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단빙]La Roue de Fortune

이렇게 점점 쌓이고 덮이는 거겠지. 이전처럼, 어쩌면 이전과는 다르게, 또 새롭게.

La Roue de Fortune :: 타로 메이저 아르카나 10번, 운명의 수레바퀴

최종장 에필로그


딸랑, 출입문의 종소리 뒤로 가벼운 재질의 팻말이 흔들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멀끔한 문 위에서 달랑거리는 판자는 손때 하나 없이 깨끗해 새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문을 여닫은 충격에 맞춰 흔들리는 「OPEN」 문구를 등진 채 히마와리는 계단을 올랐다. 지하와 지상을 잇는 계단에서는 미세하게 탄내가 났다. 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느긋하지만도 않은 걸음은 세 번에 걸쳐 멈췄다가 바닥을 박차길 반복한다. 그렇게 발자욱이 끊긴 자리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멈춘 자리의 옆면에 붉은색 포스터가 남았다는 것. 고작 일주일을 앞둔 라이브 홍보 포스터 속 소년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히마와리의 입매가 느슨해졌다.

“마스터, 포스터 다 붙였어.”

“오냐, 수고했다.”

올라가면서 오른쪽 벽에, 도로 내려가면서 왼쪽 벽에 포스터를 장식하고 나니 마치 ‘라이브 꼭 보러 와야 해!’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명백했다. 방금 붙인 포스터 외에 다른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히마와리가 에덴으로 내려가는 통로 벽의 색을 인지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이전에는 지난 이벤트 포스터나 굿즈 스티커, 혹은 밴드맨들과 팬들의 낙서 따위가 시선을 사로잡았으니까. 그 무엇도 남지 않은 지금의 벽은 커피색와 상아색 반반씩, 위아래로 경계를 나누어 가진다. 단조롭기 짝이 없는 색이었다.

크림슨과의 싸움이 막을 내린 지 한 달. 시부야 변두리의 라이브 하우스, 에덴이 본래의 일상을 되찾기까지는 꼬박 그즈음의 시간이 필요했다.

불길이 휩쓸고 간 공간은 마스터가 들어둔 보험 덕에 무사히 복구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 인테리어 역시 새롭게 단장할 수 있었다. 희미하게 남은 탄내 위를 새 건물 특유의 냄새가 뒤덮었고, 그 위로 바닥에 덧바르는 왁스 향이 한 겹 더 얹혔다. 이따금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던 바닥의 낡은 나무판자는 매끄럽게 코팅된 마루로 교체되었고, 틈 사이사이마다 낀 먼지가 그대로 남았던 무대의 타일 역시 새것으로 갈아 끼운 티가 났다. “에덴의 새출발이다!”라며 뿌듯해하던 마스터의 경박스러운 웃음소리만큼이나 밝았으니까.

물론 그 과정에서 네 밴드의 도움을 빼놓을 수 없었다. 거창한 공사야 전문 업체에서 맡아준다지만, 자잘한 청소는 오롯이 에덴을 이끌고 꾸려가는 이들의 몫이었으므로. 어디선가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티끌을 쓸어 담고 바닥을 닦고, 새로 주문한 자재들의 포장을 뜯어 창고까지 옮기고, 드링크 바에 음료를 채워 넣고…… 그 모든 정리가 어제 막 끝난 참이었다.

포스터 붙이기라는 지극히 간단한 일을 마치고 돌아온 히마와리는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소파 앞에 직행해 그대로 주저앉았다. 마찬가지로 가게를 새로 단장하며 교체한 그것은 아직 길이 덜 들어서인지 묘하게 딱딱한 감이 있었다. 밴드의 작곡 담당이라는 녀석들은 하나같이 밤을 새우고는 엉뚱하게도 이곳에서 곧잘 눈을 붙이는 탓에, 소파는 사실상 없으면 심히 아쉬운 가구로 취급받곤 했다. 히마와리 역시 그런 취급을 한 사람 중 하나였으나, 유독 최근 들어 멍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일이 잦아졌다. 바로 지금처럼,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오묘한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마스터는 이내 마뜩잖다는 듯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켰다.

“저 녀석, 요즘 들어서 상태가 이상하단 말이야.”

마스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곁에 있던 아담과 카나메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그러했으므로. 청소를 시켜놨더니 대걸레를 든 채로 가게 한복판에서 우뚝 멈춰 서질 않나, 부엌의 식기를 연달아 떨어트리질 않나. 어느 날은 창고 정리를 하는 줄 알았더니 상자 속에 욱여넣은 잡동사니를 의미 없이 뒤적거리고 있기도 했다. 단순히 집중력이 떨어졌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하기엔 차츰 안정을 되찾아가는 에덴의 모습과 반비례하듯 점차 불안정해지는 작태가 의아할 뿐이었다.

다행히 에덴에는 그녀를 제외하고서도 부릴 수 있는 새 인력이 둘이나 생겼으므로, 구태여 어서 정신 차리고 일이나 하라는 잔소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 대신 마스터는 히마와리를 어르고 달랠 만한 것을 찾기 위해 기꺼이 머리를 굴리기로 마음먹었다. 크림슨과의 싸움에서 이래저래 마음고생시킨 값을 치르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었다.

“그 뭐냐, 간식이라도 만들어 줄까? 마침 어제 감자튀김이 들어왔는데, 받아보니까 이전에 주문하던 거랑은 다른 제품이지 뭐냐. 맛 비교라도 한번……”

“음…… 아냐, 됐어.”

멍한 음성은 긴 고민 없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 내용만큼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마세 녀석이 감자튀김을 거부해……!? 마스터가 알기로, 히마와리를 다루는 데에는 먹을 것만 한 게 없었다. 뚱한 표정을 짓다가도 맛있는 걸 입에 넣어주기만 하면 금방 풀릴 만큼 단순한 성정이지 않은가. 그중에서도 좋아서 사족을 못 쓰는 감자튀김은 히마와리를 달래는 특효약으로 알고 있었건만, 그것을 거부당하자 마스터의 표정은 더없이 심각하게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식성을 꿰고 있는 마스터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라,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담은 여상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만들어 놓을 테니까 출출할 때 먹으렴.”

