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스토리 드림

사막의 꽃이 될 수 없다면 Chapter.2

쟈밀 바이퍼 드림


* ‘아리아브 나리야’ 이벤트 스토리 스포일러 있습니다.

* 스토리 내에서 묘사되지 않은 부분은 개인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03.

 

비단의 거리에 도착한 후.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그림의 난동에 휩쓸리기도 하고 아짐가의 공원을 구경하기도 한 아이렌은 몸이 피로한 와중에도 마음이 한껏 들떠 있었다.

낯선 이국을 여행하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지만, 이곳은 쟈밀과 카림의 고향이지 않나. ‘두 사람은 이런 곳에서 태어나 자랐구나’ 같은 생각을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다 보면, 신기하게도 더위도 건조함도 금방 잊게 되었지.

하지만 마냥 들떠있던 아이렌도 긴장으로 진정하는 순간이 오고 말았으니,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어서 오세요. 아이렌 님 맞으시죠?”

“저희가 환복을 도와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리 오세요.”

 

아짐가에 도착해 그 웅장한 규모에 압도당할 때도 놀랐지만, 이 정중한 대우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오늘 축제를 위해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피팅룸으로 간 아이렌은 깍듯이 자신을 맞이하는 사용인들을 보고 헛숨을 삼켰다.

 

‘꼭 현대 로맨스 재벌물 여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네.’

 

태어나 자라는 동안 수발을 받는 건 몸이 불편했을 때를 빼면 7살 정도에서 끝이었던 것 같은데.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알아서 옷을 갈아입혀 주다니. 처음 보는 양식의 전통 옷을 입는 건 힘든 일이니 입혀주는 것까지는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벗는 건 저 혼자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부끄러워…….’

 

누군가는 시중을 받는 걸 즐기며 그걸로 자존감을 채울 수도 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아무리 자잘한 일도 본인이 처리하는 게 가장 마음 편하고 안심이 되는 아이렌은 이런 상황이 불편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마치 인형 놀이라도 당하는 기분이라고 할까. 도무지 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곤란했다.

 

“귀걸이도 따로 준비해봤는데, 어떤 게 마음에 드세요?”

“예? 어…….”

 

잠깐 넋을 놓고 가만히 있다 보니 어느새 낯선 옷이 입혀져 있다. 하지만 아이렌은 제 복장을 살필 틈도 없이 사용인이 보여주는 휘황찬란한 귀걸이를 둘러보아야 했다.

다양한 형태의 귀걸이는 어느 것도 아름답지만, 어쩐지 손이 쉽게 가지 않는다.

아이렌은 옷이나 장신구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비싸 보이는 물건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사회 경험이 없진 않았지. 즉, 너무 비싼 물건은 부담스럽다. 다름 아닌 그 생각이 아이렌의 결정을 방해하고 있었다.

 

‘비싸지 않은 건 없겠지? 아니, 카림 선배에게 비싸지 않다고 해도 내겐 엄청난 고가의 물건일 수도 있지.’

 

그냥 늘 끼고 다니던 귀걸이를 낄까. 하지만 모처럼 준비해 준 걸 거절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까. 무엇보다 이 귀걸이는 열사의 나라 전통 복식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꾸미는 일에 관심이 없을 뿐 미적 감각은 멀쩡한 아이렌은 결국 준비된 귀걸이 중 가장 제 취향의 물건을 골랐다.

 

“그럼 이걸로 부탁할게요.”

“알겠습니다! 착용하고 오신 귀걸이는 교복과 같이 보관해 둘게요!”

 

작은 자수정과 다이아몬드가 달려 반짝거리는 귀걸이는 아짐가가 준비해 준 옷과 퍽 잘 어울렸다. 늘 이런 일을 해온 사람들의 솜씨는 무시할 수 없는지 혼자서 갈아입을 때보다 훨씬 빨리 환복을 마친 아이렌은 마지막으로 화장대 앞에 앉게 되었다.

 

“세상에, 이 머리카락 좀 봐. 이렇게 머리가 길면 관리하시기 힘드시겠어요.”

“아무래도 그렇죠, 하하…….”

“이렇게 흑단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이라니. 게다가 이 길이! 꾸며드릴 보람이 나겠는데요, 후후.”

