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카슈사니] 가르쳐 줄 순 없소

흰꽃은 밤에 아름답단 이유를

내게도 가르쳐줄 순 없소

이대로 날 잡아둘 뿐인지

아 그 누구보다 붉게 물든 이 마음을

왜이리도 창백하다 말하는지

캐스커, <비밀> 중에서

이제 막 취임 석 달 차를 맞이하던 날이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병아리 티를 못 벗은 신입이지만 말이야.

남자- 이 혼마루의 주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카슈와 눈이 마주치고는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한 혼마루를 이끄는 사니와로서 적응할 수 있을지 아닐지는 취임 직후의 3개월에 달렸다고들 한다. 현세에서 완벽히 유리된 데다, 인간이라고는 오로지 자신뿐인 기이한 시공. 그런 곳에서 신의 말석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신의 이름자를 쓰는 츠쿠모가미들 수십과 어울려 지내야 한다. 거기다 사니와의 업은, 그들을 지휘해 역사수정주의자들과 싸우는 데 있다. 올바른 역사를 지켜내야 한다는 중압감. 혼마루를 경영해 나가야 하는 부담감. 시간정부로부터의 이런저런 지시와 압박, 마지막으로 언제든 순직할 수 있는 위험까지…….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이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일 터였다. 계절 하나 다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는 심신자들이 생겨나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그렇다면 사니와가 '도검남사의 주인'이기를 그만두고 떠나 버린 혼마루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카슈 키요미츠는 순간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거기에 대해선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살짝 가라앉은 공기를 눈치챈 건지, 그의 주인이 다시 말을 걸어 온다.

이 혼마루도 제법 북적거리게 됐네.

그렇게 말한 주인이 빗자루질을 멈추고 기지개를 켠다.

응, 하고 대답하며 카슈는 괜히 발아래만 내려다보았다.

카슈 키요미츠는 이 이름 없는 혼마루의 시작의 한 자루, 다시 말해 '초기도'다. 그는 가장 처음 근시를 맡아 본 칼인 동시에 가장 오래 그 자리를 지킨 자이기도 했다. 주인은 새로운 도검남사가 합류하면 적응을 위해 며칠 정도 근시를 맡기곤 했는데,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주인의 보좌는 거의 항상 카슈의 몫이었던 것이다. 이 암묵적인 합의는 혼마루의 식구가 스무 자루 가까이 불어난 지금도 마찬가지라서 주인의 앞으로 전달되는 연락의 대부분은 카슈의 손을 거치게 된다. 물론 번거로움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터였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주인을 돕는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그래서, 그 봉투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도 카슈였다.

22▮▮년 제▮기 현현 도검남사 정기신고 안내

전혀 귀엽지 않은 밋밋한 봉투는 영력이 담긴 인장으로 봉해져 있었다. 미리 등록해 놓은 영력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열어볼 수 없도록 보안 처리를 해 둔 것으로, 정부에서 보내오는 서류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다른 것은 만방 거리의 식료품 가게에서 날아온 영수증, 모 화과자 가게의 신작 광고, 제▮▮기 심신자 동창회에서 보내온 정기 모임 소식과 회비 납입 안내, 이런 것들이었다. 카슈는 익숙한 손길로 서신을 빠르게 정리한다. 이쪽은 영수증과 계산서, 이건 광고물. 이건 주인의 개인적인 편지들, 그리고…….

저- 기, 주인. 이런 게 왔는데.

소리 높여 부르자 이쪽을 돌아본다. 남자의 시선이 카슈가 흔들고 있는 봉투에 꽂혔다.

아아, 슬슬 시기가 됐네.

카슈는 봉투를 건네받은 주인이 망설임 없이 입구를 뜯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손바닥만한 책자였다. 페이지를 훌훌 넘겨보며 그렇지, 음, 하고 혼잣말을 하던 남자가 고개를 든다.

카슈, 다음 주쯤에 시간 있어?

