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그를 찾는 사람은 많다 (上)
다정의 다정
타냐는 스푼 직원들의 상담을 조금씩 그만두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상담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사람들 위주로 마지막 상담을 했다. 내담자들과 둘 거리감도 조절해야 하는 데다, 거의 죽다 살아 돌아온 타냐로서는 무심코 반대로 그들에게 의지할지도 몰라 상담을 그르칠 염려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적당히 시간이 지난 뒤 신입을 위주로 상담 신청을 다시 받을 예정이니 그때는 언제든 다시 연락해달라는 공지를 보면, 아예 관둔 것은 아닌 모양.
대신 타냐는 좀 더 활발한 히어로 활동을 시작했다. 스푼 내부가 아닌 밖에서 활동하며, ‘히어로의 상담사’보단 ‘상담사 히어로’의 일에 집중한 것이다. 이에 제법 많은 시간을 소요하면서, 타냐는 완벽히 여론을 정리할 수 있었다. 물론 타냐의 내담자였던 사람들의 영향도 컸다.
그리고, 아직 상담을 진행하고 있는 스푼의 한 사람.
“잘 가요, 랩터 씨~”
“안뇽~”
랩터는 해맑게 인사하는 타냐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상담실을 나섰다. 영정이 죽은 이후 슬퍼하던 랩터는 타냐와 얘기하며 많이 나아졌다. 스텔 역시 상담을 진행했지만, 생각보다 해맑은 정신상태를 갖고 있어서 몇 회 진행하기도 전에 끝났다. 그리고,
-악수회 역시 평소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타냐 씨, 고마워요.”
“뭘요.”
“무사해서 다행이야!”
“다들 걱정해주신 덕분이에요.”
“타냐 선배···.”
“나가 군?!”
하지만 한창 악수를 진행하던 그때, 낡고 지쳐 보이는 나가가 타냐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기색이었다. 타냐는 즉시 다음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나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빈 병실로 향하는 것이다.
“저, 이제 나가야···.”
“제가 말했죠, 자기를 먼저 챙기라고.”
“그건,”
“두 시간만, 아니 한 시간이라도 자요. 제가 푹 자게 해줄게요.”
타냐는 드물게 나가가 말대꾸하려는 것을 무시하고, 그를 침대에 눕혔다. 내심 쉬고는 싶었는지, 순순히 눕는 모습에 타냐는 안타까워졌다. 타냐는 누운 나가의 눈 위에 손을 올리고 손을 가볍게 토닥였다.
“특기 쓸게요, 괜찮죠?”
“꼭··· 깨워주셔야···”
“네에, 지금은 푹 자세요.”
그리고 1분, 나가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타냐는 빙그레 웃었다.
타냐가 이런 식으로 사원들을 재우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사원들을 억지로 데려다 재우기도 했지만, 수면이 필요한데 잠이 오지 않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타냐를 찾아오기도 했다. 타냐가 능력을 사용하면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노곤한 기분이 들어서, 빛이 새어 들어오는 시야까지 완벽히 가리면 순식간에 잠에 들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가를 재우긴 했지만, 타냐는 요 근래 나가의 모습이 걱정됐다. 고트라는 스푼의 높으신 간부가 나가를 눈여겨보더니, 그의 봉사활동까지 끌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히어로의 일을 하기도 벅찬데 추가 근무라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타냐는 나가가 조금씩 쪼개 자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벼르고 벼르다가 드디어 오늘, 재울 수 있었던 것이다.
“간부님···.”
타냐는 간부 고트가 못마땅했다. 나가의 죄책감을 자극하며 억지로 일을 시키는 것이 교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꿍꿍이가 있는 기색이었다. 타냐는 자신의 욕심과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폐를 끼치는 사람들과 사회생활은 해도, 이해는 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도 위인이라고, 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위인이라고 간부 자리에 앉아있는 거라면 차라리 타냐 자신이야말로-
…아니, 이런 생각하지 말자.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났다.
“나가 군, 일어나요. 한 시간 지났어요.”
“으음-”
“더 잘래요?”
“···아니요, 일어나야 하는데.”
“이야~ 안녕, 여기 있었네?”
