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송이 : 특명, 무개성처럼 살아가기

8~13화 분량.

1

“앞으로 미노루는 개성을 되도록 사용하지 말아야 한단다.”

네?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그날 저녁. 이런저런 일(호크스가 놀러 온 일)로 인해서 원장님과 조금 늦게 만나게 됐다. 나는 소화 시키다가 들은 말에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다.

“가라키 선생님께서 미노루의 개성은 미노루의 성장 에너지를 빼앗아, 그러니까 성장 속도를 늦추게 한다는구나. 그러니까… 조금 전의 말은 어려웠지? 조금 쉽게 이야기하자면… 미노루가 개성을 사용한다면 앞으로 성장이 더 느려지거나 더는 클 수 없게 된다는 뜻이란다.”

“네에….”

그러니까 키가 크려면 개성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인가? 아니, 확실하겠네. 그보다 성장 에너지? 성장 속도라니. 어쩐지 다른 애들보다 작더라. 개성을 쓰면 그만큼 성장을 못 하는 거였구나.

“다른 아이들이 개성을 사용하는 만큼 미노루도 개성을 쓰고 싶겠지만 되도록 사용하지 않고 성장이 끝날 때까지는 참아야 한단다, 알겠지?”

할 수 있겠니? 그리 묻는 원장님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것 없지. 빙의 된 이후엔 개성을 써본 적도 없기도 하고 사용하는 법도 잘 모르니까. 개성 사용법은 조금 알긴 하지만 그건 다른 부분이다. 그리고 애들은 내가 개성을 쓰지 않아도 별문제 삼지 않았기도 하고.

원장님은 내가 끄덕이자 다행이라는 듯이 이만 나가보라고 했다. 나는 원장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 원장실에서 나와 방으로 향했다.

평소처럼 살면 되는 거겠지.

하품하며 방에 들어와 침대에 들어갔다. 자야지.

 

2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셔도….”

“아이에게 강제로 물을 생각은 없습니다, 원장님. 계속해서 숨길 수는 없다는 것은 알고 계시잖아요.”

애들과 함께 시설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데 정문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애들과 함께 구경을 왔다.

“아, 저 아저씨 경찰 아저씨야.”

코지타가 말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애들이 경찰이 왜 왔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우, 우선. 방으로 가시죠.”

원장님이 우리가 몰려와 구경하는 것을 보곤 경찰의 등을 밀며 시설 안으로 이동했다. 애들도 거기서부터는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놀기 위해 운동장으로 향했고 나도 애들을 따라 운동장으로 향했다.

“미~노루~! 우리 숨바꼭질하자!”

“여기 운동장은 좁잖아.”

“아! 나 좋은 곳 알아! 여기서 5블록 떨어진 곳에 빈 공터가 있어!”

“아. 공사 멈춘 곳?”

“응! 거기, 거기. 우리 거기에 가서 놀자!”

으음. 괜찮은가? 그렇게 해서 선생님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아, 거기 말이지? 음, 조금 멀긴 하지만… 다녀와도 괜찮을 것 같네.”

되는구나. 아니, 정말 되는 거냐. 허락을 받자마자 애들이 좋아서 얼른 가자고 외치는 것을 들었다.

“게다가 미노루가 있으니까 안심이고. 자, 이거 선생님 핸드폰이야.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렴?”

“네, 알겠어요.”

저를 너무 믿는 것 아닌가요? 싶지만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일과 그것을 지금까지 봐오신 선생님이 많은 만큼 뭐라고 하기엔 어려웠다.

내가 좀 애들을 잘 돌봤죠. 어쩔 수 없잖아. 내가 15살 때부터 조카 5명을 돌봤으니까. 겨우 10살의 어린애라지만 속에 든 것이 22살인 사람이니까.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선생님이 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애들과 함께 빈 공터(정확히는 빈 공사장)로 향했다.

 

3

“뛰지마, 얘들아.”

“맞아! 천천히 가지 않으면 놓친다고!”

“진페이, 돌아와!”

함께 가는 애들은 나 포함 총 6명으로 다양한 개성을 가졌다. 선풍기 정도의 바람을 다루는 진페이와 우박을 만드는 페코, 강아지의 신체를 가진 코지타, 비눗방울을 만드는 테이마루, 성대모사가 가능한 노노키 그리고 나.

“얼른 가자!”

“천천히 가도 도망가지 않잖아. 그리고 시설에서 나왔으니까 개성은 금지!”

“쳇, 페코는 잔소리만 해!”

“그렇지만 페코의 말도 일리 있어. 진페이가 가진 개성은 잘못하면 위험하잖아. 그치, 테이마루?”

“으응, 그렇지.”

“에이, 진짜! 알겠어! 안 쓰면 될 거 아니야!”

흥, 하고 고개를 돌린 진페이에게 코지타와 노노키가 옆으로 가서 삐지지 말라며 달래주는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미노루 목은 좀 어때?”

그때 페코가 옆으로 다가왔다. 내 목을 보더니 슬픈 얼굴을 했다. 역시 이렇게 다니면 눈에 많이 띄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여름이니까. 목티를 입기엔 덥기도 하고, 약도 바르는 중이니까 이렇게 다닐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약을 바르니까 금방 나을 거야.”

“응! 참, 약은 챙겨왔어?”

“혹시 몰라서 가져왔어.”

“잘 됐다! 거긴 거울이 없을 테니까 내가 발라줄게.”

그럼 고맙지. 고개를 끄덕이니 페코가 활짝 웃었다. 착하다, 착해. 내가 페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다른 애들도 쓰다듬어 달라며 옆으로 붙어왔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애들의 머리도 쓰다듬어줬다.

여기에 모인 애들의 나이는 많아 봐도 10살이다. 제일 어린 애가 6살인 테이마루로 시설에 있는 아이들의 나이는 대체로 이 정도였다.

“아, 저기야!”

코지타가 꼬리를 흔들며 말했다.

“와, 뼈대가 아직 남아있네?”

“뭔가 어른의 사정? 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야.”

히어로와 빌런이 존재하는 세계더라도 어른의 사정이라는 것은 존재하는구나. 어쩐지 멍한 얼굴로 빈 공터의 건물 뼈대를 올려다보다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애들에게로 향했다.