그의 주인은 도검남사를, 특히 카슈 자신을 인간처럼 대하는 버릇이 있었다. 정말로 필요한 일이라면 명령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꼭 이렇게 동료처럼, 친우처럼 몇 번이고 의사를 묻는 것이다. 이런 버릇에 대해 이 혼마루의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가 몇 번이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도-주인은 좀 무른 구석이 있어. 명령할 때는 분명하게 명령해 주면 돼.-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카슈는 잠시 생각하는 척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에 가는 거야? 이 신고라는 것 때문에?

응, 전부터 한 번은 말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내 초기도니까 알고 있어야지.

내 초기도. 무심한 말씨에 마음에 불길이 이는 기분이었다.

카슈를 바로 옆자리에 불러 앉힌 주인은 책자를 넘겨 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니와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혼마루에 현현한 남사를 반드시 정부에 등록해야 한다. 단도를 통해 현현했든, 전장에서 습득한 도검을 영력을 불어넣어 현현시켰든, 인계나 양도 등 그 외의 방식으로 합류했든 간에 예외는 없다. 서류에 도종과 도검남사의 이름, 현현 시기와 방식을 작성하고, 마지막으로 영기 샘플을 동봉해 정부에 반송하면 등록 절차가 끝난다. 정부의 유관 부서에서는 이 샘플 검사를 통해 남사의 현현 상태와 영력 스펙트럼을 분석하고, 이상이 있으면 사니와 측에 통보한다. 소위 ’개체차‘라고 불리는 각 도검 간의 차이도 이 검사를 통해 어느 정도 판별할 수 있다고들 한다. 혼마루의 식대나 비품 지원, 사니와의 성과평가와 급료 등은 기본적으로 이 신고 자료를 통해 책정되기 때문에 빼먹어서는 안 된다. 기본적으로 도검남사가 스스로 현현을 신고할 수는 없으며, 혼마루의 사니와든 정부 직원이든 간에 반드시 인간을 통해서만 신고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럼 굳이 나까지 같이 갈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

카슈의 질문에 주인이 들고 있던 책자를 소리 나게 탁 덮었다.

신고는 우편으로 해도 상관없지만, 그거랑 별개로 '초기도 연수'는 반드시 현장에서 받아야 하는 거야. 너 혼자만 보내는 건 좀 그렇잖아. 쓸쓸하고.

같이 가 줄게. 그렇게 말하는 주인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초기도, 초기도 연수…… 카슈는 입속말로 중얼거린다. 일그러진 이미지가 눈앞을 차례로 스쳐 지나간다. 시간정부의 길고 넓은 복도. 촛농과 향 냄새로 가득한 방. 가지런히 놓여 있는, 똑같이 생긴 칼 수십 자루. 흔들리는 등롱과, 서류철을 끼고 있는 정부의 직원과, 얇은 종이로 얼굴을 가린 '심신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가슴을 무거운 바윗돌로 누르고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슬쩍 주인 쪽을 돌아보면 펜을 든 채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중이다. 탁자 위의 서류엔 개미만한 글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현현 유형 : 초기도 단도. 현현 일시 : 22▮▮년 ▮월 ▮일 ▮▮시. 현현 장소 : 폐 혼마루. 도종 : 타도. 23세기씩이나 되어서 왜 아직도 이런 서류는 꼭 자필로 작성하라는 걸까. 주인은 그렇게 투덜거린다. 

펜 끝이 사각사각 종이를 스치고, ……얼마나 지났을까. 카슈는 자신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래서는 안 돼, 정신 차려야 해.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도 한 번 술렁이기 시작한 가슴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영력 패턴을 검출할 테니 긴장을 풀라는 직원의 지시에도 좀처럼 따를 수 없어서, 결국은 패턴이 안정적으로 출력될 때까지 몇 번이고 계속 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주인은 카슈가 채혈이나 영력 샘플 검출 같은 검사 자체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전장에서 매일 다쳐오면서, 이런 건 무서워?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카슈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참았다. 주인은 잘못이 없다. 이런 건 단지 자신의 화풀이일 뿐이다. 카슈가 대답하지 않자 주인은 그럼 됐어, 라는 듯 고개를 돌려 버리더니, 대기실에 비치해 둔 책자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옆모습은 태평하다 못해 지루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의 주인은 좋게 이야기하면 무던하고, 나쁘게 이야기하자면 무심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그런 주인에게 자신이 안고 있는 고민을 털어놓는 들 어디까지 이해해 줄까.

