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빅 피터팬

3. 빅터와 붕어빵 (1)

빅 피터팬 Big Peter Pan 유년기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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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지났다. 그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생일’이란 것에 관심이 생긴 빅터에 의해 1년간 모든 나이프 일원들의 생일을 놓치지 않고 축하했으며, 빅터는 6살이 되었고, 레이디는 8살, 오르카는 10살이 되었다. 그동안 잘 먹고 잘 큰 레이디와 오르카는 제법 소년의 태가 났다. 빅터야 뭐, 늘 그대로니까.

아, 세월이 드디어 노인 태를 벗고 30대 중반이 되었다는 것을 말했던가. 처음엔 엄청난 속도로 회춘하더니 이제는 슬슬 느려지고 있었다. 원래 그러니 한동안은 이런 모습일 거라고 말한 세월은, 본인이 더 어려져 7살쯤 되면 잘 부탁한다며 예고했다.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으려면 모두에게서 한 살씩쯤은 가져가야 한다고. 메두사는 태연하게 한 3살쯤 가져가도 좋다고 예고했다. 백모래는, 뭐, 모르겠다….

 

랩터네의 얘기로 돌리자면, 아이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후유증에 시달렸다.

 

‘오늘 아침에 밥 가지고 대장을 불렀지 뭐야~ 아무도 없는데 말이지.’

 

와 같은 사소한 실수로부터,

 

‘이럴 땐, 대장이 있었을 텐데….’

 

같은 깊은 상실감.

 

그에 오르카는 의외로 몇 번이나 그들이 우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에 옆에 가만히 붙어 있어 주는 것은 오르카의 역할, 같이 하염없이 울어주는 것은 빅터의 역할이었다. 그럴 때마다 맛있다던 붕어빵집에서 붕어빵을 사 오는 것도. 거기서 대장의 그림자라도 보는 건지, 아이들은 좋아하며 빅터의 머리를 몇 번이나 헤집어 놓았더랬다.

그 덕일까, 아이들은 빠르게 아픔을 잊었고 금방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오히려 더 활기찼다. 그동안 늘 챙겨야 했던 임무 따위도 없고 하루종일 놀기만 하면 됐으니까. 오르카는 하루를 그리 다양하게 보내기도 처음이었다. 그야 연구소의 일과와 비교하면 무엇이 다양하지 않겠느냐마는.

 

“빅터, 빅터, 이리 와 봐!”

“응?”

 

온종일 잠만 자보기, 산 계곡에 물놀이 가기, 먹고 싶은 과일이며 과자들을 잔뜩 사 와서 하루 만에 훌쩍 해치우기, 장난감 총이며 페인트탄으로 서바이벌 게임하기… 노는 법도 가지가지였다. 오르카는 이번에도 어디론가 불려가는 빅터의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하며 달래를 따라갔다. 후식으로 먹을 과일을 사 오자는 모양이었다.

 

그럼… 밥은?

 

“…!”

 

아니나 다를까, 오르카가 돌아왔을 때 국자를 잡고 있는 사람은 빅터였다. 어째선지 굉장히 능숙하게 소금이며 후추 간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맛을 보는 아이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놀랍단 얼굴이었다. …좋은 의미로 말이다. 거기에 빅터는 신이 났는지, 신나게 당아를 다그치고 있었다.

 

“나, 더 할래. 재미있어!”

“어? 그래 그럼. 계란말이 해볼래? 이렇게 계란을 깨고….”

“빅터?”

“형아?”

 

오르카는 한창 당아와 함께 계란을 깨던 빅터에게 훌쩍 다가섰다. 도와주려는 의도도 있었고, 정말 빅터가 요리를 잘하고 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빅터는 그런 오르카를 반갑게 맞이하며 계란을 쥐여주었다. 같이 깨 달라는 의도 같아, 오르카는 한 바가지만 한 대야에 그것을 까기 시작했다. 이 정도는 메두사 옆에서 도운 적이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할 수 있었다.

 

“근데 이거 다 할 수 있어? 너무 많은데.”

“하지만 인원이 많으니 이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빅터 대신 제가….”

“으, 너 말투 너무 딱딱해졌어. 좀 편하게 하면 안 되는 거야?”

“그…건, 어렵습니다.”

 

당아는 옆에 앉은 오르카의 말투에 질색을 하며 빅터 곁으로 도망갔다. 이제 높임말을 완벽히 사용하곤 하는 오르카의 말투가 간지럽고 어색하다나. 이런 반응은 아이들 사이에 흔했기 때문에 오르카는 태연하게 계란말이를 위해 섞어놓은 계란 물을 불에 가까이 가져갔다.

 

“이걸 후라이팬에 가득 얹고, 그치, 그다음엔 익으면 조금씩 마는 거야!”

“이렇게?”

“그게 어떻게 안 터지냐….”

“이게 정상이야, 당아.”

“입 다물어, 아스퍼.”

 

어느새 아이들은 아까 국을 끓이던 때처럼 빅터 곁에 옹기종기 모였다. 제일 가까이 있던 오르카는 잠시 압사되는 기분을 느낄 뻔했으나, 불이 뜨거운 덕에 아이들은 조금 물러났다. 대신이라고나 할까,.