 

4

어두운 그늘에서 틈으로 보이는 바깥을 보던 남자가 밑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곤 옆에 앉아 총을 만지고 있던 놈을 신발코로 툭 쳤다.

“어이, 보라고.”

“엉? 뭘?”

“애새끼들이 기어들어 오고 있잖아.”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 옆으로 가서 밑을 보던 남자가 코를 찡그리며 낄낄 웃었다.

“오, 물건들이 딱 좋은 타이밍에 좋게 굴러들어오는데.”

“한탕 하고 이 마을에서 뜨자고.”

틈으로 들어온 빛줄기가 두 사람의 얼굴을 슬쩍 비추었다. 이마에 외뿔이 난 남자와 쥐의 얼굴을 가진 남자가 비치다가 곧 다시금 그늘로 사라졌다.

 

5

“킁킁.”

코지타가 가던 길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왜 그래?”

“아니. 우리 말고 다른 사람 냄새가 나서.”

코지타의 개성은 개. 개와 같은 것을 잘하는 개성이다. 애초에 얼굴이나 신체 일부가 개의 형태를 띠고 있기도 하고. 이리저리 킁킁거리던 코지타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남은 흔적인가? 아닌가?”

“야~! 미노루~ 코지타~! 얼른 와~!”

킁킁거리며 계속해서 냄새를 파악하던 코지타와 그런 코지타의 옆에 있던 나를 부르기 시작한 진페이의 목소리에 코지타가 냄새를 맡던 것을 멈추고 얼른 가자고 말했다.

“여기서 일하는 어른인가 봐!”

“뭔가 확인하러 온 걸까?”

“그럴지도?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들키면 여기서 나가라고 혼날지도?”

코지타는 그리 말하며 뛰어가 진페이와 다른 애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흠, 이 텅 건물에 어른이라. 별일 없겠지.

 

6

그렇게 우리는 건물의 뼈대가 아직 남아있는 위층이 아니라 어느 정도 완공이 된 1층과 2층에서 놀기로 했다.

창문도 있고 문도 달려있으니 숨을 곳은 참 많았다. 바닥에 뒹구는 자재도 별로 없어서 뛰다가 넘어지는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어른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3층은 올라가지 않기!”

“헹, 어른이 와도 도망치면 그만인걸!”

“진페이도 참! 우린 여기서 노는 것은 선생님에게만 허락받은 거잖아. 여기에서 일하는 어른한텐 허락받지 않았으니까 혼날 거라고!”

“네이네이. 페코는 또 잔소리하네.”

진페이가 귀를 파며 말하자 페코가 정말이지, 하며 허리에 손을 올리고 씩씩거린다. 둘 사이에서 어버버 거리던 테이마루가 나를 쳐다본다. 말려달라는 눈빛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테이마루를 뒤로 보내고 직접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둘 다 그만해. 테이마루가 걱정하잖아”

내 말에 진페이와 페코가 놀란 듯 테이마루를 돌아본다. 내 뒤에서 진페이와 페코를 바라본 듯 두 사람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미안해, 테이마루.”

“으응, 괜찮아.”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은 테이마루에게 약하니까. 가장 어린 테이마루에겐 어쩔 수 없겠지. “그, 나도, 거, 미안.” 진페이도 조금은 늦었지만 테이마루와 페코에게 사과했다.

“그럼 술래부터 정할까?”

노노키가 말하자 애들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리곤 모두 다 함께 주먹을 꽉 쥐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안 내면 술래~ 가위, 바위, 보~!”

 

7

내가 제일 못하는 것이 있었다.

“하나~”

바로 가위바위보였다.

“둘~”

애들이 까르르 웃으며 숨을 곳을 찾아 뛰어갔다. 그 소리를 들으며 “셋~”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넷~”

그래도 그냥 내가 술래를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는 것도 제법 어려운 일이니까.

“다섯~ 여섯~ 일곱~”

술래는 열까지 세면서 다 숨었냐고 물어보고, 아직이라고 하면 다시금 하나부터 열까지 세는 것을 반복한다. 애들이 다 숨었다고 하면 그때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숨바꼭질에도 규칙이라는 게 있었구나.

“여덟~ 아홉~ 열~ 다 숨었니~?”

“아직!”

“아직이야~!”

“숨었어.”

“숨었지롱~”

“아직~”

음. 세 명이 아직 멀었군. 나는 다시 하나부터 천천히 열까지 세었다.

“다 숨었니~?”

“숨었어!”

“응!”

“숨었어.”

“나도!”

“다 숨었어.”

좋아. 이제 술래가 움직일 차례다.

“꼭꼭 숨어라~ 이제 술래가 출발한다~”

내가 그리 말하자 애들이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녀석들, 어린애들은 참 귀엽단 말이지.

그렇게 한 발 내디디려는데…

“오. 꼬맹이 발견.”

“이런 곳에서 숨바꼭질이라니 요즘 애들은 멍청한 거 아니냐?”

“덕분에 우리가 덕을 보잖냐.”

이마 정중앙에 길게 뻗은 뿔을 가진 남자와 쥐 얼굴을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코지타가 냄새를 맡았던 어른인가? 우선은 사과부터 해야겠지.

“어, 음. 허락도 없이 건물에 들어와서 죄송합….”

어라? 잠깐만? 덕을 본다고? 하려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들을 쳐다보자 남자들이 씩 웃었다.

“이 새끼, 머리 잘 굴러가네?”

“항상 애새끼들 사이에 한 놈은 섞여 있잖냐. 대가리 잘 굴러가는 놈.”

그 말을 듣자마자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미친.

이 새끼들 혹시 빌런이야?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니 빌런 놈들은 재미있는 사냥감을 보듯이 나를 쳐다봤다.

좃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은 좃된 것이다. 속이 성인인 나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뭘 할 수 있겠냐고. 다른 애들에 비해 작은 편이고 다른 애들도 나와 비슷한 정도인데.

지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비상사태!!! 빌런이다!!!”

그렇게 크게 외치고 도망치는 것. 물론 허망하게 붙잡혀 버렸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가 꽉 누르는 것처럼 말이다. 고개가 숙어지지 않아 눈으로 어떻게든 살펴보니 뿔 달린 빌런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에 겹쳐진 게 보였다.

이건 저 뿔 빌런의 개성인가? 그림자에 겹쳐지면 상대방을 결박하는 그런 느낌인가?