만약 그에게서 뭐야, 그동안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어? 그런 말을 듣게 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저 두 눈이 실망한 기색을 띠고 자신을 바라보는 상상을 하기만 해도…….

417번 사니와 님, 들어와 주세요.

주인의 대기번호다. 그는 다녀올게, 하고는 방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검사 결과는 기본적으로 도검남사의 주인인 사니와에게만 공개되고, 그것을 본인에게 공유할지 말지는 순전히 주인의 재량에 달렸다고 들었다. 저 방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주인에게 직접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아아, 지- 루- 해.

그래서 카슈는 괜시리 소리 내어 투덜거렸다. 그래도 방 안의 주인과 정부 직원에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진다 싶으면 잠깐 낮잠이라도 잘까. 그렇게 생각하며 길게 하품한 순간 누군가 제 앞에 와 멈추는 기척을 느꼈다.

키요미츠 님?

정장을 걸친 다리와 구두가 눈에 들어온다. 조금 시선을 들어 보면, 목에는 시간정부의 직원임을 알리는 출입증이 걸려 있다.

혹시 그 때의 키요미츠 님이 아니신가요?

카슈 키요미츠가 정부 청사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낯익은 직원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초기도로 현현한 후 이번이 처음,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선 카슈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직원이 활짝 웃어 보인다.

역시 맞네요! 오늘은 사니와 님을 따라 오신 건가요? 아, 초기도 연수라던가.

살갑게 말을 붙이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허리춤을 더듬거렸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것은 없다. 검사를 받으며 본체를 잠시 맡겨두고 온 것이다. 카슈는 그런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아 짧게 숨을 헐떡였다. 정말 발도할 생각이었던 건 아니다. 사람을 해칠 생각은 없다…… 그냥, 무심코. 직원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붙임성 있게 말을 걸어온다.

이야, 이렇게 만나다니 우연이네요. 어디로 배속되셨어요? 빈고 국의 혼마루? 아아, 아니면 최근 결원이 많이 발생했다는 호우키 쪽이려나. 담당이었으면 직접 혼마루에 찾아가 키요미츠 님의 심신자 분도 뵙고 인사드릴 수 있었을 텐데. 사실 말이죠……

무어라 떠들어 대는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두 발을 딛고 선 바닥이 자꾸만 울렁거렸다.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빠르게 멀어졌다가 다가오기를 반복했다. 등 뒤에 딱딱한 것이 닿는다. 벽이었다. 이제 퇴로는 없다. 손안에는 익숙한 손잡이의 감촉 대신 식은땀만이 차올랐다. 뱃속이 뒤집힌다. 금방이라도 구토가 치밀어 오를 것만 같아 황급히 입을 가렸다. 

어라, 괜찮으세요?

걱정스런 목소리가 물어 온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괜찮을 리 없잖아. 제발 꺼져, 저리 가 버려. 

막 고함을 치려던 순간,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늦어서 미안. 카슈, 뭐 하고 있었어? 그쪽은…….

아, 실례했습니다. 야마토 국 전이문 개수부서의 이토라고 합니다.

주인과 직원이 짤막하게 손을 맞잡아 서양식 인사를 나누었다. 카슈는 둘 중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부탁을 몇 번이고 주워섬겼다. 안 돼, 더 이상 말하지 마. 싫어. 그만해 주세요…….

이쪽의 키요미츠 님과는 초기도 심사 때 봤던 사이에요. 사실 그 때 걱정 많이 했거든요. 잘 지내시고 있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말해 버렸어. 뻣뻣해진 목을 돌려 뒤를 바라본다. 주인의 눈과 시선이 맞았다. 다정하지만 동시에 무감한 눈. 그 눈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어떤 선고처럼, 직원이 말을 맺었다.

지나간 일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심사에서 탈락하신 도검남사님 중에선 스스로 도해를 요청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서요.


