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송이 : 하여간, 그렇게 됐다.

1~2화 분량.

1

눈을 떴을 때, 파란 하늘이 보였다. 음. 이상하다. 분명 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어째서 하늘이 보일까.

계단, 계단. 그래. 분명 계단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지. 그래, 있었지.

“이게, 뭐지.”

아.

뭔가 이상해.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데.

“아, 아.”

헛기침을 해 봐도.

목을 풀어 봐도.

“아~. 아~~.”

평소에 듣던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뭔가, 조금. 어려졌다는 느낌?

“뭐야, 대체.”

모르겠다. 우선은….

“이게 무슨 일인지부터 알아야 하려나.”

주위를 둘러보니 새까맣게 타들어 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2

“와, 진짜 다 탔네.”

모든 게 새까맣게 탔다. 바닥도, 벽도, 가구도. 심지어 천장까지.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뭔가 화재 사고라도 크게 있었나? 뉴스에 그런 내용이 있었던가? 그보다 여기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곳 아닌가? 여기에 이렇게 있어도 괜찮은 건가?

한 번 의문이 든 생각이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자 새로운 의문을 멈추기 위해 양손으로 내 머리를 감쌌다. 아이고, 골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는데 화재 현장에 서 있는 건 왜인지.

“세상에, 또 여기에 있었니?”

아?

터벅터벅. 서둘러 달려오는 발소리와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각형 모양의 안경을 쓰고 머리카락을 다 모아 틀어 올려 묶은, 약간 어딘가 ‘가련한 주인공을 괴롭히는 계모’ 느낌을 풍기는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보다, 나한테 말한 건가?

“그렇게 둘러봐도 네게 이야기하는 거란다!”

이크.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깨를 좁혔다. 나구나. 아니, 근데 당신은 누구신가요? 절 아시나 봐요?

“여기엔 이제 가족이 없다고 했잖니. 응? 시설로 돌아가자.”

이건 무슨 소리래요?

“자, 미노루 군. 손잡으렴?”

‘미노루 군’이라니?

잠깐. 그 이름 뭔데? 왜 날 ‘미노루 군’이라고 부르는 거지? 나한테는….

내 손을 잡아챈 사람은 “얌전히 돌아가자.”라고 말했고, 난 그 사람에게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갔다. 뭔데. 뭔데. 이게 뭔데?

의아해하는 내 시선이 벽에 자리를 잡은 엉망진창으로 깨져있는 전신 거울로 향했다.

거울은 내 손을 잡은 사람, 그다음으로 ‘내’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와 동시에 손을 털어 내고-“얘!”-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을 만져봤다. 거울 속의 ‘나’도 내 얼굴을 더듬더듬 만지는 게 보였다.

이, 이게 뭐람.

이 얼굴, 누구세요??

3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양소현이라고 합니다. 올해로 22살. 대학생이었습니다.

네. 과거형이죠.

“미노루 군, 요즘 기분은 어떠니?”

“좋아요.”

“그렇구나.”

그렇습니다. 저는 ‘미노루’라는 아이에게 빙의했습니다.

아니. 이건 빙의일까? 환생? 전생? 잘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그런 느낌. 귀찮네~ 같은 느낌. 애초에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는 상상도 해 본 적 없고.

미노루 군. 나이는 10살. 성별은 코끼리가 달린 남자아이. 사촌 동생들의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자주 봤기 때문에 딱히 부끄러움이라던지 창피함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다. 물론 화장실을 처음 썼을 때는 당황했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았으나 그 집이 방화로 인하여 전소. 부모님 역시 사망. 살아남은 것은 미노루 군, 혼자였다고 한다. 그날의 충격 때문인지 미노루 군은 매일매일 시설에서 빠져나가 전소된 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모두 시설의 사람들이 내 뒤에서 하는 말을 주워듣고 안 것이다.

호호. 어른들의 입은 참 가볍지. 한참 소동을 벌이던 아이가 얌전해졌으니 입이 가벼워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겠지만.

“책 읽을래?”

“네.”

“착하구나.”