“이야, 이 새끼 다른 애새끼들에게 도망치라고 외치는 거 봤냐?”

“숭고한 희생? 뭐 그런 거냐? 히어로 놀이도 작작해라, 꼬맹아.”

뿔 달린 빌런이 내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미네타 미노루로 빙의 된 것부터 해서 나를 죽이려 들던 그 애.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터무니없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진짜 어이없다. 내가 무슨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도 애들은 무사히 도망쳤겠지. 그 뒤엔 애들이 어른들을…

“미노루를 놔줘!!”

“미노루 구해줄게!!”

…….

 

8

내가 애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랐나? 분명 도망치라고 말한 건데. 어째서 구하러 온 거야. 얘들아, 이 언니 누나는 슬프다. 아, 이젠 동갑에 형이지.

“푸하하! 애새끼들이 늘어났다고 뭘 하겠어! 바로 도망쳤으면 그나마 뭐라도 됐을 텐데 말이야.”

쥐 얼굴을 한 빌런이 캬캬캬 웃었다. 그런 와중에 애들이 뭔가를 하려는 듯이 움직였다.

“페코, 알지?”

“진페이야말로, 나한테 맞춰!”

“이번만이야!!”

그와 함께 페코가 우박을 만들어내고, 진페이가 개성을 사용해 바람을 불어 우박을 날렸다. 내 쪽으로 날아오던 우박은 테이마루의 개성인 비눗방울에 막혀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거나 비눗방울에 들어가게 됐다.

뿔 빌런과 쥐 빌런은 설마하니 애들이 개성을 사용해서 자기들에게 덤빌 것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멈칫거렸다.

“미노루!”

그 틈을 타고 코지타가 나를 구하러 왔다.

“와, 요즘 애새끼들은 다르네.”

내게 팔을 뻗은 코지타에게 마주 손을 뻗는 그 순간 코지타가 바닥으로 찌부러졌다.

“악!”

“코지타!”

갑자기 벌어진 일에 놀라서 코지타를 불렀지만 코지타는 다시 일어나지는 못했다. 그야 쥐 빌런이 코지타의 등을 발로 밟으며 섰으니까 말이다.

쥐 빌런은 페코와 진페이의 합동 개성 공격에 의해 코피가 터졌는지 피를 줄줄 흘리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뿔 빌런이 비웃었다.

“넌 가만히 있어!”

“꼬맹이들 공격에 코피 터지고, 꼴 좋네!”

욕지거리를 내뱉던 쥐 빌런이 이를 갈며 말했다.

“팔아넘길 생각이었는데… 그냥 여기서 죽여야겠네.”

쥐 빌런이 더 움직이기 전에 애들에게 외쳤다.

“진페이! 페코! 테이마루와 노노키를 데리고 도망쳐!”

“도망치길 어딜 도망쳐!”

쥐 빌런이 애들 쪽으로 손을 뻗으니 애들이 찌부러졌다. 중력? 그런 개성인가? 뿔 빌런이나 쥐 빌런이나 제압 쪽인 것 같다.

“으그극.”

“아, 아파!”

“으우, 흐엥.”

“무, 무거워….”

아, 진짜…. 내가 이렇게 될까 봐 도망치라고 그렇게 말한 건데. 나는 우선 심호흡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다 죽는다. 조금 전에 한 말로 추측하자면, 우리를 잡아서 누군가에게 팔려고 했지만… 그냥 죽이기로 결정된 것 같은데….

일단 쥐 빌런은 애들에게 신경이 집중됐고, 날 붙잡고 있는 뿔 빌런은 날 잡고 있는 것 외엔 딱히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회다.

 

9

“죽이는 것보단 팔아 치우는 게 돈이 되잖냐.”

“그렇지만 이 애새끼들이 피를 보게 만들잖아!”

“아악!”

“지, 진페이!”

쥐 빌런이 진페이의 팔을 지르밟았다.

“흐아앙! 으아아앙!”

“아, 시끄럽게!”

“켁!”

“테이마루!!”

이번엔 테이마루의 등을 지르밟았다.

애들에게 가하는 폭력을 보니 피가 식는 기분이 든다. 얼른, 제발. 하지만 떨리는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제발, 좀! 심호흡하면서 어떻게든 뒷주머니에 넣어뒀던 선생님이 주신 핸드폰으로 112를 눌렀다. 가장 빠른 방법이니까 말이다.

핸드폰을 직접 보는 것이 아니기에 불편한 점은 있지만, 다행히도 선생님의 핸드폰은 폴더폰이었다. 이 정도가 어디야. 112를 누르고 최대한 음량을 줄였다.

내가 코지타, 하고 작게 속닥이니 코지타의 귀가 쫑긋거렸다. 내가 작게 속닥이는 만큼 코지타도 최소한의 움직임만 보여주었다. 나는 이어서 작게 말했다.

“방금, 핸드폰으로 경찰에 전화를 걸었어. 코지타라면 들리지? 그에 맞춰서 말을 꺼내줘”

내 말에 코지타의 귀가 몇 번 쫑긋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말했다.

“우린 데이온 시설에 있는 애들이야!! 시설 선생님이나 원장님이 우리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셨을걸!”

아무래도 전화를 받은 모양이다. 코지타의 말에 두 빌런의 시선이 코지타에게로 향했다. 이대로 계속 좋게 넘어갔으면 좋은데.

“말이 많네, 애새끼가… 귀찮게 굴고 있어.”

“우리를 이렇게 붙잡고 있다고 끝이 아니라고!”

“좀 닥쳐!”

“악! 데이온 시설은 여기서 10분도 걸리지 않는다고! 그리고 여기에서 놀다 온다고 말도 했으니까 금방 찾으러 오실걸!”

코지타는 계속해서 말을 했다. 나는 노노키를 쳐다봤다. 노노키는 지금 이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애들 역시 쥐 빌런의 신경이 코지타에게 집중된 것을 보고 어림짐작한 것 같았다.

다들 아직 버틸 수 있을 듯했다. 원장님이 개성을 되도록 쓰지 말라고 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써야 하잖아?

개성을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개성을 사용하는 모습을 본 적은 있다. 만화책에서, 애니에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너희 둘밖에 없잖아!”