 

“아니아니!!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조심스럽게!”

“거기서 소금을 좀 올렸어야 하지 않았을까?”

“치즈 넣자 치즈~”

“이미 늦지 않았을까요….”

 

입으로 두는 훈수가 중구난방으로 작렬했다. 빅터는 계란이 찢어질까 호들갑을 떠는 당아의 말에 바로 힘 조절을 했다가, 소금을 올리라는 랩터의 훈수를 듣고 급하게 소금을 찾았다. 달래의 말은 오르카가 끊었다. 이미 반 이상 완성되고 있는 계란말이 한 줄에 치즈를 넣기에는 아무래도 힘들었다….

하지만, 빅터의 손놀림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계란 물을 후라이팬에 고르게 뿌리는 것부터 아랫부분을 젓가락으로 슬슬 말아주는 것, 손목 스냅으로 익은 계란을 앞으로 당긴 뒤 새로이 붓는 것까지… 몇 번 해봤다고 점점 능숙해져 가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완성된 빅터의 첫 계란말이. 아이들은 순식간에 몰려와 조금씩 맛을 봤다.

 

“맛있는데? 보들보들하고.”

“근데 역시 간을 해야 해.”

“이번엔 치즈하자, 치즈!”

 

하나둘씩 감탄사를 뱉는 아이들에 비해 오르카는 조용히 감탄했다. 분명 초심자, 그것도 6살짜리의 요리인데… 메두사의 손맛이 났다. 조금 싱거워서 케찹이 필수인 것까지 전부. 빅터는 어쩐지 요리사의 싹이 있는 걸지도 몰랐다. 나이프의 요리사!

 

“형아, 어때?”

“맛있어.”

 

어느새 다음 계란말이를 만들고 있던 빅터가 먼저 물어보자, 오르카는 솔직담백하게 말했다. 그야 맛있었으니까. 그에 빅터는 신나서는 후라이팬을 잡았다. 어쩐지 속도가 빨라진 기분이었다. 이젠 다른 후라이팬까지 동원해 동시에 두 줄의 계란말이, 그리고 마지막 한 줄의 계란말이가 만들어지자, 그 옆에서 국을 데운 아이들이 밥상을 차렸다.

 

흰밥에 김치, 빅터 표 김치찌개와 계란말이에, 마트 산 밥반찬과 아스퍼 표 생선구이가 오늘의 점심이었다.

 

“우와아~”

“맛있는데?”

 

그동안은 밥을 어떻게 해결했냐고? 사 오거나 대충 메두사의 밥을 얻어먹었다. 그렇게 1년에 60퍼센트 이상을 사 온 밥을 먹다가 질린 아이들이 드디어 요리책을 사 오는가 싶더니, 빅터에게 시켜버리자 빅터가 기어코 성공해낸 것이다. 오르카는 적당히 신 김치맛이 나는 김치찌개와 보드라운 계란말이를 먹으며 조용히 감탄했다.

특히 계란말이는, 나중에 만든 것일수록 더 맛있어서 나중에는 메두사의 것보다 맛있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메두사 님, 절대 6살보다 못하다는 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나 솔직히 식재료 다 버릴 줄 알고 다시 사 올 준비하고 있었는데.”

“달래 네가 맡긴 거잖아.”

“혜안이 있다고 해줘~ 랩터 너는 제일 반대했지? 빅터가 이렇게 요리를 잘하는데 말이야.”

“내가 상식적인 거거든?”

 

밥을 먹으면서도 투닥이는 아이들을 보는 빅터는 뭐가 됐든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에 살짝 웃어준 오르카는, 먼저 비운 식기를 정리했다. 한참 랩터와 말씨름을 하던 달래가 그런 오르카를 보며 말했다.

 

“어어, 거기 그냥 둬. 랩터랑 당아가 설거지하고 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오늘의 설거지 당번은 랩터와 당아인 모양이었다. 그들의 식사는 대체로 이렇게 이루어졌다. 장 봐오는 사람 두 명, 요리하는 사람 두 명, 설거지하는 사람 두 명. 한 명이라도 빠지면 서러워지는 조합이었다. 6명이기 때문에 완벽한 조합이기도 했다. 오르카는 설거지 거리를 모아놓는 대야에 그릇을 놓고 물을 풀며 며칠 전, 메두사와 백모래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젠 완전히 괜찮아졌나 봐….’

‘아직 어리니까, 회복도 빠른 거죠.’

‘! 그런가?’

‘어? 그렇게 진지하게 되물으면…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저도 어려서 할머니 돌아가셨을 땐 엄청 울었는데 지금은 얼굴도 가물가물해요.’

 

그 뒤로 백모래는 조용히 오르카에게 아이들의 일과를 물었다. 그때의 표정과 눈빛은 너무도 명확해서… 오르카는 어떤 위험을 감지할 수밖에 없었다. 바닥의 나뭇가지나 줍고 있던 빅터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그날 이후로 빅터는 오르카를 두고 백모래, 메두사와 함께 외출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빅터는 모른다는 말을 반복했다. 사실 그게 당연하다 싶어, 오르카는 질문을 바꿨다.

