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빙]관계의 표지
단테는 문득, 자신과 히마와리의 관계를 정의하는 작금의 표현이 무척이나 빈곤하다고 생각했다.
제2회 드림 소설 합작 :: https://dreamnovel.creatorlink.net/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는 받아 든 티켓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이내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 복장만큼이나 단정한, 부디 후회 없는 무대를 즐겨달라는 그럴듯한 말과 함께였다. 하여간, 겉만 번지르르한 치장으로는 이미 세계를 평정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테다. 당장 그가 발 디디고 있는 여객선만 해도 그랬다. 과하게 사치스러운 공간의 장식은 어지간한 소시민의 기 정도는 금방 꺾어버릴 수 있을 만큼 눈부시지 않은가. 마치, 우리는 감히 너희 따위가 넘볼 수 있는 수준의 적이 아니라는 속내를 과시하듯이. 허리 숙인 남자에게 대강 턱짓을 한 단테는 화려한 샹들리에를 피하듯 검은색 망토를 깊이 눌러쓴 채 아슬아슬하게 드러난 입술로 쯧, 혀를 찼다. 결코 빠르지 않은 걸음은 그 넓은 보폭을 빌어 금방 인파에 섞일 수 있었다.
크림슨이 주관하는 호화 이벤트, 세인트 엠파이어 페스의 전야제. 이 전야제에 아발론이 침투한다는 소식은 라모를 거쳐 단테에게 전해졌다. 그 애들을 도와줘. 명확하고도 간결한 부탁과 함께.
‘왜 내게 의지하지?’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으니까.’
15년 전 그날 이후로 음악에서 손을 뗀 마스터나 라모와 달리, 단테는 유일하게 자신의 음악을 관철하며 살아왔다. 설령 그 소리가 누군가의 탐욕만을 채우기 위해 이용되더라도, 혹은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더라도. 그런 단테이기에, 마스터와 라모는 그에게 아발론의 전력을 부탁하고자 했다. 두 사람이 기어코 찾아낸 희망을. 두 무리의 밴드와, 한 명의 튜너를.
‘당연하지만, 그 이벤트에는 마세 양도 참가할 거야.’
‘…….’
‘어라, 왜 그런 것까지 말해주냐는 표정이네.’
‘설명해라.’
‘단테도 사실 마음에 들었잖아?’
그래서 마세 양도 간다는 소릴 들으면 마음을 정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말하며 넉살 좋게 웃어 보이던 라모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먼 과거에 그랬듯이, 허나 조금은 바랜 듯한 웃음이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 뒤의 통찰에 꿰뚫린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하여 지금처럼 혀를 찼으리라. 쯧, 정말이지 못마땅하다는 투로.
그 뒤의 일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세세한 일을 주워 담는 일은 단테에게 맞지 않았다. 그가 기억해야 할 것은 여객선 위 이벤트와 관련된 사안뿐이었다. 가면무도회 형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과, 그렇기 때문에 정체를 들킬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점 따위의. 뭐, 고작 얼굴을 가리는 정도로 안심하기에는 단테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거대했지만 상관없었다. 당장 그의 옷차림을 살펴봐도 정장은 얼추 차려입었으나 그뿐, 얼굴을 가릴 만한 것이라곤 어깨에 걸친 검은색 케이프 정도이지 않은가. 그마저도 본 무대가 시작되면 벗어던질 생각뿐이었다. 가면무도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소품은, 그러니까 ‘가면’은 연주를 방해할 뿐이다. 참으로 단테다운 선택이었다.
다만 이제 막 이벤트 회장에 발을 디딘 지금은 구태여 이목을 끌 필요가 없었다. 하여 단테는 여전히 케이프에 달린 모자 아래에서 고요히 안광을 빛냈다. 평소에도 눈높이를 낮춰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천 조각 아래로 시야를 확보하는 건 생각만큼 버겁지 않았다.