시설의 어른들은 착했다. 친절하고 상냥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게다가 봉사 활동으로 이 시설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리고….

[오늘도 이세하라시에 나타난 빌런 일당을 쓰러트린─]

“어머, 어제 그 소란을 일으켰던 빌런들이 잡혔나 봐요.”

“그러게요. 이번에도 빌런을 잡은 히어로가….”

“올마이트!!”

선생님들의 대화에 아이들이 끼어들었다. “맞아요, NO. 1 히어로, 올마이트죠.” 아이들의 말에 답해준 선생님이 웃었다.

그래, 여긴 히어로와 빌런이 존재하는 세상.

“선생님~! 토비오가 개성 써요!”

“메롱~!”

“얘, 토비오 군! 함부로 개성을 쓰면 안 된다고 했잖니.”

이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개성이 존재하는 세상.

시설에서 이야기를 주워들으며 설마, 설마 했었지만. 그 ‘설마’가 진짜가 될 줄이야. 믿고 싶지 않지만, 믿지 않을 수가 없는 순간순간이 있다.

“미노루 군, 같이 놀자.”

“야, 미노루는 나랑 놀 거거든!?”

“뭐어~!?”

“미노루는 누구랑 놀 거야!?”

“맞아! 미노루 군은 누구랑 놀 거야?!”

식물 뿌리가 내 오른팔을 잡고, 점액질의 손이 내 왼팔을 잡고 놔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나 확실한 증거들이 널려 있는데 믿을 수 없다며 눈과 귀를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늘도 인기가 많네요, 미노루 군은.”

“그러게요.”

저기, 선생님들. 거기서 구경만 하시지 말고 말려 주지 않으실래요? “미노루!” “미노루군!” 어쨌든 나는 양쪽의 러브콜에 몸이 흔들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 이쯤 되면 알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누군지도.

4

미네타 미노루. 그게 내 이름, 이라고 해야 할까. 하여튼. 그렇게 됐다.

5

“여기요, 여보. 오늘은 미역 된장국이에요!”

“응, 맛있게….”

“난 이거 싫어!”

“어머나!”

“애미야, 국이 짜다!”

“그러지 마세요, 어머니!”

6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면, 그런 거다.

소꿉놀이.

아까 내 팔을 잡고 흔들던 애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최대한 함께 놀 수 있는 놀이로 결정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문제인 것 같았다.

분명 나는 ‘남편’ 역할을 하기로 했고 내게 식물 뿌리를 휘감았던 ‘시나나’(개성은 맨드레이크. 말 그대로 맨드레이크 같은 일을 한다)는 ‘아내’, 내 손목을 점액질 손으로 잡았던 ‘욘타’(개성은 슬라임. 신체 일부를 슬라임과 같은 형태로 바꾸는 게 가능하다)는 ‘아들’ 역할을 하기로 했다.

방금까지는 말이다.

“욘타는 아들이라고 했잖아!”

“내 마음이거든~!”

“정말이지!! 미노루 군, 우리끼리만 놀자! 욘타는 재미없어!”

“뭐?! 미노루는 나랑 놀 거라니까?!”

네, 네. 그만, 그만.

내가 두 사람에게 진정하라며 손을 휘저으니 입술을 삐죽이며 내 옆에 앉았다.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을 보니 한숨만 나온다.

“둘 다 진정해. 내 개성은 분열이 아니니까 나누어져서 놀 수는 없잖아. 그렇지?”

“응.”

“그러니까 함께 놀 수 있는 것으로 결정하기로 했지?”

내 말에 두 꼬맹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자, 서로 잘못한 게 있으니 사과하자.”

“……미안해.”

“나야말로… 미안.”

좋아. 훌륭해요.

칭찬의 의미로 두 꼬맹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활짝 웃어준다.

아휴, 귀엽다.

6.5

“……미노루 군이 선생님 같네요.”

“어른스럽다고 할까… 역시 사건 이후의 트라우마일까요?”

“글쎄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단언할 수는 없네요. 최근에는 시설 바깥으로 나가는 일도 줄어들었고요.”

