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송이 : 잘못 끼워진 단추

3~7화 분량.

1

“미노루 군. 잠깐 시간 괜찮니?”

시설의 원장님이 나를 따로 불러냈다. 곧 잠들 시간이니 얼른 이야기 듣고 자러 가야지, 생각하며 원장실로 향했다.

“이번에 가라키 선생님께서 한 번 검진을 받으러 오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거든. 미노루 군은 어떻게 생각하니?”

음, 검진이라.

“지금 당장 가자는 이야기는 아니란다. 가라키 선생님도 일정이 있으셔서 음… 그래, 한 달 뒤쯤엔 시간이 나신다고 하셨거든.”

“그러면 그때 검진받으러 갈게요.”

“그러겠니?”

걱정됐거든, 같은 말을 하며 방긋 웃는 원장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원장실에서 빠져나왔다.

가라키. 가라키라.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사실 대학교 생활을 즐기느라(정확히는 과제에 치여서 누워있었다) 바빴으니까 말이다.

기억나지 않는 건 내버려 두자. 졸리기도 하고.

 

2

“미노루 군. 책 읽어주라!”

“그래. 어떤 책인지 보여줘.”

“자, 여기!”

파란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은 미리카가 ‘토끼와 거북이’ 책을 건네줬다.

익숙한 동화책이네.

내가 책을 펼치자 주변에 있던 애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먼 옛날에….”

 

2.5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장님.”

“그런 말씀 마세요. 매번 저희를 후원해주시는데 이 정도도 못할까 봐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저쪽 구경 좀 할게요.” 그리 말하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어른 간의 대화는 계속 이어질 테니 저는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좋을 거다.

“토끼와 거북이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걷다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관심이 생겨 고개를 쏙 빼 구경을 하니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 중앙에 앉아있는 포도를 닮은 아이가 보였다.

“이 책의 교훈은 자신의 잣대로 남을 비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야. 아무리 뛰어난 개성을 가졌다고 해도 쇼타가 진바시와 달리기 시합을 하면 지는 것처럼 말이야.”

“내, 내가 언제!”

“미노루 말이 맞아! 진바시는 발이 빠르지!”

“맞아, 쇼타는 힘이 세지만 말이야.”

한 아이의 말에 아이들이 까르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가만히 구경하다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뒤로 빠졌다. 요즘 애들답지 않게 사이좋네. 아니지. 원래 애들이 저렇게 사이좋은 게 당연하잖아?

“여기 있었나?”

“아, 네.”

“자네가 보기엔 어때?”

“음, 뭐가요?”

“후배 양성 말이야. 눈에 띄는 아이는 없는가 하고.”

상사의 말에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돌려 포도를 닮은 아이를 흘겨봤다. 다시 시선을 돌려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보기만 했어요. 저보단 장관이 더 낫지 않나요?”

사람 보는 눈, 말이에요. 그리 말하며 웃자 장관은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자, 호크스.”

“네이네이.”

 

3

오늘은 손님들이 많이 왔다.

정확히는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 시설에 사람들이 들렸다 정도로 말해야 할까? 애들이 손님들 앞에 나서는 것을 보다가 뒤로 빠져나왔다.

꼭 입양되어야 하는 걸까? 이 시설에서 계속 자라서 적당한 학교에 입학해서 기숙사에 들어간 뒤에 아르바이트하면서 돈도 모으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짜다가 깨달았다.

아차. 원작. 잊고 있었네.

그렇다. 지금 당장 현생을 살다가 잊고 있던 게 있었다. 너무 잊어서 그런 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기억도 없는 상태지만.

“무섭네.”

앞으로 다가올 원작 말이다. 웅영에 가야 하는 걸까? 굳이 내가 해야 할까? 원작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2차 패러디를 접하던 친구가 해준 이야기는 기억난다. 미네타가 없어도 이야기는 잘만 진행되는 것 같다고.

그럼 나도 없어도 되는 거 아닐까?

“그냥 사라지고 싶다.”

어휴, 어휴.

“여.”

???

홀로 앉아서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하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면? 당연히 놀라겠지. 놀라서 허둥지둥 바닥을 기어서 도망쳤다.

“어라. 미안, 미안.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는데.”

뒤를 돌아보니 빨간 날개가 보였다. 퍼덕이던 빨간 날개를 접은 사람이 쭈그려 앉았다.

“무릎은 괜찮아? 다친 건 아니고?”

“괘, 괜찮아요.”

이, 이 낯선 얼굴은 뭐지? 아니, 익숙한가? 아닌가? 기억해라, 뇌야! 원작에 나온 사람인가? 아닌가? 모르겠다.

