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본편 연성글

2. 슬픔이라는 이름

프랑켄슈타인(원작) 드림 | 괴물드림

701호 by RU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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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 바란 이야기는 좀 더 대화에 가까웠다. 보통 사람들이 삶을 지나치며 흘리고 가는 그런 대화들. 하지만 곧이어 괴물은 그것이 지나친 욕심이었음을 깨달았다. 괴물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산 적 없었고, 그런 화젯거리가 있을 리가 없었다. 괴물이 들려줄 수 있는 것들은 그날따라 유달리 낮은 음조로 읊조린 이름 모를 새들과, 인간들의 고함, 마음을 맴도는 증오 같은 것들이었다. 괴물은 그런 것들을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괴물은 이 감정이 부끄러움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러한 것들은 숨기고 싶었고,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드러내면 퍼시가 다시 자신을 꺼리거나 두려워할지도 몰랐으니까.

반면 퍼시는 처음부터 ‘이야기’를 원했다. 그는 괴물이라는 존재에 대해 무척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괴물이 무엇이고,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살아왔고, 인간들에 대해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등. 그는 괴물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원했다. 어떤 것도 숨기기를 바라지 않았다. 괴물이 태어난 이후의 이야기를 하다가 멈칫했을 때, 퍼시는 괴물이 슬쩍 넘어가려는 것을 무자비할 정도로 콕 집어내었다.

“그래서 어떤 기분이었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냐, 괴물. 난 그런 답을 바란 게 아니야. 난 네 첫 번째 희망이 산산조각난 때의 기분을 듣고 싶은 거야. 네가 모든 사랑과 충성을 바치기로 했던 곳에 네 자리는 없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기분을. 수없이 상상한 모든 최악의 가능성은 현실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로 하찮았을 때, 너와 세상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끊어졌을 때…….”

퍼시의 거침없는 말들이 약간 느려졌다. 괴물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들이 투둑, 투둑, 떨어지는 순간부터. 그 말들이 더 느려질수록, 작아질수록, 조심스러워질수록, 말들은 괴물의 어딘가에 와닿으며 꿰뚫어 버렸다.

“그래서 어떤 기분이었어?”

마지막에는 거의 속삭이듯이. 이미 전부 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대답을 원하듯이. 한순간은 입을 다물었는데도 대답을 한 착각이 들었다. 괴물은 자신이 빠졌던 절망의 구렁텅이에 대해서, 처음으로 가득했던 복수와 증오의 감정에 대해서, 사나운 분노에 대해서 이미 퍼시는 다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대로 복기하여 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퍼시가 듣기를 원했으니까.

첫 마디를 내뱉으려는 순간 괴물은 멈췄고, 퍼시는 기다렸다. 한참 후에 눈물이 거의 말라붙은 괴물이 대답했다.

“슬펐다.”

그 순간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짐승처럼 흐느끼고 싶지 않았는데 제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모습이 더 흉측해질 것을 알았지만 몸이 계속 떨렸다. 평생을 몸 밖으로 끄집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무언가가 흐느낌과 함께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슬픔이었다. 슬픔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모든 흐릿했던 것들이 선명해졌고, 이름이 붙었기 때문에 괴물은 이제 이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무척이나 슬펐다고.

그날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났다. 퍼시는 지쳤으므로 좀 자겠다고 했다.

“당분간은 시간이 많아. 네 이야기를 전부 듣기에는 충분하지.”

그 말만을 남기고 퍼시는 바로 잠들어버렸다. 무방비하게. 괴물이 마음만 먹으면 퍼시의 목을 비틀어 버릴 수 있는데도. 별장의 물건들을 훔쳐 달아날 수도 있는데도.

괴물은 잠든 퍼시를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키는 적당히 컸고, 그 말은 괴물보다 한참 작다는 뜻이었다.