그때, 막 일어나 비몽사몽 하던 나가의 앞으로 와인색 머리의 남자가 끼어들었다. 꼭 닮은 색의 머플러를 한 그 사람은, 아까 타냐가 한참이나 생각하고 있던 스푼의 간부, 고트였다. 그는 오늘도 나가에게 맡겨놓은 듯이 노동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잤으니까 충분히 쉬었지? 봉사활동 가자. 어서!”
“저, 간부님.”
“으응?”
“나가 군, 지금 며칠째 과로하고 있어서요. 이대로 가다간 쓰러질 것 같은데···. 오늘은 쉬면 안 될까요?”
가늘게 뜬 눈이 타냐를 쏘아보았다. 타냐는 움찔하긴 했지만 일단 뱉은 말을 취소하진 않았다. 나가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번갈아 보고 있었다.
“흐음~ 어쩌나, 오늘은 정말 급한 일인데.”
“간부님 측 인력을 쓰면 되지 않을까요? 나가 군도 오늘 꼭 쉬어야 해요.”
어느새 손에 땀이 찼다. 간부인 고트보다도 그 뒤에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검은 장발 머리의 경호원이 더 무서웠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죽여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의 악의였다.
“~뭐, 좋아. 나가 군. 내일부터는 다시 같이 가는 거야?”
“예, 에···.”
“자, 가자. 헨리.”
결국 고트는 그 무서운 보좌관을 이끌고 사라졌다. 그 와중에도 인사는 나가에게만 하는 것이, 그 속셈이 훤히 보였다. 어차피 필요한 건 나가 하나뿐이라 이거지. 그런데 이렇게 사람을 혹사시키다니, 얼마나 사람을 도구로 보는 걸까? 타냐는 한숨을 쉬었다.
“저,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나가 군. 나가 군이 쉬어야 하는 건 사실인걸요. 며칠 못 잤죠?”
“아예 못 자는 건 아닌데, 좀 띄엄띄엄···.”
“일이 있으면 깨워줄 테니까, 지금 여기서 푹 자요.”
다시 재워줄까요? ···네.
나가는 타냐의 손에 의지해 다시 잠이 들었다. 타냐는 연락이 올 때까지 곁을 지키기로 마음먹고, 들고 있던 책을 펼쳤다. 하지만 곧 책을 덮고, 품에서 꺼낸 반지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유난히 반짝이는 것 외에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실반지였다. 타냐는 이것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면···. 웬만한 불면증 환자들은 순식간에 잠들 수 있겠군요.’
‘일어나는 데는 문제 없었나요?’
‘그게 문제입니다만···. 누가 반지를 빼주지 않으면 혼자 일어나기 힘들더군요. 저도 동생이 있어서 겨우 일어났습니다.’
타냐는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사원들의 케어에 커다란 구멍이 난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특기를 활용해서 만든 물품이다.
왜, 무효화 특기자의 ‘기’를 차단하는 성질을 담아 만든 물건들이 있지 않은가. 반지나 귀걸이, 약물 같은···. 요즘과 같은 현대에는 아예 특기를 활용한 제품이 생산되기도 했다. 깔끔해져요 샴푸라던가, 증폭 특성을 부여한 스피커라던가.
물론 그런 제품을 만들려면 특정 유형의 특기자를 찾아야 하는데, 그런 특기자 또한 소수라서 그렇게 흔한 건 아니다. 그래서 타냐는 1차로, 나름 대기업이자 제약회사인 O사의 도움을 받아 ‘약’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냥 ‘약’이 아니라, 특기의 결정체 말이다.
부르르-
“무슨 일이세요, 아울 씨?”
[아, 타냐 선생님이 만들어주신 약 실험 결과가 나왔는데요-]
실험자가 사흘 동안 일어나지 못했는데, 혹시 강도를 더 조절할 수 없을까요?
“아···.”
하지만 요즘의 문제는 그것이었다. 아무리 강도를 조절해도 약해지지 않는 것. 어차피 약이 체내에서 분해되기 전까지만 적용될 테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특기가 어떻게 작용한 건지 몰라도 상정 외의 사태가 자꾸 발생하는 것이다.
“그럼 조만간 연구실로 한 번 더 찾아뵐게요.”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약도 잘 안되고, 액세서리라면 좀 나을까 싶어서 시도해본 건데 이 모양이면 완전히 실패네.