“혼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냥, 혼자가 좋아서요?”

“그런 것 치곤 자주 모여있던데?”

???

예?

방금 무슨 말을? 어디서 절 보셨습니까? 감시 카메라로 본 건가? 그게 아니면 자기 스스로 훔쳐보고 있었다는 것을 자백한 건가??

내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으니 그가 그저 웃으며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잡아가지 않을 건데.”

“…….”

“어이쿠. 야생 길고양이 같은 반응은 신기하군.”

턱을 쓸며 웃는 그를 보다가 후다닥 도망쳤다. 뭔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작전상 후퇴다. 물론 내게 작전 같은 것은 없지만.

 

4

그날 이후로 그가, 그러니까 ‘호크스’라고 불리는 사람이 자주 놀러 왔다.

“앞으로 2년 뒤에 규슈에서 사무소를 차릴 거야. 나중에 우리 사무소에 놀러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이거 가질래? 장난감 잔뜩 사 왔어.”

개성을 사용해서 시설의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미노루도 타볼래?”

뭔지 모르겠지만… 대충 알았다.

“있지, 호크스 형은 할 일 없어?”

“억.”

호크스는 내 말에 심장께를 양손으로 꾹 눌렀다.

“미노루. 나 방금 비수가 내리꽂혔어.”

“할 일이 없구나….”

“아, 아직 정식으로 히어로가 된 게 아니라서 그런 거야. 사무실도 차리고 그러면 엄청나게 바빠져서 보는 것도 힘들어져. 진짜야.”

“응, 응. 그래. 알겠어.”

“진짠데….”

툴툴거리며 내 포도송이 머리에 자기 날개깃을 꽂기 시작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에비, 에비. 하면서 손을 휘적이니 호크스가 재미있다면서 더 꽂기 시작했다.

이 망할 놈의 새가.

 

5

내가 미네타 미노루가 된 지 얼마나 지났더라. 그러니까… 한 달하고 2주 정도 흐른 것 같다. 탁상 달력에 체크를 해뒀으니까.

미네타가 된 이후 지금까지 개성을 써본 적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서 흐지부지 시간만 보냈지만, 오늘만큼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다.

10살, 초등학교 3학년인가?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일본에선 6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을 방금 깨달았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라는 소리인가?

세상에. 대학교에 어떻게 들어갔는데. 초등학교부터 다시 시작이라니. 지옥이다.

후. 진정하고, 계산을 다시 해보자. 지금 10살이니까, 중학교엔 12살에 입학하고, 고등학교엔 15살에 입학을 하겠네.

그럼 앞으로 나에겐 5년이라는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정해야만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원작을 그대로 따라갈지. 조금이나마 뭐라도 해 볼 것인지.

원작을 그대로 따라갈 거라면 나는 지금부터라도 운동을 시작해야 했다. 기본적인 체력이 거지였고 원래부터 운동하는 건 정말로 싫어하는 편이었으니까. ‘웅영 고등학교’는 히어로 과가 대표적인 고등학교다. 그런 만큼 체력은 확실해야겠지?

또 조금이나마 뭐라도 해 보겠다고 결정하면, 다른 고등학교로 가게 되겠지. 그러면 앞으로 원작의 인물들과 크게 엮일 일은 없을 것이다.

또 빌런과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겠지.

자, 그렇게 되면 가장 좋은 방법은 후자뿐이다.

좋아! 웅영엔 들어가지 말자! 히어로, 포기하자! 편하게 적당한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느긋한 생활을 보내는 거야!

“미노루, 뭐해?”

힘차게 주먹을 꽉 쥐고 머리 위로 올린 포즈를 취하고 있다가 호크스에게 발각당했다.

조, 조금 부끄럽다.

“혹시, 올마이트 흉내?”

예?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만?

내가 아무리 열심히 고개를 저어봐도 소용이 없었다.

“하하, 부끄러워하지 마. 원래 그런 법이지. 히어로는 동경하게 되는 법이니까. 응, 응. 미노루는 올마이트 파구나. 그렇지만 엔데버도 제법 좋은 히어로거든.”

아니, 포교하려고 하지 마. 그보다 올마이트 파, 라니 그건 또 뭔데.

“이것 봐. 엔데버 피규어야. 미노루 보여주려고 가져왔어.”

그의 품속에서 엔데버 피규어가 나왔다. 이건 또 뭐야. 아, 하지 마, 하지 마. 그걸 왜 나한테 들이미는 건데.

그대로 호크스한테 붙잡혀서 한 시간 동안 엔데버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

찾아라.