“응, 고마워. ……나 잠깐 나갔다 올게.”

힘 빠진 발소리 뒤로 종소리가 딸랑거리고, 마스터의 한숨 소리가 마침표처럼 찍힌다. 히마와리가 나간 후로 더 따라붙는 대화는 없었지만, 아담이 냉동실에서 감자튀김을 꺼내는 소리와 튀김기를 예열하는 소리에서는 은근한 걱정이 배어났다. 히마와리가 요즘 들어 기운이 없어 보인다는 사실은 명백했으므로. 다만 그녀는 자신의 좋지 않은 상태를 먼저 입 밖에 내는 법이 없으니, 눈빛과 언행 따위에서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히마와리의 체질은 차라리 기꺼울 따름이었다.

“아담, 나도 감자튀김 먹을래.”

“알았어, 넉넉하게 만들 테니까 기다려줄래?”

묘하게 어색한 정적을 가른 것은 자그마한 소녀의 무던한 음성이었다. 자색 눈동자를 깜박이는 소녀, 미코는 익숙하다는 듯 바 테이블 앞에 걸터앉아 간식의 조리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살얼음 낀 튀김을 꺼내 두드리는 소리, 가열된 기름이 부글거리는 소리, 튀김을 기름에 넣자마자 튀어 오르는 열감과 그에 공격받은 듯 아얏 하고 터트리는 아담의 외마디……. 그 모든 소리로부터 상냥한 걱정을 어렵지 않게 가늠하면서도 미코의 표정은 마냥 담담하기만 했다.

“마세가 걱정돼?”

허무할 만큼 명료한 물음에 아담의 눈썹이 팔八 자로 기울었다. 그러나 미코의 말은 아담뿐만이 아닌 에덴 관계자 전원의 공통된 불안을 찌르는 것이었으므로, 마스터와 카나메의 시선이 소녀에게로 꽂히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으응, 하다못해 기운이 없는 이유라도 알면 좋을 텐데…….”

“나는 알 것 같은데.”

태연한 목소리였다. 제게 꽂힌 시선 끝의 눈동자가 커지거나 말거나, 미코는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정말이지 별것 아니라는 투로, 조용하고 분명하게.

“마세, ‘그날’ 이후로 단테 이름을 소리 내서 부른 적이 없으니까.”

* * *

“하아아…….”

가느다란 한숨 소리가 어둠 속에서 배어난다. 에덴의 입구 옆 위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주저앉은 히마와리의 인영이 그늘 속에서 흐늘거렸다. 보통의 경우라면 명백한 통행 방해겠지만 위층 역시 마스터의 명의로 되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말인즉 이렇게 잠깐 앉아 있는 정도는 괜찮다는 뜻이다. 어차피 멀리 가봤자 마스터가 돌아오라고 하면 꼼짝없이 돌아가야 하는 신세고, 또 애초에 멀리 갈 생각도 없었으니까……. 자신이 왜 여기에 자리 잡았는지 변명하듯 꿍얼거리던 히마와리는 이내 무릎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다시금 하아, 작게 숨을 토해냈다. 기분이 정말로, 좋지 않았다.

언제부터 이랬더라.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어나더 드리밍이 끝난 직후에는 이렇지 않았으니까. 당시에는 과거로부터 엮인 뿌리 깊은 악연도, 이 지긋지긋한 싸움도 드디어 끝났다는 후련함이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꼬박 하루를 죽은 것처럼 잠들거나 네 밴드와 함께 축하 파티를 즐기면서 간신히 되찾은 일상에 축배를 들었더랬다.

물론 즐거운 시간도 잠시, 그 뒤부터는 에덴을 수복하고 신생 레이블 아발론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재정비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뭐, 나쁘지는 않았다. 꼭 필요한 일이고, 또 사랑하는 공간과 사람들의 내일을 위한 일이었으니까. 에덴에서는 분주하게 업무를 분담하고 집에서는 눕자마자 잠드는 생활이 반복되는 동안에도 몸이 피곤할지언정 마음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다만 정신없이 바쁘다는 건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다는 말과 같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이는 반대로, 여유가 생길수록 잡념이 마음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다는 말이기도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에덴에 들러붙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중간중간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겼고 퇴근 시간도 점차 앞당겨졌다. 일을 돕기 위해 네 밴드 전원이 힘을 보태다가도, 날이 갈수록 하나둘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 에덴에서 볼 수 있는 면면이 줄어들었다. 무대와 드링크 바가 말끔해질수록 히마와리의 머릿속은 어지러워졌다. 마침내 연습실이 사용 가능한 수준으로 정리되었을 때 블레이스트가 당장 이 주일도 남지 않은 라이브를 대뜸 기획해 왔고, 츠바사가 디자인했을 게 뻔한 공연 홍보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히마와리는 생각했다. 나, 지금 기쁘지 않아.

블레이스트의 라이브가 싫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블레이스트가 싫어진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의 라이브는 그저 지표가 되었을 뿐이다. 자신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걸 깨닫기 위한, 여느 때라면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을 절대적인 행복의 기준으로써.

그제야 히마와리는 자신이 어떠한 감각에 잠식되었음을 알았다. 한둘이 아닌 그것에 이름을 붙여보자면, 회의감과 상실감. 하나같이 유쾌하지 못한 이름이었다.

