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빅 피터팬

3. 빅터와 붕어빵 (2)

빅 피터팬 Big Peter Pan 유년기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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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터 누나는 살아 있어.”

“뭐?!”

“다리를 다쳤다고 하긴 하는데….”

“뭐어?!”

“그래서 보스가 랩터 누나를 다치게 했다고 후야 님을 죽여버렸어.”

“뭐어어?!”

 

그렇게 얼마나 부둥켜안고 울었을까, 결국 진정한 오르카는 다시 평소처럼 돌아와 상황을 알려주었다. 큰 폭발이 있었고, 그에 하필 근처까지 왔던 랩터가 휘말렸다고. 그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크게 화가 난 백모래가 울며 후야를 때려죽인 것 역시 사실대로 말했다.

 

빅터는 역시 백모래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앞으로도 절대 정을 붙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나름 동료고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후야를, 제 사랑을 건드렸다고 망설임 없이 죽일 사람이라면 빅터와 오르카도 절대 안전하지 않다는 소리인 것 아닌가.

그리고 사실, 후야가 살인자인 것과는 별개로 그가 안타깝기도 했다….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발견된 거야?”

“산에서 굴러떨어진 걸 구멍가게 할아버지가 메두사 님께 알려주셔서…. 아무래도 수상하게 보는 눈치였지만. 난 널 따라가느라 좀 헤맸고, 뒤늦게 돌아왔어.”

“아.”

 

간단한 경과를 들은 빅터는 덕분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그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일어난 사건이 너무 많아서 정리하기가 힘들 지경이었으나, 그러기에 빅터의 머리는 꽤 좋은 편이었다. 어리되 어리지 않은 뇌가 상황을 이해하며 푸식, 돌아가는 소리를 내는 듯한 환상에, 빅터는 끝내 머리를 흔들고야 말았다.

 

“…누나 병원은? 찾아가 볼까?”

 

그리고 마침내 정리를 끝냈을 때, 빅터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랩터의 안부를 확인하자.

 

당장 얼마나 다쳤을지도 모르는데 마냥 자리에 앉아있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들 중 유일한 생존자인 랩터를 만나 아이들의 유품을 건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얘기를 하고, 추억을 되짚고, 슬픔을 견디고…. 대장이 죽었을 때처럼, 각자 애도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안 알려줬어. …이 근처에 갈 만한 병원은 하나뿐이지만. 그런데 보스가 허락 안 해줄걸.”

“왜? 우리도 가면 안 돼?”

 

하지만 오르카가 내뱉은 회의적인 말은 아까부터 완벽하게 빅터의 기대를 어기고 있었다. 빅터는 이젠 실망스럽다 못해 지겹기까지 했다. 아까부터 안 된다, 안 된다만 말하고 있는 오르카가 조금쯤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빅터에게 오르카는 형이자 훌륭한 조언자였다. 오르카의 말을 들어서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고, 늘 자신보단 현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굳이 그걸 어길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번 일은 좀 다르지만.

 

“잠깐, 나 보스한테 물어보고 올게!”

“빅터-!”

 

그래서 빅터는 우당탕, 소리를 내며 거실로 달려 나갔다. 주로 한 명 때문에 분위기는 영 좋지 않았지만 빅터가 우다다 달려오는 바람에 그것도 소란스러워질 뿐이었다. 그에 음침하게 앉아있던 한 명, 백모래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빅터는 그 무릎에 달라붙어 직설적으로 물어보았다!

이게 바로 빅터의 방식. 오르카는 그 뒤에서 늦었다는 듯이 아연하게 손을 뻗다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보스, 우리 같이 랩터 누나 보러 가면 안 돼?”

“…”

 

-하지만 그에 돌아온 건 무감각한 금빛 시선이었다. 오늘만 사람을 한 명, 아니 그보다 많이 죽였을 살인자는 그리도 담담한 시선을 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뒷목이 서늘해진 빅터는 어쩐지 겁먹은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저 사람은 절대로 긍정의 말을 내뱉지 않을 것이다.

그런 빅터의 생각과는 반대일 것처럼, 백모래는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마치 빅터를 안심시키기나 하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아.”

 

그것은 안 된다고.

 

“왜, 왜…? 나도 랩터 누나 걱정되는데.”

 

이제 백모래의 얼굴은 완벽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완벽히 평소의 모습이었다는 소리다. 처연하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아름다운 눈. 다정한 표정. 그것을 순식간에 되돌리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인지, 빅터를 위해서인지 빅터는 알 수 없었다.

 

“그야, 랩터에게 내가 유일이 되려면- 어쩔 수 없는걸. 너희는 그 폭발로 죽은 거야. 진짜로 죽일 순 없으니까 위장이라도 해야지.”

“…!”

