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드림 단편 모음집

LUCA

옥타비넬 기숙사 드림

LUCA (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 현존하는 모든 생물의 공통 조상)

현재 지구에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의 공통 조상을 뜻하는 단어. 모든 생물의 공통 조상은 약 35억 년에서 38억 년 사이(고시생대)에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출처 : 위키백과, 모든 생물의 공통 조상 페이지)

 

 

“플로이드, 왜 이제 온 겁니까!”

 

금요일 오후. 영업 준비가 한창인 모스트로 라운지에, 아줄의 날카로운 호통이 울려 퍼진다.

그를 화나게 한 원인, 플로이드 리치는 오늘도 기숙사 복을 입은 건지 걸친 건지 모를 꼴을 하고 나타나더니 비뚤어진 모자를 아무렇게나 고쳐 쓰며 넉살 좋게 웃었다.

 

“미안~ 아기새우가 뭔가 재미있는 걸 하고 있길래. 그거 구경하느라 늦었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요?”

“뭐야, 왜 이제 왔냐고 묻길래 답한 건데 변명이라니?”

 

혼내는 쪽은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날이 바짝 섰는데, 정작 혼나는 쪽은 뭐가 문제냐는 듯 눈만 끔뻑이고 있다.

이런 상황은 좋지 않다. 차라리 대놓고 싸우는 거면 잽싸게 말리기라도 할 텐데, 이래서야 화내는 쪽이 정당한 이유로 말을 꺼낸 건데도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나?

이런 상황을 처리하는 일엔 익숙한 멜로드는 잽싸게 아줄에게 다가가 예민해진 상대를 달랬다.

 

“자, 자. 너무 화내지 마세요, 사감. 그래도 늦게나마 오셨잖아요? 그것보다, 아까 보여주신 식기 말이죠.”

 

이럴 땐 일 이야기로 신경을 돌리는 게 효과적이다. 사람 다루는 법을 잘 아는 멜로드는 은근슬쩍 아줄을 끌고 안으로 들어가며, 플로이드가 나타나기 전 화제에 올랐던 식기 이야기를 꺼냈다.

후배의 매끄러운 일 처리에 속으로 감탄한 제이드는 잔소리로부터 해방된 제 형제에게 주의를 돌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같이 하교할 걸 그랬군요.”

“글쎄다? 그랬으면 제이드도 같이 늦었을걸?”

“후후. 그건 그렇네요.”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아이렌에 관련된 일이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울렸을 가능성도 있지. 자신의 시간 감각을 믿지만, 제가 이 학교의 홍일점이자 감독생에게 가진 관심이 보통이 아님을 자각하고 있는 그는 제 옆에 앉는 플로이드에게 물었다.

 

“그래서, 아이렌 씨는 무슨 재미있는 일을 하고 계시던가요?”

“그게 말이지, 무슨 꽃잎으로 손톱을 물들이겠다고 가루랑 꽃잎을…….”

 

아줄의 반응에 뚱해져 있던 것도 잠깐일 뿐. 아이렌에 대해 떠드는 플로이드는 금방 아이처럼 웃으며 제가 보고 들은 걸 형제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다른 기숙사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 좋아하는 여자아이 이야기에 푹 빠진 두 사람이란 얼마나 평화로워 보이는가.

겨우 아줄의 심기를 돌보고 온 멜로드는 여전히 일하고 있지 않은 리치 형제를 보며 한탄했지만, 그들을 탓하지는 않았다. 지금 저 사이에 끼어들어 일해야 하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했다간, 플로이드에게 척추가 뽑힐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멜로드의 시선이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던 걸까.

조잘조잘 아이렌에 대해 떠들던 플로이드가, 갑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후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뭐야, 왜 그렇게 빤히 봐?”

“네? 아니…….”

 

야단났다. ‘여기서 왜 일 안 하고 계시나 봤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살아남기 위해 눈치와 처세술을 비약적으로 발달시킨 멜로드는 재빨리 변명거리를 생각해내다가, 이윽고 늘 품고 있던 의문을 핑곗거리로 삼았다.

 

“뜬금없는데, 형제끼리 같은 상대를 좋아하는 게 신기해서요.”

 

이 이유로 보고 있던 건 아니지만, 늘 이런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리고 장담하는데, 아마 자신만 이런 생각을 한 것도 아닐 것이다. 다른 기숙사생들도, 타 기숙사 사람들도, 심지어 교사들마저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러나 플로이드는 그 신기함에 공감할 수 없는지 해괴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미간을 구길 뿐이었다.

 

“그게 신기할 일인가?”

“뭐, 그럴 수도 있다곤 생각하지만…… 보통은 한쪽이 포기하거나 서로 경쟁하지, 동시에 좋아하면서 사이좋기는 힘들죠?”

“아기새우는 내 건데 왜 내가 제이드랑 경쟁해야 하는 건데?”

 

그 말에는 어떠한 의도도 없었다. 도발도 과시도 아닌, 담담한 사실 직시일 뿐이었지.

하지만 멜로드는 경악한 표정으로 제이드의 눈치를 살폈다. 우스운 건, 눈이 마주친 제이드도 제 형제처럼 담담히 대응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하군요.”

“그걸로 괜찮은 거냐고요, 부사감.”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아이렌 씨와 저는 잘 통하는 사이니까요.”

 

중요한 건 실질적인 소유가 아닌 이해다, 뭐 이런 이야기인 걸까. 멜로드는 알 수 없었지만, 자칫 시비로 생각할 수 있는 대꾸임에도 플로이드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 걸 보아 이 형제는 정말 서로가 좋아하는 여자가 같은 게 아무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애초에 이건 소라게 군이 상관 쓸 이야기가 아니지 않나?”

 

오히려 이상한 취급 받는 건 조용히 대화를 방해한 멜로드 쪽이었다. 마치 왜 쓸데없는 참견 하냐는 듯한 플로이드의 말속에 숨은 공격성을 눈치챈 멜로드는 이번에도 능숙하게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창조해냈다.