에덴은 불타고 아발론의 반역에 함께했던 밴드맨들은 많은 것을 잃었다. 작게는 라이브를 할 권리부터, 크게는 소중한 사람의 안위까지. 그 모든 걸 희생하고 손에 넣은 것은, 크림슨을 완전히 끌어내리지 못하고 그저 제동을 거는 데에 그친 불완전한 자유. 이게 최선이었을까? 고작 이 정도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는 여전히 크림슨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딱히 크림슨의 음악이 나쁜 건 아니야. 하지만 우리 마음에는 안 든단 말이지. 그러니까, 쳐부순다. 그뿐이라고.’

어나더 드리밍에서 어떤 소년이 했던 말을 떠올린 히마와리가 소리 없이 웃었다. 불한당의 논리나 다름없는 그 말대로, 노래는 나쁘지 않았다. 박자에 맞춰 까딱이는 발끝을 타고 회의감이 가시고 나면, 손에서 놓쳐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것들을 향한 미련과 상실감이 뒤이어 밀려들었다. 이를테면, 그래. 히마와리는 몸을 일으켜 에덴으로 향하는 통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불이 나기 전까지만 해도 저곳에는 카운터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일정 확인을 위한 탁상 달력 하나와, 라이브를 앞둔 밴드의 홍보지들이 다양한 높이로 쌓여 있었고. 모든 것이 사라진 지금이 되어서야, 히마와리는 자신이 그것들을 사랑해 왔다는 걸 깨달았다. 꼭 에덴의 단골 네 밴드가 아니더라도 라이브를 향한 열정과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창구를 사랑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히마와리의 고개가 옆면으로 향한다. 지난 추억을 박제해 놓은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허전해진 벽이 보였다. 낯설기 짝이 없는 벽면의 색과 익숙지 않은 새것의 냄새, 짓밟기 아쉬울 만큼 번쩍이는 바닥과 미묘하게 달라진 구조의 무대. 비일상에 시달리다 되찾은 일상은 어색하기 그지없어서.

막연하고 갑갑하고, 또 사무치게 허전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이 감각은 마치,

“……미아가 된 기분.”

이렇듯 안개 속에 갇힌 기분이 들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강하고 다정했던 모습에 위로받는 이름. 그러나 어느 날을 기점으로 부를 수 없게 된, 그립고 또 그리운 이름. 히마와리가 그 이름의 주인을 놓치고 만 ‘그날’을 기점으로, 단 두 음절에 불과한 그것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럴 수 없었다. 몇백 번을 입술을 달싹인들 끝내 발음할 용기가 없었으므로.

‘언젠가, 네가 무릎 꿇고 멈춰 설 날이 온다면…… 내 이름을 불러라. 한가하다면 유언 정도는 들으러 가줄 테니.’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눈앞에 나타나 주겠노라고. 그렇기에 부를 수 없었다. 그의 말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굳게 믿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터무니없어 보이는 약속이라 할지라도, 그는 자신이 이름을 부르면 분명 와줄 것이다. 그토록 다정한 사람이니까, 빈말 따위를 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니까. 다만 이름을 부르고도 그가 와주지 않는다면, 그건 아마도……. 히마와리는 저를 배웅하던 그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했다. 고통에 일그러진 눈썹과 그럼에도 여유롭게 웃어 보이던 입매, 흔들림 하나 없이 단단한 목소리와 아득할 만큼의 다정함, 자신의 등을 강하게 떠밀던 손끝과…… 핏방울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소리. 그러니까 히마와리는, 확인하기가 두려웠다. 일상을 재건한 한 달이 흘렀음에도 그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지금이라서 더더욱 그랬다. 당신이라면 분명 와주리라고 믿고 있지만, 불러도 오지 않는다면 ‘그럴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뜻일 테니까. 만약으로조차 가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날 어쩌면——

「정신 차려!」

“……아.”

최악으로 치닫던 잡념이 누군가의 개입으로 뚝 끊긴다. 언제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었는지 시야가 온통 어두웠다. 히마와리가 고개를 들자 빛살 한 줄기가 발목께에 어렴풋이 비쳐 들어왔다. 갑작스레 밝아오는 사위가 아릴 법도 하건만 그 빛은 벼락같았던 호통과는 달리 마냥 온화하기만 해서, 히마와리는 그저 찬찬히 눈을 여닫으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깜박깜박, 빛이 흔들리는 박자와 맞물리도록.

「나 참, 갑자기 표정이 점점 안 좋아져서 걱정했다고.」

“그, 그랬어?”

「눈 뜨고 악몽이라도 꾸는 줄 알았다니까.」

빛은 꼭 입을 달싹이는 움직임처럼 밝아졌다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밝기와는 별개로 음성은 시원스럽도록 또렷했지만. 그것을 손끝으로 두어 번 두드리면서 히마와리는 입매를 끌어올렸다. 느슨하게 지어 보인 웃음에서는 난처한 기색이 배어났다. 아, 정말. 누가 보면 혼잣말하는 줄 안다니까 그러네.

순백의 빛이 말을 걸어온 건 어나더 드리밍에서부터였다. 빛의 정체는 유제스가 남긴 잔향으로, 처음 봤을 때는 이보다 훨씬 밝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반딧불이 정도의 밝기로 줄어들고 말았다. 또한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뭐, 그때나 지금이나 언질 없이 나타나 느닷없이 말을 걸어오는 건 똑같지만. 유제스의 말로는, 완전히 스러지기 전까지는 곁에 머물 생각이라고 했다. 어차피 오래 있지는 못할 거라는 말과 함께,

「별수 없잖아, 날 볼 수 있는 건 너뿐이고. 야박하게 그러지 말고 말동무 좀 해주라.」

그래, 꼭 저런 이유를 대어가면서. 왜 제게만 보이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튜너로서의 감각이 유제스를 인지해 내는 걸까 하고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었다.

「그 대신 미아를 위해서 방향 정도는 알려줄 테니까.」

“……어디가 맞는 방향인지 알아?”