전화를 끊은 타냐는 한숨을 쉬며 반지를 도로 집어넣었다. 다른 방법을 찾던가, 아니면 포기하던가 해봐야겠다고 다짐하며.
“타나?”
“아, 사사 씨? 나가 군은 자요. 혹시 나가봐야 하나요?”
“아니, 그낭 나가가 안보어서 차자온 거야.”
그때, 나가를 찾아온 사사가 의자를 끌고 와 타냐의 곁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사사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라, 타냐는 가만히 사사를 바라보았다. 가끔씩 타냐가 부담스러운 시선을 보낼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사는 조금 멋쩍게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 보니 사사 씨, 제가 없어진 동안 괜찮으셨어요?”
우리 오랜만에 상담실 가서, 얘기 좀 할까요?
틱, 쪼르르-
전기 포트에서 흘러내린 따뜻한 물이 훈김을 내뿜었다. 제법 따뜻한 공기가 감도는 상담실임에도 그랬다. 사사는 익숙한 캐모마일 향을 맡으며, 따끈한 잔으로 손을 녹였다. 그러고 보면 나가가 스푼에 들어온 뒤로 상담실을 찾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나가에게 든든한 선배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그런 것도 있고, 워낙에 정신없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이프가 돌아온 뒤로 상담은 처음이죠? 어떻게, 잘 지내셨나요?”
“···그덕저덕.”
“나가 군 팀에서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거 종종 봤어요. 요즘 엄청 바쁘죠?”
사사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타냐의 안색을 살폈다. 납치되었던 일 때문인지, 조금 퀭한 안색이었다. 하긴, 아무리 영정 님이 구해주셨다고 해도 그때의 기억이 어디 가는 게 아니다. 심지어 타냐는 실전이 처음이지 않았는가? 게다가 하필 상대가···.
“미앙.”
“네? 뭐가요?”
“내가, 빠리 가서 도아주지 모태서···.”
그래, 사실 사사는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그도 아직 친구라고, 친구라고 여기고 있었다고 그의 잘못을 사사가 뒤집어쓴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에, 사사는 자신이 사실 송하를 죽일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새로이 깨달았었고….
“그걸 여태 신경 쓰고 계셨어요? 그게 왜 사사 씨 탓이겠어요. 나이프 탓이지.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타냐는 손사래를 치며 사사를 달래줬지만, 울적한 기분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스푼을 배신한 전 절친 송하, 이젠 한 명도 남지 않은 팀원, 혼자 남은 사사. 그 장면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게다가,
-영정의 손에 댕강 잘려 굴러가던 송하의 머리.
“그보다 사사 씨, 전 그게 걱정이었어요. 친구분이 돌아가신 거잖아요.”
그때, 타냐는 모두가 짐작했지만 굳이 짚어내지 않은 사사의 감정을 들어냈다. 그리고는 따뜻한 말로 고이 포장해내는 것이다. 그 익숙하고도 새로운 감각에, 사사는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갠차나, 에상애떤 이리고···.”
“예상했다고 해서 준비가 된 건 아니잖아요. 저라면 굉장히 놀라고, 슬펐을 것 같은데. 사사 씨는 어땠나요?”
“···”
놀라고, 슬펐냐고? 두말할 것 없는 소리다. 심지어 사사는 죽고자 하기도 했다. 차마 죽을 용기가 없어서 그만뒀지만, 홀로 남아 절망스럽던 마음만은 진짜였다. 그때 타냐는 실종 상태라 그런 마음을 터놓을 상대도 없었고, 돌아와서는 타이밍을 놓친 것 같아 망설였다. 오늘과 같은 자리도 즉흥으로 마련되지 않았는가?
“소지키, 마니 스퍼는데 주벼네 애기하면 안댈 거 가타서···”
아무 말도 못 했어.
뒷말을 삼켰으나, 타냐는 이미 다 알아들었을 것이다. 사사는 투명한 찻물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뭐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상담을 해왔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사사는 여전히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데에 서툰 인간이었다.
“혼자 많이 아팠겠어요. 이제 냅킨 시절, 친하게 지냈던 동료들이 많이 그리울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가끔 그때가 그리운가요?