 

‘가서 뭐 하는데?’

‘? 그냥 보스 옆에 서 있어.’

 

레이디도 물었다.

 

‘그럼 보스는 뭐해?’

‘움… 우리 하는 것처럼 싸우고, 얘기하고, 물건 받고…?’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지.

 

“오르카! 빅터가 부른다!”

“아….”

“넌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때, 상념에 빠져있던 빅터를 아스퍼가 깨워 일으켰다. 어느새 대야에는 물이 넘칠 지경으로 받아져 있었다. 그에 괜히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인 오르카는 빅터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게 눈 감추듯 밥을 해치운 아이들의 식탁은 이미 깨끗해져 있었다.

 

“빅터, 무슨 일이야?”

“어제, 보스가 뭘 받았냐고 물어봤잖아. 이제 생각났어.”

“!”

 

오르카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휘휘 돌아보았다. 무얼 받았는지도 모르면서, 아이들이 들어선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이들은 설거지용 대야 주변에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오르카는 다시 빅터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뭐…였어?”

“…폭탄!”

 

그에 덩달아 은밀하게 입에 손을 댄 빅터가 오르카의 귀에 속삭였고, 오르카는 어깨를 크게 움찔거렸다.

 

백모래는 또 누군가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높은 확률로 랩터가 잊었으면 하는 누군가가 될 것이며, 그럴 사람은 랩터 주변의 아이들… 아스퍼, 당아, 달래밖에 없었다. 결국 오르카는 직면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그것도 빅터와 오르카에게 커다란 상처가 될 진실 말이다.

 

“빅터, 오르카! 뭐해, 얼른 나와서 놀자!”

“응!”

 

그에, 오르카는 고작 10살에 한참이나 혼자서 고민해야 할 거대한 문제를 떠안고 말았다.

덕분에 오르카는 온종일 아이들과 노는 데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다며 걱정한 아이들이 먼저 보내줄 정도였다. 그에 빅터는 무척이나 아쉬워했지만, 역시나 오르카의 걱정이 먼저였기 때문에 순순히 오르카와 함께 발걸음을 돌렸다.

 

“형아, 무슨 일 있어?”

“…빅터.”

 

이걸 말해야 할까? 쓸데없는 짓이 되지는 않을까? 괜히 빅터까지 고민하게 되면 어떡하지?

 

…빅터가 슬퍼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던 대장의 죽음에 그리도 서럽게 울어야 했던 빅터다. 그에게 소중한 친구들이나 다름없는 세 사람을 이제 백모래가 죽일 예정이라고 하면, 우리가 그것을 말로든 몸으로든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고 하면 빅터는 당연히…

 

‘그래도 그건 안돼! 보스한테 가자!’

 

…그러다 사랑의 장애물로 한줄기 핏덩이가 될지도 모르니, 결국 오르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아.”

“!!”

 

그것은… 백모래의 짓을 묵인하겠다는 스스로의 결심이기도 했다. 그래, 오르카는 아무리 그래도 자기 자신의 목숨이, 빅터의 생명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오르카는 어떤 비명을 들었다. 마치 미래에 있을 아이들의 비명 같았다. 실제로는 어떨지 몰라도….

 

“누나! 형이 아프대!!”

“뭐? 오르카, 무슨 일이야? 한 번도 아픈 적 없던 애가.”

“아, 아닙니다. 그냥….”

 

그러나저러나, 오르카는 순식간에 중병자가 되어 빅터에 의해 실려 갔다. 빅터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노닥거리던 메두사를 부르더니, 구급상자에 가서 체온계며 약병을 싹 쓸어왔다. 오르카는 제 거짓말에 발목을 잡혀 메두사 앞에 단단히 앉혀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메두사는 이미 알고 있는지, 장난기가 가득했고-

 

“형, 이거 해, 이거!”

“빅터, 이거까진 필요 없어….”

 

가정용 혈압계며 기생충 약, X텐 껌 사탕까지 가져오는 빅터를 말리는 건 오르카의 몫이었다.

 


“빅터, 오르카. 오늘은 애들한테 가지 마.”

“왜, 누나? 나 놀고 싶은데!”

“…”

“바보 빅터, 어른들 일이 있겠지.”

“나 바보 아냐, 레이디 누나!”

 

오르카는 생각보다 빨리 다가온 ‘그’ 날에 흠칫, 어깨를 떨다 빅터의 눈치를 보며 아닌 척 고개를 돌렸다. 최대한 평소처럼 행동하려고 해도 마음먹은 것처럼 잘 되지 않았다. 그야,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곧 지척에 와 있는데 어떻게 태연할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오르카는 그래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나이프는 범죄 조직이니까.

 

아무리 오르카가 어린아이여도, 일단 그런 이상 익숙해져야만 하는 일이었다. 오르카는 이번 일이 고작 시작일 것임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다. 온몸이 거미줄에 얽힌 기분이었다.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뒤에는?