코지타의 말과 동시에 나는 노노키에게 신호를 보냈고 노노키가 힘차게 “꼼짝 마라!”라고 오늘 시설에 왔던 경찰의 목소리를 흉내를 내 외쳤다.

“뭐?!”

깜짝 놀란 두 빌런의 행동을 본 나는 곧장 뿔 빌런의 손을 물어버렸다. 뿔 빌런은 악, 소리를 내며 나를 놓쳤고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낙법 같은 것을 배운 적이 없기에 떨어진 충격으로 머리가 지끈 울렸지만, 곧장 바닥을 굴러 애들 쪽으로 향했다.

뿔 빌런의 그림자에서 코지타를 빼내고 진페이와 페코에게 노노키와 테이마루를 챙겨서 먼저 올라가게 했다. 두 빌런은 그저 깜짝 놀라서 멈칫한 것뿐이라서 자칫하면 우리를 쫓아올 수도 있기에 코지타를 먼저 보낸 다음에 뛰어가면서 내 머리에 달린 포도 같은 덩어리를 잡아 뜯었다.

따끔한 느낌과 함께 내 손에 동그랗고 탱글탱글한 것이 잡혔다.

“미노루, 얼른 와!”

“알겠어.”

하나만이 아니라 두 개, 세 개, 네 개. 될 수 있는 한 많이 뽑아서 계단을 장식하듯 뒀다. 그 뒤에 위층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헉, 헉! 이, 이제 어떻게 해!?”

“도망쳐야지!”

“경찰이 올 때까지 숨어야 해야!”

“이쪽에 숨자.”

천장이 완공되지 않은 4층까지 올라와 벽의 개구멍을 통해 숨은 우리는 숨을 돌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가진 개성으로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몸은 숨겨야 했다.

 

10

“얘들아, 코지타 좀 부탁해.”

“응!”

“코지타, 괜찮아?”

“형아 아프지?”

“난 괜찮, 아야야.”

애들을 잠깐 살펴보다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직 통화가 연결되어 있는 중이었다.

“여보세요?”

[아, 연결됐습니다. 여보세요? 무장 경찰과 히어로가 출동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조금 전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개성을 사용해서 빌런 손에서 빠져나와 숨었어요. 저희는 지금 4번지의 빈 공사장 4층에 있고 는 벽에 작은 개구멍이 있어서 그리로 들어왔어요.

[그렇군요. 위험한 상황이었는데도 겁먹지 않고 침착하게 신고를 하다니 훌륭하네요. 곧 히어로와 경찰이 그곳에 도착할 거예요. 그러니 계속 숨어 있으세요.]

“네.”

그 뒤로도 경찰분과 계속 통화를 했다. 가장 먼저 뿔 빌런과 쥐 빌런에 대한 생김새와 개성에 관해 이야기하니 굉장히 놀란 것 같았다. 보통 그런 상황에서 그런 것을 관찰하는 것은 어렵다던가.

경찰은 칭찬도 해주고 방금 통신으로 히어로와 무장 경찰이 인근에 도착했고 곧 돌입할 예정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다친 애들도 있었기에 그에 관해 물어보니 구급차도 함께 보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계속해서 안심하라는 이야기와 좋아하는 히어로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들으며 애들도 금방 진정할 수 있었다.

역시 경력자는 다르구나, 생각했다.

“경찰이다!!”

“꼼작 마라!”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빌런을 붙잡았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이제 여러분은 안전해요. 경찰분이 곧 올라갈 테니 만약을 위해 기다렸다가 나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가장 먼저 고개를 든 건 코지타였다. 아무래도 냄새와 발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왔어.”

그와 동시에 벽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괜찮단다.”

“나와도 괜찮아.”

그 말에도 애들이 멈칫멈칫하길래 내가 먼저 나가기로 했다. 구멍에서 기어 나와 빠져나오니 경찰들이 웃으며 반겨줬다.

“정말 고생했구나. 자, 여기.”

그리고 모포를 둘러주었다. 밖으로 나온 내 뒤를 따라 애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자 경찰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무서웠어….”

“흐아아앙!”

경찰들에게 안겨나가며 애들이 울기 시작했다. 확실히 무서운 상황이었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도망치게 할 생각이었는데. 우는 애들을 보며 마음이 쓰렸다. 괜히 나쁜 기억만 만들어준 거 아닌가 싶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침착한 걸까.

 

11

그 뒤에 우리는 경찰서가 아니라 병원부터 가게 되었다. 다친 애들도 있었고 우리는 나이도 어려서 보호자를 기다려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진페이와 테이마루 그리고 코지타가 제일 많이 다쳤고 페코와 노노키 그리고 내가 상처가 비교적 덜했다. 함께 와 준 경찰분이 타준 코코아를 마시며 우리에게 내어진 병실에 앉아있으니 원장님과 선생님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얘들아!!”

“으아아앙!! 미안해, 얘들아!!! 함께 가야 했는데!!!”

 

12

아. 선생님의 개성은 눈물폭포.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13

“진페이군과 테이마루군 그리고 코지타군의 상처는 조금 경과를 지켜봐야 해서 사나흘 정도는 입원하는 것이 좋을 것 같고 페코양와 노노키양 그리고 미노루 군은 그나마 상처가 덜하지만 만약을 위해 하루 정도는 입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원장님은 의사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진찰을 와준 의사는 “피곤할 테니 쉬게 해주세요.” 말을 하며 병실에서 나갔다.

“정말이지. 심장이 남아나질 않아, 얘들아.”

“헤헤, 죄송해요.”

“흑, 흑. 선생님이 미아내, 얘드라.”

“메이 선생님도 참! 저희 괜찮아요!”

선생님이 또 울려고 하자 원장님이 급하게 말렸다. 조금 전의 눈물폭포를 어떻게 치웠더라. 오늘따라 원장님이 수척하고 늙어 보였다.

애들도 씩씩하게 선생님과 원장님에게 괜찮다는 양 말하지만, 분명 오늘 겪은 일 탓에 많이 힘들고 지쳐 보이는 것 같았다.

게다가 테이마루는 꾸벅꾸벅 졸고 있기도 하고.

“선생님, 원장님. 저희 이제 졸려요.”

내 말에 원장님이 아이고,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직도 훌쩍이는 선생님의 팔을 잡곤 일어나셨다.

