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독증 단편

FILM

善希愛 by 선희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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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종종 있기는 했다. 눈을 감았다 뜨면 학교에 앉아있었다. 어느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벚꽃, 시원한 바람 한 줄기, 낭만에 가득 찬 청춘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성적표나 시험이 삶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나마 낭만이라고 할 수 있는 건 그날 나올 점심 식단 정도였는데, 그렇다고 이 삶이 특출나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대한민국에서 학생으로 살아보았다면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지 생각했다.

또 눈을 감았다 뜨면 이번에는 노을이 지는 하굣길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그 풍경이 막 아름답게 느껴지진 않았고, 피곤이라도 털어낼 수 있을까 내쉬어본 큰 한숨에 작은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게, '아, 겨울이 왔구나' 생각하고 말았다. 매일 반복되는 풍경에서 새롭게 내뱉어볼 수 있는 감상이야 계절의 변화가 전부였으니까.

이대로면 눈이 올까,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뜨면 이번엔 불 꺼진 작은 고시원 안이다. 책상이나 침대를 포함한 몇 가지 가구를 겨우 들여놓을 수 있는 공간만이 나에게 주어졌었다. 오늘 늦게 잠들면 내일 하루 피곤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눈을 감고 한참 기다리는 짓은 하기 싫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련한 마음가짐이었다. 머리맡에 있던 휴대폰을 들어 전원을 키면 세상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얀 네모 뿐인데, 조금 기다리면 눈이 적응하며 검은 문장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자면 빗길 추돌 사고를 알리는 뉴스나, 어느 정치가의 비리, 인근에서 소규모 단체 실종 사건이 발생했다는 미스터리. 그따위 영양가 없는 소식들.

딱히 삶에 의욕이랄 건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우울한 건 아니었다. 그냥 남들보다 조금 더 침체되어있는 상태로, 감정이나 상념 따위를 흘려보내며 지낼 뿐이었다. 그러니 기억에 남는 일이랄 건 손에 꼽을 만큼 일어났고, 그건 일반적으로 시간이 무척 느리면서 빠르게 흘러감을 의미했다.

이렇게 몇 번 눈을 감았다 뜨면 내 삶이 변화할까? 글쎄.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새벽 기운을 담아 태어났던 의문도 그저 그렇게 흘려보내고 눈을 감았던 것 같다.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기억이 얼마나 흐려졌을지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어느 봄날의 일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반짝이는 폭죽 가루가 눈앞을 괴롭혔다. 나는 그게 곧 떨어져서 눈을 간지럽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천장 가까이에 둥둥 떠서 일렁이기만 했다. 온 힘을 다해 눈을 감아봐도 눈이 부셨다. 팔이라도 들어 눈을 가려보려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제서야 이상함을 깨달았다.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이윽고 느껴진 건 다급한 발소리와 새로운 목소리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 속에서 그나마 몇 가지 단어들만 머릿속에 들어왔다. 환자, 실종자, 의사, 조사팀. 분명 이미 알고 있을 단어들이 이상하리만치 낯설게 느껴졌다. 남들보다 조금 건강했고, 남들보다 조금 조용했던 나의 삶에 붙여넣기엔 하나같이 이질적인 단어들이라 마치 외계어를 듣는 듯 느껴졌다. 몇 번인가 눈을 더 끔벅거렸을 때 겨우 눈에 들어온 건 하얀 천장, 주기적으로 배열된 흰 조명, 무척 복잡해 보이는 기계의 끄트머리 정도였다.

어느 순간부터 들이닥치던 흰 옷의 사람들, 창가에서 느껴지는 웅성거림, 귓가에서 들리던 울음소리.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다가와 무어라 말을 거는 사람들은 분명히 많았는데 하나같이 표정이 읽히지 않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다시 눈을 감았다 뜨면 조용해질까. 그저 조용하고 평범하기만 했던 내 삶이 다시 시작될까. 어쩐지 기분도 몽롱하여 이게 꿈인지, 지루한 삶에서 도피하기 위한 나의 망상인지, 혹은 일어날 리가 없는 현실인지도 의심하지 못한 채 이번에는 눈이 감겼다. 잠에 빠져들듯 의식이 흐려졌다.

그리고 밤이 되어서야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이제야 주위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두운 방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삐걱거리는 침대, 방구석 작은 매트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어느 중년 부부, 일정한 리듬으로 소리를 내뿜는 복잡한 기계들, 그리고 작게 소리를 내는 벽면의 TV가 전부였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TV 속에서 누군가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 5년 전부터 발생했던 연쇄 집단실종사건, 기억하실 겁니다. 그 중 제 1차, 서별시 집단 실종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씨가 사흘 전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실종사건 수사 특별팀의 의료진은 ■■■씨에게 건강상의 문제는 없으며,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까지 회복을 마친 이후 실종자 추가 수색을 위한 조사를 시작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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