 

양옆에 나란히 선 사용인들은 바삐 오가느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풀어 빗겨주면서 산새처럼 조잘거렸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다느니, 샴푸는 뭘 쓰냐느니, 이 마을은 무엇이 유명하며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은 뭐가 있다는 등등. 살갑게 말을 걸면서도 완벽하게 머리를 땋아주는 솜씨는 훌륭했지만, 아이렌은 그 양기가 힘들어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기 빨려!’

 

이 소란스러움은 미용실에서 잡담에 시달릴 때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사회적 교류가 싫은 건 아니지만, 낯선 이와 대화할 때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는 자신인 걸 어쩌겠나. 거울을 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 탓에 발끝만 보고 있던 아이렌은 결국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얼굴에 뭔가 치덕치덕 발리는 간지러움을 견뎌내고 있는데, 복도 쪽에서 남자 사용인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아직 안 끝났어? 남자 손님분들은 다 나가셨어.”

“화장만 끝나면 돼! 금방 해!”

“휴, 역시 여성분은 손이 더 많이 가니 어쩔 수 없나.”

“그래도 꾸며드리는 재미가 있으니까, 후후.”

 

‘화장 안 해 줘도 되는데.’ 혹 제가 번거롭게 하는 게 아닐까 하여 마음이 편치 않은 아이렌이 슬그머니 실눈을 뜨자, 거울에 비치는 낯선 얼굴이 보였다.

세상에. 이게 누구야.

저도 모르게 경악한 아이렌은 주변을 살펴보려던 것도 잊고 두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사이 누가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 거울 속에 있는 사람은 분명 자신이긴 했지만, 풍기는 이미지나 느낌이 확 달라져 있었다.

 

“자, 다 됐어요! 어쩜, 공주님 같으세요.”

“아, 그, ……감사합니다.”

 

공주라니, 미용실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안 해주는데. 사용인의 과찬에 괜히 머쓱해진다.

하지만 사용인들의 솜씨가 워낙 뛰어나서 그런지, 지금 제 모습은 확실히 그럴듯해 보인다. 자신의 얼굴인데도 낯선 느낌을 받는 아이렌은 머리에 묶어진 반다나에 꽂힌 재스민꽃을 만지작거렸다. 이 정도면 공주까지는 아니더라도, 건넛마을 최진사댁 셋째 딸 정도는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농담을 떠올리자 긴장으로 굳어있던 얼굴에도 스르륵 미소가 번졌다.

 

“다들 너무 예뻐서 깜짝 놀라겠네요, 얼른 가보세요.”

“설마요. 다 미남들 뿐이라, 본인들 얼굴 보고 이미 충분히 놀라서 전 눈에 안 띌 거예요.”

“어머, 농담도 참.”

 

농담 아닌데. 다들 끝내주는 미남이라, 제가 아무리 꾸며도 눈에 안 띌 게 분명한데.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대답을 억지로 삼킨 아이렌은 서둘러 모두가 기다리고 있을 장소로 향했다. 치수에 딱 맞는 열사의 나라 신발은 시원하고도 가벼워서,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이 평소보다 가벼웠다.

 

‘기대되는 걸, 다들 엄청 멋있겠지? 쟈밀 선배야 여기가 고향이니 당연히 잘 어울리겠지만, 다른 선배들도 다들 본판이 훌륭하니 잘 어울릴 거야. 이런 화려한 느낌이라면 역시 케이터 선배가 제일 잘 어울리려나?’

 

하지만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겠지. 제 동행들의 미모에 자부심이 있는 아이렌은 눈 호강할 생각에 싱글벙글 웃으며, 익숙한 듯 낯선 뒷모습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미안해요, 다들 많이 기다리셨죠?”

“아. 왔는가, 아이렌.”

 

가장 먼저 자신을 반겨주는 건 팔짱을 낀 채 동급생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말레우스였다. 평소의 서늘하고 차분한 느낌과 달리 화사한 분위기를 뽐내는 그는 정말로 아름다워, 아이렌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역시 미남은 분위기가 다른 옷을 입어도 아름다움이 빛바래지 않는구나. 상상 이상으로 눈부신 미모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아이렌은 옷을 준비해 준 이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아차. 쟈밀 선배, 옷도 신발도 치수가 딱 맞아서…….”

 

치수가 딱 맞아서 편하고 좋다. 급히 준비한 걸 텐데도 이렇게 잘 준비해 놓다니 대단하다.