그늘 속에서 번뜩이는 홍색의 눈동자는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그것 같아서, 근처에서 얼쩡대던 밴드맨들의 어깨가 곧잘 흠칫거리곤 했다. 그 또한 익숙한 반응이었다. 단테는 단 한 번도 상위 포식자의 위치가 아닌 적 없었으므로. ……아니, 굳이 따지자면 한 명, 예외가 있기는 했더랬다. 처음 서로의 존재를 인지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어쩌면 앞으로도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슬슬 머릿수를 불려 가는 인파 속에서, 그는 지금 그 사람을 찾고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까지 혼자 돌아다니고 있지는 않겠지, ……히마와리.”
짓씹은 입술 너머로 흩어진 이름은 그가 찾는 당사자의 것이었다. 히마와리. 단테의 목소리에 이끌려 그에게 자유를 선사하고 짧게나마 동행했던, 어느 튜너의 이름. 처음 만났던 그날도 그녀는 혼자서 호랑이굴을 들쑤시다 자신이 있는 곳까지 당도하지 않았던가. 히마와리의 무지할 만큼 무모한 성정을 몸소 겪은 바 있으므로, 단테는 혹여나 싶은 마음에 몇 번이고 회장을 훑듯이 쏘아보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짧은 동행이었음에도 뇌리에 새겨지다시피 한 오묘한 색의 정수리는 보이지 않았다.
아, 그래. 그 머리카락은 꼭 황혼을 닮았더랬다. 그 흔한 창 하나 없는 지하 감옥에서는 볼 수 없었던, 태양이 떨어질 적의 하늘. 다만 태양은 권력자에 곧잘 빗대어지므로, 패자霸者의 잔광을 집어삼켜 전리품처럼 늘어뜨린 그 머리칼만큼 그 여자에게 걸맞은 색은 또 없으리라. 자신과 그녀의 관계는 ‘반역의 공범자’라는 불온한 명명으로서 시작되지 않았던가.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으나, 곧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만나야만 한다, 에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크림슨의 수중에 제 발로 걸어들어온 이상 튜너가 필요하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크림슨과의 싸움은, 튜너 없이는 이길 수 없었으므로……
……아니, 다르다.
히마와리가 제 곁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는, 고작 그뿐인가?
단테는 문득, 자신과 히마와리의 관계를 정의하는 작금의 표현이 무척이나 빈곤하다고 생각했다. 밴드맨과 튜너, 공범자, 옛 동료가 저를 위해 마련한 안배……. 그 모든 것이 튜너라는 자격을 가리키고 있었으나, 단테가 히마와리에게서 눈여겨보는 것은 그 역량에 국한되지 않을뿐더러 한낱 ‘튜너’라는 명분을 내세워야 할 만큼 알량한 마음에서 비롯한 상념이 아니었다.
분명 보다 명료한 표현이 있을 터였다. 아니, 진실로 불만스러운 건 그게 아니다. 단테를 목마르게 하는 것은, 히마와리가 보다 각별한 표현으로써 제게 묶이지 못함에 아쉬워하는 탐욕이었다. 헛웃음 나도록 유치하게도.
“이봐, 이런 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잡념은 이름 모를 목소리에 의해 끊어진다. 녹색 천에 금색의 장식을 단 가면이 시야 한구석을 비집고 들어왔다. ……누구지? 눈에 힘을 주어 초점을 맞춰봐도 눈앞의 얼굴은 도무지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하기야, 크림슨의 관계자뿐인 이 공간에 저와 구면인 인물이 있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단테에게는 권력 앞에 무릎 꿇고 꼬리치는 지인을 둔 기억 따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하여 그는 상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뒤를 돌았다. 정확히는, 그러려던 찰나 움직임이 멎었다. 이어지는 말이 너무나도 당당했던 탓이다.
“자기 파트너는 혼자 내버려두고 말이야. 이렇게 무신경해서 쓰나~.”