 

“아니, 저도 형제가 있으니까 신기해서 한 소리죠. 저는 형이랑 같은 사람 좋아하게 되면 아마 제가 포기할걸요?”

 

다행히 이 변명은 매우 그럴싸해서, 두 형제는 특별히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대신 저 의견에 각자 매서운 반론을 해, 후배의 입을 다물게 해버렸지만 말이다.

 

“군소 군이랑 소라게 군은 여자 취향이 완전 딴판일 거 같은데.”

“동의합니다. 그리고 모건 씨가 먼저 포기하겠죠.”

“…….”

 

역시 이 두 사람은 건드는 게 아니다. 정말이지 말로도 마법으로도 이길 수 없는 양반들이다.

아연실색하는 멜로드는 반박할 수 없는 사실에 입만 뻥긋거리다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구원의 목소리에 자리를 떴다.

 

“멜로드 씨, 뭐하십니까!”

“네, 네. 지금 갑니다!”

 

아줄이 부르기 무섭게 뒤돌아 뛰어가는 멜로드의 걸음은 참으로 빨랐다. 플로이드는 줄행랑치는 멜로드를 턱을 괸 채 바라보다가, 갑자기 제이드 쪽으로 획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이상한가?”

“예?”

“아니. 나는 딱히 제이드가 아기새우를 좋아해도 별로 신경 안 쓰이는데. 싫어하는 것보단 낫지 않나?”

 

이런. 한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 이야기가 신경 쓰였던 걸까.

제이드는 제 형제가 평소 얼마나 관심 없는 이야기는 빠르게 잊게 되나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걸 물어본 사실 자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아이렌에 대한 거라면 아무래도 신경을 쓰게 되는 걸까. 플로이드가 보여준 뜻밖의 반응에 흥미롭다는 듯 웃은 그는 상냥하게 대꾸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취향이 꽤 다른 저희가 이렇게 같은 걸 좋아하게 되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아, 그래서 말인데. 아까 그 이야기 말이야, 아기새우가 그 죽같이 된 꽃잎 반죽을…….”

 

역시 자신들은 이상한 게 아니다.

서로를 통해 그걸 확인한 리치 형제는 다시 아이렌의 이야기를 하며 영업시간까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한 번 든 의문이라는 것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으니.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미, 후배가 던진 말이 깊게 뿌리 박아 뿌리를 내린 후였다.

 


 

다음 날.

주말임에도 언제나처럼 일찍 일어난 제이드는 테라리움을 손볼 때 필요한 도구를 사러 밖으로 나섰다가,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익숙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아이렌 씨.”

 

상가 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카페 앞. 야외 테라스 자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던 아이렌은 비어있는 맞은편 자리에 앉는 제이드를 요란하지 않게 반겨주었다.

 

“제이드 선배. 혼자 외출하신 거예요?”

“그렇습니다. 필요한 게 있어서 잠깐 사러 나왔지요.”

“아하.”

“아이렌 씨는 어쩐 일이십니까?”

“좋아하는 작가 책이 오늘 나온다고 해서 서점에 다녀왔지요. 택배로 시킬 수도 있겠지만 저는 직접 가서 사는 쪽을 더 좋아해서요.”

 

‘성격이 급하기도 하고, 택배는 늘 조금씩 불안하다고 할까.’ 그리 덧붙이며 멋쩍게 웃은 아이렌은 머그잔 옆에 있던 책을 들어 보였다.

제이드는 빠르게 책의 제목과 저자를 훑어본 후, 책을 든 상대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정한 길이로 정리된 옅은 연분홍색 손톱은 짙은 다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손톱이 예쁘게 물들었군요.”

 

보통 이런 상황에서 말을 건다면 ‘손톱을 물들였느냐’라던가 ‘손톱 색이 바뀌었다’라고 해야 할 테지만, 이미 상황을 알고 있는 제이드는 깔끔하게 칭찬만 해주었다.

아이렌은 의문을 가지지 않는 상대를 신기하다는 듯 보고 책을 내려놓았다.

 

“제가 꽃물 들인다고 말씀드린 적 있던가요?”

“플로이드에게 들었습니다.”

“아하.”

 

의문이 해소된 아이렌은 개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이드 선배에게도 해드릴까 했는데, 몇 시간이나 손가락을 묶고 있는 건 싫다고 거절하시더라고요.”

“그럴 것 같습니다. 답답한 건 못 참는 성격이니까요.”

“그렇죠? 선배는 어때요? 다음에 할 때 해드릴까요?”

“생각해보겠습니다. 재미있어 보이니까요.”

 

식물에 대한 거라면 자신도 알 만큼은 알고 있다. 지상에서는 옷을 염색하는데 식물을 쓰는 경우도 많다고 했으니 손톱을 물들이는 꽃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지. 어떤 식으로 물들이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아이렌이 제게 뭔가를 해준다는 건 상상만 해도 즐거우니까.

 

“선배는 손이 예쁘니까, 물들여 놓으면 분명 보기 좋을 거예요. 다섯 손가락 전부 물들이기 부담스러우면 한 손가락만 물들여도 되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렌은 자연스럽게 제이드의 손을 잡고 손톱이 있을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손길은 참으로 다정해서, 그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와중. 주문도 하지 않은 손님이 나타난 걸 귀신같이 눈치챈 점원은 두 사람의 테이블에 다가와 추가 주문을 권했다. 제이드는 아이렌이 시킨 것과 같은 커피를 주문 후,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어떤 책을 사셨습니까?”

“보실래요? 그렇게 유명한 작가는 아니지만, 저는 좋아해요.”

“감사합니다, 그럼.”

 

책을 넘겨받은 그는 가볍게 페이지를 넘기며 내용을 살폈다.