그렇게 말할 작정이었던 아이렌은 쟈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하려던 말이 부자연스럽게 끊긴 아이렌이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두어 걸음 물러설 즈음. 카림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대화를 중단하고 살갑게 홍일점을 반겨주었다.

 

“아이렌! 어서 와, 엄청나게 잘 어울리네!”

“대박! 에이스랑 듀스가 이걸 봤으면 얼굴이 새빨개졌을 텐데~!”

“어이, 케이터. 여기 없는 후배들을 놀리는 건 그만둬. 하지만 알 것 같아. 화사하고 좋네, 아이렌.”

 

평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용인들의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일까. 아이렌을 향해 쏟아지는 칭찬은 요란하고도 달았다.

쉽게 입을 열지 않고 있던 말레우스 또한 감흥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지그시 상대를 바라보다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감탄했다.

 

“아까 다이아몬드가 한 말의 의미를 알 것 같군. 확실히, 검은 옷만 입는 사람이 화려한 옷을 입으니 분위기가 달라져.”

“그렇지? 그러고 보니 둘 다 검은 옷만 입는 거 같네, 하하.”

 

참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하지만, 왜 이 녀석은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을까?

쟈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자신을 보는 아이렌에게 위화감을 느끼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녀석이라면 보통 이쯤에서 과찬이라며 손을 저어야 할 텐데, 어째서 이리 멍하니 있는 건가. 부끄러워서 얼어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보려 해도, 좀 지나치게 얼이 빠져있지 않나.

 

“아이렌, 왜 멍하니 있어?”

 

결국 보다 못한 쟈밀이 입을 여는 순간. 집중하고 있던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잘게 떨려왔다.

아. 마치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초조한 모습이다.

그의 눈에는, 이 후배의 모습이 꼭 그렇게 보였다.

 

“저어, 그, 저기.”

허둥거리며 손을 젓던 아이렌은 빠르게 뒷걸음질 치더니, 이내 어깨 너머를 힐끔거렸다.

 

“두고 온 물건이 생각났어요, 다녀올게요.”

“뭐?”

“금방 올게요!”

“아니, 잠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쟈밀은 상대를 잡아보려 했다. 그러나 아이렌은 이미 전속력으로 달려 나간 후였다.

그야말로 바람 같은 도망이다. 영문을 모르는 모두는 재빨리 사라지는 후배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지만, 쟈밀은 달랐다. 그는 오래 고민할 이유가 없다는 듯 곧장 시야에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쫓아갔다.

명확하게 무엇이 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이렌이 자신이 말을 걸기 전까진 딱히 이상한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 제가 움직이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무작정 달려 나간 그는 아짐가 저택 안에 들어서자마자 쫓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걸 눈치채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이렌, 아이렌?”

 

이 넓은 대저택에서 길이라도 잃으면 곤란한데. 여러 번 와 본 사람도 제대로 방을 찾지 못할 때도 있는데, 빨리 찾지 않으면 일이 커질 수도 있다. 등골이 오싹해진 그는 숨을 고르고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방금까진 시야에 보였으니, 멀리 가지 못했을 터.

서두르고 흥분한다고 사람이 찾아지는 게 아님을 경험으로 아는 그는 발소리라도 들려오지 않을까 싶어 귀를 기울였다.

 

‘대체 뭐지? 내가 뭔가 실수라도 했나? 아니,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애초에 아이렌은 기분 상하는 일이 있어도 곧바로 티를 낼 만큼 경솔하지 않다. 그러니 뭔가 실수했더라도 이렇게 눈에 띄게 허둥거리지 않을 터.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답답한 마음에 이마를 짚고 깊게 호흡하던 그는, 이내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쿵. 쿵.

그리 큰 소리는 아니지만, 발소리라 하기엔 큰 소음이다. 익숙한 듯 낯선 짧게 두 번 울리는 소리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기던 쟈밀은 이내 피팅룸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그토록 찾던 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대체 뭘 하는 건지, 아이렌은 벽을 짚은 채 가만히 서서 바닥을 보고 있었다.

뒷모습만 보이지만 어째 말을 걸 분위기가 아니라는 게 느껴지는지, 지나가는 사용인들은 의아해하며 그를 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건 아무리 봐도 ‘물건을 두고 나와 찾으러 온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확신한 쟈밀은 한숨을 푹 쉬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이렌, 너…….”