 

그러니까, 그들은 나이프이니 일부러 죽이지 않았다는 소리다. 그것에 빅터는 안심해야 할지, 아니면 여전히 무서워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백모래가 그래도 그들을 가족으로 여기고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아 안심되는데, 한 편으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거리낌 없이 죽일 거라는 사실이 더없이 무섭다. 어떤 감정을 따라가야 하는가?

 

“우리, 그럼… 평생 못 만나?”

“음,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닮은 사람을 발견했다고 하지 뭐. 대신 모습을 좀 바꾸기다?”

“하지만-”

“빅터.”

 

그렇게 하기야.

 

아, 빅터는 그 하얀 남자의 얼굴에서 어떠한 압박감을 느끼고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소득 없이 방으로 터덜터덜 돌아온 빅터는 오르카조차 방에 들이지 않고 혼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6살이 겪기엔 지나친 상실감과 무력감, 절망감은 곧 그를 한없이 지치게 했다. 빅터는 이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알 수 없어서, 그저 눈물만 흘리고 또 흘렸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자신의 결심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당장 어른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빅터는 아직 어렸다. 빅터는 성인이 될 때까지 앞으로 남은 햇수를 손가락으로 헤아렸으나, 그런다고 남은 시간이 줄지는 않았다.

 

빅터는 곱았던 손가락을 펼치고 손을 올렸다.

 

“…분신.”

 

곧 그 손끝에서 희끄무레한 형상이 흘러나오더니 인간의 형상을 이루었다.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인간의 형상을 이룬 것은, 놀랍게도 빅터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더 어릴 적의 빅터의 모습.

얼굴엔 상처가 없고, 채 자라지 않아 빵빵한 볼살은 더없이 그를 어려 보이게 했다. 머리도 지금의 빅터보다 훨씬 짧았는데, 그래서인지 더 개구쟁이처럼 보였다. 심지어 입은 옷은 질질 흘러내리는 셔츠. 지금의 빅터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어린애다운 모습은 곧 빅터의 정신 연령을 반영하는 듯했다.

 

“…”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빅터는,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특기가 발현한 것을 보고 빅터가 처음으로 한 생각은 이거였다.

 

‘이게 정상이구나.’

 

제 나이대에 갖추었어야 할 진짜 모습. 그 분신은 빅터와 같은 행동과 같은 생각을 했지만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진짜 ‘아이’란 저런 것이다. 빅터는 다시금 자신의 실험체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빅터의 기분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슬프고, 원망하고 싶고, 박탈감이 들고….

 

그러고 보니 이걸 오르카에게 알려줄지가 고민이었다. 생각보다 멋진 특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괜히 모두의 앞에서 자랑했다가 이게 뭐냐며 놀리고 웃을 레이디를 생각하면 조금 부끄러워진다.

게다가 오르카는 내심 특기를 발현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생인 빅터가 먼저 특기를 얻어버리면 어떤 생각이 들 것인가? 그럴 리 없지만, 조금은 위축된다면….

 

그건 싫은데.

결국 빅터가 내린 결론은, 오르카가 특기를 발현할 때까지 말하지 말자, 는 거였다. 오르카가 특기를 갖게 될 거라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착각으로 인한 판단이었다. 특기가 없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 하의 판단이기도 했다.

보스도 특기가 있고, 메두사 누나도 옷을 조종하잖아. 세월도 나이를 주거나 뺏을 수 있고, 레이디 누나는, 음, 모르겠네? 나처럼 좀 늦게 발현하려나. -그럼 전부 다 발현했을 때쯤 말하면 되겠다.

 

푹,

그런 생각까지 마친 뒤, 빅터는 다시 베개에 고개를 처박았다. 딴생각을 해봐도 밀려드는 감정을 막을 길이 없었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런 문장을 대체 어디에서 봤던가. 지금의 빅터와 전혀 맞지 않는 상황임에도 빅터는 그 단 한 줄에 빠져들었다. 물, 아니 파도처럼 흘러들어오는 기억과 감정에 그대로 빠져 죽을 것만 같아서. 제 찰랑대는 눈물 속에 잠겨 들 것 같아서. 빅터는 아직 제일 낮은 곳에 있지도 않은데, 떨어지는 물은 정확히 빅터를 때리고 있었다….

 

그들을 사랑한 게 이렇게 아플 일인가. 빅터는 어렴풋이 그렇게 생각했다. 정확히는 ‘차라리 친하지 않았다면’에 가까운 상상이었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아프지 않을 것 같아서, 힘들지 않을 것 같아서. 하지만-

 

‘이젠 완전히 괜찮아졌나 봐….’

‘아직 어리니까, 회복도 빠른 거죠.’

‘! 그런가?’

‘어? 그렇게 진지하게 되물으면…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라는 대화를 떠올리면, 절대 잊지 않아서. 그들을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아서 끝까지 이 감정을 안고 가겠다고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게 되는 것이다. 빅터는 끕, 흑, 소리를 내며 입을 앙다물었다.