 

“수필집이군요. 이런 것도 읽으셨습니까?”

“다른 건 안 읽죠. 좋아하는 작가의 수필이니까 궁금한 거니까요.”

“아하.”

 

알 것 같다. 원래 관심 있는 대상의 생각이라면 뭐든 궁금한 법이니까. 그래서 자신도 이 책을 받아든 것이고 말이다.

주문한 커피가 나올 때까지 내용을 훑어보던 제이드는 커피가 나온 후에는 책을 돌려주고, 아직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음료를 홀짝거렸다.

 

“이제 돌아가실 겁니까?”

“아뇨, 나온 김에 산책 좀 하고 가려고요.”

“그럼 저도 함께해도 됩니까?”

“선배는 살 거 사셨어요?”

“예.”

 

그는 구체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작은 쇼핑백 안에 든 원예 도구들을 보여주었다.

아이렌은 슬쩍 고개를 빼 내용물을 살펴보더니, 소리 없이 미소 지어 보였다. 보아하니, 제이드가 자신의 책에 흥미를 보인 것처럼 그 또한 제이드의 취미 생활을 엿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저야 거절할 이유가 없죠. 같이 가요.”

“감사합니다.”

“제가 더 고맙죠.”

 

아이렌은 뭐든 허락하는 관대한 사람 같아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을 때는 누구보다도 냉정해지곤 했다. 상대가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 해도 혼자 있고 싶을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홀로 빠져나가곤 했으니까.

그러니, 어찌 고맙지 않을 수 있겠나. 굳이 혼자 외출하여 돌아다니던 중 동행을 허락해 준 이 순간이 말이다.

제이드는 아직 미지근한 온기가 남은 커피를 깔끔하게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페를 나선 두 사람은 정처 없이 섬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거리를 걷고, 흥미로운 것이 있다면 구경하고, 다리가 아프면 잠깐 쉬기도 하는 둥.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하던 두 사람이 이윽고 도착한 곳은, 모래톱이 아름다운 현자의 섬의 해변이었다.

 

“아.”

 

오래 걸어서 살짝 피곤해졌던 아이렌은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금방 표정이 밝아졌다. 옆에 있는 제이드는 보이지도 않는지, 성큼 앞서 나아가 파도가 닿는 곳까지 걸어간 그는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를 파도의 흐름을 따라 응시했다.

 

“오늘은 파도가 유독 잔잔하네요.”

“바람이 덜 불어서 그런가 봅니다.”

 

한발 늦게 아이렌의 옆으로 돌아온 제이드는 윤슬을 담고 있는 제비꽃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감정이 풍부한 것과 별개로 언제나 표현을 약간 억누르는 탓에 표정 자체는 잔잔하게 유지하며 살아가는 아이렌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아이처럼 웃으며 파도를 좇고 있다.

 

“아이렌 씨는 정말 바다를 좋아하시는군요.”

 

얼마나 좋으면 이렇게 웃을 수 있을까. 제이드는 그게 신기했다.

여전히 물결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렌은 그 질문을 예사롭게 여긴 채 편하게 답하였다.

 

“뭐랄까,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니까요? 차분해지고, 편안해진다고 할까.”

“고향이 떠올라서 그렇습니까? 분명, 아이렌 씨는 항구 도시 출신이라고 하셨지요.”

“으음, 그것도 있겠지만…….”

 

잠깐 고민하던 아이렌은 그제야 제이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냥 바다 자체에 그리움을 느낀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네요. 애초에 제가 살던 동네는 바다에서 좀 떨어져 있던 곳이라, 바다를 보려면 대중교통으로 1시간 가까이 이동해야 했고요. 그래도 바다가 익숙한 사람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바다 자체가 그립다, 인가.

자신들이 그런 말을 하면 또 모를까. 인간에게서 이런 말을 듣자니 참으로 기분이 묘하다. 물론 아이렌은 때론 인간이 맞나 싶은 언행을 할 때가 있긴 하지만……. 일단 DNA는 인간의 그것이지 않던가.

 

“누가 보면 아이렌 씨도 인어인 줄 알겠군요.”

“흠, 제가 인어라면 어떤 인어일 거 같아요?”

“새우부터 떠오른다면 우스울까요.”

“하하. 플로이드 선배가 들으면 좋아할 거 같네요.”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웃어 보인 아이렌은 갑자기 불어온 바닷바람에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했다. 소금의 짠 내와 미네랄의 냄새가 진동하는 습한 바람은, 제이드에겐 확실히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생명체의 고향은 바다라고 해도 되니까, 이상한 건 없는 일 아닐까요?”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비린내를 온몸에 휘감은 아이렌은 다소 추상적인 이야기를 꺼낸다.

제 여자의 이런 엉뚱한 면을 좋아하는 그는 진심으로 흥미로워하며 대화에 빠져들었다.

 

“확실히, 생명의 기원은 원시 바다에서 기원했다는 학설이 있지요.”

“역시 이 세계도 비슷하구나.”

“아이렌 씨 세계에도 그런 학설이 있습니까?”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요. 보통 심해 열수구 아니면 해변 근해에서 최초의 생명체가 태어났을 거라고 하죠. 저희 세계에서는 심해 쪽이 더 정설로 받아들여졌어요.”

 

역시 생명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제이드는 제가 아는 지식과 아이렌이 알려준 지식을 비교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느 쪽이든 바다가 기원인 건 같으니까요. 그러니까 인간이 바다를 향해 그리움을 느끼는 건 자연스럽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보통은 바다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지 않던가. 보통 인간은 물에 빠지면 호흡하지 못하니까 말이다. 심지어 상어나 육식 어류에게서 자신을 보호할 단단한 외피도, 날카로운 이나 발톱도 없어서 호흡을 참는다고 하더라도 위험에 처하기 일쑤이지 않나.

그러니, 따지고 보면 이렇게나 바다를 갈망하는 건 ‘이상하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제이드 리치에게 이상하다는 건 전혀 기피 할 이유가 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지.