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냐는 그런 사사를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걸까? 이번엔 어떤 감정을 처방하려는 걸까? 기대되는 마음이 반, 걱정되는 마음이 반이었다.
“사사 씨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제대로 말하지도 못했을 거라는 걸 알아요. 그리고 이럴 땐 그 사람들과의 추억을 들어주며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도.”
“더 이상 같은 추억을 공유해줄 사람이 없다는 건, 그 감정에 공감해줄 사람이 없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잖아요.”
“그러니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타냐는 사사가 느끼고 있는 모든 감정을 알고 있다는 어투로 말했다. 아니, 그는 항상 그랬다. 정확히 사람을 꿰뚫어 보고, 공감하며, 길을 제시했다. 그 모든 것을 경험해본 사람처럼.
그럴 리가 없음이 분명한데도, 홀린 듯이 따르게 되는 마력이 있었다. 그래서 사사는 이번에도 손을 잡았다. 참을 수 없이 외롭고,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감정이 흘러들었다.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타냐는 특기가 잘 든 반응을 보고도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말했다.
“제가 사사 씨의 얘기를 들어도 될까요?”
들어줘, 누구라도, 제발.
사사는 특유의 혀짧은 소리를 내며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다. 타냐는 그것을 신중하게 듣고 있었다. 그의 이전 기억도, 친구와의 추억도, 배신도···. 그리고 죽고자 했던 마음도.
“말해줘서, 도울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답례로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와 같은 말이었다. 그에 무어라 대답하고 싶었으나, 사사는 목이 메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타냐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어 주었다. 이 얘기가 뭐라고.
그가 뭐라고.
“-그래서, 요즘은 약 말고도 도구도 연구 중이에요. 반지, 목걸이 정도의 액세서리 위주?”
“오···.”
“사사 씨도 필요하면 한번 써보실래요? 이 반지는 수면을 돕는 건데, 반지를 뺄 때까진 숙면할 수 있어요.”
“···? 자믄서 반지을 어떠케 빼···?”
못 빼면 그대로 영원히 잠드는 거 아닌가, 사사는 뒷말을 삼켰다.
“그게 문제죠. 그래서 일어날 땐 옆에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요. 아, 사사 씨 사원 숙소에서 혼자 사시죠···. 그럼 무리겠네요.”
타냐는 고민이라는 듯 턱을 괴며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은 상담을 끝마치고 나가가 있는 의료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화 주제는 타냐가 요즘 연구 중인 감정 조절을 위한 아이템이었다. 실험 중인 알약과 반지를 보여주며 사사에게 조언을 요청했지만, 사사 역시 관련 분야에는 알고 있는 게 없어 쩔쩔맸다. 다만, 그런 생각은 들었다.
“번제에 스이먼 이허말 것 가튼데···.”
“역시, 그럴까요?”
“납치라던가.”
“그러네요. 안 그래도 그런 위험이 있다고 서장님이 말씀하시긴 했는데···. 역시 이 수면용 약은 생산을 중단해야겠어요.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평정심일지도···.”
사사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평정심 정도라면 범죄에 악용될 염려는 없어 보였다. 연구 자체도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다고 했으니, 이대로 중단되면 중간 과정에서 약이 흘러갈 틈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타냐가 생각도 못 한 관점이라며, 고맙다고 감사를 표하는 것에 사사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이 반지는 한번 써보실래요? 사사 씨는 별 차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평정심 유지를 도와주는 제품이에요. 불안할 때 쓰는 건데, 귀능 씨가 목걸이나 팔찌는 싫다고 뻥 차셔서 만든 거거든요···.”
아, 그럴 만도 했다. 펫숍에 있을 당시 부서장이었던 다나에게 구해진 귀능은 구속하는 기분이 든다 싶은 장신구는 전부 거부하곤 했다. 목걸이부터 시작해 시계, 팔찌···. 반지라면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희미했던 사사는 반지를 받아 들었다.
[타냐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울 씨, 수면용 약 라인은 개발을 중단해야 할 것 같아요. 악용의 여지가 있어서.”
[저희 쪽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오긴 했습니다만, 유통 과정을 잘 통제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린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래도 히어로 쪽의 조언을 들어보니, 아예 원천을 차단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안될까요?”