초기도 심사- 정확히는 '상호적성평가'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미 현현해 있던 도검남사를 인수하거나 하는 특별한 사정이 아닌 이상, 새롭게 취임하는 사니와는 대부분 이 과정을 거쳐 초기도와 만나게 된다. 초기도 후보군으로 내정된 도검남사들과 신규 사니와의 성격, 지휘 경향, 본인의 희망 사항, 무엇보다도 서로의 영력 패턴 등을 비교하여 가장 잘 맞는 조합을 찾는 것. 그리고 이러한 적절한 배정을 통해 취임 초기의 혼란을 줄인다, 라는 것이 이 제도의 목적이다.

그러나 '상호'적성평가라는 거창한 이름과는 다르게, 실제로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도검남사 쪽 뿐이다. 이것이 신규 심신자 교육 과정의 맨 마지막 단계인 까닭이었다. 혼마루의 주인이 되기에 자격이 부족하다면 그 이전에 탈락했을 테니, 여기까지 와 갑자기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라며 집으로 돌려보낸다던가 하는 일은 극히 적다. 그렇다면 도검남사의 입장에선 어떨까.

카슈 키요미츠는 자신이 선택받지 못했던 날을 아프도록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어두운 방이었다. 구석마다 밝혀 놓은 호롱불이 흔들린다. 발치의 받침대에 놓여 있는 것은 자신의 본체다. 그리고 그 옆에도, 앞에도, 뒤에도……. 어디가 끝인지 모를 정도로 길게 이어지는 행렬이다. 카슈는 깨닫는다. 이 방에 있는 것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카슈 키요미츠'라고. 받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검집에 비치는 빛이 흔들거렸다. 이만큼이나 많은 카슈 키요미츠가 있지만, 모두 잠들어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지금 이 곳에 인간의 몸으로 현현해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카슈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얼굴 가까이로 가져왔다. 갈대줄기처럼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 물을 들인 손톱이 반짝였다. 내 몸이야. 새삼스럽게 가슴이 벅찼다.

고개를 들면, 저만치 약간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키가 큰 쪽은 정장을 걸치고 있다. 아마도 시간 정부의 직원이겠지. 갓 현현했지만 이 정도는 알고 있다. 그 옆, 전통복을 입은 이는 얼굴을 얇은 종이로 덮어 가리고 있었다. 

이 사람이 새로운 주인이구나. 카슈는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듯한 기쁨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사 한 마디조차 건넬 수 없었지만……. 상상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즐겨 쓰이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본다. 역시 의지가 되네. 대단해. 너밖에 없어. 네가 제일 귀여워.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갔다. 사람의 몸을 얻었다고는 해도 본성은 역시 칼인 것이다. 주인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을 때, 그에게 도움이 될 때가 가장 기쁜 것이 당연했다.

짧은 환상을 깨트린 것은 헛기침 소리였다. 큼, 하고 목을 가다듬은 직원이 카슈 쪽으로 몸을 돌린다.

키요미츠 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러고는 심신자 쪽으로 고개를 숙여 무어라 속삭이는 것이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도검남사의 청력으로도 들을 수 없는 것을 보면 또 어떤 주술이 걸려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한참 서로 속닥거린 끝에 직원 측이 난색을 표했다. 카슈는 우연히도, 또 불행하게도 그 입모양을 읽어내고 말았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럼 다른 도검남사를 배정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대단히 실례입니다만, 무언가 착오가 생긴 것 같습니다. 이쪽에서 기다려 주시면…….

나, 버려지는 거야?

예?

카슈는 미소를 잃지 않고 되물었다.

버리는 거지? 왜?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이야기해 주면, 고칠게. 뭐든 할 수 있어. 뭐든 좋아, 이야기만 해 줘. 

키요미츠 님!

한 걸음 발을 내딛어 성큼 거리를 좁힌다.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내리뜨고, 가능한 한 상냥하고 귀여운 목소리를 냈다. 

정말이야. 네가 원하는 칼이 되어 줄 테니까. 후회하지 않게 해 줄게. 

사니와 님, 물러서세요!

뒷걸음질을 치는 심신자를 향해서 팔을 뻗었고, 그리고……. 