 

여기서 대체 뭘 하냐. 그렇게 말하려 했던 쟈밀은 둥근 어깨를 잡고 제 쪽으로 돌리자마자 하려던 말을 전부 잊고 말았다.

그것도 그럴 만한 것이.

 

“……아이렌?”

 

눈이 새빨개진 아이렌이, 화장이 번질까 봐 젖은 눈가를 문지르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걸 봐버렸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맙소사. 제기랄. 지금 제가 환각을 보는 건 아니겠지.

쟈밀은 낯선 울상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렌이 울고 있다니? 사람이 울 수도 있고 웃을 수도 있다지만, 제가 아는 아이렌은 그렇게 쉽게 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감정적인 면이 있는 것과 별개로, 필요하지 않을 땐 감정을 잘 감추는 그가, 갑자기 이렇게 운다고?

혼란에 빠진 쟈밀은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가볍게 상대를 흔들었다.

 

“왜 그래, 너, 아니. 지금 우는 거야?”

“…….”

“무슨 문제야? 혹시 어디 아파? 방금 그것도 변명인 거고?”

 

집요하게 캐묻는 말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아이렌은 바닥을 보다가 쟈밀의 얼굴을 힐끔 보는 짓을 번갈아 할 뿐,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 그걸 느낀 사용인들이 지나가다 말고 멈춰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주목 당한 당사자들은 수많은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다. 각자의 이유로 바쁜 쟈밀과 아이렌은, 지금 서로에게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아이렌, 뭐라고 말을…….”

 

그리고 쟈밀의 답답함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순간.

훌쩍거리지도 않고 조용히 있던 아이렌이 겨우 입을 열었다.

 

“선배가…….”

“뭐?”

“선배가 너무 잘생겼어요.”

 

숨을 고르며 말하느라 그리 큰 소리로 말하지도 못했는데, 아이렌의 목소리는 숨죽인 복도에 울려 모두의 귀에 들어갔다.

쟈밀은 분명 그 말을 똑똑히 들었음에도, 도무지 상황과 어울리는 대답이 아니었기에 부끄러워할 틈도 없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 뭐라고?”

“쟈밀 선배가 너무 잘생겨서 어지러워요.”

“아이렌, 농담은…….”

“혹시 저도 모르게 죽어서 천국에 왔다가 천사를 본 건가 싶어서 벽에 머리를 박아봤는데, 아픈 걸 보니 현실인 거 같더라고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고 그다음에는 농담이라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더는 부정할 수 없다. 아이렌은, 이 속내를 알 수 없는 계집애는……. 제가 차려입은 모습을 보고 좋아서 이러고 있다는 걸 말이다.

 

‘잠깐, 설마?’

 

분명히 이 녀석, 벽에 머리를 박았다고 했지. 상대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던 쟈밀은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붉은 이마를 보고 아까 들린 소음을 떠올려냈다.

맙소사. 넘치는 기쁨에 주접떠는 말로 한 소리인 줄 알았는데, 정말 벽에 머릴 박아댔단 말인가?

생각 이상으로 제 얼굴에 진심인 아이렌 때문에 황당해져 긴장이 탁 풀린 그는 스르륵 붙잡은 어깨를 놓아버렸다.

 

“진짜 잘생겼다.”

“아이렌, 제발 목소리라도 낮춰주겠어?”

“밖에 나갔는데 누가 세기의 절세미인이라 국보 삼겠다고 선배를 잡아가면 어쩌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아이렌의 두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얼굴이 불타고 있는 건 쟈밀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렌이 격렬히 칭찬해 주는 게 머쓱해 그런 것도 있지만, 그에겐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선명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망했다. 이제 얼굴 못 들고 다닌다.’

 

무슨 좋은 구경이라도 했다는 듯 킥킥 웃으며 속닥거리는 사용인들의 목소리들 때문에 뒤도 돌아볼 수 없다니. 아무리 어른스럽다 해도 아직 17살인 쟈밀은 몰려오는 창피함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다들 자리를 피해줘야겠다고 생각한 건지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점점 사라지더니 이내 없어졌다는 걸까.

수군거리는 이들이 떠나가자 조금은 평정심을 찾은 쟈밀은 슬그머니 상대 턱을 잡아 들어 촉촉해진 한 쌍의 눈을 응시했다. 평소 전혀 꾸미고 다니질 않아서일까. 전통의상에 맞춰 화장한 아이렌의 얼굴은 자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왔다.