……아무래도 제법 넉살 좋은 성격인 듯했다. 오지랖도 꽤 넓은 것 같고. 1분도 채 되지 않는 일방적인 대화로 단테는 상대의 성격을 어렵지 않게 추론해 냈으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파트너’. 단테가 에스코트하지 않은,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대상을 눈앞의 인물이 떠들어대고 있지 않은가. 얇게 버석대는 입술이 달싹거린다. 나에게 파트너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아니,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진정 그가 묻고 싶은 것은,
“그 녀석이 내 파트너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자신과 히마와리를 한 쌍의 짝으로 엮을 수 있었는가. 그 ‘파트너’가 히마와리를 가리킨다는 것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알 수 있었다. 그저, 그것이 당연하므로. 제 파트너라 함은 그녀뿐, 그것만큼은 지고 불변의 진실이므로. 단테는 초면의 상대가 멋모르고 빗댄 명칭으로 하여금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 제가 소유한, 지고 불변의 파트너. 그가 바라는 관계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표현이었다.
“옷을 그렇게 맞춰 입었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한 그는 출입구와 가까운 방향을 가리키며 멀어졌다. 아까까진 저쪽에 있었는데, 아직도 저기 있을지는 모르겠네. 뭉툭한 손끝을 따라 옮겨 간 시야에는 묘한 긴장감과 고양감으로 복작이는 인파가 담겼다. 단테가 입장했을 때보다 한층 수를 불린 모습이었다. 그중에서도 정중앙, 이벤트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임에도 일찍이 수선을 떠는 샹들리에 아래의 무대. 필시 저곳에 히마와리가 있으리라는 확신과 함께, 단테의 다리가 움직였다. 그 걸음은 조급했으나 조금은 들뜬 듯 보이기도 했다.
즐겨 신지 않는 종류의 신발 코가 대리석으로 된 바닥을 단단히 찍어 누르는 소리를 낸다. 그 신발을 포함해 단테가 입은 의상 전체는 라모가 부탁과 함께 건네준 것이었다. 그랬을진대 의상을 ‘맞췄다’라……. 모르긴 몰라도 라모 녀석이 허튼짓을 한 게 틀림없었다. 하기야, 이런 무도회에 어울리는 옷을 히마와리가 지니고 있을 턱이 없으니, 라모에게 도움을 청했을 테다. 부탁을 받은 라모는 옳다구나 싶어 언질도 없이 한 쌍으로 맞춘 의상을 냉큼 넘겨주었고. 이곳에서 직접 대면하고 나서야 알아차리도록 할 속셈이었겠지. 당최 누구를 위한 흉계인지.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세 음절을 떠올림과 동시에 걸음걸이에 속도가 붙었다. 하지만,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 덕에 합류하기 전부터 이르게나마 ‘파트너’ 취급을 받지 않았던가. 히마와리는 이 사실을 알는지. 분명 모를 테지만. 걸음이 점차 가벼워진다. 아득히 멀었던 소란 역시 덩달아 가까워졌다. 주변이 웅성대는 소리, 가면 안쪽에서 웅얼거리는 주인 모를 목소리와, 그에 질세라 왈칵 언성을 높이는 한 여자에게로.
“그니까, 그쪽들한테는 볼일 없다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황혼 녘을 쏙 빼닮은 머리카락. 그다음으로는 가면의 대용인 듯한 검은색 레이스로 눈을 가린 얼굴이 보였고, 그 아래에서부터는 익숙한 배색의 드레스가 눈길을 끌었다. 거칠지 않은 소재의 검은 천과 그 위를 수놓은 하얀 자수, 목을 장식한 푸른색 보석과 와인색 벨벳까지. 하나같이 제 의상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러니 파트너라는 걸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하다는 소릴 듣지. 실소가 배어 나왔다. 그러나 그 웃음은 히마와리가 제 존재를 눈치채기도 전에 사그라들었고, 그녀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단테는 둥근 어깨를 감싸 당겼다. 일련의 움직임은 응당 그래야만 했다는 숙명처럼 본인의 인식보다도 앞섰던 탓에, 너른 손아귀에 체온이 닿고 나서야 그는 제 행동을 인지할 수 있었다. 상체의 살결을 드러낸 디자인 탓인지 한기에 식은 어깨가 단테의 품에 속절없이 안겨든다.
“——!? 아니, 이건 또 뭐,”
“그래, 이 녀석의 볼일은 내게 있으니, 잔챙이는 썩 꺼지지 그래.”
“……단테?”