 

“그러고 보니 아이렌 씨는 환생한다면 고래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하셨죠.”

“와, 그거 기억하고 있으시네요?”

“아이렌 씨에 대한 거라면 뭐든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흥미가 생긴 것이라면 뭐든 깊게 파고들고, 전부 파악하려고 하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뒷말을 삼킨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흰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 보며 상대가 기꺼워 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도 전문가는 아니라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고래의 조상은 원래는 육지에서 번성하다가 바다로 돌아갔다고 하더군요.”

“맞아요. 고래는 계통학으로는 우제목에 속하잖아요. 육지 생물과 한통속이죠.”

“알고 계셨군요. 하긴, 발굽 달린 동물을 좋아하신다고 하셨으니 아실 것 같기도 했습니다.”

 

아이렌은 자신 만큼이나 외골수적인 면이 있고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으니까. 이런 반응이 나올 것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하지만 어차피 알고 있어도 상관없었다.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건, 이다음에 할 말이니까.

 

“뭔가, 아이렌 씨와 닮았군요. 육지에서 바다로 돌아간다는 부분이.”

 

그의 예상대로 저 말을 들은 아이렌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배시시 웃어버렸다.

마치 사랑 고백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볼을 붉히고 웃는 그 얼굴은 참으로 사랑스러워,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입이라도 맞출 뻔했다.

 

“그럼 인어가 된다면, 전 고래 인어가 될래요.”

“잘 어울릴 것 같군요. 돌고래 같은 종류라면 귀여울 것 같습니다.”

“돌고래는 심해로 못 가지 않나요?”

“돌고래랑 돌고래 인어는 다르지요. 저랑 곰치가 같지는 않으니까요.”

“아하.”

 

제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멋쩍어하며 코밑을 훔친 아이렌은 이마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얼굴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똑바로 색이 다른 오드아이를 마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저는 가끔은 선배들이 부러워요. 저도 바다에서 태어났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나 말이다. 어차피 궁극적으로 따지자면 시작점은 같을 터고, 이 여자는 인간보다는 인어가 체질에 맞을 듯한데. 어쩌다가 다리를 달고 태어난 걸까.

바다, 정확하게는 제가 태어나 자란 그리운 심해를 떠올리게 하는 여자를 가만 응시하던 제이드는 눈앞의 자그마한 코에 입을 맞췄다.

 

“사람은 태어날 장소는 고를 수 없지만, 죽을 장소는 고를 수 있지 않습니까.”

 

입술로 콧등을 살짝 훑은 그는 해풍을 머금은 새까만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무엇 하나 바다에서 난 것이 없는데도 본능적인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상대의 육신은, 높은 체온 덕분에 심해의 열수구를 떠올리게 했다.

모든 생명의 근원, 육신에 새겨진 고향, 영혼이 느끼는 향수(鄕愁)가 향하는 곳…….

‘아, 그래서 플로이드도 아줄도 자신도 그렇게나 이 여자에게 이끌리는 것인가. 의지가 아니라, 영혼이 본능적으로 상대를 갈구하는 거였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가, 아까 하려다가 삼켜진 말을 다시 토해내었다.

 

“그러니 너무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원하신다면, 언제든 제가 태어나 자란 곳으로 데려가 드릴 테니.”

 

아마도 거기가 이 여자가 있을 올바른 자리일 테니까.

그리 믿어 의심치 않는 제이드는, 자신보다 한 뼘은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어라?”

 

일요일 정오, 고물 기숙사 앞.

오전 내내 방에서 늘어져 있다가 심심함을 못 이기고 아이렌을 만나러 온 플로이드는 고물 기숙사에 그림밖에 남아있지 않은 걸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아는 아기새우는 분명 주말엔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집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대체 어딜 간 걸까. 의아함에 전화를 걸어보아도,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안 받네.’

 

이럴 때 만약 아줄이라면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며 여기저기 아이렌의 행방을 수소문하겠지. 제이드라면 침착하게 문자를 보내놓은 후, 제 할 일을 하러 갈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찌하느냐? 답은 간단했다.

 

‘뭐, 어차피 거기 있겠지.’

 

제가 아이렌에 대해 모든 걸 알지는 못해도, 감 하나는 좋지 않던가. 상대가 언제 연락이 두절 되는지, 그럴 때마다 어디에 있었는지 대충 파악하고 있던 플로이드는 망설이지 않고 학교 밖으로 향했다.

정문을 빠져나가 얼마나 걸었을까. 학교 건물은 멀어지고 섬을 둘러싼 바다는 가까워지는 중. 희게 부서지는 파도가 보일 만큼 해안가 가까이 도착한 플로이드는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하고 씩 웃었다.

 

‘아, 역시나.’

 

마치 새우 꼬리 같은 새까만 땋은 머리. 익숙한 교복 재킷. 바람에 나부끼는 치마 끝자락과 튼튼한 워크 부츠까지.

바위에 걸터앉아 고개 숙인 채 움직이지 않는 그건, 분명 자신의 아기새우였다. 플로이드는 제 직감이 틀리지 않은 점을 기뻐하며 살며시 옆에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아기새우야.”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던 걸까. 책을 읽고 있던 아이렌은 갑자기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책갈피를 읽던 페이지에 끼워 둔 그는 예고 없이 나타난 플로이드를 미소로 반겼다.

 

“플로이드 선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기새우 찾아왔지.”

“저를요? 그런 거라면 전화를…….”

“안 받던데?”

“예?”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확인한 아이렌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모든 알림을 무음으로 해둔 탓에, 상대에게 전화가 온 걸 이제야 눈치챈 것이었다.

 

“죄송해요.”

“됐어. 술래잡기 같고 재미있었으니까.”

 

만약 여기 없었다면 좀 짜증이 났겠지만, 결과적으로 제가 찾지 않았나? 그러니 정말 괜찮다.

