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관

아이하펜_일기

드림

일과 후 돌아오거든 우선 협탁 위의 상자를 챙겼다. 불그죽죽한 상자를 열면 우단에 싸인 목걸이가 나왔다. 좋게 말하면 검소한 세간에 보석함 같은 건 눈에 띄어 그리 두었다. 한 사람을 대신해 생명력이며 소중한 물건을 바쳐야 만들 수 있다는 수호의 부적이었다. 일기에 의하면 나는 모든 일이 끝난 이후 직접 돌려달라 당부하며 부적의 재료로 반지를 건넸고, 그 사람은 약속을 이행했다. 가족에게 받은 귀중한 반지였다. 그런데도 기억하지 못했다. 누군가를 돕고 마음에 두었다. 이 정도였다. 이런 이상한 일은 그가 밀레시안이란 것으로 설명이 됐다. 나는 투아하 데 다난, 파인하펜이란 밀레시안을 기억할 수 없었다. 아무리 연인이라도.

  일기에서 그를 특정지을 수 있는 호칭은 여신을 구출했다는 밀레시안, 팔라딘 수련생 밀레시안, 빛의 기사, 에린의 수호자, 파인하펜 씨였다. 이전에 나온 밀레시안이 동일인물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지금에 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날그날 본 밀레시안의 이름이며 인상착의를 적는 게 고작이었다. 육신도 이름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으니 그 마저도 무용지물이었다. 혹 소설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내 필체와 부적의 미스릴 체인이 아니었다면 그리 여기고 잊었을 테다. 그러니 일기를 몇 번이나 읽고 사슬을 풀지 않았다.

  일기장은 표지가 떠버렸다. 파인하펜이 나오는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어둔 탓이었다. 몇 달째 수첩을 접지 않다가 이제 마지막 장이 남았다. 성문 앞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뒤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들 수첩을 접을 일은 없었다. 마지막을 채우기 전 앞선 일기를 펼쳤다.

밀레시안은 나와 다르다. 파인하펜 씨가, 자신이 무사히 돌아올 증거로 가져온 책에 상세히 나와 있다. 그러니 이렇게 그와의 일을 꼬박꼬박 적는 것이다. 육체가 소멸한다해도 다른 육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게다가 빛의 기사인 바 신체만 강한 게 아니다. 그치만. 그치만 강한 사람이라며 모든 희생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육신의 소멸과 희생은 다른 이야기니까. 반지를 넘긴 건 그런 표시였다. 흔쾌히 받아간 것도 표시가 아닐까. 믿고 싶지만 파인하펜 씨는 수호의 부적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내가 그를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단 자기만족만 채우게 되었다.

파인하펜 씨가 수호의 부적이 어떤 원리인지 알아버렸다. 스튜어트 선생님이 말해주었다고 한다. 반지의 주인을 모르시니 그랬겠지.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며 둘러댔다. 파인하펜 씨는 옷깃에 반지를 숨기며 고맙다 말했다. 답례로 우쿨렐레 연주라도 들려주겠다는 걸 한시가 급하니 서둘러 달라 쫓아냈다. 언젠가 팔라딘 수련장에서 본 파인하펜 씨는 우쿨렐레 보다 더 작은 손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일기장 옆에는 물잔도 두지 않았다. 내 얼굴이 어떻게 비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혹자는 어차피 연인관계인데 무얼 부끄러워 하느냐 생각할지 모르겠다. 전투 중에 드는 공포며 감정들이야 오랜 훈련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 거기에 매달린 덕이었다. 그리고 그 탓에 연정 앞에서 약했다.

이멘 마하에는 서점이 없으니 던바튼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서점 주인과는 예전에 안면을 텄다. 아이라도 여신을 구출한 밀레시안을 알았다. 구하는 서적을 직접 찾아주었다 했다. 티르 나 노이부터 리다이어에 관한 것까지 다양했다. 개중에서 구하기 쉽다는 책을 몇 권 읽어보았다. 이런 책을 읽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이라는 파인하펜을 기억했다.

말만 들어서는 여느 밀레시안과 다르지 않았다. 꼭 성당이나 무기점 방향에서 서점으로 달려와 다시 문게이트로 사라졌다. 잊어버릴 즈음 나타나 성당에서 성수를 받아가는 통에 기억한단다. 매번 화살을 잔뜩 사가는 통에 무기점에서도 환영 받는다고. 값 나가는 음악서적을 사간 터라 아이라도 좋아하는 손님이라 말했다.

당연히 그걸로만 반가운 건 아니죠. 파인하펜 씨는 말재주도 연주 솜씨도 좋거든요.  마지막으로 봤을 땐 타라에 간다고 들었어요. 언제 파인하펜 씨가 오면 말씀이라도 전해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타라에 있단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멘 마하는 접경지가 많았다. 마음만 먹으면 탈틴, 타라, 던바튼에 갈 수 있었다. 덕분에 대강이라도 소식이 밀려왔다. 던바튼에서 들어온 소문이 이멘 마하를 거쳐 타라로 올라갈 때도 있었다. 파인하펜이 던바튼에서 타라로 향하면서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단 사실에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그러니 내 몫은 죄책감이며 자책이 맞겠다. 길거리까지 떠도는 그의 무용담은 꽤나 흥미진진했다. 구미를 당기는 이야기는 대개 위험천만하기 마련이었다. 파인하펜은 무리하지 말아달란 내 부탁을 여전히 들어주지 않았다. 내 몫이 아닌 서운함이 어물쩍 올라왔다. 가슴이 먹먹한 것도 그에서 왔는지. 제대로 된 기억도 없어서인지. 에린의 수호자에게 감사하다 적은 일기를 구기려다 손에 힘을 풀었다.

반지는 가족에게 받은 물건이니 온전히 내 것이 아니었다. 남에게 아예 줄 수 없었다. 협탁 위에는 촛대, 창가에는 화분, 서랍 안에는 큐브, 침대 아래에는 숨겨둔 토끼인형이 있었다. 파인하펜 씨 덕에 집안에 물건이 많아졌다. 일어나면 화분에 물을 주고, 밤에는 큐브를 돌리다 잠들었다. 하지만 수호의 부적을 새로 만들 재료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자꾸만 잊어버리는 나를 위해 파인하펜 씨가 자주 찾아왔다. 그런들 감정의 깊이가 비슷할지.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려 내가 당신을 잊고, 지키고 싶단 마음이 다해 부적이 구실을

  문장을 끝내지 못해 마침표도 없었다. 긴 여백에 전날과 다음날의 일기가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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