「아니. 그래도, 나아갔을 때 네가 후회하지 않을 방향은 알지. 그거면 돼.」

빛이 웃었다. 아니, 웃는 것처럼 깜박였다. 그 경쾌한 빛을 보고 있자니 히마와리의 입술 틈 사이에서도 푸스스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렇네, 딱히 맞는 방향으로만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혼잣말처럼 대꾸하자 빛이 일순 폭소한 것처럼 보였다.

「일단 지금은…… 그렇지, 산책이라도 하면서 기분 전환하는 건 어때?」

“……하긴, 이따 블레이스트도 올 텐데 이렇게 축 처진 모습 보여주고 싶진 않고.”

좋은 생각이구만. 순간 악동처럼 웃어 보인 히마와리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엉덩이를 툭툭 털더니, 여전히 발목께에서 반짝이는 빛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듯 신발코를 바닥에 톡톡 두드리기도 했다. 나름의 몸풀기 동작처럼 크게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치켜든 고개는 바닥이 아닌 정면을 향한다.

“다녀올게.”

그렇게 종알거리곤 빙글 뒤를 돌아 저가 앉았던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말동무를 졸라대던 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하여간, 순 제멋대로 나타났다가 제멋대로 사라진다니까. 불만스레 부풀린 히마와리의 볼은 이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이번에야말로 완연한 양지로 다리를 뻗었다. 이른 더위를 식혀주는 바람을 타고, 조금은 가뿐하게.

* * *

골목을 누비는 걸음마다 크림슨의 음악이 따라붙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더 이상 관객의 마음을 멋대로 휘두르는 강제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간간이 크림슨 소속이 아닌 아티스트의 음악 역시 섞여 들려온다는 것. 아발론이 거머쥔 불완전한 자유의 결과였다.

‘우리’가 가져온 변화는 미미했다. 그 변화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면적을 넓혀갈 것이다. 크림슨의 색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다시는 하나로 묶을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다채롭게.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몇 안되는 위안을 온몸으로 실감하면서, 히마와리는 모퉁이를 돌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길거리 예술가의 그래피티가 눈에 들어왔다. 질서나 규칙 따위를 염두에 둔 시늉조차 없이 거칠게 휘갈긴 선과 채도 높은 채색이 강렬하게도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매섭게 타오르는 불꽃을 형상화한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히마와리는 그 이미지에서 그리운 사람을 연상하고 입술을 감쳐물었다. 난폭하고 맹렬한 불길 같은 사람, 그럼에도 지독하게 다정했던 사람. 그의 이름을 무의식중에라도 더듬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히마와리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푸른 잎의 가로수를 따라 걷는다. 히마와리는 그 가로수가 어떤 종류의 나무인지를 알았다. 당장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이 길은 푸른빛이 아닌 분홍빛을 머금고 있었으므로. 흩날리는 꽃잎이 이끄는 대로 걷다 보면 벚꽃이 만연한 공터로 이어졌다. 분홍빛 나무의 실루엣을 경계로 맞은편의 건물이 아득히 멀어 보여서, 고작해야 서너 발자국 뒤의 도로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꼭, 꿈을 꾸는 것 같았는데. 히마와리는 벤치 아래의 하얀 들꽃을 괜히 발끝으로 톡 건드리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꿈꾸는 것만 같다는 감상은 비단 벚나무의 엷은 색 경계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설마 당신이 와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이곳에 나타난 당신의 존재가 더더욱 현실감을 무뎌지게 했다. 당신은 매번 힘든 싸움이 벌어지는 현장에서나 만날 수 있었으니까, 설령 폭풍 전 찰나의 평화라고 한들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을 비춘 당신이 낯설면서도 반갑기 그지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언젠가 당신과 함께하는 일상이 당연해지기를 바랐다. 미래의 전망을 헤아리지 않는 당신과 봄이 오면 함께 꽃놀이를 하고, 여름에는 바닷가에서 함께 파도 소리를 듣고. 그런 진부한 나날을 함께하고 싶다고……. ‘그날’이 오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있잖아. 나 지금 당신이 엄청 보고 싶어. 당신 얼굴도 보고 싶고, 목소리도 듣고 싶고, 무엇보다 당신 이름을 부르고 싶고……. 그런데, 이름을 불렀는데도 당신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떡해? 부르면 와준다고 해놓고 오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차라리 당신이 거짓말쟁이였다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그렇지 않다는 걸 너무 잘 알아서. 올 거라면 진작에 왔을 텐데. 당신은 왜 여태껏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지, 어쩌면 나타나지 못하는 상태면 어떡해야 하는지……

“……기분 전환 전혀 안 되잖아.”

다시금 가라앉은 마음만큼이나 한 발짝 한 발짝이 무거웠다. 점점 느려지는 걸음을 끌고 공터의 가장자리에 선 히마와리는 힘없이 벤치에 걸터앉았다. 바닥을 향해 떨군 시야에 멈춰 선 다리가 가득 찼다.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남은 장소이기 때문일까, 도무지 다시 일어날 자신이 없었다.

이럴 때, 멈춰서서 주저앉았을 때 자기 이름을 부르라고 했었는데. 나직이 중얼거리던 히마와리가 자조적으로 비식거렸다. 그냥 불러버릴까. 언제까지고 피할 수도 없잖아. 그 사람이 이야기한 상황에 꼭 들어맞는 지금, 아끼고 또 아껴뒀던 이름을 토해버릴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자신이 지쳤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인지 고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래, 그러자. 이 막연한 그리움과 두려움이 더 곪기 전에 도려내 버리자. 빨리 받아들일수록 더 빨리 아물 테니까. 숨을 찬찬히 들이켜는 히마와리의 속눈썹이 잘게 떨려왔다. 가슴께에서 불안하리만치 크게 쿵쿵대는 고동에 맞춰서.

어쩌면 그 사람도 그냥 해본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이름을 부르면 오겠다니,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게 아니고서야 가능할 리가 없으니까. 그래도 당신이 한 말이니까 믿었고, 믿었기 때문에 감히 부를 수 없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속에만 담아두기에는 너무나도 사랑하는 이름이라서.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단테.”

