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스터디

12. 너를 생각해서

드림 시온리엘 페어 / 공미포 4,626자

감정의 제도에서 동화 나라로 건너온 지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아직은 특별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일들을 대비하기 위해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정비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시오넬은 사브리나의 나이와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을 찾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엘림스와 예리엘은 저만의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물론 예리엘에겐 시오넬과 엘림스와 함께해야한다는 현실이 썩 내키진 않았지만 기쁨의 나라 국왕의 개인적인 명이 있었기 때문에 차마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시오넬은 앙리의 성에 자리를 잡았고 예리엘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연구의 목적으로 앙리의 성에 머무르게 되었다. 거처는 생각보다 깔끔했고 예리엘이 마법사라는 것을 감안해 왕실 내부의 서재를 자유로이 쓸 수 있는 권한도 갖게 되었다.

‘성 밖으로 나와서 다시 자유롭게 생활할 줄 알았는데….’

답답한 성안의 분위기에 짜증이 담긴 한숨을 푹 내쉬며 예리엘은 눈앞에 쌓인 책들과 연구자료를 노려보듯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소원의 돌의 힘이 발현하며 사브리나의 행복과 시간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지만 좀 더 확실하게 되돌려 놓기 위해 연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엘림스가 아티펙터였던 덕분에 아티펙트와 관련된 연구자료는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점이었다.

본격적으로 마법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기지개를 켠 예리엘은 펜을 꺼내 들고 마법진을 그려가며 본인이 세운 가설에 맞춰 마법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마법 연구는 생각보다 진전되고 있었고 가설에서 틀림 하나 없이 모든 것이 완벽했다. 다만 한가지 거슬리는 게 있다면 이따금 들려오는 총소리가 지나칠 만큼 거슬린다는 점이었다.

‘또 사격 연습인가?’

가끔 사격 연습에 가까운 총소리가 들렸는데 이 왕실에서 사격 연습이랍시고 총소리를 낼 사람은 시오넬이 가장 유력했다.

‘아이고, 어련하시겠습니까….’

어차피 오랜 시간 자리에 앉아서 연구한 덕에 집중력은 이미 바닥날 대로 바닥난 상황이었다. 머리라도 식힐 겸 자리에서 일어나 본인의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총소리가 들리는 사격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가 어느덧 저물어가며 붉고 노란빛의 노을이 번지는 석양 아래에서 시오넬은 사격 연습을 하고 있었다. 과녁에 쏜 총알 자국은 흐트러짐 없이 한군데로 모인 모습이었고 왕자는 본인의 사격 솜씨에 꽤 흡족한 듯 옅게 미소를 지었다.

예리엘은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시오넬의 사격은 깔끔하고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사격과 관련해 지식이 전혀 없더라도 그 모습을 보면 누구나 감탄할 법했다. 예리엘의 시선을 느낀 시오넬은 고개를 돌려 예리엘을 바라보았다.

“예리엘, 나에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나?”

“용건은 딱히 없습니다만, 총소리가 들려서 말이죠.”

“그래. 마침, 잘 왔어. 얘가 널 아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시오넬은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네레이드를 가리키며 무심하게 말했다. 네레이드는 물의 정령으로 평소에는 가오리와 같은 모습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평소대로라면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편은 아니지만 예리엘에게는 예외에 가까웠다.

예리엘은 네레이드를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안으며 쓰다듬어주었다. 마치 손에 물이 감기듯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 기분이 들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착한 정령인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순한 정령에게 대체 뭔 짓을 했길래 미움을 사고 있는 걸까 하는 궁금증도 들었지만 그건 정령과 계약자의 문제라 생각하며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용건이 없다면 굳이 여기에 머무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머리도 식힐 겸 나온 겁니다.”

시오넬은 굳이 예리엘을 돌려보내거나 내쫓지는 않았다. 예리엘은 시오넬과 대화하며 서서히 산등성이 너머로 기울어져 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타오를 듯 붉게 번져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실감했다.