 

“미안, 미안해애….”

 

-형, 누나들을 죽게 만든 사람을 신고하지도 못하고, 그에게서 도망치지도 못하고 어영부영 이렇게 함께하는 게 말이야.

-그래 놓고 언제 잊을지 몰라서 이렇게 초조해하는 게 말이야.

-내가 지켜주지… 못한 거 말이야. 대장 때도, 지금도. 내가 지킬 수 있는 건 형뿐이라서.

 

눈물이, 눈물이 자꾸만 흘러넘쳤다. 코끝이 맵다 못해 지끈거렸다. 축축히 젖은 베갯잇은 이미 제 역할을 끝낸 듯했다. 하지만 빅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얼굴을 비비고 또 비비고….

 

결국 그 체력에 지쳐 잠들어 버리고, 오르카가 슬쩍 문을 열어볼 때까지 방의 불은 새하얗게 켜져 있었다. -그 둘을 내려다보며.

 


 

며칠간 빅터는 호되게 앓았다.

 

울며불며 이마를 베개에 문댄 덕에 상처에 세균, 먼지가 들어가 덧나 버린 것도 있고, 드물게 제 체력 이상을 소비했던 것도 있고, 거대한 스트레스 탓이기도 했다. 그에 메두사는 착잡한 얼굴로 빅터의 약을 준비했다. 빅터는 그것을 옆에서 곁눈으로 바라보며 레이디의 간호를 받았다.

며칠간 빅터와 제대로 얘기도 하지 못한 레이디는 이것이 귀찮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대신 잡지의 어느 한구석을 가리키더니 손으로 돈 모양을 하는 게, 다음 달 용돈은 상납해야 할 모양. 요 며칠 레이디와 잘 놀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빅터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3개월간 나눠서 내게 해달라고 빌어야 했다….

 

“빅터, 이제 좀 괜찮은 거야?”

 

그 뒤에나 오르카와 첫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게 반가울 법도 한데, 랩터의 병문안은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앓았던 빅터는 랩터의 안부부터 물어보았다.

 

“랩터 누난 어떻대?”

“이제 두 다리로 걷기는 좀 힘들다고 하던데.”

“헉, 랩터 누나 나 다음으로 빠르지 않았어?”

“아무래도….”

 

그리고 랩터가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들은 빅터는 다시 침울해졌다. 오르카는 그런 빅터를 달래려 달콤한 사과에 포크를 꽂아 건넸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 들어도 빅터의 얼굴은 채 펴지지를 않았다. 랩터가 죽지 않았다는 희소식을 들었어도, 더는 그가 발랄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은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득, 메두사가 보던 사극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전쟁에 징병되어 한 팔을 잃고 돌아온 병사에게, 어머니가 울며 외치는 장면이었다.

 

‘아니,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어…!’

‘아니다, 아니다 죽지 않고 온 것만도 다행이다. 살아와 줘서 고맙다, 고마워….’

 

그런 감정을 빅터도 느끼고 있다고 해야 할까. 빅터는 불행 중 다행이라는 속담도 떠올렸다. 이건 다행 중 불행인 걸까, 왜 그런 속담은 없는 거지…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온통 생각에 생각이 얽혀서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빅터는 이걸 혼자 정리할 줄을 몰랐고, 그저 찾아가서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며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랩터 누나 보러 갈래애,”

“보스가 안 된다고 했잖아. 우린….”

 

진짜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야.

 

빅터는 오르카가 목뒤로 넘긴 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빅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리 납득하고 싶지 않은 얘기였다. 아니, 사실 그것도 오르카의 앞에서이니까 가능한 얘기였다. 백모래 앞에서라면 기에 눌려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을 테니까. 빅터는 누울 자리를 가릴 줄 아는 훌륭한 어린이다.

그래서 모르는 척 팔다리를 놀렸다. 말 그대로 어린아이가 때쓰는 자세였다.

 

팡, 팡팡-

문제는, 그 힘이 어린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베갯잇의 깃털이 온통 삐져나와 날아다녔으며… 실시간으로 이불이 압축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비, 빅터. 계속 그러다간 이불이 다 터질 겁니다.”

“하지마아안 나아아, 랩터 누나아아아 보러 갈래애애애!”

 

빅터는 몰랐지만, 굵직한 목소리로 떼를 쓰는 것은 그리 듣기에 좋은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오르카는 그것을 의연하게 참아 넘기며 빅터의 팔을 잡아 토닥거렸다. 이보다 훨씬 사소한 문제로 빅터가 떼를 쓰는 것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당장 빅터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두 손을 넘겼다.