“우리도 참, 많이 피곤할 텐데. 우리는 이만 가 볼 테니까 편히 쉬렴, 얘들아. 내일 다시 올 테니까.”

“흐엉, 흐어엉.”

“메이 선생님! 뚝, 그치세요!”

그렇게 원장님과 선생님이 병실에서 나가고 나서야 애들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침묵과 서로를 확인하는 시선이 오고갔다. 뭔가 수다를 떨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애들은 정말 피곤했던 모양인지 가장 먼저 곯아떨어진 테이마루를 시작으로 하나둘 잠들기 시작했다.

나는 등골이 오싹했던 일 빼면 그렇게까지 피곤하지 않아서 애들이 잠드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내 침대에 누웠다.

“끄으응.”

“으윽.”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잠자리에 든 애들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잠들기는 글렀네. 끙끙 앓는 애들을 달래주기 위해 편하게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위에서 내려와 칭얼거리는 애들 곁으로 가서 가슴팍을 도닥이며 달래주고 이불도 잘 덮어줬다.

여기서 더 심해지면 너스콜을 눌러야겠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정도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깊게 잠들었는지 조금 달래준 이후엔 칭얼거리는 애들이 없어서 다시 내 침대로 돌아왔다.

조용한 병실에서 보라색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언뜻 보인 붉은 날개에 침대에서 내려와 의자를 창가로 끌고 와 창문을 열었다.

“잠깐 보고 가려고 온 건데.”

내가 연 창문으로 호크스가 들어왔다.

 

14

나와 호크스의 수다로 애들이 깰까 봐 호크스에게 부탁해서 옥상으로 올라왔다. 몇 번이나 호크스의 품에서 날아다녔던 보람이 있다.

“오늘 정말 큰 일이었겠네, 미노루.”

“응. 정말 큰 일이었어.”

“무섭지 않았어?”

“무서웠지.”

그래? 하고 호크스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호크스는 별말 없이 그저 나를 무릎 위에 앉히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조용하네. 평소라면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럴 텐데.

“형, 무슨 일 있었어?”

“어라. 그렇게 느껴졌어?”

“응. 오늘따라 조용하잖아.”

“그게 뭐야. 내가 평소에 말이 많다는 것처럼 말하는데, 미노루.”

그러면서 호크스가 내 볼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아니, 평소에 말이 많은 건 사실이잖아? 매번 이것저것 이야깃주머니를 털어내며 떠들던 사람이 누군데.

하지만 호크스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뭔가 일이 있나 보다, 생각하기로 했다. 호크스는 내가 묻지 않자 볼을 쿡쿡 누르는 것을 멈췄다.

“미노루는 어른스럽네.”

“그런 편이지.”

“조금쯤은 어리광부려도 괜찮은데 말이야.”

무슨 소리래. 겉모습은 10살이라지만 속에 든 것은 22살의 청년이라고, 호크스. 그런 걸 말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저 어깨만 으쓱이고 말았다.

아니. 생각해보니 다 큰 청년이어도 조금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어쩐지 호크스에게 말하자니 부끄럽기도 하고.

“음, 좋아. 힘내서 10위 안에 드는 히어로가 될게.”

갑, 갑자기?

무슨 결심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으응, 그렇구나.

“형이라면 될 거야.”

내 말에 호크스가 웃었다. 어이구, 기분 좋아졌나 보네. 그래그래.

 

15

“몸은 좀 어때.”

츠카우치는 모자를 벗으며 카페에 먼저 와있는 선객에게 인사를 했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남자, 올마이트는 트루 폼으로 그 누구도 그가 올마이트임을 모르는 상태로 츠카우치를 반겼다.

“이젠 괜찮아. 움직이는 것도, 활동하는 것도”

“너무 무리하지 마. 내가 그 상처를 본 것이 겨우 몇 주 전의 일이니까. 그만한 상처를 입었는데도 조금 더 쉬지 않고….”

“쉬는 와중에도 빌런은 계속해서 등장하고, 사람들은 나를 찾지. 시민들을 위해서라면 할 수 있어.”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내려놓은 올마이트를 보던 츠카우치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갈색 서류 봉투에 넣어뒀던 자료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올마이트 앞으로 밀었다.

“찾던 자료야. 갑자기 그건 왜 찾는 거야?”

“뭔가 도움이 될만한 것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

“흠….”

서류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는 올마이트를 보던 츠카우치는 몇 주 전에 아주 잠깐 봤던 그 광경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끔찍한 상처를 입고 여러 내장 기관을 적출까지 하고서야 겨우 살아남은 올마이트. 츠카우치는 고개를 저었다.

계산대 쪽에서 주문했던 음료가 나왔다는 소리에 생각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츠카우치를 따라 시선을 돌렸던 올마이트는 서류를 다시금 뒤적였다.

‘심각’했던 부상으로 인해 잠시 히어로 일을 쉬었던 와중에 일어난 사건·사고는 건수도 많았다. 괜스레 옆구리의 상처가 욱신거리는 기분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사람이 조용히 카페에서 서류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츠카우치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여보세요? 츠카우치 형사님, 저번에 말씀하셨던 사건 있잖아요.]

“음, 어떤 사건이지?”

[그 왜, 방화와 살인 그리고 미성년 살인 미수까지 벌인 빌런 사건이요.]

츠카우치는 카페라테를 마시던 것을 멈추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귀가 좋은 올마이트 역시 통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세를 낮췄다. 그 모습을 보고도 츠카우치는 올마이트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피해자 아이, 이번에 또 사건에 휘말렸더라고요. 형사님께서 저번에 언급하신게 있어서 따로 알려드리려고 연락드렸어요.]

“그거 고맙네. 혹시 무슨 사건이었는지 알고 있나?”

[으음…. 잠시만요….]

올라온 서류가 어디 있지…. 잠시만요…. 뭔가를 찾기 시작한 듯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츠카우치와 올마이트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아. 여기 있다. 어, 어디 보자. 귀신쥐 일당 아시죠? 뿔 달린 놈이랑 쥐 얼굴을 한 놈인데… 그 둘에게 납치될 뻔했더라고요.]

“그 아이 혼자?”