자세를 고쳐 편하게 바위에 걸터앉은 플로이드는 자신보다 한참 작은 아이렌에게 몸을 기대었다.

 

“뭐 읽어?”

“어제 산 책이요.”

“헤에, 재미있어?”

“저한테는요. 읽어보실래요?”

“됐어. 관심 없고.”

 

상대에 관한 거라면 뭐든 알고 싶어 하는 제이드와 달리, 플로이드가 궁금한 건 아이렌 그 자체뿐이었다. 물론 상대가 독서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게임을 하고 있었다면 관심을 가졌을지도 모르지만, 책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아이렌의 무릎 위 책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바다를 바라보는 플로이드는 소동물처럼 머리를 상대에게 비비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책을 읽는 거야?”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읽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책을 덮고 잠깐 쉴 때는, 수평선을 바라보는 거죠.”

“그러면 덜 지루해?”

“그렇다기보단……. 좋아하면 곁에 있고 싶은 법이니까요?”

 

알 것 같다. 자신도 그래서 아이렌을 찾아 여기까지 온 거니까.

그렇다면 아이렌에게 있어 바다는 그 정도로 애틋하고 좋은 것이란 뜻인가.

딱히 질투하는 건 아니지만 인간인 아이렌이 그토록 바다에 애착을 가지는 게 신기해,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바다가 좋아?”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이렌은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기만 한다.

플로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의 반응이 의아해,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였다.

 

“뭐야, 왜 그렇게 빤히 봐?”

“아니, 어제 제이드 선배랑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게 신기해서.”

“그래?”

 

어제 제이드랑 같이 있었던 건가. 제이드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후 정체 모를 배신감을 느낀 플로이드가 입을 닫은 사이. 아이렌은 뒤늦게 상대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생각해보면, 육지 생물들은 모두 달 때문에 바다에서 쫓겨난 거니까 바다를 그리워 해도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요?”

“엥? 무슨 소리야, 그건?”

“흠.”

 

말을 고르는 중인 걸까. 덮어둔 책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침음 하던 아이렌은 살짝 고개를 돌려 제게 기댄 플로이드와 얼굴을 마주했다.

 

“이쪽 세계는 인어도 있고 다른 종족도 있어서 진화에 관련된 학설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세계에는 이런 이론이 있거든요. 왜,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잖아요?”

“응, 있지.”

“그건 달이랑 태양의 중력 때문에 생기는 거잖아요? 선배는 똑똑하니까, 굳이 자세한 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상대가 얼마나 명석한지 잘 아는 아이렌은 플로이드가 지루해할 이야기는 과감하게 뺀 후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쨌든, 수 억 년 전 원시 바다가 있을 즈음에는 달이 훨씬 가까이에서 공전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조수 간만의 차도 훨씬 컸고요.”

“아하. 뭔가 알 거 같네. 인어들 사이에서도 ‘어린 인어는 썰물 때 못 빠져나오는 사고도 종종 일어나니까 애들끼리 해안가에 함부로 가지 마라’라는 말을 하거든.”

“그래요? 저희는 밀물 때 갇히기 쉬우니 그땐 뻘에 가서 조개 캐지 말라고 하는데. 뭔가 반대되는 경고가 재미있네요.”

 

생사가 오가는 이야기가 재밌다고 해도 되는 걸까. 누군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리 생각할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이 두 사람은 그런 걸 크게 신경 쓰는 위인들이 아니었다.

 

“어쨌든, 옛날에는 밀물과 썰물 차이가 극심했으니 해안에는 썰물 때마다 수중에 있던 생물들이 남겨지기 일쑤였다고 해요. 보통은 이런 상황이 오면 죽겠지만, 이런 행동이 수천만 년간 반복되면서 육지에 적응하게 된 생물들이 나오게 된 거죠.”

“헤에.”

“그리고 그 생물들이 각자 다른 형태로 나뉘어 진화하게 되고, 이윽고 지금의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뭐, 그런 거죠.”

 

그래서 ‘달 때문에 쫓겨났다’라는 건가. 처음엔 무슨 시적인 표현인가 했는데, 이렇게 듣고 보니 말 그대로의 의미이지 않았나.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플로이드가 책을 만지작거리는 상대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럼 아기새우도 바다에서 온 거나 다름없네?”

“그렇죠. 그래서 바다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요.”

“흐음. 역시 아기새우는 육지에서 태어난 게 아깝다니까. 인어로 태어났다면 잘 지냈을 거 같은데.”

“인어가 없는 세상에서 태어난 게 실수였던 거죠.”

 

그게 진심으로 한탄스러운 걸까. 저 말을 내뱉을 때 아이렌의 표정은 쓴 약이라도 씹은 듯 미세하게 구겨져 있었다.

아. 저렇게 괴로워하면 놀리기도 미안해지지 않나. 전혀 신사답지도 않고 기분 따라 다정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을 뿐 기본적으론 짓궂은 플로이드라지만, 좋아하는 아이가 울상인 걸 즐길 만큼 악의로만 가득 찬 악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딱히 상대를 위로하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 그는, 최대한 희망적인 가능성을 제시하며 아기새우의 표정을 풀어보려 했다.

 

“그래도 다행이네. 여기에선 마법약만 제때 먹으면 인어로 살아갈 수도 있으니까. 발급받는 과정이 좀 까다롭긴 해도,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그런 위로라도 아이렌에게는 큰 희망이 된 걸까. 아니면, 제일 좋아하는 이가 자신을 위해 좋은 이야기를 해준 것 자체가 힘이 된 걸까.