아이스크림을 더 먹겠다고, 안 자겠다고, 그 늦은 밤에 놀러 나가겠다고, 밥이 맛이 없(!)다고…. 그 모든 때마다 레이디와 세월은 신기하다는 눈길로 구경했고, 메두사와 오르카는 온갖 감언이설로 그를 달랬다. 이번에도 그런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진짜, 진짜라고. 이번에도 안 되면 분신으로라도 갈 거야. 빅터가 괜히 울컥할 때였다.

 

“빅터, 그러지 말고 요리를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이제 곧 간식 시간이니… 오랜만에.”

“!”

 

넘어가지 않기엔 큰 미끼였다.

빅터에게 요리란 재미있는 놀이 같았다. 만져보지 않은 레고 조각과 같은 요리 재료들을 합하고 뭉치고, 또 달구고 데워서 아예 새로운 모양을 만드는 것. 그만큼 빅터의 마음대로 되는 게 또 있겠는가.

게다가 굳이 다른 이유까지 찾아보자면, 처음 빅터에게 요리를 권했던 아이들을 떠올릴 수 있는 일종의 추억거리이기도 했다.

 

빅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르카를 바라보았다. 잔뜩 올라갔던 열기는 이내 가라앉았다. 눈에 맺혔던 물기마저 빅터의 거칠은 손길에 그 자리를 잃고 나서야 빅터는 입을 열었다.

 

“정말로?”

“네. 메두사 님께 허락을 받고….”

“그럼 할래!”

 

그리고 쏟아지는 확답. 아니, 사실은 메두사의 허락이 필요했지만 빅터는 메두사가 허락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단 1그람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안 돼, 빅터. 다친다?”

“엑, 아니야! 안 다쳐!”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던 메두사의 축객령은 빅터에게 청천벽력처럼 내려왔다. 빅터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쿠키 반죽을 넣으며 눈길을 돌리는 메두사의 어깨에 두껍게 매달렸다. 여태까지 늘 써왔던, 무게로 조르기 권법이었다. 그에 메두사는 크게 짜증을 내며 어깨를 털어냈지만 빅터를 떼어내기엔 역부족.

 

“아아,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넌 아직 요리하기엔 어려. 다친다?”

“나 요리 잘한단 말이야-”

“아이, 죽겠다. 저리 가서 앉아 봐.”

 

결국 자리에 주저앉아 아이들의 주장을 들어줘야만 했다.

 

“메두사 님, 빅터는 요리를 좋아하니까 조금만….”

“나 맛있는 거 만들래!”

 

…같은, 배 째라 식의 주장이긴 했지만. 그래도 메두사는 조금 마음이 기우는 기색이었다. 그야, 지금 하는 요리라고 해봐야 간식용 쿠키인데 다칠 구석이 어디 있겠는가? 오븐에 넣는 것만 메두사가 담당하면… 생각보다 위험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빅터는 최대한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테이블 위에 눕다시피 메두사를 올려다보았다. 키 차이가 있어 최대한 자세를 낮춘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맑다고 해서 빅터가 며칠 전의 일을 벌써부터 저 멀리 밀어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애써 덮어두고 있을 뿐. 다만 당장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떠들지 않으면 자꾸만 생각이 나서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빅터는 더 간절하게 바라보았고, 기어코 메두사에게서 허락을 받아냈다.

 

“그럼 절대 불에는 손대지 않기야. 알았지, 빅터? 처음처럼 불장난하면 안 돼.”

“엑, 나 그렇게 어린애 아니거든?”

“어린애 맞아. 6살짜리 빅터 군.”

 

그렇게 얼렁뚱땅 허락도 받아냈겠다, 손도 잘 씻고 왔겠다 완벽히 준비가 된 빅터는 당장에 앞치마를 둘렀다가 당장 벗어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제 것을 들려준 오르카의 것이 빅터에겐 터무니없이 작았던 탓이다. 그야 초등학생과 성인의 체격 차이는 큰 편이니 어쩔 수 없다….

 

“자, 이걸로 모양을 만들면 되는 거야. 쉽지?”

“그냥 이걸로 찍어? 재미없는데.”

“그게 싫으면 내일 재미있는 숙제를 잔뜩 내줄까?”

“그건 안돼!”

 

빅터는 부한 얼굴로 쿠키틀을 손에 들었다. 어딜 보나 불만스러운 눈길로 쿠키틀을 쏘아보았으나, 그게 어디 사라져주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야 했다. 잘 밀어놓은 반죽에 기계적으로 틀을 찍어내는 반복 작업 말이다.

 

그래도… 이걸로 만들면 좀 챙겨둬야지. 이따 몰래 랩터 누나한테 가져다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조금 부드럽기도 하고 끈적하기도 한 반죽 위로 몇 번이나 틀을 찍어냈을까, 빅터는 점점 지루해졌다. 그야, 주변에서 잘한다 잘한다 치켜세워주며 적절한 난이도(?)의 요리를 시켜주던 때와는 다르게 어디 다치지나 않는지 지켜보는 시선 속에서 지루한 틀 찍기나 하고 있으니 퍽이나 재미있겠다.

