로?”

책도 나쁘지는 않잖나. 다듬어진 부분에 자잘하게 들러붙은 톱밥에 약한 바람을 불러와 멀리 날리며 그는 대꾸했다. 누가 썼는지도 모를, 실재하지 않는 글보다는 차라리 눈에 확실하게 보이고 실재하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고도 덧붙이며. 모르가나는 그런 그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래서 은둔 생활 중이고 오래 묵은 영적 종족들이란. 도무지 시대의 흐름에 발 맞출 줄 모른다니까. 말해봤자 제대로 듣지는 않을 테니 크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고, 대신 모래시계의 몸통이 될 각진 유리 부분만 열심히 닦았다. 광이 나다 못해 아예 거울이 될 지경까지 박박 문질러서. 그렇게 한동안을 말없이 닦음질만 하다가 또다시 불만이 생겼는지 고개를 비스듬히 들고 다시 입을 뗐다.

“아니면 차라리 제가 데리고 나가서 전화기를 하나씩 사주면 되겠네요. 비용은 제 월급으로 넣어주시고, 인터넷 선이랑 안테나 같은 건 아담이랑 제가 열심히 설치해보면 될 거고. 어때요?”

“들여오기도 힘들고, 설치를 한다고 꼭 작동한다는 법은 없단다.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려봐라. 아마 3년 전이었지 싶은데.”

“여기 처음 왔을 때잖아요. 그걸 제가 잘도 기억하겠네요. 평균 수명 100년 이하를 기준으로 좀 생각을 하고 말해주세요, 평균 수명 100년 이하를 기준으로.”

“그건 네 기억력이……. 그래, 다음부터는 노력해 보마.”

“제발 지금부터 좀 하시라고요. 그래서, 그때 제가 뭐라고 했기에 지금 다시 꺼내오시는 거예요?”

“‘사회랑 동떨어진 곳이라 그런가, 현대 문물이랑은 담을 쌓고 지내셨나 보다.’였지.”

“아니, 제가요? 언제요? 기억이 안 나는데.”

“요즘 세상에 신호가 안 잡히는 곳이 어디 있나, 바로 여기구나, 대체 언제적 사람이신가, 라고도 했단다.”

“생판 처음 들어보는 소리인데, 그다음에는요.”

“‘이래서 오래된 영적 종족들은’으로 시작해서 ‘이해가 안 된다니까.’로 끝났고, 아담이 반파된… 통신용이었나, 뭔지 모를 새 기계를 지붕에서 도로 주워들고 내려왔었다. 그리고 조용해졌지.”

좀 듣다 보니 기억이 좀 나는 것도 같네요.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쓰잘데기 없는 얘기였네요. 그래, 고맙다. 태세 변환이 제법 빠르구나. 본래 목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대화가 제대로 해결된 듯, 실상은 그렇지 못 한 채로 일단락되는 동안 어느새 가는 넝쿨이 떨어지고 날아간 것들을 주워 모아 탁자 위에 올려두고서 금세 시들어 사라졌다. 늘었던 일거리가 다시 줄어들어 모르가나는 내심 기뻐했다. 그러고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지만.

“그래서 그건 그거고, 제 말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 제법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전화기는 굳이 여기가 아니더라도 밖에서는 잘 돌아갈 거고요.”

“그래. 괜찮은 생각인 건 맞으니 나중에 본인들에게 직접 물어봐라. 필요한지.”

“나중에, 언제요.”

언젠가. 셔우드는 그리 대꾸하며 창문에서 등을 돌렸고, 나무판 안쪽에 마찬가지로 둥그스름한 팔각형 테두리 모양의 홈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언젠가는은 또 무슨 언젠가요. 모르가나의 물음에 당장 답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결국 작업 막바지에 대답할 테니 피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저 행동 하나에 집중하기 위해 미루는 것일까. 모르가나는 끝없는 답답함을 해결하고자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장 찍은 주문서는 오른편에, 아닌 것은 왼편에. 인주는 적당한 곳에 놓아두고 방금 닦은 유리는 조심스럽게 내려둔 뒤 기지개를 짧게 켰다. 그 잠깐에 아마 셔우드가 조금 전까지 지켜봤을, 창 저 너머에 새로이 생겨난 그림자가 유독 선명한 생김새로 다가오고 있었다.

