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빅 피터팬

2. 빅터와 나비머핀 (2)

빅 피터팬 Big Peter Pan 유년기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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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얼마나 반복되었을까. 계절이 흘러 빅터는 5살이 되었고, 9살의 오르카는 언제나 어휘력이 훌쩍 늘어난 빅터와 함께였다.

 

오늘 아침도 백모래에서 수업을 들은 두 아이는 백모래와 함께 집을 나섰다. 레이디도 마찬가지의 수업을 듣긴 했으나, 여느 때처럼 집에서 놀 계획이란다. 랩터네를 만나는 것에는 영 흥미가 없는 모양이라 오르카는 더 채근하지 않았다. 빅터는 늘 아쉬워했으나, 가지 않겠다는 걸 어쩌겠는가. 오르카는 그럴 바엔 세월과 놀겠다며 드러눕던 레이디를 떠올렸다.

세월은 많이 나아졌다. 처음엔 거동도 힘들고 습관처럼 관절이 시리다는 얘기를 하더니, 이제는 그래도 허리를 짚고 계단을 오르내릴 정도는 된 것이다. 레이디는 기뻐했고, 나머지 멤버들은 신기해 했다. 오르카도 이게 바로 그 병이구나, 싶어 한참이나 신기하게 그를 관찰해야 했다. 곧 무례인 것 같아 그만뒀지만.

 

탁, 탁,

빅터는 오르카를 목마 태우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면 빅터가 가져온 과자가 가득 든 종이가방이 자꾸만 탁탁, 빅터의 머리에 부딪치는 바람에 오르카는 그러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으나… 결국은 어깨에 숄더백처럼 종이가방을 차고 있는 게 고작. 오르카는 차라리 그게 낫다 싶어 포기했다.

 

하지만, 도착한 세 사람을 맞이하는 것은 여느 때처럼의 아이들이 아니었다.

 

“래, 랩터! 이게 뭐야, 왜 다쳤어…?”

“형, 누나!! 무슨 일이야?!”

“뭐야, 어제는 안 오더니 하필 오늘은 왔네.”

“타이밍 봐.”

“…!”

 

흙발자국으로 더러워진 옷, 그리고 찢어져 피가 나고 있는 피부, 볼은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이미 파랗고 노랗게 멍이 올라오는 곳도 있었다. 오르카는 이 모든 것이 폭력의 증거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빅터는 당장에 달려가 얼굴에 달걀을 문지르고 있는 당아의 무릎께에 꿇어 앉았다. 오르카도 그제야 슬금슬금 빅터의 등을 타고 내려왔다.

 

“무슨 일이야, 누나! 엄청 아파보여! 많이 다쳤어?”

“거, 별 거 아닌데….”

 

유난이야, 중얼거리면서도 당아는 은근히 기분 좋아보였다. 그가 은근히 걱정을 바라고 있다는 게 뻔히 보였다. 사실 오르카 본인도 무척이나 아플 때 누군가 알아주기를, 누군가의 온기를 원했으니 당연히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오르카도 걱정을 표하기 위해 아스퍼의 손을 잡았다. 그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이들은 익숙하기라도 한 듯이 치료까지 끝내놓고서 그대로 집기를 정리하고 있던 것이다. 용병이니 상처 입을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에 오르카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뭐야, 난 아무도 걱정 안 해줘?”

“내가 해!”

“우읍…! 야, 숨, 숨 막혀!”

 

그 와중에 빅터의 전력 허그를 받은 달래는 웃는 얼굴로 몇 번이나 빅터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거 놓으라 외쳤다. 그것이 비명소리보단 높은 웃음소리라, 오르카는 가만히 앉아있기를 선택했다. 대신해서 눈가에 달걀을 굴려주거나 하며….

 

그런 전쟁 후의 평화로운 현장에서 먼저 질문을 꺼낸 것은 당연히도, 빅터였다.

 

“누가 이랬어? 내가 혼내줄까?”

“풉, 네가 해보게? 그럼 웃기겠다.”

“그래도 보기엔 꽤 자연스러울걸.”

“그럼 뭐해. 결국 속을 까보면 5살 짜리한테 두드려 맞는 아저씬데-”

 

아이들은 스텔을 추켜 안은 채 도란도란 저들끼리 떠들며 킥킥, 웃었다. 드문 일이었다. 그래도 속이 깊고 어른스러웠던 아이들이 빅터와 오르카가 모를 일을 저들끼리 떠든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두 형제는 전혀 설명을 듣지 못한 채 머리 위에 물음표나 띄우고 있어야 했다.

 

“-그러지 않아도 돼. 대장이 그런 거거든.”

 

그리고- 진실은 곧 알 수 있었다.

 

“대장이 평소엔 다 괜찮은데, 가끔 팍 돌아.”

“다리가 좀 불편하잖아. 그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가?”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의 폭력. 이런 건 뭐라고 해야할까?

오르카는 다시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동화나 소설에선 조언을 구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그들은 너무나 특별했다. 나이프도, 랩터네 용병대도. 백모래와 세 사람의 관계조차도 고작 지난번에 범죄조직 ‘나이프’로 관계를 정의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들과 ‘대장’은?