[아니요. 이번엔… 데이온 시설에 있는 아이들과 함께요. 다행히 구출이 돼서 아이들은 지금 인트렐 병원에 입원한 상태이고, 아직 조사는 못했어요. 아이들이 미성년자에다가 보호자인 데이온 시설 원장이 꽤 까탈스럽게 구셔서요. 아, 물론 아이들이 그런 일을 겪었으니 그렇게 나오시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은 합니다.]

“고맙네. 그다음은 내가 하도록 하지.”

[네, 알겠습니다. 그럼 끊겠습니다.]

뚝. 통화가 끊기자 츠카우치는 고민을 했다. 어떻게 하면 이번 기회에 조사를 받을 수 있게 협조를…

“음?”

츠카우치는 눈앞의 올마이트를 봤다. 그리고 올마이트 역시 츠카우치를 봤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츠카우치의 눈이 빛났다. 올마이트는 어쩐지 오싹한 기분에 팔을 쓸었다.

 

16

밤늦게까지 호크스와 함께 밤하늘 구경을 하다가 늦게 잠들었던 것 같은데 소란스러움에 눈을 떠보니 어쩐지 병실이 축제 분위기다. 뭐야, 무슨 일이야.

“와하하하! 사인은 당연히 해주마!”

“올마이트한테 사인받았어!!”

“사진도 찍었어!”

한쪽에 애들과 화풍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 아니, 뭐야. 왜 병실에 올마이트가 있지. 이렇게 가까이에서 애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니 꿈, 은 아닌 것 같은데. 볼을 꼬집으니 아팠다.

뭐, 그래. 생각해보니 올마이트는 일본의 NO. 1 히어로니까 정부 정책 어쩌고로 병원에 입원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병문안을 해주는 그런 게 있나 보다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다시 눈을 감았다.

“소년!”

그런 나를 올마이트가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올마이트에 의해 종잇장처럼 펄럭거렸다. 어쩐지 올마이트가 당황한 듯싶었지만, 착각인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얼굴 화풍이 달라서 그런지 표정 변화가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렇게 만났으니 대화를 해보는 것은 어떤가!”

“에, 저는 됐어요. 애들이랑 대화해 주세요.”

“엇.”

어쩐지 올마이트가 ‘이건 예상과 다른데’ 같은 느낌으로 멈칫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올마이트는 나한테 뭔가 말을 더하려다가 애들이 달라붙자 나를 내려주고 애들을 신경 써주기 시작했다. 이러나저러나 올마이트는 인기인이니까 호응도가 낮은 나보다 흥분도가 상당한 애들이 밀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

어휴, 잠이 깼네. 어쩔 수 없다. 애들은 올마이트가 있으니 잠깐 병실에서 나갔다가 와도 괜찮겠지.

나 홀로 나가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지만, 병원 안이니까 괜찮… 씁, 저번에 병원에서 끌려갔었던 것이 떠올라 병실에서 나가려던 것을 멈췄다.

한참 동안 애들에게 시달린 올마이트(조금 전까지 진페이가 올마이트의 머리에 올라가 뿔같이 뻣뻣하게 솟아있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있었고 노노키는 오른쪽, 페코는 왼쪽 어깨에 올라타고 있었고 테이마루와 코지타는 올마이트의 팔뚝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는 조금 낡은 모습으로 내 옆에 앉았다.

“괜찮으세요?”

“음! 이 정도로 힘들지는 않다, 소년!”

아, 그러신가요. 그 뒤에 나와 올마이트 사이에서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쩐지 옆에서 뭔가 대화를 시도해 보려는 모습이 보였으나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소년에 대해 알고 싶어서 말이다!”

라고 말하고 ‘이게 아닌데!’ 표정이 되었다. 아니, 된 게 맞나? 아까보다 좀 더 짙어진 화풍으로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올마이트가 내게 작게 속닥였다.

“실은 내 친구가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해서 말이야.”

과연. 올마이트의 친구…라면 그때 그 사람이려나. 마침 잘됐네. 나도 그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하기도 했고 그때 끌려갔던 애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으니까. 신님이 말한 이탈권이 제대로 됐는지도 알아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았다.

게다가 원래라면 올마이트의 지명도? 인기 같은 것을 이용해 내 입으로 이야기를 들어야 했던 것 같지만, 올마이트는 이런 일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 친구라는 사람도 어쩌면 이렇게 될 것을 알지 않았을까?

“그 친구분이 지금 여기에 와 계신가요?”

“만나 줄 수 있겠나, 소년?”

“그럼요.”

“그럼 다행이군! 자, 그럼 지금 당장 가도록 하지!”

네?

“어? 미노루 어디가?”

“올마이트가 미노루 데려간다!”

“어어?”

“HAHAHA! 잠시 친구 소년을 빌리겠다, 소년, 소녀들이여!”

올마이트는 설명 대신 그리 말하고 나를 데리고 병실에서 나왔다. 그에 병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었던 애들이 “올마이트가 데려갔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나도 가고 싶었는데.” “나중에 미노루가 돌아오면 무슨 얘기했는지 물어보자.” 같은 대화를 나누고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에 혹시 몰라 쫓아올 아이들을 대비하던 올마이트가 어쩐지 하하, 웃는다.

“친구들이 믿는 모양이군, 소년!”

아니. 날 믿는 것과 별개로 당신을 믿는 것 아닐까요? 그런 생각만 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올마이트도 주위의 눈길이 있기에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호크스에게 안겨서 하늘을 날 때 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사람의 뛰는 속도로 이런 느낌을 받다니. 호크스도 별거 아니네. 어쩐지 호크스가 ‘NO.1과 비교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같은 소리를 할 법한 생각이었지만, 어쩌겠어.

 

17

“그래서 이렇게 데려왔다고…?”

“그렇지!”

츠카우치는 미간을 짚었다.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사고를 칠 줄이야. 올마이트는 츠카우치의 행동에 화풍이 다시금 짙어졌다. 뭔가 잘못한 건가?

“저기, 저는 괜찮아요.”

오렌지 주스를 빨대로 쪼로롭 마시던 아이, 미네타 미노루가 그리 말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미노루에게 꽂혔고 아이는 고개를 기울이며 주스를 마셨다.

아이가 괜찮다고 말을 하더라도 아이의 보호자인 데이온 시설의 원장은 전혀 괜찮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원장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왔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걸어보는 츠카우치는…

“원장은 만났나?”