갑자기 내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이 처음, 대장을 잃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일까. 빅터와 오르카가 당장 도망친다고 해서 어떤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기에 오르카는 이미 듣고 봐온 게 많았다. 연구소의 경험과, 어른들의 대화와, 백모래가 손잡은 범죄조직들 사이에서의 일들….

 

그 속에서 어린 혼혈들은 위험에 노출되기 쉬운 대상이었다. 오르카는 어린 빅터를 어린 자신이 지켜줄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저 이런 일들을 감내하며 나이프 안에서 빅터를 지켜야겠지.

 

그가 선택하지 않은 보호자의 밑에서.

 

“-어쨌든, 가지말라면 가지 마. 빅터. 오늘 숙제는 특별히 더 많으니까.”

“에엑- 나 공부하기 싫은데!”

“오르카, 빅터를 도와줘. 알았지?”

“네.”

“레이디도.”

“우음, 알았어요.”

 

결국 막대한 숙제를 받고 입을 부- 내밀고 있는 빅터를, 잘하면 내려가서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달래야만 했다. 맛있는 거란, 어느 날 메두사가 사 온 프라푸치노를 말한다는 걸 오르카는 잘 알고 있었고, 차라리 빅터가 그에 관심이 쏠려서 아이들의 일을 아예 모르기를 바랐다.

 

-그런 마음을 담아, 숙제를 마친 뒤 셋이서 내려온 카페.

 

“와아, 예쁘다.”

“그치? 용돈 주니까 종종 여기로 와. 그 구멍가게에서 과자만 사 먹는 것도 안 좋으니까.”

 

그럼 카페인은 좋은가? 오르카는 종종 TV에서 봤던 카페인의 유해성을 설파하던 프로그램을 떠올리며 덩달아 카페를 구경했다. 시원하고, 깨끗하고, 심지어 인형이나 이것저것의 피규어를 잔뜩 세워놓아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가득한 예쁜 카페였다. 빅터의 말마따나.

 

“오르카는 뭐 마실 거야?”

“…복숭아 아이스티요.”

 

오르카는 메두사의 물음에 제일 가격이 저렴한 음료를 고르며 이름이 복잡하고 길기만 한 빅터의 음료수를 메뉴판에서 열심히 찾았다. 하지만 ‘휘핑크림 잔뜩에 초코칩 드리즐에 캐러멜 시럽을 뿌린 모카 프라푸치노’라는 메뉴는 없었다. 그냥 예쁜 색으로 적어놓은 ‘프라푸치노’라는 메뉴만 있었을 뿐. 아, 추가 메뉴에 휘핑크림과 초코칩이 있긴 한데….

 

모르겠다. 그걸 추가해야 하는 건가?

 

고개를 기울이며 고민하다 이내 포기한 오르카는 메두사 옆에 앉아 아이스티 컵을 잡았다. 조금 차고 축축한 감각이 손안에 가득해서 아직 가시지 않은 여름의 더위를 식혀주었다. 맛도 새콤달콤 상큼해서, 조금 어린 오르카의 입맛에도 나름 잘 맞았다. 아이들의 일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가실 정도로.

 

…사실은,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건지도 몰랐다.

 

“맛있다! 엄청 달아.”

“그래 보인다. 이거 한번 마셔볼래?”

“응! -으으, 써!”

“그야 그렇지. 아메리카노니까.”

 

그 와중에 메두사는 한창 단맛을 즐기고 있는 빅터를 놀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에 오르카는 다급하게 빅터에게 아이스티를 가져다 주며 달래고, 빅터는 울상을 짓다가도 금방 웃고…. 오랜만에 셋만의 일상이었다. 조금 감상에 젖은 오르카는 옅게 웃음 지으며 결국 빅터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때, 주인이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들고 다가왔다. 그리고선 오르카에게 다가섰다. 어딜 보나 호의적인 표정과 움직임이었다.

 

“하하. 귀여운 아이라서 서비스로 안 드릴 수가 없겠네요. 혹시 아이스크림은 좋아하나요?”

“아… 네.”

“풉, 오르카. 감사합니다, 해야지.”

“감사… 합니다.”

 

졸지에 서비스 아이스크림을 받아버린 오르카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꾸벅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것을 수줍어한다고 여겼는지, 가게 주인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오르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카운터로 돌아갔다. 참 평범한 일상의, 참 평범한 호의였다. 그에 의외의 복병은 빅터였다.

 

“저도 어… 읍, 읍읍!”

“네?”

“아, 하하하…. 아니에요.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아요. 괜찮으니까…”

“아, 예.”

 

저도 아이스크림이 탐이 났는지, 빅터가 번쩍 손을 든 것이다. 제 모습이 아이라기엔 조금 많이 크다는 걸 크게 개의치 않는 빅터로서는 당연한 얘기였으나, 그걸 일반인이 ‘아, 실험 받으셨구나~’ 하고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다행히 그런 빅터를 순발력 있게 막은 것은 오르카였고, 메두사는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수습했다. 다행히, 가게 주인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빅터를 조금 모자란 사람으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히잉….”