 

가족도, 친구도, 모르는 사람도 아닌 사람의 폭력은?

 

그래, 폭력이 성립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도움을 구하는 범죄조직이라니 가당찮다. 용병대도 마찬가지다. 불법 용병대의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잡기 위해 누가 와주겠는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연구소에 방치되어 있었던 오르카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더욱 비관적인 경향이 있었다.

 

“내가 말해볼까? 그럼 안 된다고. 잡혀간다고! TV에서 그러던데!”

 

…하지만 빅터는 그러지 않은 모양이었다. 태연하게 ‘안돼!’를 입에 담는 것을 보면… 모두가 TV 속 애니메이션처럼 세상이 합리적이고 공평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그에 비해 오르카는 세상이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잘 아는 편이었다.

 

“아서라, 우리는 괜찮으니까 됐어.”

“우리가 그래도 실력이 있는데, 대장 정도야 이기지. 그냥 맞아주는 거야. 기분 풀리라고.”

 

게다가 아이들은 자신만만했고 또 태연했다. 이런 태도에 구태여 도와주겠다는 말을 보태기도 힘들어, 오르카는 어물쩍거렸다. 빅터도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였지만 차마 뭐라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역시 안 그런 척 어른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오르카는 다시 한 번 아스퍼의 손을 꽉 쥐었다. 그들에게 힘을 줄 방법이 그것뿐이라는 것처럼.

 

그때, 오르카는 싸늘한 시선을 느꼈다. 어쩐지 불안했다. 백모래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할 때의 느낌과도 같았다. 그에 뒤를 돌아보니…

 

입가의 진한 흉, 연한 자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 오르카가 잘 알고 있는, 익숙한 사람이었다. 눈으로 들어온 정보를 느리게 인식한 머리는, 곧이어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빅터의 손을 잡아끌었지만, 빅터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만 있었다. 그만큼 찰나였다는 뜻이다.

 

아, 과자 봉지가 바닥에 흩어졌다.

 

탁,

합이 맞지 않았던 탓에 오르카는 먼저 일어나 저 멀리 달렸고, 빅터는 그런 오르카를 놓쳤다. 그에 거칠게 멱살이 틀어잡힌 것은 빅터였다.

 

“뭐, 나를 혼내줘?”

 

하,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렸다. 목이 졸린 소리를 내는 빅터를 보며, 오르카는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백모래는 랩터와 어디를 간 건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너무 당황한 탓에 몸이 굳어버린 듯 했다. 사실 오르카도 그랬다.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믿을 수 있는 어른은 없었다. -아니, 불러오기엔 너무 늦을 것 같았다. 아무도 우릴 도와줄 수 없다는 막막함에 오르카는 울음이 올라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이만큼 자신이 어린 것이 억울할 때가 없었다. 내가 다 큰 성인이었다면, 빅터만큼 큰 사람이었다면, 그랬다면…

 

너를 지키겠다고 나설 수 있었을 텐데.

 

사실 언제나 지켜지는 것은 나였다.

 

퍽, 쿠당탕!

순식간에 얼굴을 얻어맞은 빅터가 심상찮은 소리를 내며 뒤의 나무둥치까지 날아갔다. 왕년의 실력이 죽지 않은 건지, 깔끔한 주먹질이었다. 그마저도 오르카의 눈엔 들어오지 않았지만.

오르카는 쓰러져 누운 빅터에게 달려가 그를 흔들어 일으켰다.

 

“빅터, 빅터. 괜찮아?”

“우… 아파.”

 

어지간히 센 힘으로 때렸는지, 입 안이 터져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르카는 처음으로 화가 난다는 감각을 알게 되었다. 절망과 체념만이 전부였던 연구소에서는 알 수 없었던 감각이다. 그 사이에 오르카는 불합리함을 알았고, 정상과 비정상을 배웠으며, 일반적이지 않은 삶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그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는 소리다.

 

아마 그가 아이들의 대장이 아니었다면 오르카는 진작에 달려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대장은 아이들을 이끌고 감당하는 유일한 성인이었기 때문에, 당장 오르카가 할 수 있는 것은 차가운 분노에 씨근덕거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대장은 그 반항적인 눈길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바로 차가운 지팡이가 날아들었다. 불편한 다리를 보완하기 위해 늘 짚고 다니던 바로 그것이었다.

 

빠악!

“빅터!”

“대장, 대장 우리가 잘못했어! 얘는 잘못 없잖아, 응?”

“차라리 우릴 때려!”

“당아, 스텔 데리고 들어가!”

 

오르카를 대신해서 머리를 후려맞은 것은 빅터였다. 처음 겪는 종류의 고통에 동공이 동그랗게 확장된 빅터를 보는 것은 오르카로서도 오랜만이었다. 평소의 빅터는 일반적인 고양잇과 동물답게 날카로운 동공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동그랗게 풀렸다는 것은 그만큼 큰 충격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에 비하면 큰 상처는 없어보였지만… 아이들은 이미 충분히 놀라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됐어, 나와 봐. 쟤가 날 혼낸다고 하잖아. 지가 뭐라고, 응? 나보다 한참 모자란 정신병자 주제에.”