[···안 될 게 있겠습니까. 다만 후원해온 쪽에서는 불만이 있을 테니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이죠.”
그사이에 타냐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의료기업 쪽과의 통화를 마쳤다. 통화내용을 들으니 아예 사장 쪽과 직통으로 연락하는 것 같은데, 평소 타냐의 인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고 보니 명절마다 엄청난 양과 가격의 선물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고···.
[네? 생산 라인을 줄인다고요? 제가 얼마나 돈을 투자했는데···.]
“일단 투자금 일부는 돌려 드릴게요. 기대 수익이 줄어든 것은 유감이지만, 범죄에 사용될 여지가 있어서요.”
[아이, 그래도···.]
“대신 보상은 저희가 운영하는 쪽에서···.”
이걸 가만히 듣고 있어도 과연 괜찮은 걸까? 싶은 대화가 이어졌다. 보상금이며, 다른 지원이며, 거래 같은 얘기들이 오간 것이다. 일개 히어로라기보다는 사업가 같은 면모가 있었다. 언제부터 이랬지? 사사는 기억을 더듬었지만 언제나와 같이 바쁘기만 했던 타냐의 모습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비교적 최근의 일일까.
툭, 달그락-
그때, 타냐가 메고 있던 작은 에코백에서 소리가 났다. 에코백 한쪽에 걸려있는 키링들이 서로 맞부딪치며 나는 소리였다.
하나, 둘, 셋, 넷···. 서너 개씩이나 달고 있을 필요가 있나?
사사는 타냐가 언제부터 이런 키링을 달고 다녔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아, 다시 보니 스푼에서 준 방범 벨이었다. 아마도 실종에서 되돌아온 직후에 새로 발급받은 건지, 이전의 것과는 모양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벨은 처음 보는데. 사사는 호기심이 들어, 반짝이는 그것을 건드리며 물었다.
“이거, 머야?”
타냐는 오늘도 평범하게 퇴근하던 길이었다. 다만 오늘따라 왠지 맥주가 마시고 싶어 편의점으로 발을 돌렸을 뿐이다. 4캔 만 원에 잠시 고민하다가, 나중에 또 마시면 된다는 마인드로 상술에 속아주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다 연락이 와서-
부웅,
“네, 여보세요?”
[…-…]
“! 읍, 으읍, 읍!”
···정신을 차려보니 폐공장 한켠이었을 뿐이다.
타냐는 제일 먼저 소지품을 살폈다. 방범용 키링이 달린 가방, 그 안에 지갑과 핸드폰이 있고, 총도 있을 텐데···. 그래, 내가 만약 납치한 사람이라면 이걸 남겨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나마 잡힐 때 반사적으로 벨을 눌렀으니 다행인가.
타냐는 한숨을 쉬며 주변을 살폈다. 청색 테이프로 둘둘 모아 싸매진 발목과 뒤로 넘겨진 손. 심지어 몸도 마비된 듯 뻣뻣했다. 특기를 쓴 것 같았다, 아마도.
“드디어 일어나셨군. 히어로가 아니라 잠자는 공주님인 줄 알았어.”
“! 누구세요?”
그때,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괴한들이 나타났다. 동물의 귀 모양이 달린 것을 보아하니, 분명한 혼혈 혐오 단체인 듯했다. 타냐는 자신이 이들과 엮일 일이 뭐가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설마 지금 그걸 알려줄 거라고 생각하고 묻는 건 아니지?”
“아주 곱게 자란 샌님인가 봐?”
“야, 방송 안 봤냐? 특기에 당해서 목매달고 자살하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하시지.”
“으, 그건 안 되지.”
일단 자신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만은 잘 알겠다. 타냐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들끼리 떠들고 있어서 당장은 무사하긴 하지만, 빨리 의도를 알아내지 않으면 탈출은 요원한 일이다. 뭐라고 말을 골라야 하지? 아무래도 납치는 처음이니,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절 왜 납치해오신 건진 모르겠지만···. 놔주세요.”
“그럴 수야 없지. 우리도 원하는 게 있으니 ‘선생님’을 데려온 거 아니겠어?”
야, 가져와. 넵.