 

그때, 빅터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메두사? 뭐해?”

“보스? 웬일로 빨리 왔어요? 애들 간식 만들고 있었는데.”

“음, 다시 시체들을 찾아서 발목을 잘라야 할 것 가-”

“가요, 가. 애들 앞에서 이 화상이. -오르카, 알지?”

 

저 칼로 여기를 잘라내면 더 예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빅터는 조심스럽게 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오르카의 눈이 샐쭉하니 올라갔지만 빅터가 불쌍하게 눈을 깜빡이자 그마저도 누그러져 메두사를 부르려던 입을 다물었다. 그때쯤이었다.

 

“빅터, 뭐해?”

“레이디 누나? 세월?”

 

위층에서 레이디와 세월이 내려왔다. 빅터의 것과 같은 흰 후드티를 걸치고 있는 세월은 낮잠이라도 곤하게 잤는지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영락없는 20대의 여성이었다. 빅터는 그것이 아주 신기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일부러 입을 열지 않으며 칼로 쿠키 반죽을 조각내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저대로 둬도 돼, 오르카? 오늘 우리 간식 못 먹는 거 아냐? 바보 빅터가 쿠키를 조각내는 것 같은데.”

“…괜찮을 겁니다.”

“아직 요만한 어린애 아냐? 시키면 안 될 것 같은데.”

“나 크거든, 세월!?”

 

금세 부엌은 요란법석이었으나, 메두사와 백모래는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빅터는 여전히 칼을 휘둘렀고, 쿠키들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칼끝에 무언가 깃들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임이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모두가 그런 빅터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잎사귀 모양으로 섬세하게 갈라진 반죽이 잘 땋은 댕기처럼 엮인다. 자연스러운 머리카락처럼 어울리는 가닥가닥들이 면과 선을 이루어 한 공간을 만들어내자-

 

납작하지만 섬세하게 표현된 작은 과자 집과 심상 궂은 마녀, 헨젤과 그레텔의 완성이었다. 작은 다른 쿠키들은 선명한 병정과 나비 모양을 하고 있었다. 퍽이나 동화 같은 광경의 쿠키들의 향연에 오르카와 세월, 레이디는 짧게 감탄했다.

 

“빅터 너는 그림은 꽝이면서 왜 이런 건 잘하냐.”

“그림 잘 그리거든! 그치, 형?”

“…”

“비익터, 오르카도 아니라잖아.”

“혀엉!”

“아니, 빅터, 이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빅터는 잔뜩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을 흐린 오르카에게 자신은 평범한 6살의 실력을 갖고 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었어야 할 세월은 한창 쿠키를 오븐에 넣는 중이었고, 레이디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쿡쿡대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빅터는 정말 억울했다. 저가 4살 때야 몰라도 지금은 만화를 보며 곧잘 따라 그릴 정도로 많이 나아졌는데, 레이디는 제 옛날 그림을 가지고 놀릴 때가 있어서 모든 그림을 숨겨둬야 했다. 그런데…

 

“이것도 봐, 빅터가 5살 때 날 그려준 첫 그림!”

“!!!”

 

레이디가 처음 들어왔을 무렵, 빅터가 환영한다며 그려준 그림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지! 빅터는 와아악, 소리를 지르며 그 그림을 뺏으려 들었다. 그에 와르르 웃어넘기며 재빨리 2층으로 올라가 버리는 레이디.

모든 게 평소와 같다는 생각에 빅터는 멈칫, 멈춰섰다.

 

-그리 중요하던, 소중하던 사람들이 며칠 전 사라졌는데 이렇게 평소 같을 수 있나?

-당장 랩터 누나가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는데 이렇게 태연해도 되는 건가?

-난 사실 엄청나게 나쁜 아이가 아니었을까?

 

“빅터?”

 

하지만 오르카는 그런 생각을 하는 빅터를 그대로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었다. 빅터보다 훨씬 아래에서 마주친 시선은 복잡한 감정을 주고받았다. 결국 빅터는 울듯이 눈가를 찡그리고 말았다.

 

“형아… 왜 다 그대로지?”

“…”

“책에선 그랬는데, 세상이 다 무너지는 것 같다고 그랬는데,”

“…”

“왜 난 그대로야? 내가 나쁜 애라서 그럴까?”

“그건 아니야.”

 

오르카는 뭐라 말하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으나, 결국 아니라는 말밖엔 하지 못했다. 그게 빅터를 납득시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빅터는 크고 굵은 눈물방울을 보이고 말았다.

 

아스퍼, 달래, 당아…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감정이 목울대를 아프게 두드렸다. 그마저 처음엔 죽을 듯이 아팠던 것이 살만해졌다. 그 짧은 시간 만에, 오르카의 몇 시간에 걸친 달램으로 평소와 같이 돌아온 것이다. 랩터에 대한 걱정도 저 멀리 날아간 것이다. 이건 주의력이 부족한 걸까, 아니면 그들의 무게가 원래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걸까?