“아이들만 있어서 사인도 하고 사진도 찍고 왔지!”

다시금 미간을 짚었다.

 

18

“우선은 감사합니다.”

내가 감사 인사를 하자 올마이트의 친구, 그러니까 자신을 츠카우치라고 소개한 사람이 놀란 얼굴을 했다. 왠지 의아하다는 시선인데. 기억 못하는 걸까?

“저번에, 저를 도와주셨잖아요. 그때 제대로 감사 인사를 못 했던 것 같아서요.”

“아. 아아, 그때 말이구나.”

옆에 있던 올마이트가 무슨 이야기냐는 듯이 츠카우치 씨를 바라봤고 츠카우치는 그런 올마이트를 옆으로 밀었다. 저 올마이트가 그렇게 쉽게 밀려나는 모습이 조금 이상해서 가만히 바라보니 츠카우치 씨가 헛기침했다.

“그래서 저한테 볼일이 있으시다고 올마이트가 말했는데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우선은 이렇게 미노루 군을 데려올 계획은 없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사정을 말하도록 할게. 미노루 군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듣고 싶은 이야기라. 어떤 이야기려나. 그때 옥상에서 만났던 그 애와의 이야기겠지? 그것 외에는 다른 사정은 없을 테니까.

“어떤 건가요?”

의심 가는 것은 있었지만, 상대방 측 그러니까 츠카우치와 올마이트는 나를 그저 평범한 아이 정도로 파악했을 테니 얌전히 아이가 궁금했을 법한 내용으로 묻기로 했다.

“방화와 살인 그리고 미성년 살인 미수를 일으킨 빌런에 관한 이야기야. 혹시, 이 이야기가 불편하다면 여기서 그만두도록 할게.”

“저도 하고 싶었던 이야기예요. 그 빌런에 대해서라면… 저도 잘 모르는데….”

“그래…. 그 빌런도 무차별적인 방화에 살인이라고 말하고 있어.”

음, 그 애가 말이지. 그 애의 말로 따지면 미네타 미노루라는 내 존재가 정말 싫었으니 무차별적인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미노루 군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가 없을까 하고 말이야.”

음, 아버지나 어머니.

…….

“미노루 군?”

잠깐?

나, 나 왜 기억이 안 나지?

미네타 미노루가 되기는 했지만, 미네타 미노루의 부모님의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어찌 알겠나.

그건 그렇다 치고.

미네타 미노루에 빙의 되기 전의 삶의 부모님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나 분명 기억했을 텐데. 이름까지. 이름? 이름, 이름이 뭐였지? 세상에. 아무것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가…을.”

“미노…숨을….”

어, 엄마 이름이. 뭐더라?

아빠, 아빠는?

내 이름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미네타 미노루라는 것뿐.

빙의했다는 것뿐.

“미노루 군! 숨을 쉬어!”

귀로 크게 들려온 목소리에 허억,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와 함께 콜록, 하고 기침 소리가 내뱉어졌다. 폐에 갑작스럽게 찬 공기가 들어와 식도를 간지럽히며 기침이 계속해서 새어 나와 힘들었다.

그보다 나 언제 츠카우치 씨에게 안겨 있게 된 거지. 멈추지 않는 기침을 했다.

“봉투를 가져왔는데… 괜찮은가, 소년!?”

“올마이트, 우선은 간호사를 불러와 줘. 미노루 군, 괜찮아? 괜찮으면 고개를 끄덕여줄래?”

기침하며 고개를 끄덕이니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미노루 군의 상태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이렇게 물어봐서 미안하다.”

“아, 아뇨. 콜록. 아니에요.”

“아니야. 아무래도 원장님의 걱정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기억, 안나요.”

“응?”

“기억이 안 나요. 부모님에 대한 게….”

“그게 무슨….”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요!”

내가 그리 말하자 츠카우치 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옅은 기침이 이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츠카우치 씨의 팔을 잡았다.

“어떡해요? 엄마. 아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미노루 군, 진정해!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진정하고 심호흡을 해.”

또 내가 숨을 쉬지 않았나? 의식적으로 숨을 쉬기 위해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내 등을 도닥여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 덕인지 점차 기침도 멎었다.

올마이트와 함께 들어온 간호사가 츠카우치 씨에게 나를 넘겨받아 그대로 병실로 돌아왔다. 원장님이 간호사의 뒤를 따라 들어오려던 츠카우치와 올마이트를 매섭게 노려보는 것을 끝으로 나는 침대에 눕혀졌다.

 

19

“이게 뭐 하는 짓이죠?”

원장은 병실 문을 닫고 그 앞에 서서 눈앞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냥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매섭게 보는 것이었다. 지은 죄가 있는 두 남자는 다른 말을 얹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제 납치될 뻔했던 상황을 겪은 아이예요. 거기에다가 한순간에 평생 함께하던 부모님도 잃고 그곳에서 겨우 살아남은 아이라고요! 그런 아이에게 뭘 물어보신 겁니까? 당신들이 인간입니까!?”

점점 올라가는 목소리에 츠카우치는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올마이트도 마찬가지였다. 원장은 수군거리며 몰려들기 시작하는 구경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손가락을 튕겨 주변의 소음을 차단했다.

“따라오세요.”

원장이 먼저 앞서가기 시작하자 츠카우치와 올마이트는 그 뒤를 따랐다. 구경꾼 무리를 지나쳐 병원 옥상으로 올라간 세 명이 옥상의 문을 잠근 후에 다시금 원장이 손가락을 튕겨 개성을 풀었다.

“적어도 절 통해서 이야기를 나눴더라면 제가 이렇게까지 화낼 일은 없었겠지요. 츠카우치 형사님 그리고 올마이트.”

“올마이트는 그저 제 부탁을 들어준 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제 잘못….”

“오롯이 당신 잘못이라고요? 아니요! 올마이트도 잘못했습니다! 미노루에 대해 올마이트는 뭘 알고 계십니까?”

“으음….”

“보십시오! 츠카우치 형사님께 들은 이야기가 전부이지 않습니까! 후우, 정말 어떻게 된 어른들이….”

원장의 긴 한숨에 두 사람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 할 말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이번 일에서 죄인은 두 사람이었으니까.

한참을 침묵하던 원장은 마른세수한 다음에서야 입을 열었다.