타냐는 잠자코 앉아 분위기를 살폈다. 서장님이었다면 진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텐데. 아니, 애초에 납치당하는 일도 없었겠지···. 자신의 보잘것없는 무력에 잠시 묵념한 타냐는, 곧 우두머리로 보이는 인간의 부하가 가져오는 물체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얘들아, 이게 뭔지 알지?”
“끝내주는 수면제죠. 액상으로 만들면 납치용으로 아주 딱이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그건 환자들을 위해 연구 중인 수면제···!”
짝-
“약은 쓰기 나름이야, 선생.”
비릿한 비웃음이 두 눈에 맺혔다. ‘약은 쓰기 나름이다’라는 말이 이런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코앞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이가 갈렸다. 그마저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서 헛도는 수준에 그쳤지만···.
“뭐, 이렇게 범죄에 쓸 수 있다니까 갑자기 연구를 중단한 것 같은데··· 너무 늦었어.”
“이전부터 알고 있었나 봐요. 연구의 후원자 중 한 명인가요?”
“오우, 그런 예민한 건 묻지 말자고.”
제 불리한 말이란 건 알았는지 대답을 회피했지만, 도리어 그 반응이 확신을 주었다. 오늘 연구 중단을 결정하고, 그것을 바로 알린 후원자 중 한 명이 연관되어 있거나 직접 지시했을 것이다. 민간인 후원자 명단이 다 그렇지. 스푼이 확인한 것도 아닌데 다 공증된 사람들만 있겠는가? 그중 이상한 세력이 하나쯤 끼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
콰당, 쾅!
타냐가 깊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의자를 발로 차 밀어버렸다. 엔간한 힘이 들어간 게 아니었다. 의자에 꽁꽁 묶여 앉아 있던 타냐는 순식간에 저 멀리 있던 벽에 등을 부딪치고 말았다. 생경한 고통에 악, 소리가 절로 났다.
“아으, 후···.”
“자자, 우리도 선생을 험하게 다루고 싶지 않다고. 그냥 우리랑 계속 있으면서 그 약을 계속 생산하기만 하면 돼.”
재사용 가능한 반지를 만들어도 되고. 어때?
“···반지 따윈 필요 없잖아요. 왜 굳이 저를? 제가 저항할 거란 걸 알면서 굳이 이럴 가치가 있나요?”
“그야 당연하지! 네년의 특기를 이용하면 몸에 약물이 남지 않으니 증거인멸에 최적인데다 약물 라인도 걸릴 일이 없···”
탕!
“저 고문관 새끼가···.”
“···형님,”
“처리해. ···하, 뭐. 이제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지이익, 지익-
시체 끌리는 소리가 났다. 바닥에 길게 핏자국이 남는 것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부하로 보이는 이들은 그런 타냐를 비웃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타냐는 우두머리의 눈을 똑바로 보기 위해 노력하며 똑똑히 말했다.
“싫어요.”
“뭔가 착각하나 본데, 여기에 온 이상 선택지는 없어. 선생 같은 특기자는 아주 유용하거든, 이제 안 게 아쉬울 정도로. 자, 우리는 이 희귀한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거든. 그러니 죽거나, 협조하거나. 어때?”
“절 구하러 사람이 올 거예요.”
“그럼 싸늘한 변사체 하나 찾는 거지, 뭐.”
야, 가둬.
그는 타냐가 처음부터 말을 들을 거란 기대는 전혀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별 실망하는 기색도 없이, 타냐를 가둬놓으라는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타냐는 힘없이 몸을 맡기며, 독방으로 옮겨졌다. 난방 따윈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손발이 얼어붙을 듯한 냉기가 올라오는 방이었다.
“야, 잘 생각해라.”
“···”
타냐를 방에 데려다 놓은 부하는 위협하듯 침을 뱉고 다시 방을 나섰다. 타냐는 그가 쓰고 있는 복면을 보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왜 그리 미워하는 걸까?
사람과 짐승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타냐는 그것이 사유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생각을 하고, 생각을 통해 변화하거나 발전할 수 있으니까. 심지어 그것을 모으고 축적해 후세에 전달하기까지 한다. 영물과 혼혈은 그 기준에 들어맞기 때문에, 타냐는 평소에 그들을 외양으로 차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에 반해 혐오자들은 짐승의 귀나 꼬리를 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깎아내린다. 짐승을 사람 취급할 순 없다는 빈약한 근거를 가지고 쓸데없이 굳센 신념으로 그들을 공격하기까지.