금방이라도 팔을 뿌리치고 덤벼들 것처럼 들썩이더니 저를 알아보자마자 얌전해진 꼴이 영락없이 잘 길든 고양이였다. 목을 꼿꼿이 세워 마주해오는 눈은 분명 붉을 터인데, 검은 장막이 그 사이를 가로막으니 아쉬움이 짙었다. 그러나 단테는 제 성에 차지 않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행동을 마다하지 않는 성정이었으므로, 히마와리의 턱 아래에 손을 넣어 베일을 걷어내는 움직임은 성마르기 짝이 없었다. 마침내 드러난 해사한 얼굴은 벌써부터 눈가가 붉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뭉근히 녹여 빚어낸 듯한 눈동자만큼이나.
보고 싶었어, 아주 많이.
말하지 않은 속내가 오롯이 닿아온다. 단테 역시 히마와리와 만나지 못한 반년 동안, 이토록 투명한 애정을 가슴 한 켠에서 지운 적이 없었다. 다만 그 마음을 말로써 한가로이 전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으므로, 단테는 깊게 눌러쓴 망토를 벗어 던지는 것으로 히마와리의 소리 없는 인사에 대꾸를 대신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활짝 핀 웃음이 맑았다.
“지금부터 뭘 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겠지, 히마와리.”
“응! 나, 단테 거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짤막했지만 마땅하기 그지없었다. 품속에서 드럼 스틱을 꺼내든 단테가 흡족한 웃음을 그렸다. 그러나 시선을 감히 자신의 것을 가로채려 한 무뢰배에게 돌리자, 그 웃음은 단번에 사냥감을 앞둔 맹수의 호기로운 경고로 변모하는 것이었다.
탐탐 드럼을 가볍게 두드리는 것으로 시작된 경합 속에서, 단테는 문득 제 소리로 전신을 물들인 히마와리를 바라보았다. 튜너니 뭐니 하는 허물과 무관하게도 절망처럼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오롯이 저만의 여름꽃. 지금 보니, 짝을 표하는 물건으로 목줄을 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의 의상과 꼭 닮은 히마와리의 목장식을 곁눈질하면서, 단테의 연주는 경쾌하게 불티를 쏟아냈다. 마치 이벤트의 개막을 알리는 불꽃놀이처럼, 불티가 튄 방향마다 관객의 환호성으로 요란했다. 다만 단테에게 그 모든 광란은 새삼스럽도록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제가 피워낸 승리의 열기를 익숙하게 삼켜내며 무대에서 내려온 손끝은 곧장 히마와리의 목덜미로 가닿았다.
단테의 색이 짙게 번진 그 살갗은, 그의 손아귀 역시 스틱의 마찰열과 관객의 호응으로 화끈거렸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찬 바람을 쐬었냐는 양 달게 익어 있었다.
“……왜, 왜?”
“다음번에는 목줄이라도 마련해 둘까 싶어서 말이다.”
“나 뭐 잘못한 거 있어!?”
“잘못이라……”
본인이 딛고 선 자리가 얼마나 험한지도 모르고 혼자 돌아다니다 꼭 탈이 나니, 최소한 줄이라도 채워둬야 마음이 놓일 지경이지 않나. 가늘게 뜬 눈웃음과 함께 대꾸하자 히마와리의 눈동자가 데록 굴러간다. 이내 어물거리며 변명을 토해내는 것을 보아 제 말을 단순히 장난 섞인 잔소리로 치부한 듯했다. 단테는, 적어도 히마와리의 앞에서만큼은 단 한 순간도 거짓이며 농, 허풍 따위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음에도.
“……안심해라. 거부권 따윈 없다는 걸, 이번에도 알고 있겠지.”
눈을 보다 가까이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이자 짤랑, 귀에 익은 금속 소리가 문득 눈앞을 스친다. 그의 오른쪽 귀를 장식한 귀걸이가 흔들리는 소리였다. 히마와리의 가는 목을 가로지른 마찰음의 궤도를 훑으면서, 단테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우와, 못된 얼굴…….”
히마와리가 무어라 중얼거리든 상관없었다. 마침, 제 것에게 꼭 맞는 목줄의 형태가 떠오른 참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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