얼굴 전체를 가린 웃는 표정의 특이한 격자무늬 가면, 어깨너머로 늘어뜨린 보랏빛 띤 길고 검은 머리칼, 바깥 계절에는 맞겠지만 숲에는 맞지 않는 두꺼운 겉옷, 그리고 그 사이로 얼핏 보이는 검은 예복과 어깨에 들쳐 맨 커다란 배낭. 모르가나 뿐만 아니라 이 공방과 깊이 엮인 사람은 모두 아는 그 사람이 손을 흔들었다. 모르가나도 얼떨결에 손을 흔들었다. 다시 창문을 바라보고 선 셔우드는 손 대신 숲속 모든 나무의 가지를 살며시 흔들었다. 그 흔들림에 맞춰서 가면은 가지에 걸려 멀리 날아가버렸고. 날아간 가면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그는 체념했는지 겉옷까지 벗어들었고. 녹색 한복판, 겉옷 속에 숨어있던 검은 예복에 수놓인 은색과 제비꽃 빛깔 자수가 햇살을 받아 반들거리는 그 모습이 제법 이질적인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겉옷과 함께 벗었던 배낭은 무슨 이유에선지 머리 위에 올린 채, 창문으로 들어오려다가.

“문으로 들어와라.”

“소요되는 시간 및 이동 거리를 대조한 결과, 창문을 거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인 이동경로라고 판단됩니다.”

“아니, 문 옆에 내려놓고 와라.”

“유감입니다.”

“나도 유감이군. 일단 가서… 그래, 잘한다.”

창가에 선 셔우드에게 제지당한 탓에 옆으로 빙 돌아 똑바로 된 문으로 가야만 했다. 아담이 대체 어째서인지 게걸음으로 창가에서 멀어지자마자 셔우드는 뒤돌아보았다. 셋, 둘, 하나. 녹색 왼눈을 깜빡일 때마다 들리는 발소리. 깜빡이는 것이 멈춘 그때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녀왔습니다, 공방장님.”

“그래. 수고 많았다.”

“안녕, 아담. 이번엔 좀 어땠어요?”

“제법 유쾌한 편이라고 판단됩니다. 이전에 비하여 계획한 바와 오차가 적었으며, 초기 목표이던 물품 또한 모두 확보하였으니 더욱이 그러하지요.”

“보통은 어느 지역은 어땠고, 다른 어디는 어땠다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그리고 난 그걸 물은 게 아닌데.”

“그냥 넘어가라, 쉘비. 하루이틀 일이 아니잖나.”

아니, 사장이랑 직장 선배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쌍으로 무뚝뚝해서야 원. 이래서 제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지금 하고 있잖나. 그렇다고 도장만 줄곧 찍지는 말고. 누가 들으면 제가 도장만 찍는 줄 알겠네요? 홈을 판 나무판을 조금씩, 더 둥그스름하게 다듬던 셔우드와 가벼운 말싸움을 벌이려 하는 모르가나를 지나, 아담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머리 위에 비뚤게 얹힌 배낭은 기울어진 방향을 따라 툭 굴러떨어지다가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에 아담의 손에 잡혀 천천히 내려왔다. 그랬음에도 둥그런 가방이 바닥에 내려앉자 바닥이 살짝 들썩였다.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약간 들린 것도 같지만 그런 느낌만 들고는 끝이었다.

"문 옆에 내려두고 오라고 말했을 텐데."

"특정 대상을 지칭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님이기에 공방 내의 문 전체 중 가장 근접한 하나를 임의로 선택하였습니다."

"또 이쪽의 잘못인가."

"다음번에는 특정하여 지시하여 주십시오."

와, 말 진짜 잘한다. 주문서를 적당히 솎아내던 모르가나는 뒤에서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아담도 슬쩍 엄지를 들어올렸고. 셔우드만이 못마땅하게 그들을 바라보다가 한숨만 내쉬며 창문을 다시 열었다. 무언가로 눌러두지 않았던 주문서의 절반은 다시 열린 공방 문을 지나 날아가 버렸다.

