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세]Still Here
이러니까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 속으로 한탄하듯 종알거린 말조차 달았다.
히마와리는 물을 홀짝이며 눈앞의 소년을 마주 보았다. 갈색 머리카락은 눈을 찌를 듯한 기장으로 잔뜩 흐트러져 있었으나 생기 넘치는 눈동자는 그에 굴하지 않고 푸르게 빛났다. 방금까지만 해도 같은 밴드의 멤버들, 그러니까 블레이스트와 한바탕 소란을 피운 흔적이 고스란히 엿보였다. 그 소란의 명분을 제공한 건 자신이었지만. 묘하게 해탈한 표정을 띄운 히마와리의 손가락이 컵을 매만졌다. 컵 위에는 블레이스트의 로고가 붉은색으로 크게 박혀 있었다.
어나더 드리밍이 끝난 지 24시간이 좀 지났을까. 듀얼긱이 끝난 직후 긴장이 풀린 히마와리는 꼬박 하루를 기절하듯 잠들고 나서야 깨어날 수 있었다. 그것이 당장 30분 전의 일. 눈을 뜨자마자 확인한 휴대폰에는 밴드맨들의 걱정이 서린 메시지가 잔뜩 몰려 있었고, 답장을 보내고 블레이스트가 들이닥치기까지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조심성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힌 건 역시나 야마토였다.
“좋은 아침!!” 쩌렁쩌렁한 인사말 뒤로 뒤따르는 소스케와 츠바사, 텟페이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항상 듣던 목소리, 곧잘 마주하던 얼굴임에도 유독 심장께가 벅찼던 건 이제 다 끝났다는 해방감 탓이리라.
블레이스트에게 고독을 침략당한 뒤의 일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네 소년의 대화는 한마디씩 얹을수록 원래의 주제에서 열 발짝씩 멀어져 갔으므로. 기억나는 건, 그래. 소스케가 몸통만 한 소스개 인형을 던지듯이 넘겨줬던 일과 츠바사에게서 물이 담긴 블레이스트의 굿즈 컵을 건네받은 일, 그리고 야마토를 제외한 세 사람이 요깃거리를 사 오겠다며 들이닥칠 때만큼의 소란과 함께 썰물처럼 빠져나간 일. 다시금 적막을 되찾은 공간에서, 야마토가 입을 열었다.
“나, 마세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뭔데?”
“마세는 아직도 여기에 있고 싶어?”
예상치 못한 질문에 히마와리는 컵을 기울이던 손짓을 멈추었다. 여기에 있고 싶은가. 소년의 올곧은 푸름을 마주하면서, 그 물음이 단순히 이 공간에 대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여기’라는 단어는 아발론을, 더 정확하게는 블레이스트를 포함한 네 밴드의 곁을 가리킬 터였다. 기껏해야 그만큼 오래 자면 허리 안 아프냐는 질문일 줄 알았는데. 컵의 손잡이를 매만지는 손길이 느지막했다.
“무슨 질문이 그래? 갑작스럽게.”
“어쩐지 지금이 아니면 못 물어볼 것 같아서 그래.”
생각해 보면, 마세는 우리한테 휘둘려서 여기까지 온 것 같거든. 마세라면 언제나 우리 편에 서고 싶어 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처럼 크림슨에 직접 대항하고 싸울 필요는 없었어. 유우나처럼 곁에서 응원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됐으니까. 우리의, 아발론의 튜너가 마세뿐이니까, 그런 이유에서 물러날 수 없었던 걸 수도 있고. 그래서 모든 싸움이 끝난 지금 물어보고 싶었어. 지금이라면 물러나도 괜찮아. 우리를 위해서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계속 여기에 있으면 이번처럼 또 언젠가 마세한테 부담을 줄지도 몰라. 그러니까,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어?
야마토는 이따금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찌르곤 했다. 지금처럼, 조금 무서울 정도로. 하지만, 히마와리는 어째선지 그 질문을 받음으로써 마음 한 켠이 홀가분해지는 걸 느꼈다. 어나더 드리밍 전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야마토의 걱정은 기꺼우나, 답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때 ‘그 사람’과의 대화로 이미 도출된 해답이었으므로.
“있잖아, 나 어나더 드리밍 때 유제스를 만났거든.”
“그래? 굉장하네!”
“그때 유제스도 나한테 그렇게 물어봤다? 너는 왜 여기 있냐고.”
“응. 그래서?”
“그래서…… 밴드가 좋아서 여기에 있다고 했어.”
어느새 빈 컵을 허벅지 위에 내려놓고, 히마와리가 슬쩍 웃었다. 이건 한 치의 망설임도 꾸밈도 없는 그저 순수한 진심이었다. 솔직히 음악 자체가 좋은지는 모르겠어. 그렇지만 밴드가 좋아. 넷이서 함께 무대에 오르고 서로 다른 소리를 내고, 그러면서도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가면서 하나의 노래로 완성되는 그 모든 게 좋아. 그래서 나는 여기에 있어. 말을 덧댈수록 목소리는 가벼워졌다. 심장이 들떴다. 라이브의 조명과 환호성, 그 모든 걸 아우르는 열기를 떠올리는 것처럼.
“음악은 소리를 즐긴다고 쓰는 거니까, 내 스스로가 소리를 좀 더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그걸로 좋다고 유제스가 그랬는데,”
“헤에…….”
“내가 소리를 즐기는 방법은, 너희랑 함께하는 거야.”
히마와리의 말이 끊어짐과 동시에 이번에는 야마토가 활짝 웃었다. 정말이지 그 사람과 꼭 닮은, 태양처럼 천진하고 난봉꾼처럼 장난스럽게.
“그리고 네가 그랬잖아, 록이라는 건 제멋대로에 바보 같은 거라고.”
“그러고 보니 그런 말 했었지.”
“그러니까, 그런 바보 같은 너희를 가장 가까이에서 구경하는 맛도 쏠쏠하지 않겠어?”
반쯤 농담 섞인 말을 끝마친 히마와리의 표정이 밝았다. 유제스와 야마토, 두 사람의 닮은 구석에 물들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에 곧잘 물들곤 하는 히마와리에게 야마토와 블레이스트는, 아발론의 색은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또 자랑스러웠다. 올곧고 선명하면서, 제멋대로에 자유롭고 유쾌한 색. 이러니까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 속으로 한탄하듯 종알거린 말조차 달았다. 사랑해 마지않는 푸른색 눈동자를 향해 제 붉은색 눈을 접어 올리면서, 히마와리는 생각했다. 저 푸름은 꼭 하늘이나 바다 같아서, 오늘도 내일도, 어쩌면 그보다 먼 미래까지도 끝없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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