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미스터리,단편) 고비
24.10.17. 2485자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밤새 달리던 차의 창문 밖으로 쨍하게 빛나던 가로등과 신호등. 헤드라이트만이 구불구불한 길을 밝히던 산 속으로 차가 들어서면 나는 늘 조수석의 어머니에게 재밌는 얘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어머니의 할머니가 해주셨다는 산골에서 나물 캐고 나무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지겨워지면, 나는 늘 새로운 이야기를 졸랐다. 그 이야기는 늘 작은 승용차를 탄 엄마, 아빠, 딸, 세 식구의 이야기로 시작되었고 차 뒤에서 시작된 그림자가 뒷좌석에 탄 딸에게로 서서히 다가오는 부분에서 내가 자지러지며 엄마의 머리받이 부분을 껴안고 바싹 매달려 이야기는 끝나곤 했다.
왜 이런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거지. 나는 문득 상념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조수석의 남편에게 말을 건다.
"유리는, 자?"
대답이 없다. 고개를 창쪽으로 돌리고 있어 볼 수 있는 것은 얼굴의 옆선뿐이다. 할 수 없이 나는 목소리를 조금 돋운다.
"유리야, 자니?"
백 밀러로 자고 있을 딸을 보려고 하지만 뒷좌석은 어둡다. 곤히 자는 숨소리도 히터에 가려선가 들리지 않는다. 순간 두려움이 엄습한다. 바깥은 빛 한자락 없이 어둡고, 헤드라이트만이 구불구불한 길을 비추고 있다. 마치 그때처럼...
"희영아, 뭐 해."
나도 모르게 팽팽하게 당겨졌던 어깨가 내려갔다. 남편이 어느샌가 잠에서 깨어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유리 아빠. 유리 좀 확인해 봐. 자는 것 같은데, 안 보여."
"희영아, 운전 중인데 앞을 봐야지."
남편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조금 짜증과 조바심이 났다.
"그러지 말고 유리 좀 확인해 봐. 유리야, 유리야!"
"애 깰라. 괜히 자는 애 깨우지 마. 아까 장모님이 싸주신 떡 먹는 것 같던데."
"유리야! 일어나 봐! 화장실 안 가고 싶어? 응? 유리야!"
"희영아 앞! 앞에 봐!"
그제야 내가 길 옆의 바위를 들이받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았다. 브레이크를 밟는 발이 한박자 늦었다. 끼이이이익, 하고 차가 섰다.
밤새 달려 도착한 외가에서는 새벽까지 주무시지 못하고 깨어계시던 할머니가, 아이구 내 강아지, 하고 팔을 벌려 맞아주셨었다. 잘 땐 자더라도 맛이나 보고 자라고 식어버린 잡채와 산적, 떡과 갈비를 내오시면 아버지는 아유 장모님, 저희 자야돼요, 하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못이기는 척 싱글벙글 밤새 달려온 허기진 속을 채우곤 했다. 엄마는 이것만 먹고 나머지는 내일 먹자, 하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쑥떡을 입에 넣어주었고 그러면 할머니는 아이구 내새끼, 아이구 내새끼, 잘 먹네, 좋아하셨다.
하얗게 질린 남편이 나를 보았다. 그리고 안전띠를 허겁지겁 풀더니 나보다도 먼저 뒷좌석을 향해 몸을 휙 돌렸다.
"유리야, 괜찮아?"
그제야 부스스, 뒷좌석에서 유리가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아빠..."
나는 턱까지 차올랐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안심할 틈도 없이, 유리가 남편에게 손을 뻗어왔다. 나는 고함을 질렀다.
"안 돼!"
남편과 유리가 움직임을 딱 멈추고 귀신이라도 본 것 처럼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술을 어물거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왜 그랬지?
"그러니까...위험...하잖니..."
하지만 뭐가?
어색한 정적 끝에 남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희영아, 너 지금 신경이 날카로워. 피곤한가봐. 지금부터는 내가 운전할게. 여기가 어디지?"
유리가 눈을 크게 뜨며 손가락질을 했다.
"어? 엄마, 내비가 왜 이래?"
나는 먹통인 노이즈를 보고 당황했다. 남편이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우리가..."
우리가 어디로 가는 중이었더라?
바깥은 여전히 어두웠다. 헤드라이트만이 아까 내가 들이받을 뻔한 바위를 비춘 채였다. 히터가 세차게 바람을 뿜어냈지만 겨울밤의 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엄마, 나 춥고...무서워..."
유리가 웅얼거렸다. 나는 오른손을 뒤로 뻗어 유리의 손을 잡아주려 했지만 유리는 장난치듯 요리조리 피하기만 했다. 문득 춥고 외롭고 취약한 기분이었다. 나는 불안함을 숨기기 위해 애써 밝게 말했다.
"유리야, 엄마 아빠도 뭐 좀 먹을까? 배고프다. 자기도 출출하지?"
"그래, 유리야. 할머니가 싸주신 떡 보따리 좀 꺼내볼래?"
그러나 유리는 베시시 웃었다.
"미안. 내가 다 먹었어."
"그 많은 걸?"
"응. 미안. 엄마, 아빠...정말 미안해."
언제 칭얼거렸냐는듯 그 어른스러운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남편과 나는 깨닳았다. 우리 엄마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동시에 폐부를 찌르는 고통이 느껴졌다.
좀전까지의 어둠이 무색하게 온 세상이 빨갛고 푸르게 물들었다.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도 귀에 둥둥 울렸다. 환자분, 환자분, 정신 잃으시면 안돼요, 하는 의미없는 잡음들과 함께 시야 가득 다급한 사람들의 얼굴이 잡혔다. 나는 겨우 목을 돌려 옆을 봤다. 담요가 덮힌 들것 아래로 작고 여린 손이 툭 떨어져 있었다. 그 위로, 무언가가 겹쳐 보일 듯 했다.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는 유리와, 아이구 내새끼, 하고 팔을 벌려 맞는 우리 엄마.
아, 엄마. 유리를 데려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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