 

하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빅터가 침울해졌단 것이다. 집에서는, 아니 산 위에서 누구보다 애 취급을 당하던 빅터인지라 이런 종류의 반대에 부딪힌 것은 처음이었겠지. 뭐, 빅터는 단순한 편이니 아이스크림을 못 먹는 것에 대한 슬픔이 더 크겠지만….

 

“빅터,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나도 공짜 아이스크림….”

“언제부터 그렇게 공짜를 좋아했다고. 그냥 사줄게, 응?”

“하지만 누나, 나 비싼 거 먹었는데?”

 

풉, 순식간에 메두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와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었다는 투였다. 곧 배까지 붙잡을 태세에, 오르카는 그런 메두사와 잔뜩 풀이 죽은 빅터를 번갈아 보다가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이거, 빅터 먹어.”

“응?”

 

어리둥절한 빅터의 앞에서 아이스크림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오르카가 양보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얼굴색이 환해진 빅터가 단순하게 눈을 반짝거렸다. 빨리도 회복하는 것이, 정말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해결될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오르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늘 헤실거리는 얼굴을 봐서인지, 빅터의 울적한 얼굴만 보면 가슴이 철렁거렸다.

 

“정말? 나 줘도 돼?”

“응. 형이니까.”

 

사실 아이스크림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오르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결국 완벽히 회복한 빅터는 오르카를 꼭 안아주고선 신이 나서 아이스크림을 받아 갔다. 빅터의 손안에 반쯤 녹아든 휘핑크림이 얹힌 음료 대신 하얀 아이스크림이 들렸다.

 

“내가 하나 더 사줄까, 오르카?”

“아닙니다….”

 

어차피 수시로 입에 음식을 주워 넣는 빅터에 비해 소식가인 오르카다. 굳이 여기서 더 군것질할 필요는 없었던 터라 오르카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메두사는 흐뭇하다는 듯이 두 형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오르카는 2년 전만 해도 그들의 일상이 이렇지는 않았음을 새삼스럽게 기억해냈다.

 

그때는 좁은 유리 벽 안에 새 사람이 나란히 있었어야 했다. 오르카와 함께 있지 않으면 온갖 난리를 치던 빅터를 메두사가 담당해야 했던 탓이었다. 메두사는 종종 동화를 읽어주었고, 몇 가지의 상식을 알려주었으며, 무엇보다 두 사람이 형제가 될 수 있게 해준 사람이었다. …빅터에게 이름을 지어주진 않았지만.

하지만 순식간에 빅터라는 이름이 생겼고, 5살에 상실을 겪고 6살이 되었다. 그사이에 세 사람의 일상은 많이 달라졌다. 연구소에서의 기억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였다. 빅터와 오르카는 좀 더 많은 것을 배웠고, 평범하게 자랐으며, 메두사는 두 사람의 보호자로서 그들을 따라다니며 늘 지켜봐 주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관계는 좀 더 가족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나이프는-

 

“자, 이제 가자. 지금부터 천천히 올라가면 후야랑 타이밍이 맞을 거야. 빅터?”

“응, 응! 형아, 가자!”

 

후야, 또 다른 나이프의 이름이 거론되자 오르카의 어깨가 크게 흠칫거렸다. ‘타이밍이 맞는다’ 는 건 무슨 의미인 걸까? 일을 끝냈다는 신호라도 받은 걸까? 당장 내일 훈련용 공터를 방문해봐도 아이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못내 충격적이어서…

 

오르카는 빅터가 뛰쳐나가는 걸 막지 못했다.

 

“누나, 형아! 나 역시 다녀올게! 붕어빵만 같이 먹고 돌아갈 테니까!”

“잠, 빅터!”

 

빅터는 빨랐다. 치타 혼혈 정도는 아니어도 그 근육량과 훈련도가 엄청나니 어쩔 수 없었다. 당연히 메두사나 오르카가 쫓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미 빅터는 마을 반을 주파해 붕어빵을 샀을 것이고, 산 위로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제법 오래 달렸으나 그를 반도 쫓아가지 못한 메두사와 오르카는 헉헉대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죽겠네… 너희들이 하는 훈련이란 게 저런 거였니?”

“네….”

“사람 하나 충분히 잡겠다.”

 

그러나, 오르카는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데다 마실 것을 마시고 바로 달린 탓에 속이 불편하지만 그 아이가 걱정되어 미칠 것 같았다.

혹시나 아이들이 죽은 걸 본다면? 폭발에 휘말린다면? 그렇다면 자신은 빅터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그 애, 그 애가… 무사히만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메두사 님, 제가 먼저 다녀와도 될까요?”

“…뭐, 그래. 지금이면 다 정리됐을 테니까. 조심해서 다녀와. 빅터는 꼭 데려오고. 혼을 내줘야지 아주….”

 

결국, 오르카는 참지 못하고 먼저 달려 나갔다.

 

펑- 하고 터지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한편, 메두사와 오르카를 두고 달려 나온 빅터는 이미 큰 붕어빵 봉지를 사 들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냠, 형아도 같이 올 걸 그랬나?”