날아가는 것을 허망하게 바라보던 모르가나는, 도로 붙잡으러 냅다 뛰쳐나갔다. 구두굽 소리 아래에 얼핏 공허한 분노의 외침이 섞인 것 같지만 기분 탓이리라 믿기로 했다. 저런. 셔우드는 그리 중얼거리면서 창문 반쪽을 도로 닫았다. 그러기엔 이미 조금 늦은 듯 하지만서도.

얼굴을 여러 차례 갈기며 멀리 날아가려는 주문서를 한 손으로 붙들며, 아담은 남는 손으로 배낭을 풀었다. 가장 위쪽에 쌓아둔 가볍거나 중요한 것들부터 차례로 척척 꺼내서는 한편에 차곡차곡 쌓아 올려 제 키만한 탑을 여럿 세우려는 듯이. 기름 자국이 드문드문 퍼진 바스락대는 얇고 큰 종이봉투와 비닐 포장지에 싸인 견과류와 다 으스러진 도넛 상자나 틴 케이스에 가득한 티백이며 쿠키 따위부터, 어느 시골 동네 장터에서 샀다는 보드라운 토끼와 사막여우와 오리너구리 봉제인형을 근처에 대강 내려두고, 그 옆에 시집과 터무니없는 제목의 소설과 그다지 신빙성이 없어 보이는 잡지와 언제 발표되었는지 모를 학술 서적을 산처럼 쌓은 뒤에는 그 위에 꽃씨 봉투를 착착 올려두고. 심지어는 제 팔뚝 길이의 묘목 세 그루를 배낭 옆에서 슥 뽑아 들고는, 한 뼘이 더 자랐다는 둥 중얼거리는 소리를 해 다듬은 표면을 털어내던 셔우드가 눈을 돌리게 했다.

뭐가 가방 안에서 자랐다고? 주목 묘목입니다, 학명으로는 아마 Taxus cuspi- 그건 그다지 궁금하지 않아. 그게 가방 안에서 자랄 수가 있던가. 보시다시피 가능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아직은 확인된 바가 없어 변수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말을 말자. 알겠습니다. ……그래라. 단호하게 끊기는 말의 연속에 잠시 반짝이는가 싶던 레몬빛 눈에서 광채가 넌지시 가셨다.

탁자에서 좀 떨어진 바닥 어딘가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묘목 화분은 유독 파릇한 것과 그저 그런 것과 시들한 것으로 총 세 그루였다. 다른 것들의 생기까지 홀로 모조리 빨아먹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도록 파릇한 한 그루를 더 옆으로 밀어두고 다시 가방을 뒤지는 아담을 바라보던 셔우드는 더 이상 말을 않기로 마음먹었는지, 그저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담은 그러거나 말거나, 종이 몇 뭉치를 내려놓자마자 자기 팔 길이와 길이가 같은 상자 서너개를 더 끄집어내고, 무엇이 들어있는지- 또는 가둬놓았는지조차 도무지 알 수 없는 커다란 천 주머니를 다섯 개나 더 끌어내고, 도로시가 봤다면 누가 이런 걸 사냐며 말을 줄일만한 특이한 물건들 여럿을- 예시를 약간 들어보자면, 생선구이나 둥글고 붉게 잘 구운 새우구이 따위와 아주 똑같이 생긴 베개며 조립할 수 있는 내장 모양 지우개 같은 해괴망측한 것- 죽 나열했다. 묘목을 꺼내던 때부터 줄곧 늘어나는 물건을 죽 훑어만 보던 셔우드는 참 괴이쩍다는 말만 남기고 등을 돌려 나무판에 둥근 홈을 내기 시작했다.

시선이 사라진 것을 눈치채자, 그런 틈을 타 잠시 주위를 살피던 아담이 홀쭉해진 배낭에서 상자 하나를 끌어냈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슬며시. 그러고선 그것을 조심스레 쌓인 물건들 뒤편에 세워 감춰두고선 가방을 들고 밖으로 갔다. 빈 가방을 뒤집었을 텐데도 아주 요란한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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