“히어로 포화 시대라고 해도 이렇게 부모님을 잃은 아이가 많네요….”

“그만큼 빌런도 늘어나는 추세겠죠.”

7

“미~노루~군~!”

“응, 왜 그래?”

“헤헤, 나 내일 시설에서 나가게 됐어!”

갑작스러운 말이네. 시설에서 나가다니.

시나나의 말에 다른 애들이 술렁이며 모여들었다.

“시나나, 입양되는 거야?”

“응. 나와 비슷한 개성을 가진 부부인데 10년째 아이가 없다고 하네. 그래서… 응. 그 두 분의 아이가 되기로 했어.”

“그거 다행이네! 비슷한 개성이면 개성 조절법도 배울 수 있을 테고!”

“다행이야, 시나나 쨩!”

“고마워, 얘들아!”

과연. 시설을 나가려면 입양이 되는 방법이 있구나.

여기에서 계속 지내면서 학교에 다니는 방법도 있으니까 딱히 문제는 없겠지만.

“그, 그래서 말이야… 미노루 군.”

“응? 응. 왜 그래?”

“나… 시설에서 나가잖아….”

“응.”

“내가 없어져도 나, 기억해줄 거지?”

“당연하지. 시나나는 친구인걸?”

내 말에 시나나가 활짝 웃었다.

“나도 기억할 거야!”

“나도!”

“우린 친구잖아~!”

“고, 고마워…. 얘들아…. 훌쩍….”

결국, 시나나는 울어버렸다.

8

참고로 시나나의 개성 ‘맨드레이크’는 시나나가 울면 비명이 터져 나와서 큰일이 난다.

9

시나나가 입양된 이후에도 여러 아이가 입양되어 떠나거나 새롭게 들어왔다.

대부분 이 시설에 들어오는 아이들은 빌런에 의해 부모님을 잃거나 부모님이 빌런과 관련되어 잡혀가 버린 경우가 많다.

내 경우에는… 아무래도 시설이 집 근처에 있기도 하고 누가 방화를 저질렀는지조차 알 수 없어서 보호차 시설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주워들은 이야기다.

이곳 어른들은 입이 너무 가볍다. 애가 듣는지도 모르고 그냥 말해버리더라.

음, 저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미네타 미노루로 지낸 지도 한 달이 됐다. 이 생활에 익숙해졌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이라고 답할 수 있겠다.

그야 개성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기도 하고 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렇다.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예전에 대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보던 만화책 제목이다. 그걸 봤을 땐 이런 걸 바란 적도 원한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나. 이렇게 이곳에서 살아 숨 쉬는걸. 그리고 내가 살아가게 된 곳이니까.

어쩔 수 없지, 하고 타협하는 거다.

한탄해 봐야 나오는 게 뭐가 있겠나. 하늘에 대고 욕을 해봐야 해결되는 일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타협해야만 했다.

그래야 우울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으니까.

10

“미노루 군. 오늘은 손님이 오는데 도와줄 수 있겠니?”

“네.”

고맙구나, 라며 선생님이 내게 꽃다발을 건네줬다.

“미노루 군은 그 꽃다발을 손님께 드리면 된단다.”

“어떤 손님인데요?”

“이 시설이 만들어지게끔 힘써주신 분이란다.”

그렇구나.

누군진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미야 선생님, 오셨어요!”

“자, 미노루 군? 다녀오렴.”

“네.”

그렇게 나는 꽃다발을 품에 안고 문 앞으로 향하니 두 명의 SP를 대동한 사람이 보였다.

아무래도 저 사람이 그 손님인 모양이다.

의사처럼 보이는데….

“안녕하세요.”

“오.”

“받으세요.”

“고맙구나, 얘야.”

음, 건네줬으니 된 거겠지?

10.5

“작은 아이군”

“네….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작아요.”

“흠…. 걱정된다면 내 병원으로 데려오게나.”

“아. 네, 감사합니다.”

“무얼.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은 귀중하니 말이야.”

웃는 의사의 안경이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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