“빅터는 그런 거 아닙니다!”

“저 봐. 뭐가 좋다고 그렇게 싸고도는데? 쟤도 사람 구실 못하는 건 똑같잖아. 안 그래?”

 

아, 그제야 그가 갖고 있는 비이성적인 적개심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빅터가 실험의 결과라는 걸 믿지 않고 있었다. 그저 정신병자라고 생각했고, 잘못된 우월감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빅터의 모자란 행동을 할 때마다 착실히 몸치를 키웠고-

 

저가 아이들에게 5살짜리 빅터보다 못한 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생각에 폭발한 것이다. 아이들이 자신을 깔보고 있다는 분노와 함께. 정말 아이들과 대등하게, 그 이상으로 싸우고 있는 빅터를 보면서…. 감정을 태우는 불꽃이 빅터를 향했다. 정작 오르카는 그 튀어오르는 불티에 조금씩 맞고 있을 뿐이었다.

 

“-안돼!”

 

그때, 오르카는 덜렁 들어올려지는 익숙한 감각과 함께 숨막히도록 갑갑한 빅터의 품 안을 느껴야 했다. 그가 오르카를 들어 안고 대장의 주먹을 피한 것이다. 대상을 잃은 주먹과 함께 단단한 몸체가 취한 듯이 흔들리는 것이 빤히 보였다. 그 뒤에서 아이들이 얼른 가보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기는 한 건지, 빅터는 가슴을 가파르게 헐떡이고 있었다.

 

“이런 건, 좋지 않아….”

 

그의 말에 동감했고, 또 그렇게 말하는 빅터의 입장을 이해했다. 연구소를 나와, 이곳에 와서 빅터는 연구소의 일을 거의 다 잊은 것만 같았다. 그러니 그에겐 이것이 첫 폭력일 것이다.

 

물론 아이들과 치고박고, 대련하거나 훈련하면서 커왔던 빅터로서 폭력이 아예 낯선 존재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의 성장을 위한 겨룸이었고, 스트레스 해소이자 쾌감의 분출이었다.

 

‘와, 빅터 몸 쓰는 건 타고났는데?’

‘이 정도면 대장보다 훨씬 나을지도.’

 

그러니까… 동등한 입장에서 순수하게 겨루는 그 땀과 활력을 좋아했다는 소리다.

 

하지만 이것은 일방적인 폭력 아닌가. 오르카는 숨이 막히는 것을 참고 순순히 빅터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이들에게 미안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빨리 자리를 피해주는 것밖에는.

 

그래서 빅터는 뛰고, 또 뛰었다. 오르카는 그 안에서 가쁘고 더운 숨을 기꺼이 감내했다.

 


두 사람은 곧 아지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아직 백모래는 돌아오지 않았고 레이디를 포함한 네 명의 여성이 함께 간식을 먹고 있었다. 네 사람은 무척이나 기괴한 것을 보았다는 얼굴로 둘을 바라보았다. 특히 메두사는 ‘우리 애가 어디서 맞고 올 애가 아닌데…?’ 싶은 얼굴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맞았다.

어쨌든, 그런 얼굴인 것과는 별개로 메두사는 차분하게 응급처치 상자를 찾아왔다. 드디어 빅터의 품에서 벗어난 오르카는 먼저 다급하게 손을 씻고 왔다. 메두사를 도울 생각이었다.

 

“오르카. 어디서 맞고 온 거야?”

“그… 랩터 님이 있는 용병대의 대장과 부딪혀서….”

“뭐? 그 인간이 뭔데 우리 애를 때린 거래? 겨우 5살짜리를!”

“…”

 

어딜 봐도 5살로는 보이지 않는데요.

레이디가 그런 얼굴로 오르카에게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오르카에게도 빅터는 아이가 맞았기 때문에, 애써 고개를 돌렸다. 커피를 마시고 있던 세월의 묘한 시선은 덤이었다.

어쨌든 메두사에게 총총 다가간 오르카는 옆에서 약을 들거나 소독약을 가져다주는 등, 그를 보조했다. 사실 찢어진 입 안이나, 이마의 작은 혹과 생채기 외에는 다친 곳이 보이지 않아 그럴 것까진 없었지만, 언제나 그랬듯 과보호였다. 결국 메두사와 오르카는 빅터를 거의 밴드투성이로 만들고 나서야 만족했다.

 

“나 답답해….”

“씁, 떼면 혼나, 빅터.”

“힝,”

“나왔어~ 응? 빅터 다쳤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얼굴이 비쳤다. 그에 메두사는 초등교사에게 따지는 학부모라도 된 것마냥 빅터를 내보였다. 오르카는 메두사 옆에 붙어 고개를 끄덕거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글쎄, 그 대장이-”

“아, 알아. 오늘 듣고 왔는데… 빅터까지 때린 거야?”

“네….”

“빅터가 먼저 때렸을 리는 없고. 음, 아무래도 안 되겠네.”

“뭘 어떡하게요? 그 ‘사랑’님의 대장인데.”