 

6

이상한 꿈을 꾼다. 내가 미네타 미노루가 된 이후부터 계속해서 꾸는 꿈이다.

정확하게 어떤 내용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새하얀 공간에서 누군가가 계속 내게 말을 건다.

‘찾아라.’

이게 전부였다. 기억하는 전부.

악몽, 이라고 하기엔 어려웠다. 무서운 것이 나오지도 않았고 가위에 눌리지도 않았으니까. 정말로 누군가가 나에게 뭘 찾으라고 하는 것이 전부여서 오히려 뭘 찾아야 하는지 제대로 알려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꿈이라….”

“형이라면 아는 게 있을 것 같아서.”

“글쎄. 나라고 해도 다 아는 것은 아니라서 말이야.”

나름 친해진 호크스에게도 물어봤지만 좋은 답변은 없었다. 하긴, 호크스가 어떻게 알겠어.

“어쩌면 이 마을에 꿈을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는 개성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과연. 그럴 수도 있겠네.

“고마워, 형. 도움이 됐어.”

“그래?”

그 말과 동시에 호크스는 내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만해, 형….”

“그렇지만 이거… 제법 중독적이란 말이야.”

호크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 머리가 좀 탱탱하긴 하지.

 

?

…찾아라.

널…….

 

곧.

 

7

“미노루, 준비는 됐니?”

“네….”

“어머. 눈 밑이 꺼멓구나, 미노루.”

“꿈자리가 안 좋아서요…….”

“그래? 세수하고 오렴.”

원장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욕실로 향했다. 꿈자리가 진짜 안 좋긴 했다. 최근 들어 더 심해진 기분이 든다. 그전에는 그저 찾으라는 말만 들렸는데 이번엔 뭔가 더 들린 것 같았다.

‘곧’이라고 했던가? 뭐가 곧이지. 뭔지 모르겠지만 찝찝한 생각은 세수하며 날려버리고 양치도 깔끔하게 한 뒤에 옷도 갈아입고 원장실로 향했다.

“말하지 않아도 다 하고 왔네. 역시 미노루는 착하구나”

속에 들어간 게 22살의 다 큰 청년이라서 그렇습니다, 원장님.

“자, 차에 타렴. 가라키 선생님이 계신 병원에 가려면 2시간은 가야 하거든.”

“2시간….”

차멀미가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없었던 것 같았다. 22살의 양소현도 10살의 미네타 미노루에게도.

시동이 걸려있는 승용차 조수석에 앉으니 원장님이 곧 운전석에 앉으셨다.

“출발할게.”

“네.”

원장님은 라디오를 틀고 운전대를 잡았다.

나는 딱히 할 것이 없어서 안전띠를 매고 창밖을 구경했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은 조용했다. 라디오 방송에서 들려오는 앵커의 목소리를 빼면 말이다. 라디오를 켜두는 이유는…

[방금 들어온 속보입니다. 하다노시에 괴수형 빌런이 등장했다고 합니다. 통행 중인 일반 시민분들께서는 최대한 거리에서 벗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유 탓이다.

“세상에. 여기에서도 보이네.”

원장님의 말에 정면을 보니 진짜 거대한 괴수가 요란한 몸짓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거기에 불꽃이나 얼음이나 전기 같은 것들이 반짝거리며 괴수를 공격하는 것도 보였다. 아무래도 히어로가 나서기는 한 것 같다.

[앗!]

앵커의 외침과 함께, 괴수가 갑자기 높게 뛰었다.

[어떻게 된 거죠?!]

어, 어떻게 되긴.

그 괴수가 점프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크워어엉~!!!!”

엄마야. 살려주세요.

 

8

“내가! 왔다!!”

 

9

순식간이었다.

진짜로.

눈 깜빡하는 사이에, 거대한 괴수가 주먹 한 방에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가 다시 추락하는 그 괴수를 가볍게 어깨에 둘러멘 것은… 올마이트였다.

“올마이트!!”

“굉장해!! 방금 봤어? 주먹 한 방으로 끝냈다고!!”

“HAHAHA! 그럼 이만!”

“고마워요, 올마이트!!”

그렇게 올마이트는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말 올마이트는 굉장하네….”

그러게요.

“그보다 조금 전 일 때문에 정체가 심해지겠네. 예정했던 시간보다 늦어질 것 같은데.”

어휴, 한숨을 내쉬는 원장님을 위로하는 것도 이상했기에 그냥 얌전히 있기로 했다.

 

10

“접수하고 올 테니 조금 기다려줄래?”