 

‘……기껏 이렇게 꾸며놓고 엉망이 되어서는. 거울이나 실컷 볼 것이지.’

 

갑자기 뛰쳐나가서 울 정도로 제 얼굴을 좋아해 주는 건 고맙지만, 이렇게 유난을 떠니 괜히 부끄러워지질 않나. 화장이 지워지지 않게 손으로 눈물을 훑어준 그는 여러 사람의 손길로 다시 태어난 아이렌을 느긋하게 응시했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걱정이 되는 건 자신이어야 하지 않을까.

평소엔 긴 소매 속에 꽁꽁 감춰져 있어 유독 더 새하얀 팔도, 금색과 보라색이 조화롭게 칠해져 빛나는 눈가도, 여러 장식을 넣어 땋은 탐스러운 흑발도, 지나가는 사람마다 다 쳐다볼 것 같아서 초조한데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복잡한 감정이 담긴 한숨과 함께 눈물 젖은 손을 거둔 그는 상대가 어디로든 도망치지 못하게 손을 꽉 잡았다.

 

“화장이 안 번져서 다행이네. 빨리 가자.”

“알겠으니 당분간 이쪽 보지 말아주세요. 제가 심장마비 걸려서 죽으면 다 선배가 잘생겨서 그런 거예요. 제 마음의 준비가 끝나면 먼저 눈 맞출게요.”

“…….”

 

그래. 빌이 왜 아이렌에게 믿고 각본을 맡기는 지 알 것 같다. 주접을 떠는 것만 보면 졸업 후 3년 안에 국제 대회에서 상이라도 받을 것 같은 문장력이지 않나.

또 얼굴에 피가 쏠리는 걸 느낀 쟈밀은 다른 사용인들과 마주치지 않게 얼른 밖으로 나섰다.

04.

 

아이렌이 제대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카림이 집안일을 위해 자리를 비우고, 쟈밀이 손님들을 낙타 바자르로 안내하게 되었을 즈음이 되어서였다.

아, 어쩜 이렇게 멋있을까. 누군가는 제가 유난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안 그래도 취향에 딱 맞는 잘생긴 얼굴이 화려한 전통의상을 입고 있으니까 마치 조명을 받은 것처럼 환하게 빛난다. 동네 구경도 열심히 하고 시장도 열심히 둘러보기도 했지만, 결국엔 쟈밀을 향해 시선이 가고 마는 아이렌은 습관처럼 계속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간 오늘 불꽃놀이 구경 중에도 쟈밀 얼굴만 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아이렌이었지만, 뜻밖의 사건이 그의 긴장을 풀어 주게 되었다.

 

“나쥬마!?”

 

쟈밀이 사 온 샤와르마를 나눠주고 제 몫의 음식을 찾고 있을 때. 돌연히 사라진 제 샤와르마를 먹고 있는 소녀를 발견한 그가 기겁하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

싱글벙글 웃으며 샤와르마를 먹어 치운 낯선 소녀와 눈이 마주친 아이렌은 어쩐지 익숙한 상대의 얼굴에 고개를 기울였다.

 

‘어라, 혹시?’

 

닮았다.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얼굴이랑 똑 닮았다. 눈매라던가 분위기가 영락없이 그를 닮지 않았나. 아이렌은 슬쩍 눈알만 굴려 경악하는 쟈밀과 소녀를 번갈아 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건지 어깨를 으쓱이며 아이렌을 향해 웃어 보인 샤와르마 강탈자는 쟈밀에게 다가섰다.

 

“어서 와, 쟈밀!”

 

완전히 다가가지 않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서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 확신이 맞는 거 같다.

연년생의 남동생이 있으며 쟈밀의 가족관계를 대충이나마 아이렌은 소녀의 정체를 눈치채고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섰다.

 

“……어, 쟈밀 군? 이 여자애랑 아는 사이 같은데, 어디 사는 누구야?”

“처음 뵙겠습니다, 여러분. 저는 나쥬마 바이퍼라고 해요.”

“바이퍼?”

“설마…….”

 

하지만 아직 사태 파악을 못 한 3학년들은 소녀의 대답에 얼떨떨해할 뿐이었다.