어쨌든 확실한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랩터를 보러 가고 싶다는 마음은 그대로지만, 그대로여야 하지만….

 

“뭐야, 얜 또 왜 울어?”

“그, 지난번 폭발 사건으로….”

“아, 그거?”

 

그 옆에서 세월은 오르카에게 자초지종을 묻고 있었다. 그것을 내버려 둔 빅터는 어두운 구석으로 걸어 들어가 쭈그려 앉고 무릎을 감싸 안았다. 슬픔과 죄책감과 자책으로 기분이 엉망이었다.

 

네가 잊지는 말았어야지.

네가 막지는 못했더라도, 평소와 같지는 말았어야지….

 

“야, 빅터.”

“세월?”

 

그때, 빅터의 어깨를 흔들어 깨운 것은 저 멀리에서 오븐을 만지작거리고 있나 싶던 세월이었다.

처음 봤을 때의 모습과 달리, 세월은 그저 까무잡잡한 성인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빅터는 세월의 머리카락이 푸른빛이라는 것조차도 비교적 최근에야 알 수 있었는데, 이목구비는 더 했다. 주름이 없는 세월이라니, 건강하게 걷는 세월이라니. 제가 안아 들어 방까지 모셔다드려야 했던 기억과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

 

“괜찮아.”

 

-그러니까, 이렇게 세월이 다정하게 다가와 위로를 건네는 것조차 낯설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금방 잊어. 잊으니까 사람인데 뭐…. 어쨌든, 그거에 하나하나 자책하면 사람이 닳아. 그러다 포기하는 거고. -어차피 나중엔 포기할 거, 굳이 닳지 말고 지금 그냥 잊으라는 소리야.”

“…”

“평소처럼 있어도 된다고. 넌 충분히 슬퍼했어.”

 

빅터는 세월의 손이 잠시 왔다 간 머리를 멍하니 헤집으며 눈을 깜박였다. 방금까지 머릿속을 꽉 채웠던 생각들이 싹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단순히 놀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월은 언젠가 자신이 그것을 경험했던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빅터로서는 세월의 지난 삶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쩐지 그 단편을 엿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세월은 얼마나 ‘닳아’ 왔던 걸까? 빅터가 닳지 않기를 원하는 그 마음은 어떤 걸까? 어쨌든-

 

세월이 나를 생각하고 있어.

 

그 작은 위로가 빅터의 마음에 한 줄기 바람을 불러왔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어쩐지 더 충격이 커서일까, 그들이 죽고도 평소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빅터 자신에 대한 자책이 조금은 가신 것 같았다.

 

“세월… 안 어울려.”

“얘가 진짜, 생각해줬더니?”

“세월 님, 진정하세요.”

 

그런 빅터의 말에, 세월은 조금 열받았는지 꽁, 빅터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하지만 빅터에겐 간지러운 정도라, 히- 하며 웃어 보일 뿐. 결국 물러나는 건 세월 쪽이었다. 그러고도 얄미웠는지, 샐쭉한 눈으로 빅터를 바라봤지만 빅터는 그저 기분이 좋아 헤실거렸다.

 

“어머, 세월이 대신 구워줬어? 고마워라.”

“온도는 맞춰놨던데요 뭐.”

 

그렇게 얼마나 소란을 피웠을까, 빅터가 쫓아오지 않자 2층에서 쏙 고개를 내민 레이디를 포함한 모두가 부엌에 모였다. 슬슬 오븐에서 쿠키를 뺄 시간이 됐기 때문이다. 사실, 메두사는 오븐에 쿠키를 넣기 위해 온 모양이었지만 세월이 대신 넣어준 덕에 그 과정을 생략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 덕에 바로 쿠키를 먹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메두사는 대신 자리를 정리했다. 테이블은 아이들과 어른들 6명이 둘러앉기에 충분했다. 후야의 빈자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에 생각이 미치자, 빅터는 메두사 뒤를 졸졸 따라온 백모래를 아무렇지 않게 보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다.

 

“뭐야, 이 쿠키 빅터가 한 거 맞아? 거의 조각을 했는데?”

“진짜? 나도 볼래.”

 

와, 진짜 잘했는데? 뭐 만드는 데에 재능 있는 거 아냐? 일단 보스보단 잘하는 것 같네요. 뭐?

하지만 곧 감정이 미묘하게 변해갔다. 분명 무섭고 싫은 사람인데, 제 칭찬을 하고 있으니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철없이도 그랬다. 그저 인정받고 싶은 아이처럼. 아니, 빅터는 어린아이가 맞았으니 더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자그만 칭찬에도 그 사람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나이이니.

 

하지만, 그게 또다시 무서워져서.