아, 하지만 타냐가 그들을 이해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저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야 쓸데없는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고, 생각할 힘이 생기니까. ···하지만 비일상의 공포 속에 노출되어 있었던 탓일까, 타냐는 뒤늦게 긴장이 풀려오는 바람에 점점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일단, 지금은 좀 자볼까.
타냐는 다가오는 졸음에 저항하지 않고, 다만 눈을 감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흐···으···.”
“!”
타냐가 잠시 눈을 붙이고 깨어나자 뒤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독방인 줄 알았던 이 방은 사실 독방이 아니었던 것이다. 타냐는 부리나케 뒤를 돌아봤지만, 고개가 잘 돌아가지 않아 끙끙거리다 결국 쿠당탕, 의자 째로 넘어지고 말았다. 얼어붙은 찬 바닥에 볼이 닿자 소름 끼치게 추워서 애매한 자세로 얼굴을 들어 올렸다. 목이 뻐근하게 당겼다.
“으윽···?”
“저, 정신이 드시나요?”
“···타냐?”
“네, 히어로 타냐 맞아요.”
이 사람도 방송이나 뉴스로 ‘히어로’ 타냐의 존재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요 근래 주변에서 타냐를 알아보는 일이 잦았던 경험으로, 익숙하게 받아들인 타냐는 일단 이 혼혈로 보이는 사람을 안심시키기로 했다. 그런 것치곤 어딜 봐도 잡혀 온 모양새라, 믿음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서, 설마 당신이 이 조직의···!”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저도 잡혀 온 거예요.”
···믿음직하지 않은 히어로가 되기로 했다. 멀쩡한 척하다가 한패로 보이는 것은 사양이었다. 타냐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고갯짓하며 대꾸했다. 그에 오히려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전 아시다시피 타냐고···.”
“후안, 이라고 합니다.”
“후안이요? 그 혼혈 인권 단체의?”
“···네.”
타냐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나름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혼혈 인권 단체, 가시성이 비교적 적은 나무 영물부터 혐오감이 짙은 벌레 영물 등 비선호 동물 혼혈 인권 단체의 수장이지만, 곧 정치인으로 출마하겠다는 선언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짜 정치인이기도 했다. 타냐는 나름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일부 혼혈 혐오자들이 그를 싫어한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범죄의 대상이 될 줄은 몰랐는데. 심지어 꽤 규모가 큰 단체의 수장 아닌가? 그런 사람까지 납치해오는 범죄 조직이라면, 그리 피라미는 아닐 확률이 높았다. 타냐는 이곳을 탈출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고 보면, 정신을 잃기 직전에 벨을 누른 기억이 있다. 스푼에서 준 것을 포함해 이것저것. 만약 제대로 눌렀다면 스푼 측에서는 타냐를 찾아 수색을 하고 있을 것이고, 매번 도와주는 지인 측에서도 스푼에 협조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난 뭘 할 수 있지?
“저···.”
“네?”
“타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곧 구조될 수 있다는 거겠죠? 저,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요···.”
“아···.”
이제 보니 웅크려 앉아있던 후안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단풍잎을 닮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러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구조를 느긋하게 기다려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저번처럼 나가의 도움을 기다리는 납치자 신세가 아니라, 사람을 구하는 히어로가 되어야 했다. 타냐는 그게 새삼 낯설어서, 꽉 조여오는 가슴을 애써 무시하며 후안에게 말했다.
“네, 이미 대략적인 위치는 스푼에서 추적 중일 거예요. 저에게 GPS가 달린 방범 벨이 있기도 했고, 스푼에는 관련 특기자가 있으니까요. 조금만 더 참을 수 있겠어요?”
그렇게 양해를 구하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상태가 말이 아닌 후안은, 겨우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는 침묵이었다. 타냐는 손가락을 움직이려 노력하는 데에 시간을 보냈고, 후안은 정신을 차리는 것만으로도 한계인 듯했다. ···그 고통을 도와줄 방법이 없어서, 타냐는 한없이 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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