나쥬마는 이런 건 명확하게 말해두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는지, 장난스레 검지로 쟈밀을 가리키며 진실을 밝혔다.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이거의 여동생이에요!”

“뭐?!”

 

‘역시나.’ 모두가 놀라고 있지만, 아이렌은 이미 둘의 관계를 확신하고 있었기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 눈에만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이렇게나 닮았는데 혈육이 아니라고 했다면 더 놀랐을 거다. 쟈밀에게 여동생이 있단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던 아이렌은 초면이지만 묘하게 익숙한 나쥬마를 따뜻한 눈으로 살펴보았다.

 

“오빠에게 ‘이거’라니! 아니……, 그것보다 네가 왜 여기에?”

“나라고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고.”

 

만나자마자 티격태격하는 바이퍼 남매의 모습은 정겨운 맛이 있었다. 살벌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그 미묘한 관계. 형제 사이라는 게 가정마다 온도 차이가 심하다지만, 가장 보편적인 모습은 역시 이런 형태가 아닐까.

 

‘귀엽다. 아니, 지금도 충분히 미인인데? 조금만 더 자라면 엄청 예뻐지겠지. 선배랑 닮은 얼굴이니까……. 어라? 그러고 보니, 그럼 선배 어릴 때도 저렇게 귀여운 얼굴이었으려나? 맙소사.’

 

두 사람이 집안 이야기를 하는 건 의도적으로 흘려듣고 나쥬마만 바라보던 아이렌은 새삼스럽게도 오누이가 이렇게도 닮을 수 있다는 사실에 탄식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성장 과정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닮은 건,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제 남동생은 자신과 별로 닮지 않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든 아이렌은 자신보다 한 살 어린 혈육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곧바로 고개를 저어버렸다.

 

‘……뭐, 잘 있겠지. 나보다야 훨씬 사교성도 좋고, 착하고, 똑 부러진 애니까.’

 

제가 없다고 곤란할 사람은 없다. 자신은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니까. 원래 세상에서 먹여 살려야 할 존재도 없었는데, 괜한 감상에 휩쓸릴 필요 없다.

아이렌은 가볍게 볼 안쪽 살을 깨물어 생각을 환기했다. 그 무렵, 사이 좋은 남매의 대화도 어느 정도 마무리된 모양이었다.

 

“이상. 좋아. 볼일은 끝났지? 그럼 당장 집으로 돌아가, 나는 지금 바쁘니까.”

 

누가 봐도 쫓아내려는 태도다. 아이렌은 단호한 그의 태도에 헛웃음 짓고 말았지만,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선후배와 함께 있는데 여동생이 끼어들면 곤란할 테니, 매정하지만 저렇게 나오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해가 곧 배려는 아닌 법.

누나가 둘이나 있는 케이터는 충분히 쟈밀을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 맞아, 나쥬마도 우리랑 같이 관광하지 않을래?”

“예?!”

“쟈밀 군, 우릴 챙기느라 집에 돌아가는 것도 늦어질 테고……. 여기서 우리가 쇼핑하는 거에 어울려 다니면서 오빠랑 쌓인 이야기도 하면 어때?”

“그렇네. 쟈밀이랑 만나는 것도 오랜만일 테고.”

 

심지어 동생이 많이 있는 트레이 조차도 거들고 나서니, 쟈밀의 안색이 순식간에 나빠진다.

 

“아, 안 됩니다!”

“저는 OK예요! 재미있을 것 같고!”

 

어떻게든 나쥬마를 두고 가고 싶은 그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안타깝지만, 나쥬마는 오빠와는 의견이 달랐지만 말이다.

냅다 승낙하는 여동생을 노려본 쟈밀은 어떻게든 동생의 고집을 꺾겠다는 듯 단호하게 선언했다.

 

“나는 널 상대해 줄 틈 같은 건 없어!”

“뭐? 쟈밀이 상대해 주길 바란다고 한 번도 말한 적 없는데?”

“어쨌든 안 돼!”

“너무해~! 모처럼 말도 전하러 왔는데!”

 

다시 옥신각신하는 남매를 보는 3학년들이 킥킥 웃는다. 유일하게 형제가 없는 말레우스에게 신이 나서 형제관계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하츠라뷸의 두 사람을 보던 아이렌은 누구의 편을 들기도 애매한 상태라 따분해하는 그림의 등을 쓰다듬으며 상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나저나 선배들, 즐거워 보이네. 특히 동생 입장인 케이터 선배가 제일 즐거워 보여.’