 

정작 맞은 당사자인 빅터보다 더 씩씩거리던 메두사는 백모래의 알고 있다는 반응에 반대로 더욱 성이 난 것으로 보였다. 사실 뭘 요구할 수도 없는 상대라 더욱 그랬다. 어쨌든 상대는 랩터를 쥐고 있는 용병대의 대장 아닌가. 잘못해서 밉보였다간 그들이 떠날 수도 있었고, 아예 그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쫓아낼 수도 있었다.

사실 당황스럽게도, 오르카는 그 아이들을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언제 이렇게 친해졌나 싶어진 오르카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백모래의 대답이 두려웠다.

 

“음, 뭐.”

 

과연, 백모래의 얼굴은 뭔가 애매했다. 꿍꿍이가 있다기에는 너무 산뜻해 보였고, 그렇다고 묻고 넘기기로 했다기엔 기색이 흉흉했던 탓이다. 그리고 대답했다.

 

“죽여야지. 감히 내 사랑을 아프게 하는 사람은, 없어져야 마땅하잖아?”

 

그쯤 됐을 때, 오르카는 적어도 죽인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자신에게 새로이 놀랐다. 오히려 화들짝 놀란 것은 빅터뿐이었다.

오르카는 이미 많이 겪었다. 연구소에서의 행보부터 죄없이 죽은 이 산장의 주인, 그리고 저 손아래 명을 다했을 교단 사람들… 백모래의 행보에서 모든 죽음을 눈치챈 지 오르카였다. 빅터와는 달랐다.

고작 4살짜리라 연구소의 일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빅터는 책으로 죽음의 존재와 공포를 알아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책 위의 글자가 아닌 실제 죽음을, 실제 시체가 천천히 피라는 활력을 잃어가는 것을 제대로 인식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말만 들어도 저리 놀랄 수밖에.

 

“허어? 그 아이들은 어쩌고요? 그래도 부양하고 있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애들한테도 폭력을 휘두르는 것 같던데, 없어지는 게 좋지 않겠어? 정 아니면… 우리가 책임져 줘야지.”

 

책임이라, 백모래와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모래가 그렇게 말은 하지만 결국 책임지게 되는 것은 메두사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오르카는 메두사에게 좀 더 바짝 붙었다.

 

“하아…. 애 넷 더 품고 살 여력은 없어요.”

“그럼 말고! 똑똑한 애들이니까 알아서 잘할 거야.”

 

봐라, 메두사가 곤란해하니 이렇게 태세가 변하지 않는가. 게다가 언제 봤다고 똑똑하다는 건지…. 관심은 무슨. 오르카는 가끔씩 훈련용 공터에 랩터가 머물 때가 아니면 매번 랩터와 함께 사라지던 백모래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도리어 떠오른 아이들의 걱정에 머리를 어지럽힌다.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지는 오르카를, 빅터와 레이디가 발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형….”

“오르카, 뭘 그렇게 걱정해?”

 

사실 대장이 사라지고 나서 슬퍼할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 2할이고, 나머지 8할이 앞으로 살아갈 생활에 대한 걱정이었다. 모든 임무 접수와 대금의 수납을 담당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사람이 바로 대장이었다. 참 당연하게도 팀의 경제권을 틀어쥐고 있었으니, 그게 끊기면 아이들은 무슨 돈으로 생활하고 지내겠는가….

그런 것을 걱정하는 오르카를 보며 빅터는 덩달아 걱정스러운 얼굴이었고, 레이디는 의외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정말로 얘기를 이해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그 애들을 몰라서? 우리와는 별로 상관없어서? 그 저의를 알 수 없어 망설이던 그때, 레이디가 그새 구워온 머핀을 건네며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린진 모르겠지만, 우리랑 상관없는 애들이잖아. 그냥 보스의 사랑만 지켜주면 되지 않아? 다른 애들은 알 게 뭐야.”

“그건….”

 

셋 다일 줄은.

오르카는 이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저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얘기해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대체 뭘 설득해야 할지도 알 수 없어 선택한 침묵이었다. 그에 먼저 나선 것은 빅터였다.

 

“난 상관있어! 죽는 건 엄청 무서운 거니까!”

“나만 안 죽으면 되는 거잖아, 그런 거.”

“음, 엄, 하지만… 다시는 볼 수 없다고 했는데,”

 

빅터는 레이디가 건넨 머핀을 이미 한입 가득 베어 문 상태였다. 나비 모양으로 예쁘게 장식되어 있던 쿠키 부스러기와 크림이 입술에 잔뜩 뭉개졌다. 오르카는 휴지를 가져다 그것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입 안의 상처를 걱정하는 건 결국 오르카뿐인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문제야?”

“…형, 누나들이 엄청 슬퍼할 테니까?”

“걔네가 슬퍼하는 게 왜? 걔네가 나이프에 그렇게 중요해?”

 

-그저 솔직하기만 한 말로, 빅터는 주장하고 있었다. 80퍼센트는 돈이나 생각하고 있던 오르카와는 다르게, 사실 빅터가 걱정하고 있던 것은 100퍼센트 가족을 잃을 아이들에 대한 것이던 모양. 오르카는 알게 모르게 조금은 닳아버린 자신의 공감 능력에 안녕을 고했다.

