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14

슬픔에 잠겨 걸음을 멈추지 말기로

에르퀼 그레이

꿈 속의 꿈 by 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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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탄 디버프 걸린 빛전 이야기인데 비탄 디버프가 처음 나오는 던전이 구브라 환상도서관, 그 직전이 이슈가르드 교황청이라는 정보를 듣고 맞춰서 쓰다. (NCP 글)

* 창천의 이슈가르드 스포일러 포함. 4인 던전이지만 게임의 시스템과 별개로 그냥 포록고와 3명의 NPC와 빛전이 함께 구브라 환상도서관을 들어간다는 서술 존재.

마토야가 어딘가에 던져뒀다던 에테르 집속기가 서술되어 있는 논문을 찾으러 갈 요량이었다. 별의 의지와 접촉하여 민필리아의 상태에 대해서 반드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을 위해서는 그 논문이 필요하다 이야기를 했으니까.

민필리아를 찾으러 가는 일은 산크레드를 위한 일이기도 했고, 동시에 에르퀼 그레이 본인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여전히 그는 울다하 왕정을 빠져 나갔을 적에 결국 홀로 도망쳤던 것을 후회하고, 자책하고 있었으니까. 이 모든 일이 자신의 무지에서 비롯된 일인 것만 같다 생각하기도 했고……. 물론 나쁜 마음을 먹고 자신을 비롯한 동료들을 속인 이들이 가장 나쁘고 그것을 에르퀼 본인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뿔뿔이 흩어진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은 여전히 그의 안을 맴돌고 있었다. 그는 따지자면 언제나 선(善)에 서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오랜 시간 방치되어 이미 마물의 소굴이나 다름 없을 것이라는 구브라 환상도서관에 들어서며 서늘한 공기와 매캐한 먼지들을 지나, 마주하는 마물 무리들을 하나씩 해치우며 깊은 곳까지 걸음을 계속 이어가는 동안 안내자를 맡은 포록고를 제외하고도 네 사람은 이렇다 싶을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이미 날이 선 채였고, 누군가는 잃은 것을 대체할 능력에 익숙해지는 데 신경이 쏠려있던 상태였고, 누군가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서로 그저 조심하라는 말만을 주고 받으며 걷기를 한참 했을까. 포록고를 따라 선두로 계단을 내려가던 산크레드가 입을 떼었다. 조심해!

그 소리는 후방에서 치유를 도맡던 알피노나 마력 공격을 퍼붓기 위해 주문을 외우고 있던 야슈톨라에게 외치는 말이 아니었다. 창을 들고서 산크레드와 비슷한 보폭으로 걸음을 내딛던 용기사, 에르퀼 그레이에게 한 말이었다. 산크레드의 외침과 함께 튀어나온 스판듈의 돌격을 후방으로 뛰며 겨우 피한 에르퀼이 창을 고쳐 쥐고서 스판듈 한 마리를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 이후 다시 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포록고가 운을 떼기를, 스판듈이 아마 한 마리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 안 좋은 소리 늘어놓으며 정신을 혼란하게 만들어 종국에는 슬픔 상태로 빠지게 만든다고 하니 조심하라고. 이미 각자 여러 일로 슬픔이 넘실대는 네 사람에게는 실로 만만치 않을 상대일 것은 확실했다. 그것이 설령 작은 마물에 불과하더라도.

포록고의 말은 얼마 안 가 사실이 되었다. 조금 더 걸음을 내딛고 있자니 스판듈 여러 마리가 마물이 된 책과 바람 정령들과 함께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곧바로 포록고와 함께 산크레드와 에르퀼이 선두에서 공격을, 그들을 따라 야슈톨라와 알피노가 후방에서 공격과 치유를 퍼붓기 시작할 즈음, 옆에서 튀어나온 스판듈 한 마리를 보지 못한 에르퀼이 안 좋은 소리를 퍼부으며 등장한 그 작은 마물 한 마리 때문에 그대로 창을 놓치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느낀 알피노와 야슈톨라가 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그에게로 다가가려 했지만 아직 건재한 마물 몇 마리가 공격을 퍼붓는 통에 그 공격들을 피하며 마물들을 차근차근 공격하고, 선두에 서 있는 포록고와 산크레드에게 치유술을 걸어주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놓쳤던 창을 쥐고 바닥에 손을 짚으며 약간의 앓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일어났다. 뒷모습만 봐서는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았기에 알피노가 일어선 에르퀼에게 지속 마법을 걸어두고는 전방에서 싸우는 산크레드와 포록고를 확인했다. 야슈톨라도 마찬가지였다. 불안했지만 지금은 앞에 남은 몇 안 되는 마물들을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그의 안위까지 챙길 여력이 되지 않았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정리되면, 그러면 그때는 돌아보겠노라 속으로 생각하며 주문을 외우기만 했다.