 

…와 같은 작은 고민과 함께. 하지만 빅터도 빅터 나름대로 생각한 구석이 있었다. 아침에 메두사가 형, 누나들을 보러 가지 말라고 했을 때의 반응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형, 영 가고 싶지 않은 것 같았지.

그래서 빅터는 굳이 형을 다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상대를 조금 배려할 줄 아는 어른이 된 것이다! 적어도 예전처럼 오르카를 달랑 들고 나르는 매너 없는 짓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빅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짜 잠깐 들렀다 가면 될 거라는 생각은 덤이었다.

 

“스텔, 자려나~”

 

그러고 보니 낮잠 시간이었다. 어린 스텔은 아직 빅터보다도 아기라서, 낮잠 시간을 꼭 챙기고는 했던 것이다. 어린 스텔, 귀여운 스텔. 모두의 막내. 빅터는 흥얼거리며 공터에서 유난히 늦는 저들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빅터는 귀여움받는 것도 좋아했고 귀여워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런 의미로 랩터네 아이들은 빅터의 최적의 놀이친구였다.

스텔 한 입, 랩터 한 입 사이좋게 나눠먹을 장면을 생각하니 빅터와 오르카가 떠올라 유난히 기분이 좋아진 빅터는 다시 한 번 발을 굴러 앞으로 뛰쳐나갔다. 빨리 달려가서 붕어빵이 조금이라도 더 따끈할 때 나눠먹고 싶었다. 얼른!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이쯤이면 시끄러운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야 할 텐데… 사위가 싸늘하도록 조용했던 것이다. 빅터는 왜인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을 느꼈으나, 그걸 인식하지 못한 채 몸을 곤두세우기만 했다. 어쩐지 비린내가 났다. 생선이라기보단 철에 가까운, 왜인지 모르게 익숙한 비린내였다. 온통 붉은 빛만이 연상되는.

 

그 순간, 어떤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

 

싸늘하게 누워있던 팔다리. 평소에 실험체가 고통을 못 참고 쓰러지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얼굴색은 푸르게 죽었고, 눈에는 핏줄이 돋아 있었다. 한없이 차가운 향기가 맴돌았다. 분명 형이 눈을 가려주고는 있었으나, 그 작은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유독 예민한 후각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때 빅터는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빅터는 알 수 있었다.

 

“그 애새끼는 어디 간 거야. 보스도 갔으니 얼른 터뜨려야 하는데.”

 

후야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순식간에 두 장면이 교차했다.

 

쓰러져 있었을 당아, 머리가 깨져나간 아스퍼, 칼이 거칠게 쑤셔 박아졌을 달래. 빅터가 그동안 배워온 모든 것이 지나치게 디테일한 묘사를 상상케 했다. 빅터는 고작 피가 흩뿌려진 방향만으로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연구소의 경험을 통해, 그들이 어떤 얼굴로 차디찬 시체가 되었을지를 알 수 있었다.

 

투둑, 툭.

 

화들짝 놀란 빅터는 붕어빵이 떨어진 제 발밑을 확인할 새도 없이 빠르게 달려가 커다란 나무 뒤에 숨었다. 종종 아이들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고 놀 때마다 술래가 서 있던 바로 그 나무였다. 그 나무가 빅터를 숨겨주기에도 충분히 크기를 바라며, 빅터는 몸을 숨겼다. 후야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나, 커?’

‘6살치곤 크지.’

‘바보야, 이건 그냥 다 컸다고 하는 거야.’

‘다 컸다고? 나 아직 20살 아닌데.’

‘음, 넌 그냥 또래 애들보다 좀 큰 거야. 그런 걸로 하자.’

 

하지만 형, 난 너무 커. 누나들은 쏙 가려지는 나무 뒤에 숨고도 들킬까 봐 무서워서 떨고 있잖아.

아, 그들의 말들이 떠오르는 것은 이것이 살해 현장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인 걸까. 벌써부터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는 걸까? 빅터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모든 사고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한참 전부터 뜨거워진 눈가에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

 

문득, 빅터는 이것을 주도했을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몰라, 그분 오시기 전에 그냥 빨리 폭탄이나 터뜨려야지. 혼날라.”

 

빅터가 처음으로 ‘살인’을 경험했던 그날 밤의 해맑은 얼굴, 그리고 빅터로선 의미 모를 대화를 나누며 폭탄을 얻어내던 선득한 시선, 그리고 ‘애새끼’와 ‘폭탄’….

머리가 팽팽 돌아갔지만 빅터는 현실을 부정했다. 설마,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보스가 모두를 죽이려고 했을 리가 없어. 형이랑 누나들은 잘못한 게 없잖아. 레이디 누나 말대로라면 장애물이 되거나 잘못한 게 있을 때에나 죽일 거라고 했는데.

 

장애물?

 

사박사박, 후야가 빠르게 현장을 벗어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그 발자국에는 진한 붉은색이 남아 있었다. 아니, 푸른 눈물의 색이기도 했다. 그게 죽은 이들의 억울함이었는지, 빅터의 눈물인지는 지금 알 바가 아니었다. 빅터는 순식간에 현장으로 가 그들의 흔적을 찾았다.