 

“나한텐 중요하니까 상관있어!”

“걔네들이 죽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나도 레이디가 죽으면 슬픈데. 형이나 누나들도 그럴 텐데.”

“그렇게 때린 사람이 죽었는데도? 오히려 속이 시원할걸.”

 

이쯤 되면 레이디와 빅터의 대화가 흥미로워진 오르카는 조심스럽게 대화를 곁에서 구경했다. 사실, 빅터를 응원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빅터의 순수와 공감이 닳지 않는 것이 곧 오르카의 양심 같아서. 그의 논리가 이기는 것이 곧 도덕이나 선함의 증명 같았으니까.

 

“하지만, 형이랑 누나들은 분명 대장을 좋아했단 말이야.”

“그럴 수가 있…나?”

“가족이니까?”

“그런 가족은 없어, 빅터. 엄마아빠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으음….”

 

하지만 빅터는 끝내 레이디를 납득시키지 못하고 입만 우물거렸다. 5살치곤 힘낸 결과였고, 그 이상으로 레이디가 단호한 탓에 더 해봤자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오르카는 속으로 레이디에 대한 조그만 의혹을 피웠다.

지나치게 공감 능력이 없었다. 아이들이 가족이나 다름없는 대장을 좋아하는 것도, 그의 죽음에 슬퍼할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 빅터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상식이 확실한 것에 비해 빅터가 말하는 일종의 유대감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자라난 환경이 특이해서일까? 사이비 종교의 주교에게 바쳐져 세월의 시동이 되었다고 듣긴 했다. 그 전엔 실험을 당해 그들과 같은 강화 인간의 처지라는 것도. 교단에서 이루어지는 세월의 착취를 보면서도 특별한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 역시.

 

‘아직도 관절 시려? 언제 노인네 그만 하는 거람. 빨리 나가고 싶은데.’

‘아직 멀었다, 이년아.’

 

세월을 좋아하는 건지 무관심한 건지 알 수 없는 모습. 오르카는 그것이 그저 막역한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편안한 대화라고 생각했으나,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날 밤의 일로 확신이 되었다.

 

“형, 형아….”

 

반쯤 잠에 들려던 오르카는 몸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감각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려야 했다. 거의 속이 울렁일 정도의 강한 감각이었다. 그렇다면 이 손길의 주인은 하나일 수밖에. 백모래는 이럴 일이 없고, 메두사는 그래도 힘 조절을 할 테고, 같은 방을 쓰는 빅터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무슨 일이야, 빅터…?”

“형, 형아, 나, 봤어… 대장 아저씨가 죽는 거.”

“?!”

 

잠이 확 깼다.

오르카는 단숨에 벌떡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눈을 번쩍 뜨자마자 발견한 것은 온통 눈물에 콧물 범벅이 된 빅터의 얼굴이었다. 심지어 몸은 답지 않게 잘게 떨린 체 오르카 위에 올라타듯 누워있었다. 졸지에 허리를 끌어안긴 오르카의 작은 몸이 깔릴 지경이었다.

어쨌든 자초지종을 물어야 했기 때문에, 오르카는 먼저 물었다.

 

“어쩌다가?”

“선생님이, 진짜 그럴까 싶어서 몰래 따라갔는데… 그래서, 도망쳤어.”

“아.”

 

그제야 상황을 알 것 같았다. 대장이 걱정되고, 백모래의 말이 설마 싶었던 빅터는 그를 확인하기 위해 밤 산책을 나가는 백모래를 따라나선 것이다. 그러다 살인 현장을 정면으로 목격하고, 도망치고….

 

“보스랑 마주쳤어?”

“몰라. 아저씨가, 흡, 머리 맞을 때 뛰쳐나와서….”

 

그럼 일단 마주치지는 않았으려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 다행인가? 일단 같은 나이프인 이상 백모래가 그들을 죽일 일은 없어 보이니 별 상관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제 걱정해야 할 것은 빅터의 정신적인 충격이겠지.

오르카가 눈을 가려주었던, 그리고 빅터가 죽임이란 것의 개념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연구소에서의 경험을 제외하면 이것은 빅터가 목격한 첫 죽음이었다. 그것도 사람이 같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이란 개념의. 오르카도 연구소 때의 충격을 아직도 조금은 갖고 있는데 빅터라고 아닐 리가 없었다.

 

게다가 꽤 가까웠던 사람의 죽음이 아닌가?

 

“어떻게 해…. 대장 죽어서 어떡해. 나 이제 아저씨 못 봐? 나한테 붕어빵도 줬는데….”

 

그래, 고작 붕어빵뿐인 기억일지라도 어린 빅터에겐 나름 가까운 사람이었다. 어린아이는 더 쉽게 사람을 받아들이니까. 사실 오르카에게도 그렇다. 나름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 동안, 그 사람과 웃었던 기억이 한 번쯤은 있어서.

 

그래서, 오르카는 토기가 올라왔다.