반대로 산크레드는 그가 창을 들고 일어설 즈음에 바닥과 마찰되는 창의 잘그락대는 소리에 에르퀼을 돌아보았고, 그가 공격으로 창을 놓쳤다는 걸 인지했다. 그러나 산크레드는 단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감히 그에게 자신들과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 직전의 시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핏발이 서 있는 살기 어린 눈 위로 눈물이 그렁거렸다. 척 보기에도 슬쩍 훔쳐 해결 될 양 같지는 않았다. 도리어 그 눈물들이 흐르지 않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이를 꽉 문 채 다물고 있는 입은 당장이라도 비탄 섞인 울음이 터질까 염려되어 다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턱이 부서질 것처럼 꽉 다물고 있는 것이 실로 대단했다. 그 상태로 두 다리를 딛고 바닥에서 일어난 에르퀼 그레이가 창을 꽉 쥔 채로 마물을 향해 일격을 날리는 동안 산크레드는 그저 그를 바라보는 것밖에 하질 못했다. 포록고가 말한 스판듈의 성가신 공격이라는 것은 이 상태를 말한 것이었으리라. 에르퀼의 공격에 마지막 남아있던 마물들이 사라진 도서관의 복도는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에르퀼은 잠깐 동안 바닥을 보고 서 있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고서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포록고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계속 가요, 포록고. 상황을 뒤늦게 인지한 포록고는 그에게 괜찮냐는 말을 묻기보다는 그의 말에 응하며 앞을 향하는 선택지를 골랐다. 에르퀼이 그것을 원하는 것 같아보여서.

순간 암전, 그리고 제게 지금 가장 치명적일 마지막을 제 눈으로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자신의 상태……. 이리도 잔인할 수가. 저는 제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 모두를 잃은 슬픔에서 겨우 벗어난 참이었고, 여전히 그를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오지는 못하는 중이었다. 오르슈팡을 잃은 감각은 여전히 어제와 같았고, 그것은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배신당한 채, 동료들과도 모두 헤어지고 처음 마주한 정직한 선의와 끝을 알 수 없는 자신을 향한 신뢰가 그 당시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의미로 다가왔는지―

“에르퀼, 괜찮나?”

“당신 괜찮아요?”

돌아온 동료들과 돌아오지 못할 그를 떠올렸다. 여전히 헤어져 생사를 알 수 없는 동료들이 있었지만 눈앞에 돌아온 동료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저를 지키고 별바다로 떠난 그를 다시 떠올렸다. 그의 마지막 말도 떠오른다. 영웅에게 슬픈 얼굴은 어울리지 않는다던 그의 마지막 말. 눈물 흘리는 것조차 감히 엄두를 내질 못했다.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무너지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만을 했다. 지금이라면 분명히 울 수야 있겠지만, 그것이 그가 원하는 것은 아닐 테니…….

“괜찮아요. 죄송해요, 놀라게 해서.”

“…… 아니에요. 당신이 괜찮다면 그걸로 됐어요. 미처 당신 곁으로 스판듈 한 마리가 달려드는 걸 확인하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야슈톨라 말이 맞네. 에르퀼, 자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야. 우리도 미처 보호하지 못했으니.”

마물이 사라진 고요한 복도를 지나며 자신의 안위를 묻고, 걱정해주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에 화답하듯 에르퀼은 그들에게 미소를 내보이며 괜찮노라 화답했다. 눈은 여전히 물에 젖어 있었지만……. 그의 옆으로 보폭을 줄인 산크레드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에르퀼―

오르슈팡 씨가 죽었을 적에는 이슈가르드에 대한 선의보다도 당신 개인을 위한 복수에 대한 열망이 더 컸고, 그 모든 것이 끝났을 때는 아주 잠깐 허탈한 감각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게는 일어나서 다시 만나야 할 동료들이 있었기에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허탈감을 느낄 수가 없었어요. 동료들과 만날 수 있는 미래와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준 것은 오르슈팡 씨이니…… 저는 그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일어나려고 해요. 그것이 당신이 내게 바란 일일 테고, 또한 내게도 가장 필요한 일일 테니까. 물론 무리하지 않을 테고요.

“너무 무리하지는 마.”

“…… 네, 걱정 마세요. 절대 무리 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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