때마침 시오넬 역시 사용하던 장총을 정리하고는 성안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굳이 그를 뒤따라가진 않았지만, 예리엘 역시 이곳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다시 성안으로 자리를 이동하기로 했다.


어느덧 밤이 찾아오고 성에도 어둠이 내려앉았다. 예리엘은 방 안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고 생각보다 진전이 있는 성과에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고도 잠시 갑작스레 몰려오는 피로감에 기지개를 켜고는 머리를 식힐 겸 문을 열고 나와 성안에 위치한 화원으로 향했다.

달빛이 내려앉은 화원은 낮에 보여주는 풍경과는 색다른 모습이었다. 서늘한 공기를 들이켜며 조용함을 즐기기 시작했다. 소음도, 자신에게 향하는 관심도 없었다. 벤치에 앉아 눈에 들어오는 꽃을 바라보다 별이 수놓아진 밤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이곳은 조용하니까 좋네.’

마침, 밤바람도 살랑이며 부는 덕에 선선함을 느끼며 복잡했던 머리를 비우던 찰나였다.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을 느낀 예리엘은 고개를 돌려 인기척을 느낀 곳을 살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으나 아마 저 사람도 머리를 비우거나 걱정거리가 있어 잠시 나왔을 거로 생각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했으나 멀리서 누군가가 예리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흠, 혼자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시오넬은 예리엘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예리엘은 익숙한 목소리와 얼굴을 바라보고는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있었습니다.”

“전에 하던 연구는 잘 되어가고 있는 건가?”

“아무렴요. 진전은 좋은 편이죠.”

예리엘은 그간 자신이 보고 기록했던 연구 결과를 이해하기 쉽게 시오넬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시오넬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자연스레 옆에 앉아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 머지않아 사브리나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군.”

“그렇죠.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가설이긴 하지만요….”

처음에는 시오넬과 단둘이서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이야기하다 보니 불편한 감정도 어느새 무덤덤하고 익숙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연구와 관련된 이야기가 끝나고 나니 두 사람 사이에는 긴 침묵이 찾아왔다. 두 사람 모두 먼저 대화를 먼저 거는 편도, 그렇다고 다정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 편도 아니었기에 생각보다 어색하고 냉랭한 침묵만이 흘렀다. 그 침묵을 먼저 깨고 대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시오넬이였다.

“그나저나 네가 그때 나를 살렸다고 들었는데.”

“그때면…. 왕자님께서 쓰러지셨던 그때 말씀하는 겁니까?”

예리엘의 물음에 시오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예리엘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그를 주시하며 대답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넌 신분과 능력을 숨기고 들어왔었지.”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무시하고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굳이 나를 살리려고 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예전에 시오넬이 사냥하러 갔다가 쓰러진 적이 있었다. 예리엘은 상황 파악을 위해 사람들을 따라간 적이 있었고 그곳에 남아있던 물의 기운을 통해 시오넬의 기억을 읽은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기억이 흘러들어온 것이 맞았다.-

어린 시절 잠깐이지만 행복했던 모습, 어머니의 죽음 이후 주변의 차가운 시선,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담아왔던 답답하고 무거웠던 감정을 읽은 예리엘은 차마 그 기억을 외면할 수 없어 마법을 사용해 시오넬을 살렸었다. 덕분에 시녀라는 신분에서 궁정 마법사로 신분이 바뀌기도 했었다.

“그냥 왕자님을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나 모른 척 거짓말을 했다. 예리엘은 언제나 직진하듯 말하는 성향이 있어 숨기는 것을 잘하지 못했다.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시오넬처럼 눈치가 빠른 사람이 알아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시오넬은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며 지적하듯 말했다.

“그럼, 본인이 거짓말에 소질이 없는 것도 잘 알고 있겠군.”

“….”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거다.”