 

그 새하얀 남자가 또다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 새삼 두려웠다. 교단 때에는 정신이 없어서 차마 생각할 새도 없었고, 나중에야 그 사실이 떠올랐을 때에는 뒤늦은 감정이 채 자취를 감춘 뒤였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생한 목격담이 있지 않은가. 그에 자세한 디테일을 더한 오르카의 상상은 그가 선득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결국, 오르카는 제 허리에 매달려 이불을 더럽히고 있는 빅터를 덩달아 껴안았다. 빅터는 정신연령을 따라가려는 건지, 성인인데도 아이처럼 따끈해져 있었다. 그것에 어쩐지 안정을 얻은 오르카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달칵,

“빅터, 아까 들어가는 거 봤는데 나 형광등 좀… 뭐야?”

“레이디,”

“힝, 누나!”

 

빅터가 순식간에 레이디에게 달려가는 바람에 오르카는 허전해진 무릎께에 손을 올려야 했다. 그에 반해 레이디는 눈물 콧물 범벅인 빅터의 얼굴을 보며 질색을 하는 모양. 결국 빅터는 레이디에게 밀려나 오르카에게 돌아와야 했다. 이어 레이디는 물었다.

 

“무슨 일이야?”

“보스가, 대장을 죽이는 걸 봤다고.”

“빅터가?”

 

오르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에 돌아오는 레이디의 대답은 예상외였다.

 

“그게 뭐라고 이러는 거야?”

“?”

“사람이 사람 좀 죽일 수도 있지.”

 

별로 무서워할 거 아니니까 너무 그러지 마.

레이디는 그렇게 말하며, 태연하게 빅터의 머리맡에 쓸쓸히 먼지만 쌓여가던 형광등의 코드를 뽑았다. 요즘 들어 연애소설에 빠져 메두사와 종종 쇼핑을 하나 싶더니, 밤새 읽을 모양이었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할 게 아니라,

 

너무 살인에 무감각하지 않나?

 

오르카나 빅터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이었다. 각각 학살의 현장과 살인의 현장을 목격한 두 형제는 공포와 패닉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와는 반대로, 백모래가 거리낌 없이 살인을 저지르며 데리고 나왔을 세월과 레이디는 그에 무감각한 면이 있었다.

 

“…”

 

하지만 오르카는 차마 그에 대해 무어라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있었을 환경에 대한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환경에 있었길래, 어떤 상황을 겪었길래 이렇게 살해에 무덤덤해진 걸까. 그에 대해 물어본 적도, 먼저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 속마저 헤아리기 힘들었던 오르카는 결국, 말을 포기했다.

 

결국 이번에도 빅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안 죽이면 안 돼? 누나는 보스가 나 죽이면 안 슬퍼? 안 무서워?”

“음… 그게 남이 죽는 거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

“!”

 

그에 레이디는 가늠해보든 곰곰이 생각하는 몸짓을 했다. 그리고는 애벌레 모양의 머리카락을 괜히 빗어 내리며 말하는 것이다.

 

“물론 네가 죽으면 슬프겠지. 하지만 무섭진 않을 거야. 죽이는 거엔 다 이유가 있거든. 방해돼서, 귀찮아서, 그럴 만해서….”

“내가 그러지 않았는데도 죽이면?”

“그러니까 그럴 일 없대도. 근데 그 사람이랑 나는 별 상관없잖아. 그래서 안 슬퍼. 됐지? 난 갈래.”

 

그 이상의 실랑이는 싫다는 듯이, 레이디는 도도하게 나가버렸다. 그에 오르카 옆에 고꾸라진 빅터는 한참이나 웅얼거렸다. 그에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오르카가 여실히 공감하는, 단 한 문장이었다.

 

“…누나는 누가 죽는 걸 안 무서워해.”

 

그래, 레이디는 그랬다. 어떤 목표를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여도 괜찮다는 아이. 어쩌면 백모래와 같은 아이가 들어온 걸까. 아니면 아직 어리니 감화의 여지가 있을까. 정말 여기에 양심과 정상적인 도덕관념과 선함을 간직할 인물은 빅터밖에 없는 걸까.

…라고, 이미 닳아가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는 오르카는 생각했다. 그래서 빅터를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토닥이는 것만이 고작. 속사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빅터의 말에 고이 속으로 답하며.

 

“형, 난 봤어. 대장 아저씨 머리에서 피가 막, 막 나는데,”

 

응.

 

“그러면서 차게 식는 게 보여서, 죽는다는 게 너무 무서운데-”

 

나도… 나도 그래.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을 그렇게 만들면, 무서울 것 같아.”

“그런데 선생님 표정이 아무렇지 않아서, 그래서 선생님을 모르겠어.”

 

너는, 그걸 보지 않기를 바랐는데.

 

“-형, 내가 이상한 거야?”

 

하지만 이 질문에는 망설임 없이 소리 내어 대답해야 했다.

 

“아니.”

 

나도 그래.