“네, 저기 의자에 앉아 있을게요.”

“역시 미노루는 착하구나.”

원장님은 내 머리의 포도(같은 무언가)를 통통 만지곤 접수를 하러 가셨다.

나와 원장님은 예정된 2시간이 아닌 2시간이 추가된 4시간이나 지나서야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는 길목에서 히어로를 구경할 수 있었으니 만족은 했지만 말이다.

기억에 전혀 없는 히어로와 기억에 있던 히어로가 섞여 있어서 신기했다. 아니, 신기한 것은 아니지. 원작에 등장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들은 당연히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가. 지금 내 옆에서 열이 오른 아이를 달래며 순서를 기다리는 어머니라든가 손주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병원에 온 할아버지처럼.

원장님이 접수를 마칠 때까지는 병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했다. 어린애가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나. 가끔 TV를 보는 것 외에는 아주 심심했으니까 말이다.

구경하는 것으로도 심심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야 그렇겠지. 사람 사는 것 정도는 시설에 있는 아이들이나 마을 주민들로 충분히 보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저쪽에 책이 꽂혀있는 게 보였기에 책이라도 읽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났다.

 

11

“너, 뭐야?”

 

12

응?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정말 엄청난 미인이 서 있었다. 길고 긴 검은색 머리카락이 불편하지도 않은지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고 반듯한 눈썹과 긴 속눈썹 그리고 새파랗게 빛나는 보석 같은 눈동자까지. 그 누가 보더라도 잠깐 정도는 돌아볼 법한 미인이었다.

그보다, 방금 그 말을 저 사람이 한 건가?

“왜 살아있는 거야?”

…….

예?

“그때 분명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뭐, 됐어. 다시 처리하면 그만이지. 여긴 보는 사람이 많으니까, 옥상으로 가면 되겠지!”

어? 어??

반, 반항을 해야 하는데 어쩐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덜덜 떨리기도 하고 오금이 저려서 비틀거리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도 내 팔을 잡고 끌고 가는 사람은 그런 나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뭐지? 뭔데?

 

?

그것은 불길 속이었다.

어두운 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것이라곤 가느다랗고 은은한 달빛뿐, 그 외에는 그 어떤 광원도 없는 어두운 밤에 붉디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비명이 들렸다. 아. 비명은 내가 지르는 것이구나. 그제야 깨달았다. 내 몸이 아프다. 뜨겁다. 타들어 간다.

미노루! 미노루!

누군가 이름을 부른다. 문이 쿵쾅거린다. 내 몸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난다.

“어차피 원작에서 도태된다고 하더라도 너 같은 놈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싫거든.”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방 한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어째서? 왜?

내가 뭘 했는데?

“아, 아~ 정말이지. 이런 ‘운명’은 필요 없는데 말이야.”

바닥에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는 그 눈빛은, 더러운 구정물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뭐, 됐어. 곧 죽을 테니까.”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칼로 찔러 죽인 것도 아니고, 총으로 쏴 죽인 것도 아니잖아? 아하하하!

어째서. 어째서 내가? 죽기 싫어. 죽기 싫어!

“미노루! 기다리렴!”

“개성으로 어떻게 좀 해봐!”

“불이잖아! 우리 개성은 불에 약하단 말이야!”

아. 엄마. 아빠.

“엄마, 아빠가 구해줄게, 미노루!”

“정신 잃으면 안 된다, 미노루!”

 

?

불길의 뜨거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팔을 잡아당기던 그 사람도 없었다.

이곳은 새하얀 공간이었다.

“여긴…”

멍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기억에 있는 장소였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분명 이곳이 어디인지 떠올렸다.

아아, 그래. 여긴 꿈속에서 보던 곳이다. 여기에서 매번 누군가에게 말을 들었지.

[잘 왔다, 아이야.]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새하얀 빛이 나를 내리쬐었다. 눈이 아픈 느낌은 없고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게 나를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꿈이라는 방식으로 전달하니 불편함이 크더구나. 흠, 이 방식은 조금 고쳐야겠도다.]

뭔가 혼자서 이야기를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어쩐지 내 쪽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가 바라보는 기분은 조금 좋지 않았다.

[이 몸이 직접 강림할 수는 없음을 이해하기 바란다. 쉽게 쉽게 강림해서야 절대자로서 근엄하지 못하지 않겠나.]

아, 음.

그러니까… 신님?

[비슷하도다, 아이야.]

비슷한가요….

[이 세계가 어떤 세상인지 알고 있겠지.]

어, 네.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세계입니다.