당아의 특이한 머리 끈, 아스퍼가 종종 들고 다니던 단검과 달래의 털 빗. 폭탄이 곧 터진다는 걸 알면서도 빅터는 멈출 수 없었다. 마음은 급하고 머리는 슬픔에 젖고 손은 그를 따라주지 않아서, 벌벌 떨리는 것이 몇 번을 물건을 떨구고는 다시 주웠다. 도둑이라도 든 듯이 어지러워진 방 안에는 빅터의 흙발의 흔적이 가득했다.

 

아, 혼날 텐데. 차라리 야! 하고 들어와서 혼내준다면 좋을 텐데. 할로윈의 장난이나 떠올리고 있기엔 너무 따뜻한 계절이었다. 대장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죽이던 백모래의 전적을 알고 있었다. 이젠 그들의 첫 만남이 어땠는지도 어렴풋이.

 

아, 빅터는 이렇게 죽음을 알아가는가?

오르카는 빅터가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사실 감각은 기억보다 생생했다. 죽음이 그 앞에 선명했다. 다만 그들이 제가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아니었으며, 연구소에서 죽음은 너무나 흔했던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개념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백모래가 대장을 살해한 순간 알게 된 살인의 공포는 빅터의 뇌리를 관통했다. 그것은 첫 깨달음이었고, 첫 경험이었고, 강제로 쑤셔박힌 기억이었다. 차라리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 바로 지금, 학살의 현장에서.

 

빅터는 죽음의 감각을 되살려냈다.

 

탁탁탁,

먼저 앞서나간 사람과는 별개로, 빅터는 다급한 발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곧 폭발에 불태워질 그들의 유품들과 함께. 시체조차 빅터는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별수 없는 일이었다.

 

펑!

그때, 아슬아슬하게 폭발이 터졌다. 그 압력에 빅터는 몇 번이나 떨어져 데굴데굴 산을 굴렀다. 발목이 접질리는 감각도, 얼굴이 찢기는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공포와 절망, 슬픔 따위의 감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래, 오르카가 걱정했던 바로 그 상황이었다.

 

추락이자 추락의 순간. 그 한 가운데에 빅터는 있었다.

 


빅터가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익숙한 천장이었다. 주변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메두사, 오르카, 레이디, 세월… 빅터가 서둘러 입을 때기 전에, 온갖 질문들이 쏟아졌다. 참으로 소란스러운 자리였다. 오르카마저 입을 열 정도로.

빅터는 그에 어쩐지 안온함을 느꼈다. 눈을 감기 전까지의 감정과는 참으로 맞지 않게도.

 

“괜찮아, 빅터? 힐러가 왔다 가야 할 정도였어.”

“빅터, 그러니까 내가 가지 말랬지!”

“역시 바보 빅터야. 어른 말은 제대로 들어야지.”

“나한테 나이를 나눠줄 사람이 줄어들면 안 되지. 어린애 주제에 조심해.”

 

그에 빅터가 눈을 가물가물하자, 곧 이들은 빅터를 쉬게 둬야 한다며 왁자지껄이었다. 그 와중에도 오르카는 남겠다며 드물게 고집을 부렸고, 메두사는 그것을 허용했다. 평소에 신뢰를 착실하게 쌓아온 오르카의 승리였다. 그에 반해 특유의 마이페이스로 크고 작은 사고를 쳤던 레이디는 입을 비죽이며 방을 나갔다. 결국 빅터와 오르카의 방에는 방 주인인 두 사람만이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흉이 질 거래.”

“에, 어디에?”

“눈썹에.”

 

반사적으로 눈썹을 더듬으려던 빅터의 손을 오르카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당장 만져보라고 한 말이 아니라며 혼내는 말은 덤이었다. 빅터는 그에 습관적으로 눈썹을 내리려다 따끔함에 얼굴을 찌푸렸다. 생경한 고통이었다.

그 고통 덕일까, 불현듯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의 기억이 떠올랐다.

붉은 죽음, 푸른 눈물과 터지는 폭발의 눈부시고도 검은 불꽃… 그 와중에 품에 안고 있던,

 

“! 나 들고 있던 건?”

 

빅터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오르카를 다그쳤다. 사실 자신도 그걸 왜 챙겼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저 그것을 잃으면 사라질 기억들이 아쉬웠을 뿐이다. 제 기절 덕분에 그걸 잃어버리기라도 했다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얼마 없는 물건이지만, 그만큼 빅터에겐 중요했다. 실제로 폭탄이 터진 시점에서, 후야의 말이 진실이 된 시점에서, 그들의 죽음이 진실이 된 시점에서, 그 와중에 랩터와 스텔의 것은 챙기지 못한 시점에서….

 

“저기 있으니까 진정해, 빅터.”

“하, 으아아아…. 다행이다.”

 

그래서 오르카가 확답을 주며 빅터의 책상 위에 분명히 남겨져 있는 물건들을 보여주고 나서야, 빅터는 안심할 수 있었다. 차갑고도 뜨거운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다행이야, 다행이야. 고작 그런 말들이 빅터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어린 아이의 머리통은 그만큼이나 단순했다. 제 손에 그들의 기억이 실물로 쥐어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그 물건들이 소중하고 소유욕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마치 그들이 빅터와 늘 함께 있는 듯해서.