그 짧은 공감. 그것만으로 빅터가 ‘정상’을 유지할 수 있다면 얼마든 해줄 수 있었다. 오르카는 조심스럽게 빅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조금은 거칠어 보이지만 생각보다 매끄러운 곱슬머리가 조금 눌렸다 제자리를 찾았다. 처음엔 그것에 놀란 것 같던 빅터도, 가만히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생각해보면 빅터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은 처음이던가. 늘 저보다 위에 있는 빅터이다 보니 손이 닿을 수 없었지. 안겨있을 때도 어깨를 토닥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일까, 예상보다 좋아하는 것 같은 모습에 오르카는 좀 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봐야 빅터에겐 간지럽지도 않을 힘이었다.

 

“…형,”

“응.”

“오늘은 같이 잘래.”

 

그거야말로 오르카가 부탁하고 싶은 바였으나, 역시 동생이 먼저 요구하는 편이 보기는 좋았다. 그에 오르카는 안 그런 척 고개를 끄덕이고 이불을 들췄다. 그에 빅터가 꾸물꾸물 들어와 오르카에게 바짝 붙었다.

동생이 먼저 파고들어 온 것이 무색하게, 형이 안아줄 수는 없었다. 안아주어도 매달리는 꼴이 되었으니, 결국 오르카는 빅터의 팔을 베고 눕고야 말았다. 빅터는 그런 오르카를 인형이라도 되는 것마냥 꼭 끌어안았다. 어쩐지 익숙한 압박감에 익숙히 자리를 잡은 오르카는 천장을 보며 돌아누웠다. 그리고 물었다.

 

“죽을까 봐 무서운 거야, 죽인 게 무서운 거야?”

“…둘 다.”

“일단 우리는 나이프니까, 우릴 죽일 일은 없을 거야. 안심해.”

 

본인도 100퍼센트 안심하지 못하면서도, 오르카는 일단 그를 안심시키는 말을 뱉었다. 어떻게든 그 훌쩍거림을 막고 싶어서.

 

“하지만, 나 사람을 죽인 사람은 무서워….”

“그건….”

 

나도 무서워.

그렇게 말했다간 빅터가 정말로 무서워할 것만 같아서, 오르카는 한참이나 말을 골라야 했다. 어떻게 말해야 빅터를 안심시킬 수 있을지, 용기를 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나쁜 사람은 언젠가 벌을 받아. 그러니까, 누군가 보스를 혼내주는 날이 올 거야.”

“정말?”

“응, 정말.”

 

결국 입 밖으로 꺼내놓은 말은 확실하지도 않은 공수표였다. 고작 동화책 몇 권에서나 나올 법한 흔하디흔한 얘기로 빅터를 안심시키려는 것이 같잖았지만, 지금 자신의 보호자를 이런 말로 다루는 것이 기묘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당장 빅터가 울음을 그치는 것에는 매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자신이 백모래를 혼내주겠다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그는 말로도 그런 말을 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도 백모래는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결국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히어로 같은 사람이 날아와 그를 응징해주기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릴 뿐이었다.

 

아, 이 얼마나 소시민적인 생각인가.

오르카는 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이미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 원인은 연구소에서의 무력함의 경험 덕분일까, 아니면 백모래에 의해 압도적인 공포로 짓눌려진 경험 덕분일까. 어쨌든 그 때문에. 오르카는 막연히 바랐다.

 

누구라도 좋으니, 메두사와 두 형제를 구하러 와줬으면 한다고.

 

그날 이후로 빅터는 백모래를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로부터 이틀 후, 랩터는 빅터와 오르카가 있는 자리에서 대장이 실족사했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전달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아무도 그 거짓말을 믿지 않았다.

 

“어쩐지 어제 안 보이더라.”

“무서운 아이… 대장이 스텔을 건드리니 기어이 죽이고 말았구나!”

“야! 넌 슬프지도 않아? 대장이 죽었는데,”

“별로. 너도 알잖아, 나 남자애라고 더 죽어라 맞은 거. 스텔도 더 크면 그렇게 됐을걸.”

 

난 이제 그럴 일 없다고 생각하니까 더 시원한데.

-하지만 빅터와 오르카가 걱정했던 것과 같은 충격과 비통함은 없었다. 누구보다 죽음과 가까운 삶을 지내서인 걸까, 아니면 그저 정신력이 단단한 걸까, …그도 아니면 아스퍼처럼 악감정이 심했던 걸까.

 

어쨌든 이를 예상하지 못했던 빅터와 오르카만 죽상으로 덩그러니 그들 사이에 앉아 있어야 했다. 아니, 심지어 빅터는 지겹지도 않은지 또 울고 울기를 반복했다. 울지 않는 아이들을 대신해서 울기라도 한다는 양으로.

 

“흐어어엉….”

“왜 얘가 우냐. 너 우리 대장 좋아했어?”

“부웅어빵으앙….”

“…그냥 끝내주는 붕어빵을 얻어먹었나 본데.”

“야, 거기 어딘지 알려줄 테니까 뚝, 하자 뚝!”

 

제 가족이 죽은 것마냥 서럽게 울어 재끼는 것에 아이들은 되레 당황해, 이것저것 먹을 것을 물려주기에 바빴다. 심지어 아직 멋모를 나이인 스텔도 제 사탕을 나눠줬으니 말 다했다. 하지만 그런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대장의 부고는 가볍게 날아가 버리고야 말았으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던 랩터나 반응을 걱정했던 오르카 시점에서는 얼떨떨할 일이었다.