[이해력이 좋은 아이로고. 그렇다. 이곳은 그 창작물 속 세계이니라. 본래라면 너는 원래의 세계에서 죽은 이후 이곳에서 다시 태어났을 예정이었도다.]

예정, 이었다니요?

[그 예정이 조금 전의 아이로 인해서 뒤바뀌어져 버렸도다. 참으로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지.]

그, 그럼 제가 미네타 미노루가 된 것도?

[음. 그 아이의 행동으로 인해 아직 살아있던 너의 영혼을 급히 불러와 어떻게든 ‘인원’을 채워 넣었지. 무슨 뜻인지 이해했는가?]

아, 아뇨. 아뇨. 저기, 진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 아이야. 이해했지 않은가.]

아뇨. 몰라요. 진짜 몰라요. 알고 싶지 않아요.

[…….]

신님이 말한 대로라면… 저는 걔 때문에 원래 수명만큼 살지도 못하고 이렇게 미네타 미노루에게 빙의되었다는 이야기잖아요.

[음. 역시 이해력이 좋은 아이로다. 그렇다. 그 아이가 그러한 짓을 벌이는 바람에 이 몸이 매우 귀찮아졌노라. 하나의 세계에 하나의 영혼이 깃드는 법이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주인공’이 깃드는 법이라는 이야기니라.]

신님은 말했다.

이 세계는 정확하게 구분하자면 원작 세계의 하위 부류에 속한 세계로 다양한 주인공이 존재한다고 한다.

[너에게도 익숙한 이야기이지 않은가. ‘패러디’라고 하던가. 혹은 ‘드림’이라고 하던가.]

어쩐지 신님이 그런 말 하니까 이상한 기분이다.

[그러한 세계를 관리하는 것이 이 몸이니라. 보통 그 세계는 주인공이 뭘 하든 크게 관여하지 않는 것이 규칙이고, 진리인 법이니라. 그러나 그 아이는 저질러서는 안 되는 짓을 벌였노라.]

그게 바로 미네타 미노루의 죽음, 이라는 건가요?

[그러하다. 비록 미네타 미노루라는 생명이 그리 중요하냐고 묻느냐면 그것은 아니다. 이쪽 세계에선 미네타 미노루는 언제나 사라지기 마련이었으니.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대부분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는 살아있었지. 그러한 것을 이런 식으로 망가트리면 귀찮아지는 법이다.]

신의 입장에선 미네타 미노루가 지금 시기에 죽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NG’였다는 것이다.

그럼 다시 살려내면 되잖아요?

[그게 가능하다면 다른 세계의 주인공인 너를 급히 끌어와 미네타 미노루에게 집어넣을 일은 없었겠지.]

……하긴.

그렇지만 왜 미네타 미노루에게 빙의를 시킨 건가요? 죽은 것 아닌가요?

[어찌 되었든 미네타 미노루는 이 세계의 한 축이다. 미약하더라도 세계를 지탱하는 한 축이 무너지면, 결국 세계가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 그렇기에 미네타 미노루의 몸을 복구시키고 너의 영혼을 그 몸에 집어넣은 것이니라. 미네타 미노루의 부모는 없어도 괜찮았기에 내버려 두었도다.]

그럼, 그럼 나는.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화나는 것은 당연하겠지. 아이야, 그러하니 너에게 그 아이의 ‘이탈권’을 주도록 하마.]

이탈권이요?

[그렇다. 그 아이는 해서는 안 될 행위를 하였으니 이 세계에서 퇴출이니라. 분명히 이 세계는 그 아이가 주인공이 되는 세계이지만, 죄를 저질렀으니 퇴출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어떻게 쓰면 되나요?

[현실로 돌아가면, 모든 게 알아서 진행될 것이니라. 그 뒤부턴… 그래. 아이야. 네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 말과 함께 나를 내리쬐던 빛이 점차 얇아졌다.

[이런 식으로 운명이 꼬이는 일은 참으로 귀찮은 일이도다. 앞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 아직도 산더미처럼…. 어휴.]

어쩐지 마지막에 들린 신님의 목소리는 블랙 기업에 등골이 파먹히는 사원의 체념 어린 그것과 닮아있었다.

 

13

눈을 떴을 때는, 아니 정신을 차렸을 땐 내가 있는 곳은 불길이 솟아오르던 미네타 미노루의 방도, 신님을 만났던 새하얀 공간도 아닌 병원의 옥상이었다.

“야, 내 말 듣고 있어?”

그리고 눈앞엔 미네타 미노루를 죽이고, 나를 미네타 미노루에 빙의되게 만든 원흉이 서 있었다.