“그래서… 미노루가 뭐라고 했나요?”

방금까지의 기세는 없어지고 조용히 묻는 원장의 말에 츠카우치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지금 미노루 군은 일시적 기억 장애를 일으키고 있는 듯싶습니다.”

“…네? 그건 무슨 소리죠?”

“미노루 군이 그러더군요.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고.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요.”

“……설마. 아니, 그렇지만….”

츠카우치의 말에 원장이 조금 복잡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에 그런 증상이라든가 느낌은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전혀요. 아니, 그래. 없었던 것을 이상하게 여겼어야 했는데….”

“그 말은…?”

“그 아이, 시설에 들어오고 사흘 동안 불타 버린 집으로 매번 되돌아갔어요. 몇몇 아이가 그런 적이 있었기에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닷새가 된 날부터 아이가 정신을 차린 것처럼 다른 아이처럼 행동하더라고요. 게다가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서 이제는 마음의 정리가 끝났구나 하고 넘어갔는데… 세상에. 설마 그런 상태가 되었을 줄은….”

아이를 제대로 못 본 것은 자신이었다며 흐느끼기 시작한 원장을 본 츠카우치가 쓰고 있던 모자를 꾹 눌러썼다. 그 사이에서 올마이트는 그 작은 아이를 떠올렸다. 부모를 잃고 더욱이 그 부모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다니. 그것만큼 괴로운 일이 어디 있을까.

아까의 일을 떠올려보면 아이가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만큼 그때의 기억이 무섭고 괴롭다면 말이다.

옥상에 서 있는 어른들은 그저 조용히 미노루에 대해 생각했다.

 

?

간호사님이 내어준 진정제와 링거를 맞으며 침대에 누우니 금세 잠이 들어 익숙한 듯 어색한 새하얀 공간에 오게 되었다.

신님.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나는 들어야 했다. 대체 내게 왜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없는지.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아이야.]

그게 어째서 당연한 건데요!

[어째서 화를 내는 것이지? 너는 이제 이곳에서 살아야 하느니라. 그런데 그 전의 기억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지?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데 불필요한 기억을 품고 가야 하는 이유는 없지 않은가.]

불필요한 기억이 아니에요!

[들어라, 아이야. 이미 이 세계에 네 영혼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영혼이 이 세계에 오며 그 전의 기억이 사라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절차이도다. 어찌 그것을 거부하려는 것인가. 잊지 마라, 아이야. 주인공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세계의 부속품에 불과한 존재이니라. 너 역시 세계를 구성하는 부속품이니 세계에 맞게 바뀌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내가 되고 싶다고 한 것도 아닌데! 이 세계에 오고 싶다고 한 적도 없는데!

[운명이라는 것은 그러한 법이니라. 너 역시 맨 처음엔 ‘타협’을 하지 않았는가.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으니 타협을 해야 하느니라. 타협해라. 이 세계에서 살아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

이 세계에서 살아가게 되었다고 모든 것에 타협해야만 한다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갑자기 미네타 미노루가 된 것도 어이가 없었는데 원래 내 기억조차 사라진다면 난 뭐가 되는 거야.

 

내가 어떻게 미네타 미노루의 몸에 빙의한 것을 참아냈는데.

내가 어떻게 최대한 멀쩡하게 살아가려고 했는데.

내가 어떻게 참고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시금 생각해보면 나는 이 세계에 와서 가족에 대해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아예 가족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미네타 미노루에 빙의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가족에 대해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앞으로의 삶의 고민만 했다.

이게 신이 말했던 운명이라는 것인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면 언젠가는 내가 미네타 미노루에 빙의했다는 사실도 잊었을지 모르겠다.

그게 너무나 허무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제 기억도 못 하는 것이니 받아들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가장 컸다. 그렇지만 부모님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슬펐다. 분명 좋은 분들이었는데.

어쩌면 괜한 오기일지도 모른다. 편하게 받아들이고 가볍게 생각하면 되는데 구태여 상황을 어렵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미네타 미노루가 되기 이전의 나는 무엇이 되는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다. 존재조차 남지 않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그게 너무 슬펐다.

 

?

[아이야.]

부르지 마세요.

[그렇게까지 원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싫으냐?]

당연하죠!

[흐음. 이해할 수가 없도다. 깔끔하게 기억이 사라지는 편이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 좋은 것이 아닌가?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잊지 않았겠지? 네가 살던 세계와는 별세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개성’이 강한 세계이니라. 그런 곳을 원래의 기억을 가지고서 어찌 살려고 그러는 것인지.]

신님은 인간의 마음을 너무 모르시네요.

[당연한 것을. 신이란, 절대자란 그런 것이니라.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길을 만들어주는 것이 전부이니.]

그러니까 너무 신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인간적으로 좀 생각을…

[그러나 이번엔 자비를 베풀어주마.]

네?

[아무리 정해진 순서라고 할지라도 너는 원래 세계의 수명대로 살지 못하고 강제로 미네타 미노루의 몸에 깃들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두마. 신의 자비는 여러 번 내릴 수 없고 받기도 굉장히 어려운 것이니라. 그것을 너에게 베풀어주마.]

그, 그럼 부모님이나 제 이름도 다 기억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하다. 그리고 이렇게 자비를 베푼 이후로 우리가 더는 만날 수 없음을 알아두도록 하여라, 아이야.]

이제 신님과 대화는 못 하나요?

[이 몸은 언제나 아이야, 너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내 실수로 인하여 네가 고생을 하기에 잠시 보살피고 있는 것뿐이었으니. 대화하지 못하여도 이 몸은 듣고 있을 것이니라. 그러면 이제 작별이다.]

신님, 감사합니다.

[오히려 이 몸이 네게 감사 인사를 해야겠지. 이 세계에서 살기 싫다고, 원래 몸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지 않아 주어 고맙구나.]

제가 돌아가면 미네타 미노루는 죽는 거잖아요. 그건 좀 그렇잖아요. 이미 이렇게 된 것을 어쩌겠어요. 신님이 그랬잖아요. 타협을 해야 한다고. 제 타협은 그거예요. 미네타 미노루가 된 것은 어쩔 수 없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인간은 사랑스럽구나. 아이야, 타인을 사랑하고 친절을 베풀거라. 그리하다 보면 운명이 네 편이 되어 분명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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