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꽃 설탕절임 2
말려서 박제한 추억같은 이야기를 적어요
내가 울건 말건, 이 세계가 종이와 2차원으로 바뀌어버리건 말건, 박제된 페이지 속에 남을까 두려워하건 말건, 이 세계가 펜선과 잉크로 직조되었건 말건 시간은 흐르고 지구는 돈다. (근데 그 만화가가 돌아가는 지구와 우주도 만화에 그렸을까? 그리지 않았다면 그 세계 밖의 부분들은 여기서도 실존할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세계가 순식간에 뒤집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받아들일 무렵 나는 배구 경기 비디오 테이프를 하나 쥐고 대문을 두드림으로서 테츠로와 화해했다.
학습은 천천히 이루어졌다. 이 애가 내가 전생에 본 만화에서 나오는 닭벼슬 머리 라이벌 학교 주장 캐릭터가 아니라,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 내가 눈 깜빡했다가 뜨는 그 잠깐의 사이 이 애는 펜선과 잉크로 되돌아가버리지 않는다는 사실. 내가 잠들어도, 내가 눈을 감아도, 내가 세상을 떠나도 이 세상은 회전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들. 그걸 하나하나 인지하고 의식에 새기는 과정. 나는 그 무렵에서야 치이 쨩은 배구 싫어하지? 라는 테츠로의 말에 이제는 아냐, 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나는 이 세계가 하나의 만화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나를 이 세계 속에 온전히 파묻어 보자고 결심하게 됐다. 그 즈음 중학생이 되었다.
‘같은 중학교 갔으면 좋았을 걸.’
거실 마루에 대자로 누워 풀풀 내리는 눈을 바라보던 테츠로가 먼저 불쑥 그렇게 말했다.
‘그러게.’
마당에 잔뜩 쌓여가는 함박눈을 보며, 나는 거짓말을 했다.
‘테츠로 친구랑도, 다 같이 같은 중학교에서 놀았으면 재밌었을 텐데.’
눈치가 제법 빠른 테츠로는 굳이 그게 거짓말이 아니냐고 반문하지 않았다. 그건 지금까지 나름의 우리 사이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자, 내가 이 세계와 나 사이에 선을 긋고자 한 최종 저지선이었다.
그러니까, 뭐랄까. 이 세계의 존재를 제대로 납득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나는 테츠로 외의 다른 ‘원작 인물’을 도저히 못 견뎌 했다.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확인사살 당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예의 그 인물이 머리 좋고 영리해서 골치 아픈 종류라면 더더욱.
테츠로는 내심 제 친구들끼리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지 나를 코즈메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내가 워낙 은연중에 싫어하는 티를 내서 접은 듯 했지만. (고작 초등학생 수준의 배려심이라고 생각하면 놀랍게도.) 어지간하면 순순히 어울려 줬겠지만 당시 나에게는 도무지 그럴 여유가 없었을 뿐더러, 코즈메는 개중에서도 가장 껄끄러운 기피 대상이라 어쩔 수 없었다. 실은 같은 초등학교 출신에다 내내 옆 반이었던 만큼 계속 마주쳤다. 하지만 그 아몬드형 눈동자가 지그시 나를 응시할 때면,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 탓에 도무지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상대만큼은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전부 속속들이 나를 헤집고 피부를 뒤집어 까밝힐 것 같다는 위기감.
그건, 고작 초등학생을 상대로 과한 상상이었을까?
“…농담이지?”
어색하게 웃으며 발을 뒤로 빼는 나의 손목을 켄마가 조금 더 빠듯하게 쥔다. 채근하는 듯한 목소리. 어딘가 느긋한 듯 하면서도 조바심이 새어 나오는 어조.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지금이 아니면 안 되니까 하는 소리야.”
…과한 상상이었을까?
“줄곧 묻고 싶었어, 치이.”
누군가는 그렇다고 비웃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지금 와서 감히 단언하건대, 전혀 아니었으며 타당한 우려에 불과했다고 말해보고 싶다. 그래, 이 순간. 지금 내 몸에 화살처럼 꽂혀 들어오고 있는 질문들을 보라.
“네가 아는 미래는, 이제 끝났어?”
여전히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 아래, 완전히 조각조각 해부당하는 감각과 함께.
이제와서 다시 뒤집자니 멋이 좀 없지만, 장르가 순정만화였냐던 말을 취소하고 싶다. 이건 스릴러다.
어떻게 했냐고 묻지 마라. 바로 도망쳤으니까. 너무 놀라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웃으며 반문할 틈조차 나지 않았다.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어 정지되어 버린 탓이다. 나는 그 앞에 대고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짤막한 한 마디만 남기고 홀로 먼저 도쿄 체육관을 달려나갔다. 뒤에서 다른 어딜 가냐고 당황해서 3학년 선배들이 붙잡건 말건…와중에 테츠로는 예상했다는 듯 나를 더 붙잡지도 않았다. 열받았다. 너는 이거 같이 눈치 채고 있었다 이거지.
어디 가서 상담할 수도 없는 문제다. 소꿉친구가 저한테 고백했어요. 여기까지야 평범하지. 소꿉친구가 제가 전생에서 이 세계의 미래를 보고 왔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아요…누구한테 어떻게 상담해도 정신과 확정 아닌가? 누구한테 들키게 될 거라곤 그러니까, 상상도 못 해봤다. 대체 누가 옆에 있는 친구가 전생에서부터 미래를 보고 온 거 아니냐고 의심해 보겠냐고. 나는 다시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노란 시선을 떠올렸다가 몸서리를 쳤다. 어디서부터 눈치챈 거지. 어디서부터 추측한 거지?
“지로───.”
“나 잔다…….”
그리고 이럴 때마다 별로 도움 안 되는 웬수 같은 친구놈 하나. 눈 앞에. 집으로 도망쳐 가봤자 대문 앞에 코즈메 켄마가 서 있을 것 같아서 쫄아서 못 돌아갔다. 결국 나의 선택은 다시, 가장 익숙한 곳이다. 졸업한 옛 모교의 정문 근처 세탁소의 2층, 나를 비롯한 친구들 그룹이 매일같이 농땡이를 피우며 빈둥거렸던 우리의 아지트. 아니나 다를까, 방 주인은 침대에서 빈둥거리면서 주무시고 계시고.
“나 진짜 큰일났어어어어…….”
“쿠울…….”
이 자식 진짜 자네. 나는 침대 위로 엎어졌던 몸을 벌떡, 들어올려서 손을 뻗어 지로의 뺨을 찔러보았다. 중학생 때만은 못하지만 여전히 말랑말랑하다. 찹쌀떡 같다. 찔렀는데도 별 말 없이 뒤척이기만 하는 걸 보니 그 사이에 잠에 푹 빠져든 모양이다. 이건 이거대로 좋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떠들고 생각 정리 하고 털어버리면 되는 거다. 나는 시트를 와그작와그작 손아귀에 우겨넣은 채로 쿵, 한 번 더 매트리스 위에 이마를 박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내가 켄마한테 환생자라는 걸 들킨 것 같은데…….”
…… 털자. 어차피 지로는 한 번 눈을 감으면 아토베가 와도 못 깨운다. 그러니까 얘가 자는 김에 눈 딱 감고 아무도 못 듣는 대나무 숲에 말하고 터는 거다. 그렇게 입을 연 찰나였다.
“뭘 들켰다꼬?”
와. 이건 진짜 계획에 없었는데, 큰일났다.
등짝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그대로 지각하며 나는 삐걱삐걱 고개를 들렸다. 문간에는 손목에 편의점 비닐봉투를 건 채로 떨떠름하게 서 있는 유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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