이 공포심은 미네타 미노루에게 각인되듯 새겨진 기억 탓이다. 기억뿐만 아니라 몸에도 남아있는 듯 그저 달달 떨려오기만 했다. 내가 아닌 미네타 미노루를 향한 적의라고 하더라도 저 애가 그냥 무섭다.

나를 깔보고, 내려다보고, 더러운 것 보는듯한 시선이 잊히지 않는다.

괜히 억울하고, 화가 난다.

“애초에 너 같은 쓰레기가 존재하면 안 되잖아.”

그런 말을 하며 나를 밀쳐 낸다. 애초에 미네타 미노루의 몸은 이제 막 80cm로 여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작은 편이었다. 성장 속도가 극도로 느렸다. 그렇기에 발로 쉽게 차였다.

그래. 밀쳐졌다기보단 차였다.

그런데도 나는 반항할 수 없었다. 그 개 같은 기억 때문에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신님. 뭐 하는 거예요. 이탈권 줬다면서요. 그럼 빨리빨리 이탈권이 발동되게 해달라고요.

“어떻게 그 불길에서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제대로 죽일게.”

그게 더 편할걸?

그렇게 말하며 그 애는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도 쉽게 잡히는 목을 그 애는 아무렇지 않게 잡았다. 넌, 너는. 원작도 알면서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는 거야? 어떻게 그게 가능해? 난 그럴 수 없는데.

숨이 가빠진다. 목이 졸려 몸을 버둥거렸지만 애초에 덩치 차이로 나의 완패였다. 이대로 죽는 건가? 이탈권 줬다면서.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는 건가? 아, 데려올 때도 멋대로였으니까.

점점 시야가 흐릿해질 때, 총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니, 확실하게 들렸다.

내 위에서 비틀거리던 몸이 곧 앞으로 고꾸라졌다. 콜록, 콜록. 기침하며 어떻게든 벗어나려던 나를 도와준 사람이 있었다.

“괜찮니?”

“가, 감사… 콜록….”

“이런, 말하지 말고. 우선 조금 살펴볼게.”

그제야 그 사람이 제대로 보였다. 갈색의 트렌치코트를 입은 사람이었다. 아. 기억났다. 올마이트의 친구, 라던 그 사람이다.

 

14

“미노루!!”

“워, 원장…님.”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니?!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했잖아!”

달려온 원장님을 보고 올마이트의 친구, 음, 이름은 까먹었다. 하여튼 그 사람이 자리를 비켜주며 나를 원장님에게 맡겼다.

“목 좀 봐! 새파랗게… 어떻게 이렇게 작은 아이를….”

“우선 아이를 납치하고, 살해하려던 현장을 목격했으니 적어도 쉽게 풀려나지는 않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보다, 선생님은?”

“아, 이런. 자기소개가 많이 늦었군요.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예에… 아, 경찰이시군요.”

“병원에 일이 생겨서 잠시 들렀는데… 현장을 목격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웃은 그 사람은 그 애를 잡고 끌고 갔다. 가면서 “아이가 걱정되니 한 번 더 연락을 부탁드립니다.”라는 말도 했다.

나는 그 상황에 그저 멍하니 원장님에게 안겨져서 옥상에서 내려왔다.

“미노루, 이대로 시설로 돌아갈까? 응? 이런 일을 겪어서 힘들었지?”

“여기까지 왔으니까… 검진은 받고 싶어요.”

“…그래. 그러자꾸나. 순서만 기다리면 되니까. 그래도 힘들면 꼭 말해야 해, 알겠지? 검진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미노루, 너의 안정이니까.”

“네….”

다행히 병원 안에선 큰 소란은 없었다. 경찰인 그 사람이 잘 처리하고 간 모양이다. 몇몇 의사와 간호사분이 우리 쪽으로 와서 간단하게 확인을 하고 가는 것 외에는 다른 일은 없었다.

이제 그 아이는 이 세계에서 사라지는 걸까? 이탈권이라는 게 어떻게 발동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미네타 미노루 군. 미네타 미노루 군. 제1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차례구나. 자, 걸어갈 수 있겠니?”

“네, 그럼요.”

원장님은 그런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제1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그때 꽃다발을 건네줬던 의사 선생님이 의자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안녕하세요, 가라키 선생님.”

“조금 전 일, 들었다네. 우리 병원에서 그러한 사건이 벌어지게 내버려 둔 점, 사과하네”

원장님과 나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는 의사 선생님을 보고 나는 멋쩍게 뒷목을 긁적이다가, 따가워서 손을 그냥 내렸다.