대체 퍼시는 뭐 하는 사람일까? 미친 사람일까? 흥분이 가라앉고 보니 이 설명이 가장 합리적이었다. 사람을 환대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다. 하지만 괴물을 환대하는 사람은 어딘가 정상이 아닌 게 아닐까? 물론 괴물에게는 퍼시가 정상이든 아니든 별 상관은 없었다. 퍼시가 무엇이든 그는 괴물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듣겠다고 했다. 앞으로 그 누가 괴물의 이야기를 이렇게 들어줄 것인가? 아직 만나지 못한 그의 창조주를 제외하면.

퍼시는 괴물에게 손님방을 내어주었다. 손님방의 침대는 제법 컸지만 괴물이 눕기에는 지나치게 작았고, 아마 억지로 누워도 부서질 게 틀림없었다. 대신 깔거나 누울 만한 것도 주지 않았다. 아마 피곤한 퍼시의 실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손님방이었다. 괴물은 손님이었다.

너는 그 어디에서도 환대받지 못한다. 네가 친절하고 온정적인 마음씨를 지니고 현명한 말씨를 자아내도 그러하다. 그 마음씨와 현명함이 인간의 겉모습을 했을 때는 칭송받겠지만, 너의 거죽을 뒤집어썼을 때는 결코 밖에 드러나지 못할 것이다.

너는 함부로 대해도 되고, 적대해도 되고, 짓밟아도 되고, 죽여도 되는 존재다.

그 누구도 괴물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 말이 거짓이라서가 아니라, 괴물에게 말로 알려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것들은 진실이었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것이 바로 괴물이 우연히 지나가다 만난 퍼시벌 머피가 익사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려고만 했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괴물은 그자에게서 호의를 받았다. 이제 괴물은 다시는 증오하지 않을 것이다. 티끌만큼의 호의를 받는다면 그것을 수천 배 돌려주겠다고 한 다짐은 터무니없었다. 실제로는 티끌 이상의 호의가 돌아왔고, 그것으로 괴물은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었다.

다음날 동이 틀 때까지 괴물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퍼시는 일찍 일어나서 몸을 풀고는 다시 괴물을 찾아왔다. 전날 본 퍼시는 확실히 귀족 태가 났다. 괴물이 오두막에서 본 인간들과 그동안 마주친 인간들과는 행동하는 방식이 달랐다. 하지만 아침에 만난 퍼시는 그리 귀족같지 않았다. 이것은 편한 옷차림의 문제가 아니라, 몸가짐과 태도의 문제였다.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질 만큼의.

그래서 불쑥 묻고 말았다.

“너는 무슨 인간인가?”

“신기한 질문이네. 나, 퍼시벌 머피는 소개했듯이 아일랜드의 귀족가 차남이야. 잠깐 할 일이 있어서 대륙으로 왔지. 하지만 네가 바란 것은 이런 대답이 아닐테지?”

퍼시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독약이 되고 싶어하는 인간이지.”

“……독약?”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형형한 눈빛과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총과 대포가 굉음과 함께 사람을 찢어발긴다면, 독약은 한 방울만 있으면 수많은 사람이 조용히 쓰러지지. 난 그런 게 되고 싶어. 어쩌면 이미 그런 인간일지도 모르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유독하고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의미인가?”

“정답을 벌써 알려주면 재미없어. 스스로 알아내봐. 그나저나…….”

퍼시가 성큼 괴물에게 다가왔다. 많이 가까운 거리다. 어딘가 불편해지고, 낯선, 그 누구도 다가오지 않았던 만큼의 거리. 빤히 바라보는 눈길에서 호기심이 깃들었다.

“네 눈은 멋진 황금색이구나. 그때 본 게 착각이 아니었어.”

아침 햇살이 자신의 눈을 비추고 있는 걸까? 하지만 괴물은 자신의 눈을 볼 수 없다. 멋진 황금색이라는 것을 알려면, 남이 말해줘야 한다.

괴물은 그것을 기억할 것이다.

“자, 그럼 이야기를 좀 더 시작해볼까?”

괴물은 갑자기 두려워졌다. 자신의 짧은 삶을 거의 다 이야기하긴 했지만, 아직은 남았다. 이전까지는 슬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다음에는 무엇이 붙을 것인가?

그러나 퍼시가 듣기를 원하므로,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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