예리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이 거짓말에 조금이라도 능숙했다면 눈앞에 왕자라는 상대를 속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텐데 천부적으로 재능 없는 거짓말에 어설픈 연기까지 더했으니 들킬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물의 힘을 통해 읽게 된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사실대로 말하면서 옆자리에 앉은 시오넬의 표정을 읽어보았다. 불쾌함과 짜증을 내도 이상해할 것이 없음에도 이상하게 표정은 덤덤했다. 오히려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은 표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런 걸까, 예리엘은 예상과 다른 왕자의 표정을 읽고는 표정을 더 굳힐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생각이라든지 행동을 파악하는 성향을 보인 예리엘에게 시오넬은 예상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예리엘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까다로운 상대였다.

“불쾌했다면 사과드리죠.”

“아니다. 이미 한참 지나간 일은 굳이 신경 쓰지 않으니.”

예리엘은 생각보다 덤덤한 그의 반응에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반응이라 꽤 놀란 것 같은데….”

“기억을 읽었으니, 불쾌감을 표현하실 줄 알았습니다.”

“지금 표현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인 것을.”

시오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현재 시점에서도 한참 과거였기에 이제 와서 화를 내고 불쾌감을 드러내 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예리엘은 본인의 생각이 짧았다며 다시 한번 더 사과했다. 시오넬은 괜찮다며 온화한 말투로 예리엘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나저나, 왕자님께서는 사브리나 여왕님과 사이가 각별하신 모양이군요.”

시오넬은 말없이 예리엘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거두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브리나는 자신의 동생이지만 어머니가 다른 이복남매였다. 분명 어릴 때는 화목하게 지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을 향한 수많은 견제와 왕실에서 추잡하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지내며 분명 자신은 사브리나를 미워했지, 각별하게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미워했다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시오넬에게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 것은 라라의 만남이 있었다. 사브리나는 시간의 탑에서 바깥세상과는 다른 시간대를 보내며 빠르게 늙어갔고 그 이유에는 라라가 존재했다.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자신을 애틋하고 가슴 저리게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글쎄. 그게 각별한 건지….”

“때로는 본인의 감정에 솔직해질 필요도 있는 법이죠.”

“예리엘, 지금 참견하는 건가?”

예리엘은 시오넬의 말에 피식하고 웃었다. 시오넬의 반응이 웃겨서 나온 웃음인지, 본인을 되돌아보며 나온 어이없음인지 분간은 가지 않았다. 본인 또한 누군가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글쎄요. 제가 누군가에게 참견할 처지는 아니지만….”

“….”

“그보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네요. 왕자님도 이만 들어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잠깐 앉아 머리를 식히려고 했던 것이 벌써 자정을 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시오넬도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리엘은 방에 들어서며 시오넬과 나눈 대화를 곱씹어보았다. 분명 ‘감정에 솔직해져라.’, 라고 본인이 시오넬에게 이야기했었다. 그러는 자신은 마음이 이끄는 감정에 솔직해져 본 적이 있던가.

‘하아….’

솔직하게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용하고, 이용 가치가 떨어졌을 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녀사냥하기에 바빴다. 예리엘은 어린 나이에 귀족들이 펼치는 마녀사냥을 당해왔으며 그런 일에 진절머리를 느껴 사람들과 동떨어져서 생활했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은 어떠한가. 왕족과 함께 생활하며 마법을 연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언젠가 시오넬도 여타 다른 귀족들처럼 뒤통수를 치진 않을까 걱정해 왔었다. 그러나 시오넬에 대해 알아갈수록 예리엘은 그가 본인과 많이 닮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들에 대한 불신, 굳게 닫은 마음과 강해지지 않으면 죽음뿐이라는 삶을 살아온 것.

‘머리가 아프네. 얼른 자야겠어.’

예리엘은 침대에 몸을 뉘며 불 꺼진 방안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모든 게 어색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기에 때로는 무계획이 정답이라고 느낄 때도 많았다. 이러한 생활방식도 예상한 것도 아니었기에 예리엘에겐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지만.

서서히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예리엘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자고 일어나면 복잡했던 감정과 생각, 그리고 쌓여있던 스트레스도 풀리며 한결 나아질 것이다. 모든 것은 내일의 자신에게 맡기며 의식이 멀어져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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