한결 표정이 좋아진 그는 가만히 플로이드를 응시하더니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겹쳐진 손을 꼭 잡은 아이렌은 아까 전 플로이드가 제게 그랬듯, 이번에는 자신이 상대에게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그 모습이 꼭 말미잘에 몸을 파묻는 흰동가리 같다고 생각한 플로이드는 자신의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달에 이끌려 뭍에 내던져진 몸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런 몸으로 바다로 돌아간다면, 허무하게 녹아서 사라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육지에 내던져진 건 제 탓이 아니지만, 바다로 돌아가는 건 제 의지로 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마치, 그것만이 제 유일한 소망이라는 듯이 말이다.

아, 정말이지. 어쩌다가 제 아기새우는 사람의 육신으로 태어난 걸까. 이 살가죽 아래에 있는 건, 분명 제가 나고 자란 심해의 파편인데. 죽음처럼 차갑고 끔찍할 정도로 조용하지만, 각종 영양분이 잔뜩 가라앉아있어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풍족함이 느껴지는. 그리운, 심해의 파편.

 

‘아, 그런 건가?’

 

심해에서 나고 자란 자신들이 심해에 이끌리는 건 당연한 이치. 그리고 섭리가 밝혀진 당연한 것에는,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신은 제이드도, 아줄도, 모두 아이렌을 좋아하는 걸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는 걸까. 제 아기새우는 물건이 아니라서, 좋아하는 사람이 둘쯤 늘어도 닳아 없어지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플로이드는 끌어안은 몸에서 신경 쓰이던 문제의 답을 찾아낸 것이 기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해가 중천에서 수평선 쪽으로 기울었을 즈음.

마을에서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온 플로이드와 아이렌은 옥타비넬 기숙사로 향했다.

 

“다녀왔습니다~”

 

담화실에 들어선 플로이드가 명랑하게 인사하자, 소파에 앉아 매출 장부를 뒤적거리고 있던 아줄이 목소리에 이끌려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가 먼저 발견한 건 목소리의 주인이 아닌, 그 옆에 있는 아이렌이었으니. 예고 없이 등장한 반가운 손님을 본 아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이렌 씨, 어쩐 일이십니까?”

“저기, 아줄. 나는 안 보이는 거?”

“아. 왔습니까? 나간 지 꽤 된 거 같은데 이제 왔습니까.”

“우와~ 성의 없어.”

 

플로이드는 누가 봐도 한쪽으로 쏠린 관심에 질렸다는 듯 고개 저었다.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귀엽다는 듯 웃은 아이렌은 정중하지만 친근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줄 선배. 외출했다가 플로이드 선배랑 만나서 함께 왔어요.”

“잘 오셨습니다. 차라도 내어드릴 테니 쉬다 가세요.”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자, 여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제가 앉아 있었던 자리 옆에 아이렌을 앉힌 그는 하던 일을 대충 정리하고 부엌으로 향했다.

그 재빠른 행동을 힐끔거리며 지켜보던 플로이드는 살그머니 아이렌의 어깨에 양손을 얹고 속닥거렸다.

 

“아기새우야, 나는 잠깐 방에 갔다가 올게? 그사이에 돌아가면 안 돼?”

“예. 편하게 다녀오세요.”

 

그렇게 혼자 남겨진 아이렌은 담화실을 한번 둘러본 후 가지고 있던 책을 펼쳤다. 누군가 오길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을 스마트폰 하며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이왕 책을 가지고 온 김에 읽던 이야기의 뒷부분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라, 안녕. 아이렌.”

 

그러나 페이지를 두 장쯤 넘겼을 때. 뜻밖의 인물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외출하던 길이었던 걸까. 출입구 쪽으로 향하던 멜로드는 아이렌을 발견하곤 냉큼 비어있는 옆자리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이쪽으로 오는 길에 플로이드를 스쳐 지나가듯 봤던 그는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물었다.

 

“플로이드 선배랑 놀러 갔다 왔어?”

“음, 그렇다고 봐야지.”

“뭐야, 그 애매한 대답은. 하하.”

 

저렇게 말하는 걸 보아하니 처음부터 함께 외출한 건 아니고 도중에 만났거나 한 명이 다른 한쪽을 찾아 나선 모양이다. 모호하게 말할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으려는 아이렌의 성향을 아는 멜로드는 꽤 정확하게 전후 상황을 추리해 냈다.

 

“멜로드 씨, 왜 여기 앉아 있는 겁니까?”

 

두 동급생의 대화가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 하나의 찻주전자와 두 개의 찻잔이 담긴 쟁반과 함께 돌아온 아줄은 자신이 앉아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멜로드의 모습에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아니, 저는 친구한테 아는 척도 하면 안 돼요?”

“방해되니까 나가서 노십시오.”

“와, 갑자기 6살 애 취급하시다니.”

 

하지만 사감의 연애 사업을 방해할 이유는 없다. 남에게 밉보여봐야 자신만 손해 아닌가. 멜로드는 입으로는 불평하면서도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차피 외출하려던 길이었으니, 그에겐 딱히 손해인 일도 아니었으리라.

아이렌은 떠나는 멜로드에게 가볍게 손을 흔든 후, 아줄이 내미는 찻잔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천만에요. 입에 맞으시면 좋겠군요.”

 

단가가 맞지 않아 라운지에도 내놓지 않은 좋은 차니까, 분명 맛있어 할 것이다. 아줄은 조금 우쭐한 마음으로 차를 입에 머금는 상대의 반응을 살피다가, 다홍색으로 물든 손톱을 발견했다.

 

“손톱은 염색하신 겁니까?”

 

리치 형제와 달리 아이렌의 ‘재미있는 짓’에 관해 듣지 못한 아줄은 신기하다는 듯 물든 손톱을 응시한다. 입안에 퍼지는 향긋한 차의 풍미에 한결 어깨가 가벼워진 아이렌은 찻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쭉 펴서 보여주었다.

 

“네. 봉숭아로 물을 들였어요. 천연 매니큐어 같은 거죠.”

“흠. 그건 얼마나 지속되는 겁니까?”