 

한참이나 빅터가 그런 상념에 젖어 있을 동안, 오르카는 빅터의 말을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그 덕에 두 형제에겐 참으로 낯선 짧은 침묵이 스쳐 지나갔으나, 그리 어색하지도 않았다. 당연하게도, 먼저 입을 연 건 빅터였다.

 

“형, 도망치자.”

“뭐?”

“보스가, 후야가 모두를 죽였어. 얼른 도망치고, 가서 신고해야 해!”

“빅터….”

“우, 우리도 언제 죽을지 몰라. 시체를 묻고, 후야를 시켜서 터뜨리고… 어떻게든 죽을 수 있어. 위험해!”

 

그에 오르카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안쓰러우면서도, 무력하고, 또 무척이나 여리고 순수한 것을 보는 시선. 그것을 빅터는 100퍼센트 이해할 수 없었으나, 저를 현실을 모르는 어린애로 본다는 것만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다음으로 이어진 날카로운 말로도 숨김없이 드러났다.

 

“어떻게?”

“뭐?”

“어떻게 도망칠 거야. 그리고 누구랑?”

“어, 메두사 누나랑, 레이디 누나랑, 세월이랑….”

“하지만 같이 가준다는 보장이 없어.”

“그야, 당연하잖아. 보스는 나쁜 사람인걸….”

 

점점 빅터의 대답에 힘이 없어진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르카는 이 문제에 대해 처음부터 충분히 고민해왔으나, 그에 반해 빅터는 현실을 깨달은 지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빅터는 이제 와서 오르카의 질문을 통해 현실적인 한계를 깨닫고 있었다. 오르카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우리가 도망친다고 무사할 수 있을지, 신고한다고 해서 백모래가 순순히 잡힐 수 있을지, 보복은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하나 같이 빅터가 스스로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사실 아이들 사이에서 답이 나올 만한 문제가 아니기도 했다. 당연히 오르카와 빅터의 대화는 질문과 ‘모르겠다’는 대답으로 돌고 돌았다. 빅터는 점점 풀이 죽었다.

 

“하지만 형아, 나는 여기 있기 싫어.”

“빅터,”

 

그러나 빅터의 마지막 말에 오르카는 멈칫,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은 나도 싫어, 라는 말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에 빅터는 기대를 감추지 못했지만 오르카는 고개를 돌리며 그 기대를 배신했다.

 

“우린 여기를 벗어날 수 없어. 연구소처럼. 적응해야 해.”

“형….”

“여태 잘 지내왔잖아 그냥 모른 척하고, 지금까지 지내온 것처럼 평화롭게…”

“어떻게 그래!”

 

결국, 빅터는 울음을 터뜨려야 했다. 여태까지 참은 것만 해도 용한 일이었다. 당장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던 사이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는데, 그것이 비록 스산한 공포의 대상이었어도 나름 가족처럼 지내던 사람의 짓이라는데 연약한 아이의 정신으로 그것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형은 안 슬퍼? 당장 내일부터 형, 누나들을 못 보는데!”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코 먹는 소리가 나온다. 결국 눈물이며 콧물이 얼굴 위를 완전히 덮는 바람에 엉망진창이었으나, 어떤 작품에서 나올 법한 비탄에 빠진 남자 그 자체의 얼굴이었다. 맑은 은회안이 출렁이는 눈물 아래 그 빛을 감췄다. 오르카는 결국 그것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달래 누나랑 장난도 못 쳐, 아스퍼 형이 해주는 밥도 못 먹어, 당아 누나랑 훈련도 못해… 랩터 누나랑 스텔이 같이 낮잠 자는 것도 못 봐….”

 

결국, 오르카는 주륵 눈물을 흘렸다. 애써 의연한 척해보려 해도 고작 중학생도 되지 못한 어린아이였다. 그리고 그에게도 아이들은 첫 친구였다. 아무리 전부터 이렇게 될지도 모르는 미래를 예견했었어도, 마음의 준비를 했어도 상실의 슬픔은 늘 낯설게 다가오는 법이었다.

-그것은, 다음날부터 친구를 볼 수 없게 되는 날은, 그들에게 난생처음일 수밖에 없으니까.

 

“…나도, 나도 슬퍼.”

 

결국 두 형제는 두 어깨를 끌어안고 울고 말았다.

 

“나도 무서워. 나도 싫어.”

 

빅터는 그를 통해 오르카의 날것의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늘 어른스럽던 오르카가 이리 서럽게 우는 걸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그가 정말로 때 쓰듯 말하는 걸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그에 빅터는 오히려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이 집에 빅터와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아닌가.

그래서 빅터는 꿈을 가졌다. 오르카의 질문에 모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도망쳐도 무사할 수 있도록 모두가 튼튼하게 자라서, 우리 손으로 백모래를 잡아서 넘기는 거다. 너무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기 전에, 제발 무사히….

 

그래서 언젠가 우리도 동화처럼 앞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겁이 많은 나라도 얼른 클 거야. 빅터는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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