아껴왔던 두 음절은 허무할 정도로 가볍게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그러나 목소리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단테, 단테.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름을 불러대는 음성은 점점 또렷하게 형태를 잡아갔다. 그간 삼켜온 무수한 애정의 크기만큼이나, 혹은 시답잖은 두려움에 억눌린 반동처럼, 고동은 이름을 되뇔수록 부피를 키웠다. 부풀어 오른 마음이 턱까지 차올라서, 먹먹하게 가로막힌 목구멍 사이로 밭은 숨소리가 울음처럼 이어졌다. 단테, 있잖아, 아마도 나는, 그냥 당신이 필요한 것 같아, 이 회의감도 상실감도 전부, 당신이 없어서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아, 새로운 일상도 오랜만의 라이브도 전부, 당신이랑 같이 맞고 싶었어, 기대했단 말이야, 그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당신이 오질 않으니까,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오는데도, 당신만 없으니까, 이제 됐어, 그냥,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단테……

결국 혼자 멋대로 품은 희망에 짓눌려서 숨이 막힌 것이다. 그 누구도 당신이 금방 돌아올 거라고 장담하지 않았는데, 저 혼자 그럴 거라고 굳게 믿고서. 보답받지 못한 희망이 절망으로 변모하는 감각은 물속으로 침몰하는 감각과 닮아 있었다. 번지듯 허물어지는 눈앞의 광경과 죄어오는 숨 같은 것들이 꼭 그랬다. 이대로 숨이 멎어버리면,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서 내뱉은 어리광이 유언이 될까 싶을 만큼. 그럼, 당신이 내 유언을 들으러 와주겠다는 약속은……

“언제까지 그렇게 주저앉아 있을 셈이지?”

기억하고 있던 홍색이 가물거리며 떠올랐다. 이 감각을 안다. 유제스와 대화할 때와 비슷한 감각. 그렇다면 들려오는 이 목소리는 분명 제 기억 속의 잔향일 테다. 히마와리는 허벅지 위로 떨군 고개를 구태여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목소리에 응하기 위해 입을 빠끔거렸다. 비록 무의식이 멋대로 불러낸 환상이라도, 그와 말을 나눌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아서. 동시에 실체가 없는 목소리임을 확인할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들고 무릎을 세워. 그리고 나아가라. 네게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

단테는 잔향으로조차 저를 채근하고 있었다. 기억 속의 단테는 꼭 이렇게 강하고 당당했다. 나아갈 자격 따위를 멋대로 책정해 어깨에 지울 만큼 매정하기도 했다. 그런 당신의 신뢰가 버거울 때가 있다면, 필시 지금 같은 순간일 테다. 히마와리는 목구멍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속내를 있는 그대로 토해내었다.

“나아갈 때 나아가더라도, ……단테랑 함께가 아니면 싫어.”

형편없는 응석이었다. 아마 한심하다고 하려나. 머리 위로 드리운 그림자 속에 숨은 채, 히마와리는 짧게 자조했다. 제가 아는 단테라면 그러고도 남으리라. 이렇게 약해빠진 자신을 용납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오, 제법 갸륵한 소릴 하는군그래.”

예상치 못한 말이 눈앞을 채웠다. 내 멋대로 끄집어낸 잔향이라면 내가 예상하는 그대로의 말을 해야 하잖아. 그런데 왜? 히마와리는 그제야 홍색에 둘러싸인 사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롱거리는 시야 속 모든 것의 경계가 허물어진 세상에서 그 심홍빚만이 선명했다. 마치 벚꽃이 만개한 것 같다고 생각하던 입술이 조금 더 과감하게 달싹였다.

“……그 말은, 계속 같이 있어 준다고 약속하는 걸로 생각해도 돼?”

알 수 없는 예감으로 심장이 들떴다. 쿵쾅거리는 고동과 전혀 맞물리지 않는 리듬으로 목소리가 떨려왔다. 만약 지금 이 목소리가 잔향이 아니라면, 지난날의 봄 색 꿈결에 홀려 불러들인 환상이 아니라면. 히마와리의 두 눈이 꾸욱 감겼다. 다만 감은 눈두덩 위로도 음색은 비쳤으므로, 그리운 색이 어둠을 비집고 쏟아졌다.

“……그래, 여기까지 와서 더 어울려주지 못할 것도 없지.”

절망처럼 다정한 속삭임이었다. 속눈썹 사이로 배어나는 눈물의 감촉이 간지러워서, 고작 그 정도의 변명을 대어가며 히마와리는 눈을 떴다. 얼마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지 한 치 앞이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직접 마주해야 할 때였다.

고개가 올라갔다. 뒤축을 구겨 신은 신발과 다리가 보였다.

고개가 조금 더 올라갔다. 낯익은 색의 후드집업과 얇게 땋은 땅거미 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목을 세웠다. 굳게 다물린 입술과 붉고 흰 머리 장식이 보였다.

턱을 치켜들었다. 미세하게 짤랑거리는 귀걸이와 단정한 눈썹과…… 아, 어줍잖게 벚꽃을 빗댄 색의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유언은 잘 들었다, 히마와리.”

“……이거, 꿈이지?”

분명 바라고 또 바라온 순간인데도 무심코 얼빠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치만 꿈이 아니면 말이 안 되잖아. 이제까지 소식도 없던 당신이, 내가 이름을 부르고서야 타이밍 좋게 나타난다는 게. 너무 간절하다 못해 눈 뜨고 꾸는 꿈인 건 아닐까. 터무니없는 생각으로 입매가 굳었다. 그러나 눈앞의 입꼬리는 오히려 비뚜름히 기울어져 갔다. 언젠가 마주한 적 있는, 정말이지 못된 얼굴로.

“꿈이라면, 악몽 취급이라도 할 텐가?”

