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의 추억, 1월 편
리들 로즈하트 드림
* 트친이랑 1년 장기 프로젝트(https://1yearcollabo2.creatorlink.net) 하는데 써서 냈습니다.
‘그냥 두 개 살까?’
그것이 다이어리 코너 앞에서 약 30분 고민한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황당하긴 하지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았나. 레몬 파이와 딸기 케이크를 두고 고민하지 말고, 둘 다 먹으라고 말이다.
뭐,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나에게는 ‘둘 다’라는 선택지를 고를 만큼 주머니 사정이 여유로운 편은 아니라는 정도일까. 지금 내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비용은 학원장의 주머니에서 나오고 있고, 그 외 자잘한 돈은 교내 아르바이트 같은 걸로 충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애초에 용돈을 줄 혈육도 없고, 저축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이세계 전이자가 어떻게 여유있는 생활을 할 수 있겠나? 오히려 교내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어 여윳돈이라도 있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으음…….”
생각해보니 애초에 두 개 사더라도 양쪽 다 쓸 수 있을까. 요즘 다이어리는 그리 싸지도 않은데 괜히 사놓고 둘 다 끝까지 쓰지 못하고 버리게 될까 봐 걱정된다. 돈이고 자원이고 낭비하는 건 죄악이지 않은가. 나는 통장과 나무에 미안한 짓은 하고 싶지 않다.
“아이렌, 아직 이러고 있니?”
그렇게 여러 이유로 고민하고 있던 나는 등 뒤에서 가까워져 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책이라도 사러 오신 걸까. 사복도 아닌 교복 차림으로 외출하신 리들 선배는 팔짱을 낀 채 내 앞에 놓인 다이어리를 곁눈질로 살피셨다.
“안녕하세요, 선배. 그런데, ‘아직’이라는 건……?”
“아까 지나갈 때도 네가 보였거든. 그땐 갈 길이 급해 말을 걸지 못했는데, 돌아오는 길에도 네가 보이길래.”
“그래요?”
그럼 책을 사러 오신 게 아니라 날 보고 가게 안으로 들어오신 건가. 하긴, 리들 선배라면 이렇게 이런저런 상품을 파는 대형 서점보다는 깔끔하게 책만 파는 서점을 더 선호하실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아예 샘의 상점에 책을 주문하거나 하시겠지.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셨어요?”
“구두 수선집에. 그러는 너는 뭘 하고 있니? 다이어리를 사려고?”
“예. 요즘은 예쁜 디자인으로 나온 다이어리가 참 많아서, 어떤 걸 살지 고민되네요.”
“……그래서, 이렇게 오래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게 묻는 리들 선배의 표정은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고민할 일이니?’라고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날 한심해하는 느낌은 아니었고, 굳이 따지자면 순수하게 이해가 가지 않는 느낌에 가까운 의문이었지.
나는 선배의 의아함을 해소해드리기 위해, 직접 두 개의 다이어리를 하나씩 보여드리며 고민의 이유를 설명해드렸다.
“이 다이어리는 깔끔하고 글씨 적는 칸도 큰데다가 구성도 다양해서 마음에 드는데, 만년형 다이어리라 날짜와 달을 직접 써야 하는 게 번거로워서 마음에 걸려요. 제가 글씨가 예쁜 편도 아니다 보니, 직접 적으면 더 지저분하게 보일 것 같고요.”
“흐음.”
“이쪽 다이어리는 올해에 맞춰 나온 거라 날짜와 달이 전부 적혀있어 편하고 디자인도 아기자기해서 특별히 꾸미지 않아도 예쁜 게 좋아요. 하지만 글씨를 적는 칸이 작아서 많은 글씨를 쓸 수 없고 페이지 구성이 단조로운 건 단점이라서요.”
“과연. 장단점이 뚜렷한 거구나.”
그런 이유라면 고민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는 걸까. 리들 선배는 한결 명쾌해진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래도 설마 다이어리 하나로 이렇게 오래 고민하다니. 너도 참 신중하구나.”
“사실 이 둘로 추려내는 데 걸린 시간이 더 길긴 했어요. 원래는 후보군이 5개 정도 있었거든요.”
“5개나?”
“그렇지만, 보세요! 이렇게 다이어리가 많은걸요? 오히려 5개밖에 후보군이 없었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요?”
나는 신년을 맞이하여 매장의 한쪽 구석을 꽉 채운 다이어리들을 손가락으로 훑어 가리켰다. 12월 말, 아니 11월 말부터 가게의 매출을 책임지는 이 다이어리들은 아마 2월이 되면 반의반 정도만 남기곤 다 사라지겠지.
리들 선배는 매장에 널린 다이어리를 둘러보고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종류가 많다니. 나는 늘 어머니가 골라주시는 걸 사용해서 몰랐어.”
“아하…….”
안타깝다. 여기가 트위스티드 원더랜드의 현자의 섬이 아니라 지구촌 대한민국이었다면 당장 오 선생님께 이 상황을 제보하는 건데.
복잡한 심경에 표정이 구겨지려는 걸 겨우 참아낸 나는 얼른 말을 돌려 얼굴도 본 적 없는 타인의 부모님을 향한 유감을 지워내려 노력했다.
“어쨌든, 1년을 함께 할 다이어리니까 최대한 꼼꼼하게 고르고 싶었어요. 아무거나 적당히 샀다간 12월 31일까지 ‘이거 말고 다른 걸 살걸’이라며 후회할 수도 있잖아요?”
“흐음. 확실히, 오래 써야 하는 물건이니까 섣불리 구매하는 것보단 지독하게 신중한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리 답한 리들 선배는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더니, 첫 번째로 보여드린 다이어리를 가리켰다.
“나는 이게 더 좋은 것 같구나. 역시 이런 물건은 실용성이 중요하니까.”
“음, 그렇죠?”
리들 선배의 말이 옳다. 귀여운 것도 좋지만, 역시 다이어리는 실용성이지. 물론 악필인 내게 만년형 다이어리는 펜 하나 긋는 것도 신중해지는 단점이 있지만……. 화이트를 넉넉하게 사두면 괜찮겠지. 그래. 괜찮을 거다. 아마도.
선배가 골라주신 다이어리를 들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내게서 망설임이 느껴진 걸까.
먼저 자리를 뜨지 않고 옆에서 계속 날 기다려 주던 리들 선배가 슬쩍 손을 내밀었다.
“내가 써줄게.”
“예?”
“날짜와 달 말이야. 전에 내 글씨가 정갈하고 예쁘다고 했지? 내가 써 줄 테니, 너무 망설이지 말렴.”
와, 완전 왕자님 같다. 이것이 바로 신사의 품격이라는 건가.
따뜻한 배려에 어쩐지 뺨이 뜨끈해진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계산한 후 드릴게요.”
“아니, 지금 주렴.”
“네?”
“내가 사주고 싶구나. 이것도 다 인연이기도 하고, 네 1년이 행복하기를 빌며 선물해주고 싶어.”
그렇게 말하며 근사하게 웃어 보인 리들 선배는 슬쩍 내 손에서 다이어리를 가져가시더니 그대로 계산대로 가버리셨다. 그 뒷모습은 신장이나 체격과 상관없이 너무나도 듬직해 보여서, 도무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게 하츠라뷸의 왕…….’
올해는 저 다이어리만큼 정말 특별한 한 해가 될 것 같다. 그런 좋은 예감, 아니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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