그 다음의 기억은 흐릿하기만 하다. 아마도 강제로 현현이 풀렸으리라.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혼자였다. 인기척 대신 촛불이 드리우는 그림자만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쓸쓸하구나, 하고 카슈는 중얼거린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단어의 뜻을 오늘에야 뼈저리게 깨닫는 기분이었다. 난, 난 그냥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했을 뿐이야. 한 번 더 생각해줄 수는 없냐고 물어보려던 거야. 해칠 생각은 없었어. 해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카슈 키요미츠라는 도검남사는 사랑 받고 싶어하는 칼이란 말이야. 미래의 주인 될 사람을 털끝 하나 건드릴 리 없다고. 나는, 난……. 들어줄 이 없는 변론이 텅 빈 방 안에 메아리쳤으나, 그것뿐이었다. 

결국 '그 심신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후 직원이 조심스레 심사 불합격 소식을 전해왔을 때 카슈는 놀라지도, 실망하지도 않았다. 그는 인간의 몸을 입었던 그 짧은 사이에 기대하지 않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다음 심사가 있을 때까지 잠시 잠들어 계시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던 직원에게 자신은 무어라 대답했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왜 도해를 선택하지 않은 걸까. 그것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첫 번째는 그렇다고 쳐도, 결국엔 선택받았잖아. 누군가의 초기도가 된 거야. 주인은 나를 제일로 여겨주고 있어. 나를 사랑해 주는 거야. 카슈 키요미츠는 스스로를 설득하려 애썼다.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던 소리는 자꾸만 커져 간다. 

정말? 정말로 귀여움 받고 있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왜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은 거야? 실은 주인을 만나기 전에 초기도 심사에서 한 번 탈락한 적이 있어. 나 같은 칼을 거절하다니 바보 같은 사람이지,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던 거야?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건 귀엽지 않으니까. 전혀 귀엽지 않으니까. 실은 한 번 버림받았던 적이 있어. 주인은 나를 버리지 않을 거지? 그렇게 물었을 때. 

제 주인이 지어보일 표정이, 입에 담을 말이 두려웠으니까.


어떻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는지는 기억에 없다. 추한 꼴을 보였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낯선 복도에 접어든 카슈 키요미츠는,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벽에 쓰러지듯 기대어 앉는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듯 불규칙한 박자로 뛰고 있었다. 코끝이 시큰했다. 양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카슈는 숨만 헐떡거렸다. 이런 게 울고 싶은 기분이구나, 깨닫는다.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귀찮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계속 칼로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이렇게 괴로울 일도, 부끄러울 일도, 누군가를 미워할 일도 없었을 텐데!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떤 얼굴로 주인을 보면 좋은 걸까. 눈물과 식은땀 따위로 엉망이 된 얼굴을 소매로 거칠게 훔쳐냈다. 문득 우구이스마루가 지나가듯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는 영리하군.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마주쳤을 때 적당히 잊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아아, 물론 잊어버린 척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수지. 그 때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영감은.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지금 와선 역시 오래 전에 만들어진 칼은 다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자신이 초기도 심사에서 한 번 탈락했던 도검남사라는 사실을 주인이 몰랐을 리는 없다. 혼마루를 지휘하는 사니와에게는 자신이 거느린 칼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전달된다고들 했다. 하물며 취임 초반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할 초기도에 대해서야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바꾸어 말하면 주인은 카슈의 허물을 알고 있었음에도 초기도로 받아들였다, 라는 이야기가 된다. 결국 자신은 다 지난 일로 이제 와 괜히 소동을 피웠던 셈이다. 

주인은 아마 신경 쓴 적도 없을 거야. 그런 사람이잖아. 카슈는 벽을 짚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오늘 한 일이라고는 고작 검사 몇 개 받은 게 다였는데도, 전장에서 하루 종일 칼을 휘둘렀던 날보다 더 녹초가 된 기분이었다. 이대로 주인의 기척을 더듬어 곁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웃어 보여야겠다. 카슈는 그렇게 결심했다. 주인은 무던하다 못해 둔하기까지 할 때가 있으니까, 넘어가 줄 거야. 우리는 계속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기나긴 복도를 걷는다.