 

“잘했어, 빅터… 어?”

 

제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백모래의 손을 피해버린 것이다.

 

피해버렸다. 그러면 안 되는데, 무서워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쿵쾅쿵쾅, 심장이 뛰었다. 들켰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이미 표정 관리는 실패하고 잔뜩 뜨끔한 표정이 빅터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와 함께 순식간에 식은 분위기는, 모두가 두 사람에게 주목하게 만들었다.

 

“뭐야, 랩터 보러 못 가서 아직도 삐졌어?”

 

그에 상황을 천연덕스럽게 넘긴 것은 백모래였다. 다시 다가와 빅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는, 빅터의 떼를 받아주는 것처럼 자애롭게 말하는 것이다.

 

“말했잖아, 곤란하다고. 대신 내일 숙제는 줄여줄게. 좋지? 아니면 좋아하는 붕어빵도 사줄까? 그날 결국 못 먹었잖아.”

“으…응.”

“그럼 이제 이걸로 뚱해 있지 않기다?”

 

지극히 어린 아이를 돌보는 정상적인 모습. 빅터에겐 그것이 혼란스러웠다. 앞의 어른이 정말로 그 나쁜 사람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빅터에게 글이며 상식을 알려주던 선생님과 자애로운 보호자였던 모습들이 퐁퐁 떠올랐다.

어느 면에서는 지극히 악하지만 빅터의 앞에서는 평범한 어른. 종잡을 수 없는 모습에 빅터가 떠올린 것이라고는 고작 지킬 앤 하이드였다. 한 가지 불행은, 빅터는 아직 지킬 앤 하이드가 어떤 사람인지 결론지을 만큼 생각이 단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백모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빅터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뭐야, 빅터 그런 걸로 뚱해 있었어?”

“어린애잖아. 뭐. 결국 6살짜린데.”

“난 6살 때 안 저랬어.”

“레이디, 상황이 다릅니다.”

 

그런 빅터를 보며 조용해진 사위를 채운 것은 레이디와 세월, 오르카의 잡담이었다. 그에 잠시 기민하게 상황을 살피나 싶던 메두사는 뻔뻔하게 웃으며 쟁반 가득 쿠키와 우유, 커피를 가져오며 테이블에 다가왔다.

 

“자, 간식 시간이야 어린이들.”

“잘 먹겠습니다!”

“저녁 먹어야 하니까 너무 많이 먹진 말고.”

“네.”

 

빅터는 드물게 대답하지 못한 채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쿠키를 깨작였다. 평소라면 제일 먼저 달려들었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전해졌는지, 테이블 위의 공기는 전반적으로 조용했다. 그나마 다들 분위기에 구애받지 않는 마이페이스들이라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한 명 정도는 진작에 체했을 것이다.

그만큼 빅터는 분위기의 중심이었다. 이 멤버 중 특별히 수다스러운 사람은 빅터뿐이라서, 본의 아니게 늘 분위기를 환기하는 역할을 떠맡았었으니까. -결국 그날의 저녁 식사도 반쯤은 우중충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빅터는 그것을 모른 채 제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백모래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쉴 새 없이 나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점. 좋은 선생님이다. 빅터에게 친절하다. 오르카에게 잘해준다. 같이 있으면 이상하게 웃긴다. 고양이랑 있을 수 있다. 은근히 집안일을 잘한다. 메두사보다 만만한 면이 있다. 숙제를 못 해도 봐주니까. 그리고… 나이프라는 가족을 만들었다.

나쁜 점.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대장을 죽였다. 아스퍼, 달래, 당아를 죽였다. 우리는 나이프니까 죽을 염려는 없다지만, 후야가 죽은 걸 보니 우리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우린 정말 나이프라는 가족 안에 있는 게 맞을까?

 

아무래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어떡하지?”

“빅터?”

“아무것도 아니야….”

 

결국 그 고민은 잠자리까지 이어졌으나, 빅터는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옆에서는 오르카의 고른 숨소리가 들리는데도 말이다.

 

그때, 작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것은…

 

“빅터.”

 

메두사였다.

 

“메두사 누나?”

 

빅터는 익숙한 호칭을 입에 담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맡에 기댔다. 처음 메두사와 만났던 날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음… 그 모습으론 오히려 위화감이 드니까, 그래. 누나가 좋겠다.’

‘누나라고 불러.’

 

뜬금없이 오르카의 격리실로 뛰어든 빅터가 그와 떨어지려고 하지 않자, 연구원들은 아예 실험체를 묶어서 함께 관리하기로 결정했었다. 그레 일거리가 늘어난 메두사가 한숨을 지었고, 오르카와 빅터는 눈치를 보고….

 

‘…’

 

어쩐지 위축되어 있던 빅터를 어떻게 알았는지, 메두사는 위와 같은 말로 빅터를 달랬었다. 누나라는 호칭을 처음 들었던 빅터는 잠시 무어라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처음으로 ‘메두사 누나’를 중얼거렸고-

 

‘그래, 그렇게.’