짓궂은 말투. 그 음성만큼이나 심술스러운 문장은 정말로, 단테 본인이나 할 법한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히마와리는 아랫입술을 꾹 짓눌렀다. 악몽 취급이라니,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은 그저 이 달콤한 꿈에서 깨는 것이 두려울 뿐이니까. 악몽에서 깨어나는 걸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히마와리는 입을 살짝 열었다가, 이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목이 메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급하게 큼큼, 목을 가다듬는 사이 단테의 목소리가 정적을 젖혔다. 네게 3초의 시간을 주마.

“셋을 셀 때까지 눈을 감으면 꿈에서 깰 수 있게 해주지. 허나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면, 이대로 있어도 좋다.”

친히 기회를 주겠노라는 시혜적인 어조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항상 선택의 여지는 제게 내어주곤 했다. 은근하게 배어나는 다정의 형태가 반가워서, 그 다정에 조금만 더 응석을 부리고 싶어서. 작게 속살대는 음성으로 괜히 말꼬리를 물었다.

“꿈에서 깨면, 사라질 거야?”

“이 자리에 있는 내가 현실의 인간인지, 꿈속의 망령인지를 확인하는 건 네 몫이다만.”

의뭉스레 답을 넘기는 입매가 얄미웠다. 다만 그 말대로 언제까지고 선택을 미룰 수는 없었으므로, 히마와리는 느리게 서너 번 숨을 가다듬은 끝에 눈꺼풀을 닫았다. 검게 가라앉은 사위 너머로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도무지 환청인 것 같지 않은 그 소리에 문득 궁금해졌다. 꿈에서 깨어나려고 하는데 왜 눈을 감아야 하는 걸까. 마음이 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웃음소리가 대꾸한다. 눈을 감아야 다시 고쳐 뜰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럼 나는 고쳐 뜬 눈앞에 여전히 당신이 있는지를 확인하면 되겠구나, 생각한 순간이었다.

열기가 온몸을 덮친다. 달음박질하는 여름에 추월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 꼭대기에 오른 태양이 그늘을 꺼트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쩌면 무대 한가운데에서 스포트라이트를 오롯이 받아내는 것 같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더위에 현기증이 난다. 숨이 고팠다. 갈증처럼 차오르는 갑갑함에 입술을 열자 되려 호흡이 가로막혔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 더위는 당신의 체온이라는 걸. 당신의 열이 온통 들러붙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서 입술 사이를 침범당하는 감각은,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선연했다.

숨과 점막을 맞대는 와중, 단테가 무어라고 속삭였다. 당신의 말이라면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데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데일 것처럼 열렬하고 녹을 것처럼 다정한 밀어라는 것만큼은 확실해서.

“으응…….”

단테의 속삭임에 응하듯 둥근 울음밖에 되지 못하는 소리를 뇌까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듯, 당신도 놓치지 말아 달라고. 알아듣지 못해도 모두 당신한테만 속삭일 수 있는 말들이라는 것만큼은 알아달라고. 다 뭉개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음에도 이어지는 대화는 사무치도록 달았다.

아, 이거 꿈 아니구나. 입술이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입을 맞춘 명분부터가 꿈과 현실을 판별하겠다는 것이었음에도. 눈을 감았다 뜬 지금 당신은 사라지지도 않았고, 환상처럼 깨지지도 않았다. 그냥, 당신이었다. 그렇게 그리웠던 사람. 좋아하는 만큼 그립고, 그리운 만큼 원망스럽기도 하고. 꼭 그 원망만큼이나 좋아하는 사람. 이제는 이름을 부르는 데에 거리낄 필요가 없는—

“……단테.”

“그래, 이제야 나를 현실로 받아들일 준비가 됐나?”

손이 많이 가는 점은 변하질 않았군그래. 궂은 말과 달리 눈가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내는 감촉이 험하다. 손에 박인 굳은살 탓이었다. 그 거친 살갗으로부터 단테의 온도가 옮겨붙기라도 한 듯이 눈가가 달아올랐다. 더 울고 싶지 않은데. 시큰거리는 코를 기울여 억센 손아귀에 뺨을 비볐다. 마디 굵은 손가락이 금세 턱을 감싸왔다. 얼굴의 절반을 당신으로 덮고 나서야 안심이 됐다. 진짜 단테다. 그것도 몸 상한 곳 없이 멀쩡한,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의. 고작 그 정도의 사실에 들떠서는, 복에 겨운 원망이 잇따랐다.

“왜 이제 와…… 늦었어. 것도 엄청나게.”

“꿈에서 깨자마자 어리광을 부릴 줄은 몰랐는데.”

“다 당신 때문이잖아.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바보. 불퉁하게 두 음절의 비난을 뱉어내자 단테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 눈매만큼이나 날카롭게 깎인 미간에서는 이상하게도 언짢은 기색이 배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유쾌한 색을 매단 손끝으로 귓불을 매만질 뿐이었다. 간지러워……. 발갛게 부르튼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들자 눈을 가늘게 내려 뜨고 웃어 보이는 단테와 시선이 맞았다. 그런 와중에도 당신의 손은 멈추는 법이 없어서. 귓불에서 귓바퀴로 옮겨갈수록 손길은 눅진해져 갔다. 간지럽다 못해 민망할 지경이라 두 눈을 꾹 감자, 그제야 멈춘 손가락 대신 단테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왜 당신은 자꾸 내가 눈을 감을 때마다 그렇게 웃는지. 문득 얄궂다는 생각이 들어 샐쭉 눈을 떴을 때, 단테는 여태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정하고 애틋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동시에 모든 것을 거머쥔 듯, 또 어떤 찰나의 반짝임에 영원을 기약하는 듯한…… 그래, 꼭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같은 표정. 그런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정말이지 심장께가 뜨겁도록 저려와서, 히마와리는 단테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너를 잡으러 왔다, 히마와리.”