“글쎄요, 2주에서 3주 사이라고 하던가? 한 달도 못 가는 걸로 알아요. 뭐, 지울 수 없는 거니까 너무 오래 가는 것도 안 좋겠죠.”

 

역시 뭐든 장단점이 있는 것이겠지. 화장에는 크게 관심이 없지만, 상품을 대하는 자세는 언제나 정확한 아줄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책은?”

“이거요? 어제 산 건데, 좋아하는 작가의 에세이에요.”

“에세이 같은 것도 읽으셨군요.”

“평소엔 잘 안 읽는데, 이 작가 글은 좋아해서요. 정말 좋아하는 작가의 글은 냉장고에 붙여둔 메모까지도 궁금한 법이니까요.”

 

냉장고에 붙여둔 메모라.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이 아닌가. 하지만 아줄은 신기하게도 그 말을 꽤 쉽게 이해하고 공감했다. 자신도 아이렌의 생각이라면 아주 사소한 것도 궁금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질문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고.

 

“어떤 내용입니까?”

“어어, 이것저것 신변잡기가 적힌 글인데……. 작가가 어느 작은 섬에 휴양간 한 달 간의 일을 써놓은 글이거든요.”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떠드는 건 크게 좋아하지 않아도, 제가 향유하는 것들에 관해 떠드는 건 좋아하는 아이렌은 상대가 책에 관심을 보인 게 기쁜 듯했다. 마른 입을 차로 한 번 더 축이고 책을 펼쳐 보인 그는 아줄에게 바짝 붙어 앉아 가볍게 페이지를 넘겨 보였다.

 

“남부의 휴양지 섬이 아니라 북반구의 섬에서 머무른 이유도, 눈보라와 파도가 뒤엉킨 겨울 날씨의 묘사도,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저도 여기 가보고 싶어졌다고 할까요.”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런 마음에 들었다니, 상당히 책을 잘 쓰는 작가인가 보군요.”

“그렇게 인기 있는 작가는 아니지만, 마니아층은 탄탄한 작가예요. 저도 그중 한 명이고요.”

 

취향이 독특하다는 건 그만큼 자신에 대해 잘 아는 것이라고 했던가. 이런 타입들이 사업을 하면 레드오션을 파고들어 성공한다던 이야기를 떠올린 아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였다. 아이렌은 줏대도 있고 취향과 지향점도 명확하지만, 돈에 욕심이 없으니 분명 사업을 하는 건 힘들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예술가가 되는 게 더 맞겠지.

아, 같은 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기질이 달라지는 것만으로도 천직이 바뀐다니. 마치 인어라고 다 같은 동족이 아니라, 하반신이 무엇이냐에 따라 특징이 크게 달라지는 자신들 같지 않나.

종족도 태어난 세계도 다른 상대를 보며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낀 아줄의 얇은 입술이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제가 태어난 곳은 눈은 구경도 하기 힘든 지역이었거든요. 눈 내리는 바다라니. 얼마나 예쁠까요.”

 

책 속 풍경을 상상하는 걸까. 살며시 눈을 감은 아이렌이 황홀함에 젖어 중얼거렸다.

다른 이의 소원이라면 계산기를 두드려봐야겠지만 상대가 아이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아줄은 금방 좋은 제안을 떠올려냈다.

 

“눈 내리는 바다가 보고 싶으신 거라면 저희 고향에 가도 되겠군요. 아, 물론 한겨울에는 유빙 때문에 해수면에 머리도 내밀 수 없지만요.”

“어라. 선배 고향에 간다면 바다 위를 구경할 틈이 어디 있겠어요? 바닷속을 보고 와야죠.”

“글쎄요.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참으로 조용하고 어두운데다가 추운 곳이라서요. 아이렌 씨가 좋아할지는 모르겠군요.”

 

아무리 아이렌이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라지만, 기껏 먼 길을 온 상대에게 보여주기엔 제 고향은 너무나도 심심한 곳 아니던가. 아줄은 어디까지나 상대를 생각하여 그런 말을 했지만, 아무래도 그 걱정은 불필요한 것인 모양이었다.

그의 걱정에 의아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아이렌은 책을 덮더니, 다홍색으로 물든 손끝을 아줄의 손 위에 얹었다.

 

“추운 건 싫지만, 조용하고 어두운 건 좋을 거 같아요. 저랑 잘 어울리지 않아요?”

 

능청스럽게 손을 잡으며 묻는 아이렌의 얼굴이 참으로 가깝다. 마치 급류처럼 제게 확 밀려오는 상대의 존재감에 숨을 삼킨 아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조금 뒤로 빼고 말았다.

‘그렇지 않다. 아이렌 씨는 좀 더 밝고 화사하다.’라고 말하는 게 보편적인 대화 스킬에 맞는 답이겠지만……. 이 여자에겐 그런 보편적인 매너가 아니라 진심이 더 잘 통하는 법이었지. 그렇기에 아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아이렌은, 심해와 잘 어울리는 생물이었으니까 말이다.

 

“아기새우야!”

 

아슬아슬한 긴장감 속 미묘한 침묵은, 요란하게 돌아온 플로이드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거리낌 없이 아이렌의 목을 뒤에서 끌어안은 플로이드는 꼭 놀아달라고 보채는 아이처럼 조잘거렸다.

 

“우리 방에서 보드게임 할래? 제이드랑 나랑 셋이서 게임 하자. 둘이서 하면 매일 결과가 비슷해서 재미없고. 아기새우가 끼면 다를 거 같은데, 어때?”

“보드게임이요? 어떤 게임이에요?”

 

갑작스러운 요청임에도 침착하게 게임 내용부터 묻는 건, 분명 아이렌이 제 사람에게는 한없이 무른 성격이기 때문이겠지. 아줄은 갑자기 나타나 좋은 시간을 방해하는 플로이드를 노려보며, 흘러내린 안경을 검지로 밀어 올렸다.