시간 정부는 무슨무슨 국, 이라고 불리는 스물한 개의 서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각 서버에는 해당 서버에 소속된 혼마루와 심신자들을 보조하는 수십여 개의 부서들이 딸려 있다. 날마다 수백 개씩 새로이 분기되는 세계선을 관측하는 부서, 시간 소행군과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대응책을 고민하는 부서, 심신자와 도검남사의 훈련과 교육을 담당하는 곳, 새로운 도검남사의 현현을 위해 역사 속 인연을 더듬어나가는 이들, 각 혼마루의 전적과 운영 상황을 감찰하고 평가하는 감사관들……. 어떤 서버에도 속하지 않는 본부 소속 부서들과 각종 연구소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끝이 없을 것이다. 정부 직원들도 매일같이 길을 잃는 마당이니, 도망쳐 헤매던 자신이 아주 낯선 복도에 들어와 있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그래서, 여긴 어디인 건데.

정신없이 뛰다 보니 잘도 이런 먼 곳까지 와 버린 모양이었다. 벽 어딘가에 층별로 안내해 둔 표지판이라도 붙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자 커다란 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코르크 보드로 만든 게시판이었다. 군데군데 색이 바래고 꽂혀 있는 서류들이 너덜너덜해진 것을 보면 쓰이지 않게 된 지도 오래된 모양이었다. 카슈는 걸음을 돌려 게시판을 들여다본다. 적어도 여기가 어떤 부서인지 정도는 적혀 있으리라. 모월 모일 모시에 건물 전체 메인터넌스가 있을 예정이니 업무에 참고해달라는 안내, 모 시대에서 시간소행군의 흔적이 발견되어 새로운 합전장으로 지정되었다는 공문, 몇 월 몇 주차의 구내식당 식단. 시시한 이야기들 뿐이다. 막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어린애가 만들 법한 유치한 종이꽃 장식 아래,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이 달의 우수 직원

▮▮▮ 수석연구원

잘못 보았을 리가 없다. 혼마루에 현현한 이후 매일같이 보아 온 얼굴이었으니까. 카슈는 손을 뻗어, 주인의 사진 아래 붙어 있는 글귀를 더듬었다. 수석, 연구원. 그 앞에도 글자가 씌어 있긴 했지만 읽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가늘게 떠 보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건 아마도- 인식 저해 효과다. 이 자리에 존재하는 글자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누군가가 읽을 수 없게 그것이 의미하는 개념 자체를 삭제해 버리는 것이다.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이런 현상은 절대로 흔하지 않다. 어쩌다 일어날 수 있는 우연도 아니다. 특정한 의식을 거쳐야만 성립하는 것으로, 어떤 이에 대한 가장 무서운 형벌이거나 반대로 어떤 이유로건 철저히 보호받아야 할 때만 가능한…… 일종의 주술이었다. 

카슈는 그제야, 사니와가 농담처럼 해오던 말의 뜻을 이해한다.

그러고 보니 주인, 우리 혼마루의 이름은 뭐야?

이름?

연련 같은 데서 보면 혼마루에도 다들 이름이 있던걸. 무슨무슨 성, 아니면 적어도 사니와 누구의 혼마루, 이렇게.

그런 거라면 있잖아. 이름 없는 혼마루.

거- 짓- 말.

진짜라니까. 정부 서류에도 그렇게 등록해 놨는데. 안 믿기면 볼래?

다른 데는 계어에, 풀꽃이라던가, 복을 불러오는 토끼나 거북 같은 거. 여러모로 귀여운 이름이 있었는데 우리는 수수하네.

수수해서 실망했어? 뭐, 이름이 없다는 것도 이름의 일종이지. 

금방이라도 모서리가 부서져 떨어져나갈 듯 낡은 게시판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먼지와 세월의 냄새가 난다. 여기에 자리하던 부서는 어떻게 된 걸까. 이 게시판은, 이 복도는 얼마나 오래 버려져 있던 걸까. 몇 달? 몇 년? 아니, 몇십 년? 카슈 키요미츠는 고집스레 읽을 수 없는 글자를 손끝으로 더듬는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몇 초 지나지 않아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누군가 양 관자놀이를 붙들고 힘을 주고 있는 것처럼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털썩, 하는 소리에 자신이 무릎을 꿇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리놀륨 바닥에 창백해진 얼굴이 비친다. 종잇장처럼 새하얘진 뺨에, 윗입술을 따라 시뻘건 코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알고 싶어.