“그게 무슨…… 아.”

웃음이 밴 음성으로부터 지난겨울의 대화를 기억해 내기란 어렵지 않았다. 자신이 필요해질 때 잡으러 갈 테니, 언제든 각오해 두라는 말. 단테의 말을 담아두는 함이 가슴 한 켠에 마련되기라도 한 것처럼, 히마와리는 겨울의 기억을 금방 꺼내 들었다. 빛바래지 않고 선명하게 보존된 기억이었다.

“혹시 또 무슨 일 생겼어?”

그것을 소중히 더듬던 히마와리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또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그 말 앞에 ‘튜너가 필요할 만한’이라는 표현이 생략되었음은 두 사람 모두가 알았다. 지난겨울, 단테가 던진 통보는 튜너의 필요성과 맥락이 닿아 있었으므로. 그러나 단테는 그 해석의 오류가 달갑지 않다는 양 입꼬리를 비뚜름히 늘어뜨렸다. 그리고는 느리고 분명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마치 어떤 중요한 선언이라도 하듯, 혹은 제 말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듯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너다, 히마와리.”

“……응?”

“앞으로의 내 시간에 네가 필요하겠더군.”

단정한 문장은 그 어떤 곡해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갈무리되었다. 단테는 튜너가 아닌 ‘마세 히마와리’를 잡으러 온 것이다.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음에도, 히마와리는 몇 초에 걸쳐 소리 없이 눈동자를 깜박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의 말이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자신의 미래를 가늠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당신이라서. 그런 당신과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는 것은 오직 저만의 몫이었다. 가을이 되면 단풍을 구경하고, 겨울에는 당신의 외투에 손을 넣어 체온을 나누어 갖고……. 사계절을 함께 지내는 건 오직 나만의 욕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말을 하면 꼭,

“……단테, 나 좋아해?”

당신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잖아. 그것도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무심코 뱉은 물음에 단테의 미간이 구겨졌다.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입매 역시 일그러졌다. “허?”하는 짤막한 대꾸는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물음 대신 튀어나왔을 게 뻔했다. 물론 당신이 날 좋아한다는 말은 예전에도 들었지만, 그게 나랑 같은 크기의 마음이라고는 한 적 없잖아! 눈가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단테의 눈에는 이미 발갛게 익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당신의 대답이 무엇보다 간절했으니까.

“하…… 네 눈에는 내가, 마음에도 없는 여자와 입 맞추는 난봉꾼으로 보였나 보지?”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냥, 직접적인 표현도 없이 엄청나게 열렬한 고백을 받은 느낌이라…….”

좋아한다는 말도 듣고 싶어. 심장 소리가 너무나도 컸다. 입을 열면 그대로 소리가 새어 나올 것만 같아서, 이 쿵쿵거리는 고동에 가리지 않게끔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혼자 들떠서는 괜한 응석을 부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차 싶어 뒤늦은 변명이라도 입에 올리려던 찰나, 단테가 먼저 선수를 쳤다. 혀를 차는 대신 웃음을 참는 것만 같은 숨소리, 불쾌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채도의 음색과, 묘하게 상기된 톤의 음성으로.

“그 전에 한가지 잊은 듯한데.”

“응?”

“내 말이 고백처럼 들렸다면, 대답은 어디로 갔지?”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기어코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짓궂었다. 대답이 필요한가? 당장 이 심장 소리만 들어도 알 텐데. 여전히 목청 바로 아래에서 튀어나올 듯이 두근거리는 고동을 간신히 삼키고 있는 탓에, 히마와리는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이어지는 단테의 말이 없었다면 아마 영영 그랬을지도 몰랐다.

“나도 사람인지라, 나 좋다는 말이 기껍거든.”

얼핏 농담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농담이든 진담이든, 히마와리로서는 감응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 역시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제가 당신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조르는 만큼 당신도 제게서 받아내길 원하는 것일 테다. 다만 아무런 예열 없이 대뜸 고백을 들이미는 것에는 면역이 없어, 히마와리는 다시금 물었다.

“그럼…… 단테, 나 좋아하지?”

이전과 닮았되 명백히 다른 물음을. 이번에는 단테 역시 답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이유가 없었다. 마주한 투명한 눈으로부터, 히마와리의 대답이 한 발짝 앞에 마련되어 있음을 알아보았으므로. 기껏해야 한 발짝, 고작 그즈음의 거리를 좁히는 건 단테의 몫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고 있다.”

“나도 좋, ……응, 사랑해.”

돌아온 답이 무겁다. 그렇다면 이쪽도 마냥 가벼운 답을 돌려줄 수는 없었다. 히마와리는 혀뿌리에 준비해 둔 ‘좋아’를 지우고 급하게 ‘사랑해’를 가져다 적었다. 당신이 뭐라고 답하든 좋아한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미리 갖춰둔 답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탓에 첫음절은 차마 주워 담지 못했지만, 그 정도야 상관없을 것이다. 단테의 만족스러운 표정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빠듯한 충족감이 맞닿은 체온을 타고 옮겨붙은 듯 히마와리가 웃었다. 그와 닮지 않은 해사한 얼굴로, 그럼에도 그와 꼭 닮은 열렬한 인상으로.

단테는 제 색에 물든 히마와리를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을 엿볼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투영하는 건 하릴없이 사랑에 굴복한 자신의, 정말이지 하잘것없이 무른 낯이다. 느슨한 눈매와 말려올라간 입꼬리, 상기되어 물든 귀 끝……. 제 다정은 그토록 형편없는 꼴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 다정을 뒤집어쓸 적마다 히마와리의 얼굴이 항상 환하게 개었으므로, 단테는 문득 그녀에게 이 책임을 오롯이 떠넘길까 싶었다. 한평생 제 성미에 맞는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탈을 떠넘긴 당사자로서, 또한 그것의 유일무이한 수혜자로서. 나와 함께가 아니라면 싫다고 했지…… 그 마음은 틀림없이 저와 들어맞는다. 다만 그렇다고 한다면,

“……그 말, 네 생을 걸고 책임져야 할 거다.”