 

오히려 본론은 그렇게 한참을 실랑이하고서야 나왔다. 그제야 울음을 그친 빅터가 훌쩍훌쩍 코를 먹으며 초X파이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표정만은 누가 보나 5살짜리였다. 오르카는 그럴 리 없겠지만, 빅터가 탈진할까 싶어 내내 상태를 살피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사실 오르카보다 훨씬 건강할 성인을 걱정하는 게 말이 안 되는데도 말이다.

 

“그럼 우리 어떻게 살아? 대장 돈 있나?”

“그건….”

 

그에 랩터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에 대해선 랩터도 아는 바가 없었던 모양. 오르카는 걱정했던 말이 튀어나오자 절로 간절하게 랩터를 바라보았다. 빅터도 사정은 모르면서 같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뭔가 방법이 있기를 바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의외의 방향에서 튀어나왔다.

 

“대장 돈 다 금고에 넣어놨을걸? 이 산에 네 군데 정도 있어. 이 산 대장 거잖아.”

“나 그거 비밀번호 알아. 4-8-…”

“아, 혹시 그 나무둥치에?”

“엉, 그거 말고도 다 아는데. 내일 파러 가볼까?”

“다행이다….”

 

아이들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랩터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대장이 죽고 당장의 생활 문제 때문에 혼자서 마음고생을 끌어안기라도 했는지 얼굴색이 여간 죽은 게 아니었다. 그것이 해결되었으니 얼마나 기뻤는지, 스텔을 하늘 위로 들고 둥기 둥기하는 랩터의 얼굴에 밝은 빛이 가득했다.

 

“돈 어느 정도 있어?”

“빅터 너 정돈 데리고 살 수 있을걸.”

“우리 어른 될 때까지는 일 안 해도 살 수 있지 않을까? 금고가 4개나 있는 줄은 몰랐네. 왜 이렇게 많이 모아뒀대.”

“사실 우리 주려고 그런 거 아냐? …넝담~”

 

이제 오르카는 거의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돈은 여유를 준다. 적어도 어른이 될 때까지 무슨 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지 고민할 수 있는 안정적인 시간을 준다. 당장의 생존에 급급하기보단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꿈꿀 수 있는 생활이 더 좋다는 걸, 오르카도 간접적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사실 내가 대장 지갑을 줍긴 했는데~”

“오, 랩터!”

“아직 그 컨셉 유지하는 거야?”

“야!”

 

사실, 아직 걱정이 남아 있긴 하다. 겉으론 이래 놓고 뒤에서 울지 않을까, 속으로는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따위의 걱정 말이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터놓고 얘기하지 않으면 모를 일이고, 이렇게 가볍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아픔의 경중을 나타내는 것 같아서….

 

오르카는 일단 마음을 놓기로 했다.

 

“근데 우리 밥 어떻게 해?”

“일단 당아 넌 안됨.”

“내가 뭐!”

“빅터 한번 시켜보자. 어쨌든 몸은 어른이니까 될지도 몰라.”

“어른이라고 요리를 잘하겠냐!”

 

어느새 아이들은 아예 대화 주제를 바꾼 채 발랄하게 떠들고 있었다. 랩터가 먼저 요리 주제를 꺼낸 모양인데 이젠 거의 태클을 담당하고 있었고, 아스퍼와 당아가 누가 요리를 하느냐의 문제로 치열하게 싸우는 역할, 달래가 그에 이상한 말(주로 빅터를 시켜보자 같은)을 던지는 역할이었다.

일단 오르카는 달래의 의견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빅터의 무릎 위에 앉아 두 팔로 엑스 자를 그렸다. 그것을 본 당아가 뒤집어져서 웃자, 일단 요리하는 사람은 당아를 제외한 세 사람으로 무사히(!) 정해질 수 있었다.

 

“그럼 형, 누나들은 이제 어떻게 지내? 뭐할 거야?”

 

그때 빅터가 나름 중요한 질문을 했다. 오르카가 궁금한 이야기기도 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떤 계획이 있는가, 어떻게 미래를 상상할 것인가는 누구나 궁금해할 수 있는 얘기 아닌가. 하지만 동시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수록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했다. 그에 아스퍼가 쌈박하게 대답했다.

 

“몰라.”

“살던 대로 살아야지. 당장 바뀌면 그것도 이상하지 않아?”

“우린 이거밖에 안 해봐서.”

 

결국 그 밖의 삶의 방식을 모른다는 랩터의 말로 끝난 대답. 오르카는 기묘한 안정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들은 앞으로도 이제까지처럼 이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말 아닌가. 사실, 오르카가 생각하기엔 최상의 상황이었다. 대장이 죽은 것에 대한 충격도 적어 보였고, 생활비도 넉넉했으며, 의도치 않게 헤어질 일도 없을 테니….

 

아니, 그 무엇보다-

 

“나 그럼 내일도 와!”

“그럼 안 오려고 했어? 빠졌네. 내일도 와서 단검 던져야지.”

“한참 멀었어, 빅터~”

 

이들이 어울리는 평화로운 풍경을 앞으로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운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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