카슈는 중얼거렸다.

알고 싶다고. 이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아. 주인과 나만의 비밀로 하면 안 되는 거야? 어리광을 부리면, 안 돼?

어리광은 언제든 환영이야.

천천히 고개를 든다. 게다를 신은 발, 발목. 짙은 색의 하카마. 불쑥 내민 손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손가락 마디마다 살짝 굳은살이 잡힌 낯익은 손이다.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춘 주인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없는 걸 있는 것마냥 가르쳐 주는 재주는 없어서. 미안.

턱, 하고 어깨에 손이 놓였다. 옷깃 너머로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체온이 전해져 온다. 웃음이 날 정도로 서투른 위로였다. 아, 당신은 이런 사람이지. 카슈는 몹시 지친 채로 생각한다. 당신은 바위 같다. 바위를 깎는 물 같다. 물을 말리는 바람 같다. 마음에 없는 말을 지어내지 않는다. 설사 그것이 상대를 더없이 상처입힐지라도 거짓을 입에 담는 일은 없다. 나는 당신의 이런 솔직함에 앞으로 몇 번이나 마음을 더 베이게 될까. 

당신은, 주인은, 내 주인은…… 어떤 기분으로 나를 받아들였던 걸까.

카슈는 자신이 영원히 이 질문을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초목도 잠드는 시각이라는 축시(丑時).

조용히 장지문을 열어젖힌다. 방해하는 이는 없다. 주인은 침실에까지 근시를 들이는 것을 싫어했으니까. 막 현현했던 자신이 그렇게 고집을 부렸지만 끝끝내 지고 말았던 것을 기억한다. 주인은 깊이 잠든 것처럼 보였다. 카슈는 이불을 덮어쓴 가슴이 숨소리에 따라 오르내리는 것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부자리 아래로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잠꼬대일까. 무어라 중얼거리던 주인이 옆으로 돌아눕는다. 짐승처럼 그 등에 이마를 딱 붙인 채 웅크렸다. 영원히 이렇게 있고 싶었다. 영원히.

카슈?

막 깬 탓일까, 잠긴 목소리가 낯설다. 옷자락끼리 스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떻게 알았어, 나인 거?

카슈는 늘 좋은 냄새가 나니까.

부스럭, 주인이 이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이 느껴진다. 타도의 시력이라면 어두운 와중에도 표정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주인의 손길은 이마를, 뺨을, 마지막으로는 점이 자리한 입가를 스쳐 지난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고 있는 걸까.

외로웠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이 눈가에 머문다. 그 끝에 물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우는 거구나, 나는. 카슈는 생각한다. 머리로는 이것이 눈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살아 있는 몸으로 흘려 보는 것은 처음이다. 원래 눈물이란 건 이렇게 뜨거운 걸까. 이부자리란 건 이렇게나 쉽게 축축해지는 거였나. 산다는 건 꼭 이렇게 까닭 없이 숨이 막히고 때때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이어야만 하는 걸까. 원래 이렇게, 뜻대로 되는 게 없는 건가. 이런 건 전혀 귀엽지 않은데.

난 말주변이 별로 좋지 못해서, 한 마디로 네 마음을 돌리거나 불안을 가라앉혀 줄 자신은 없어.

카슈는 잠자코 기다렸다. 주인의 옷소매가 젖은 뺨을 닦아주는 것이 느껴진다.

대신 약속 하나 하자. 이제 너는 여기서 나와 함께 웃거나 울거나 실망하거나 화내거나 기뻐하거나 하면서…… 점점 인간처럼 되어가는 거야.

이부자리 아래로 새끼손가락이 마주 걸렸다. 카슈는 이러다 부러지겠다 싶을 정도로, 마주 얽힌 손가락 하나에 힘을 주었다.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이것만이 주인과 자신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끈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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