본디 단테는 탐욕스러운 성정의 남자였다. 제가 바라면 곧 거머쥐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탐하는 것들은 언제나 형체가 없어 손에 쥘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의지의 표상으로써 가치를 갖는 것, 외부와 타인의 개입 없이 오롯이 스스로 택한 결과로써 드러나는 것. 그렇기에 더없이 사랑스럽고 탐나는 것. 지난 추억 속 북극성처럼 반짝이던 친우의 노랫소리와, 당장 그의 눈앞에서 등대처럼 깜박이는 히마와리의 눈빛이 꼭 그러하듯이. 하여 단테는 마지막 선택의 여지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선택받는’ 입장이 되어야만 비로소 욕망하는 것을 소유할 수 있었다. 단테는, 히마와리가 그녀 자신의 의지로 제게 온 생을 귀속시켰으면 했다. 그럼으로써 자신 역시 그녀에게 얽매이고자 했다. 작게 숨을 들이켜는 입술로 시선이 기운 것은 그 까닭이었다.

“나는 이미 단테 거잖아. 당신이야말로 이런 날 책임져야 할 텐데, 괜찮겠어?”

단테가 바랐던 답은 허무할 만큼 가볍게 돌아온다. 평생을 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벼운 농담거리를 던지는 것에 더 어울릴 법한 말투였다. 그러나 히마와리만큼 진실성의 증명이 간단한 상대가 또 없었다. 그녀는 단테가 아는 한 가장 알기 쉬운 낯을 하고 있었으므로. 투명한 망막에 보란 듯이 제 진심을 내걸고 숨기지 않는 성정이었으므로. 단테는 능숙하게 마주한 붉음으로부터 히마와리의 속을 파헤쳤고, 당연한 수순처럼 그 올곧은 순수에 탄식했다.

깊이 고민할 가치도 없는 선택이었노라고, 그녀는 진심으로 그리 여기고 있었다. 단테가 히마와리를 ‘나의 것’이라고 지칭한 그 순간부터, 그녀의 모든 것은 곧 그의 것이 되었다. 히마와리는 아주 오래전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안길 준비를 마친 셈이었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그 역할은 응당 제 것일 터라는 발칙한 확신이 단테로 하여금 헛웃음을 짓게 했다. 단 한 순간도 달갑지 않은 적이 없었던 당돌함만큼은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히마와리의 물음이야말로 고민할 가치가 없었다. 이미 그 어리광에 답하듯 선언하지 않았던가.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취미는 없다만…… 좋다,”

기꺼이 어울려 주마. 내게 종속한 네 최후까지.

단테의 입에 걸린 헛웃음은 어느샌가 다정의 편린으로 녹아 있었다. 도무지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심장 소리를 가까스로 삼킨 채 히마와리는 그 웃음의 온도를 가늠했다.

단테의 곁은 언제나 덥기 그지없었다. 그만한 열기 속이라면 제가 느낀 회의감이며 상실감 따위는 금세 수증기처럼 증발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뿐만 아니라 내일, 어쩌면 당장 1시간 뒤에 예고 없이 들이닥칠지 모를 무수하고도 불확실한 불안과 절망까지 전부. 그런 당신이 있다면, 당신과 함께라면 쉼 없이 나아갈 자신이 있었다. 그토록 간결한 결론의 품에 안긴 히마와리가 웃었다. 단테라는 계절에야 비로소 만개하는 꽃처럼 해사하게, 혹은 그가 언제까지고 지극히 갸륵해할 절망처럼 사랑스럽게.

“그럼 같이 돌아가자. 에덴으로.”

히마와리가 아는 한 마스터는 아직 단테와 재회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참에 만나면 좋겠지. 분명 깜짝 놀랄 것이다. 어쩌면 질린 듯한 표정을 지을지도 모르고. 그래도 뭐 어떡해. 좋든 싫든,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텐데. 히마와리의 입꼬리가 실룩거리다 이내 히죽이는 곡선을 자아낸다. 그것은 몹시도 가볍고 또 유달리 짙은 색을 지닌 감정이라, 히마와리를 소리 없이 내다보던 단테에게도 순식간에 전염되고 말았다.

벚꽃이 진 자리에 돋아난 새잎을 따라 걷는 발소리는 꼭 두 사람분. 돌아가는 길에는 블레이스트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느 한쪽이 앞서거나 뒤처지는 일 없이 나란한 걸음걸이에 유독 들뜬 기색의 허밍이 섞인다. 가사 없는 흥얼거림이 두 사람 사이의 대화처럼 이어지고, 공터를 뒤로하고 그래피티를 스친 끝에 다다른 곳은 꼭 낙원의 이름을 달고 있었다.

발끝이 계단 앞에 멈춘 직후, 히마와리는 통로 벽에 새로 붙은 이름 모를 밴드의 라이브 포스터를 발견했다. 어지간히 급했는지 포스터의 아랫부분은 구겨졌고 귀퉁이의 테이프 역시 말끔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부분까지도 반가워서, 마음이 충만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렇게 점점 쌓이고 덮이는 거겠지. 이전처럼, 어쩌면 이전과는 다르게, 또 새롭게. 그렇게 생각하니 허전하다고 느꼈던 벽이 빈 캔버스처럼 보였다. 마스터가 알면 누구 마음대로 남의 건물 벽을 낙서장 취급하냐고 잔소리하겠지만. 히마와리는 작게 키득거리며 문의 손잡이를 강하게 붙잡았다. 작은 문틈 사이를 비집고 기름 냄새가 새어 나왔다.

“다녀왔습니다.”

산뜻한 인사 뒤로 낙원으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딸랑, 새 손님을 알리는 종소리는 더없이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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