“자, 우선 몸 상태 좀 확인해 볼까.”

의사 선생님의 안경이 번쩍였다.

 

15

“미노루, 간호사분이랑 함께 있으렴”

“네, 원장님”

원장은 아이를 간호사와 함께 보낸 뒤에야 가라키 앞에 앉았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아이에게 들려주기는 어려운 이야기였으니까.

“목의 상처는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네. 아까 전 아이에게 했던 이야기대로 멍이 든 것 외에는 없어. 그나마 다행이지. 체격 차이도 있어 좀 더 힘을 주거나, 시간이 더 지났다면….”

“죽, 죽었을…거다?”

가라키가 고개를 끄덕이자 원장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어린아이가 뭐라고. 부모도 잃고 겨우겨우 지금을 살아가는 아이인데. 괜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목의 멍보다 더 심각한 것은… 신체의 성장 속도군. 미노루의 부모에 대한 정보는 찾아봤는가?”

“아, 네. 아버지, 미네타 네타오, 52세. 개성은 접착제. 신장은 180cm. 어머니, 미네타 미즈키, 49세. 개성은 탱글탱글. 신장은 170cm입니다”

“흠. 미노루의 개성은 송이송이, 였지. 부모의 개성이 잘 섞인 개성이군. 개성혼인가?”

“그런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부부의 사이는 매우 좋았고 지인 이야기론 연애결혼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요?”

원장은 가라키가 말한 정보를 시키는 대로 찾아뒀으나 의아해했다. 어째서 이런 것을 알아 와야 했는지.

“우선, 보게”

엑스레이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가라키는 레이저 포인트로 엑스레이 사진을 가리키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머리의 포도 같은 탱글탱글한 덩어리는 지금 같은 ‘개성의 시대’에선 그렇게 튀는 것이 아니라네. 그렇지만… 그렇군. 이 포도 같은 덩어리가 미노루의 영양분을 가져가고 있다네. 그러니까… 개성을 쓰면 쓸수록 성장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겠지”

“그, 그러면 개성의 부작용인가요?”

“그렇게 볼 수 있겠지. 예로 들어볼까. 개성을 사용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하는 발동계 개성과 유사하지. 미노루의 경우엔 머리의 포도를 떼어내 다시금 만들기 위해 몸속의 성장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말이야. 맨 처음 개성이 발현됐을 때는 알 수 없었겠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분명하겠지. 성장기의 아이에겐 큰 악영향을 줬겠어.”

원장은 가라키의 설명을 들으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개성이 신체에 악영향을 준다니.

“가장 좋은 방법은 미노루의 성장이 끝날 때까지 개성의 사용을 자제시키는 것 외에는 없을걸세.”

“아, 네. 알겠습니다”

“목의 멍은 약을 처방해주겠네. 개성에 대해선… 영양제라도 지어 주지.”

“감사합니다, 선생님.”

“음.”

원장은 가라키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진찰실에서 나왔다.

 

16

“‘성장 속도’에 영향을 끼치는 개성이라. 활용하기엔 어렵군. 이건 폐기해야겠어.”

 

17

“자, 미노루 약만 받고 돌아갈까?”

“네.”

간호사 선생님이 건네준 책을 읽으며 기다리니 금방이었다. 원장님과 함께 약을 받고 나서 차를 타고 시설로 향했다.

식사 시간이 애매해서 원장님과 중간에 휴게소에서 저녁을 먹은 다음에 다시 출발했다.

시설에 도착하니 벌써 잘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해줄 이야기가 있지만…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씻고 목에 약 바른 다음에 자렴, 미노루. 내일 보자꾸나.”

고개를 끄덕이니 원장님이 어서 가보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 꾸벅 인사를 하고 대충 씻은 다음에 거울을 보고 목에 약을 발랐다. 와, 이렇게 보니까 진짜 아파 보이네. 뭐, 실제로도 아프긴 하지만. 약을 바르니 좀 따갑기도 하고.

이제, 자볼까.

그렇게 침대에 누우니…

 

18

[아. 미안하구나, 아이야. 운명이 좀 꼬였다.]

 

19

어쩐지 그런 꿈을 꿨다. 데헷,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낸 신님의 목소리가 마지막에 들려온 것 같은 기분이다.

 

20

후두둑, 하고 사과가 데굴데굴 굴러온다. 뭐야, 하고 사과를 줍고 고개를 드니 호크스가 나를 보고 경악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거기다가 들고 있던 사과 봉투까지 떨어트려서 이렇게 사과가 굴러오는 중이고.

“안녕, 혀….”