 

이렇게 보면 아마 평생 동생을 소개할 일은 없을 것 같은 제 입장이 다행스럽게 여겨진다고 할까. 자신과 동생은 사이가 좋지만, 그것과 별개로 타인에게 왈가왈부 당하고 싶지 않다. 제 처지를 딱하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아이렌은 그런 느긋한 생각이나 하며 소란의 현장에서 한 발 떨어져 섰다.

 

“다들 놀릴 생각만 가득하잖습니까! 나쥬마, 당장 돌아가!”

“너무 해. 여동생에게 이렇게 차갑게 굴다니. 믿을 수 없어. 다들, 어떻게 생각해요?”

 

여동생을 말리면서도 선배들의 쑥덕거림을 다 들은 쟈밀은 결국 최후통첩에 가까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나쥬마는 외모뿐만이 아니라 성격도 오빠를 쏙 빼닮은 건지,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대담하게 손님들에게 동의를 구해왔다.

그리고 그 전략은, 아주 효과적으로 먹혔지.

 

“데려가도 좋잖아. 쟈밀.”

“열사의 나라를 잘 아는 가이드가 귀여운 가이드가 한 명 더 늘어난 거고!”

“그렇지. 그리고 가족은 소중히 여겨야지.”

 

트레이와 케이터, 말레우스가 차례차례 허락하자 남매의 눈이 동시에 아이렌에게 향했다.

‘제발 너라도 반대해 줘라.’ 쟈밀이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나쥬마가 ‘허락해 주세요!’라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는 걸 어찌하겠나. 취향에 쏙 맞는 얼굴이 동시에 자신을 응시하는 바람에 잠깐 숨이 막힌 아이렌은 고민 끝에 제 욕망을 따르기로 했다.

 

“시누이에게 점수를 따고 싶으니 저도 찬성이에요.”

“아이렌!”

“하하.”

 

‘시누이’라는 단어가 신경 쓰인 걸까. 나쥬마는 제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음에도 기뻐하기보단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상대가 제 오라비를 놀리기 위해 농담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제가 상상하는 그런 상황이 맞는지 확신이 서질 않는 모양이었다.

정답을 알려줄 생각이 없는 아이렌은 나쥬마와 눈을 맞추기 위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선배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기쁘네요. 선배랑 닮아서 엄청 미인이고.”

 

아이렌에게 있어 이 칭찬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고의 칭찬이었다. 하지만 ‘평범하고 보편적인 남매’의 여동생인 나쥬마는 그 말을 듣자마자 펄쩍 뛰며 쟈밀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네? 제가 이거랑 닮았다고요!?”

“너, 그 말 무슨 뜻이야!”

“그리고 이거랑 닮아서 미인이라니, 쟈밀이 미인이에요?”

“나쥬마!”

 

누가 봐도 닮았는데.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들 동의할 텐데.

아이렌은 그 사실부터 짚어주어야 했지만, 가장 마지막에 들은 질문만이 뇌리에 박혀 심각한 얼굴로 즉답했다.

 

“그거야 당연히 미인이지. 나는 매번 선배 얼굴 볼 때마다 황홀한데……. 어떻게 같은 인간인데 이 사람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고.”

 

생각이라는 걸 거치지 않은 듯 자연스럽고도 빠르게 튀어나온 대답에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세상에~!’ 케이터는 너무나 직설적인 찬사에 닭살이 돋아 어깨를 떨며 감탄했고, 트레이와 그림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말레우스는……, 못마땅하다는 티를 내며 눈을 가늘게 뜨긴 했지만 구태여 쓴소리는 하지 않았지.

혈육을 향한 극찬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나쥬마는 결국 대놓고 쟈밀에게 물었다.

 

“쟈밀, 너 설마 저 언니에게 이상한 마법 쓴 거 아니지?”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좋겠군. 그럼 숨 쉴 때마다 저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을 텐데.”

“……우와.”

 

차라리 ‘넌 또 무슨 말을 하느냐’라며 화를 냈다면 웃어넘겼을 텐데. 대체 얼마나 빈번히 저런 강도의 칭찬을 하면 쟈밀이 저런 말까지 할까. 떨리는 동공을 감추지 못한 나쥬마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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