 

라며,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메두사에게 한순간에 빠지게 되었더랬다.

 

그날부터 메두사는 빅터의 한결같은 보호자였다. 장난스럽고 얄미운 면이 있으면서도 가끔은 엄격하고, 저보다 훨씬 꼼꼼하고 능숙해서 빅터를 챙겨주고 다니는. 사실 어떤 책을 읽으면서는, 메두사가 마치 엄마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래, 엄마.

 

빅터에게 메두사는 엄마 같은 존재였다.

 

“역시 안 자고 있었네.”

“응….”

 

빅터의 침대 가에 걸터앉은 메두사가 빅터의 엉킨 머리카락을 풀어주며 말했다. 말소리를 바짝 죽인 것이, 오르카가 깰 것을 염려하는 모양이었다. 빅터도 그건 싫었기 때문에 작게 속삭였다. 내내 질문하고 싶었으나 백모래와 메두사가 종종 같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질문이다.

 

“누나는… 보스가 안 무서워?”

 

그것은 빅터가, 백모래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진실을 담은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그에 메두사는 눈을 잠시 크게 뜨나 싶더니, 다시 평소의 웃음기 어린 얼굴을 하며 몰래 들고 온 라이트의 불을 껐다. 틱,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주변에 안온한 어둠이 드리우자, 빅터는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그것은 그저 저를 감싸주는 듯한 어둠 그 자체 때문일까, 아니면 그 어둠에 가려 제 얼굴 표정이 보이지 않을 거란 생각 때문일까? 빅터는 굳이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내리지 않고 메두사의 답을 가렸다.

 

하지만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하지 못했다. 빅터의 얼굴을 가려주는 어둠은 메두사의 표정 역시 건너편으로 감추고 있었다. 빅터는 답답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험악해진 얼굴마저 어둠을 꿰뚫어 보진 못했다.

 

“글쎄…. 잘 모르겠어.”

“뭐?”

“처음엔 무서웠지. 무서웠는데, 보면 볼수록 만만한 사람이고- 속내가 저렇게 투명한 사람도 드물지 않나.”

 

빅터는 메두사의 충격적인 발언에 입을 닫을 수 없었다. 빅터가 생각하던 것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어 저녁 내내 고민이나 하고 있던 빅터가 아닌가. 그런데 메두사는 진작에 그런 고민을 끝낸 채였다니.

차라리 그것을 믿고 싶지 않아서, 빅터는 두서없는 말을 더듬더듬 꺼냈다. 형편없이 기워진 말들이었다.

 

“난, 난 모르겠어. 평소엔 만만한데 어떨 땐 너무 무섭고, 좋은데, 좋은 선생님인데-”

“그래.”

“형이랑, 누나들을 죽여서 너무 미워…!”

“그래, 알겠어.”

 

어느새 다시 터져버린 울음은 침대 위에 잘은 진동을 흘려보냈다. 어느새 무릎을 끌어안고 울고 있는 빅터의 등을, 메두사가 토닥여 주었다. 그 나름의 위로이고 위안이었다. 그것에 어쩐지 더 촉촉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빅터는 조르듯이 물었다.

 

“우리, 도망가면 안 돼? 형이랑 나랑, 세월이랑 레이디랑-”

“그건 안 돼.”

 

오르카에게도 했던 질문이었다. 차라리 백모래를 두고 가자는 조름. 그에 돌아온 건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에 오르카가 했던 질문이 떠오른 빅터는 울던 것도 멈춘 채 단단히 굳었다.

 

‘같이 가준다는 보장은?’

“일단 난 가면 잡혀갈 거야. 내가 없는 게 좋니?”

“아, 안 돼. 그건 싫어….”

“세월도 예전과 비슷한 곳에서 이용당할 수도 있고. 어쨌든 지금처럼 편안하게 살 순 없겠지.”

“아,”

“그럼 너희들만 남는데, 괜찮다고 할 수 있겠어?”

 

그건 절대로 싫어.

 

빅터의 ‘우리’는 전부가 있어야만 ‘우리’였다. 그것이 깨어진다면 차라리 가지 않는 편이 나았다. 이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작게 지익- 찢어지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금방 메두사에게 들켰다. 메두사는 부드러운 손길로 이불을 빼앗으며 말했다.

 

“보스는 ‘사랑’만 도와주면 온화해. 만만하지. 그만큼 쉬운 사람이 없어.”

“…”

“그 말은, 심기만 거스르지 않으면 그 밑에서 어렵게 살 걱정 없이 지금처럼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거야. 그만큼 좋은 게 어디 있겠어?”

 

그러니까 이대로 있자, 응?

 

분명 메두사 안에 고이 있을 뱀이 그 밖으로 쉭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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