“이게 뭐야? 누가 그랬어?”

다짜고짜 달려와서 하는 말이 그거다. 내 어깨를 붙잡고 목에 남아있는 멍을 보며 미간을 찌푸린 호크스를 보고 음, 고민했다.

“그런 일이 있었어.”

“그런 일?”

“음… 여기서 말하기엔 좀, 그런데.”

그제야 호크스는 여기가 시설의 운동장이고 지금 애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몰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날개를 퍼덕이기 시작했다.

“안에 들어갈래? 원장님께 드릴 사과지?”

“어, 응.”

“가자, 형.”

“으응.”

호크스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싶은 얼굴로 내가 잡은 손을 놓지도 못하고 허리 숙인 채로 끌려오고 있었다.

원장실로 호크스를 배달하고 호크스한테 받은 사과를 잘 닦아서 한 입 베어 물었다. 음, 맛있다. 어째서인지 포도보단 사과가 더 맛있단 말이지. 미네타 미노루의 개성이라던지 생김새가 포도를 닮아서 그런지 조금 물리는 기분이랄까.

사과를 반쯤 먹었을 때 호크스가 원장실에서 나와 내 옆에 앉더니 내 머리를 통통 만지기 시작했다.

“왜 그래?”

“…아니, 그냥.”

“…?”

뭔지 모르겠지만, 그래. 마음대로 만져라. 나는 사과를 먹고 호크스는 내 머리의 포도를 통통 만졌다.

 

21

“그러면 그때 잡힌 빌런이?”

“미노루의 부모님을 죽인 빌런이죠.”

“미노루는….”

“모릅니다. 그런 걸 말해줄 수는 없잖아요. 아직 10살이에요. 부모님을 잃은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은. 조금 더 성장한 다음에. 그때 이야기해줄 생각이에요.”

원장의 말에 호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옳았으니까. 너무 어린 나이에 그만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고 또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이 부모를 죽인 사람이었다? 그만큼 견디기 힘든 일이 어디 있겠나.

“그보다 자주 오시네요, 호크스,”

“뭐… 그렇죠.”

“당신도 알겠지만… 공안 소속인 만큼, 주의를 해주세요. 그게 아니더라도 곧 히어로 사무소도 차릴 예정이잖아요? 당신이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지만… 빌런이 노리는 것은 쉬운 상대니까요.”

콧잔등을 긁적이던 호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맞는 말이었다.

“주의할게요.”

“그래도, 미노루는 호크스를 잘 따르니까요. 제대로 히어로로서 이름을 떨치기 전까지는 아이와 자주 만나주세요.”

“…네.”

원장실에서 나온 호크스는 저 앞에 사과를 먹고 있는 미노루의 옆으로 걸어가 앉았다. 아직 이 아이에게 어두운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제 몸을 더럽히는 게 낫지.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겠지만.

“왜 그래?”

“…아니, 그냥.”

미노루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으나 호크스는 그저 웃었다. 너는 그저 건강하게 자라줘. 나중에 히어로가 되면 좋겠다. 또 기회가 된다면 함께 팀으로 일해도 좋을 것 같고.

그런 생각을 하며 미노루의 머리의 포도를 통통 도닥였다. 언제나처럼 참 좋은 느낌이었다.

 

?

[으음.]

절대자. 신. 무형의 존재.

그것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 것.

[흐으음.]

그리고 지금 그것은 고민을 했다.

[귀찮아졌군.]

그것이 내려다보는 세상은 어쩐지 실타래가 엉킨 것만 같았다.

[원흉인 아이만 제거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것은 손에 들린 새하얀 덩어리를 흔들었다.

[이 아이가 가졌던 운명이 저 아이에게 스며들기 시작했군.]

그것은 곧 아직 세상에 존재하는 새하얀 덩어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새빨간 실이 단단하게 꽂힌 그 새하얀 덩어리에 또 다른 새파란 실이 꽂히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운명이 두 개가 된다니. 으음… 귀찮군. 귀찮아. 귀찮도다.]

그것은 고개를 저었다. 서로 다른 운명이 충돌하여 충격을 줄 것은 분명했다.

[……. 뭐, 잘 해결하겠지.]

그것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세계는 존재하는 그것만으로도 완벽했다. 그리고 운명이라는 것은 세계가 완벽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다.

신이라고 멋대로 세계와 운명에 간섭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그러나 조언을 주는 것 정도는 괜찮으리라 판단했다.

모두 절대자로서, 신으로서의 판단일 뿐이었다.

어쩐지 세계에 존재하는 새하얀 덩어리가 부들부들 떠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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