 

“플로이드, 아이렌 씨는 지금 저랑…….”

 

하지만 아줄의 잔소리가 끝나기도 전. 밀고 나가는 힘만큼은 여기서 1등인 플로이드가 냅다 아이렌을 잡아당겨 상대를 질질 끌고 가버렸다.

 

“일단 가면 설명해 줄게. 가자, 가자~”

“앗, 잠깐. 갈게요. 갈 테니까! 뜨거운 게 있는데, 잡아당기면 안 돼요!”

 

아직 찻주전자에 차가 남아있으니 조심하려는 아이렌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덜렁 플로이드에게 잡혀가고 말았다.

‘플로이드, 오고 계십니까?’ 저 멀리서 들리는 제이드의 부름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둘은 한통속인 듯하다. 1대 1이라면 몰라, 혼자서 리치 형제 둘과 싸울 여력은 없는 아줄은 한숨을 푹 쉬곤 덩그러니 남겨진 아이렌의 책을 챙겨두었다.

아마 금방 돌아오진 않겠지. 그럼, 이 다과상은 치우는 게 나을까.

그리 고민하는 사이, 아까 전 제가 쫓아낸 후배가 샘의 상점에서 사 온 음료수를 홀짝거리며 들어왔다.

 

“어라? 아이렌은 돌아갔어요?”

“플로이드에게 잡혀갔습니다. 보드게임 상대가 필요하다더군요.”

“저런. 쫓아가서 잡아 오지 않아도 괜찮나요?”

“됐습니다. 그 두 명을 상대하는 건 피곤한 일이니까요. 가운데 낀 아이렌 씨만 곤란해질 겁니다.”

 

이 상황에서도 아이렌을 걱정하다니. 참으로 훈훈하지 않은가

자기 일이 아니라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멜로드는 짓궂게 아줄을 놀렸다.

 

“사감도 힘들겠네요, 하필 저 선배들이랑 좋아하는 사람이 같다니.”

 

그러나 아줄은 이 얄미운 말에 상처받지 않았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책만 만지작거리는 그는 시선을 표지에 고정해 둔 채 대꾸했다.

 

“그런 건 별로 상관없습니다.”

“예?”

“누가 아이렌 씨를 좋아하든, 그게 몇 명이나 되든……. 그런 걸 생각하기엔 이미 아이렌 씨와 제 일 만으로도 머릿속이 꽉 차 있으니 말입니다.”

 

자신이 연애라는 것에 능숙한 사람이었으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제겐 그런 재능은 없었다. 모든 걸 물자와 금액으로 환산하여 계산기를 두드리는 건 잘해도, 가치가 없는 것들을 다루는 것엔 익숙하지 않다고 할까.

아줄은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제게 다정하게 구는 저 여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어떻게 자신 또한 상대를 흉내 내어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바빠, 리치 형제의 일 같은 건 신경 쓸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어차피 제가 신경 쓴다고 무언가 바뀔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 복잡한 심상을 이해한 걸까. 아니면, 초연한 듯한 선배의 대꾸에 기가 눌린 걸까.

입을 다물고 눈만 끔뻑이던 멜로드가, 한층 뜬금없는 소리를 해왔다.

 

“뭐라고 할까……. 윤리 도덕적으로 어떨지는 모르겠는데, 나쁘지 않네요.”

“뭐가 말입니까?”

“선배들이 모두 아이렌을 좋아하는 거요.”

 

그렇게 말하는 멜로드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분위기를 주도하고 상대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실없이 웃는 얼굴로 나불나불 지껄여 댈 때와는 다른, 그의 한 살 많은 친형을 떠올리게 하는 차분한 얼굴이었다.

 

“저는 올해 입학한 처지라 선배들의 과거는 잘 모르지만, 아이렌이 세 분의 좋은 구심점이 되어 주는 것 같거든요. 좀 더 유대감을 느끼게 한다고 할까. 잘 몰랐던 부분도 이해하게 한다고 할까……. 원래 같은 걸 좋아하면 더 친해지기 쉬운 법이잖아요?”

“허.”

 

구심점이라. 다소 황당한 이야기 같지만, 어쩐지 알 것도 같다. 너무나도 달라서 평소엔 뭉쳐 다녀도 개인 시간은 결국 다 흩어져서 보내는 자신들이, 아이렌을 만난 이후로는 휴일에도 하나의 덩어리처럼 뭉쳐 다니는 일이 많아지지 않았던가.

신기하기도 하지. 이렇게나 다른 셋을 한곳으로 모으다니. 성격도 취향도 다른 자신들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어쩌면 그건 당사자의 말을 빌려, 아이렌이 너무나도 심해를 닮아있어 그런 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어도 결국은 저 두 다리 달린 심해에서 자신의 근원을 보게 되게 되니, 모두 거기로 향해버리는 거지. 마치, 제 근원을 찾아가듯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세 분이 지키면 아이렌은 누구도 못 건들 거 같기도 하고요.”

“당연합니다. 저 혼자서도 지킬 자신이 있지만, 그 두 사람까지 한 팀이라면 상대가 불쌍할 뿐이지요.”

“그렇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전해진다는 건 기쁜 일이다. 흐뭇한 얼굴로 반쯤 마신 음료수를 테이블 위에 올려둔 멜로드는, 티포트 세트를 쟁반 위에 정리하더니, 아줄에게 손짓했다.

 

“그렇게 덩그러니 앉아 계시지 말고, 사감도 가서 끼워달라고 하세요. 이건 제가 치울게요.”

“……감사합니다.”

 

후배의 말이 옳다. 제가 끼지 못할 자리도 아니고, 빼앗겼다고 가만히 있는 건 자신답지 않지. 보드게임이라면 자신 있으니, 넷이서 놀자고 하면 그만인 일이다.

좀 얄밉긴 해도 일머리 있고 싹싹한 후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준 아줄은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쌍둥이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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