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도서관

[BL]잠입

1차 BL 자캐 페어 : i**님 연성 교환 샘플

신이 울먹이기라도 하나. 울상인 하늘을 힐끗 올려다본 E의 감상은 그러했다. 나름 감상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실은 흐린 날씨에 대한 애먼 원망에 가까웠다. 그는 신을 믿지 않았으므로.

─경찰청 차장으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A 조직에 잠입할 것. 물론 직접 E에게 내려진 명령은 아니었다. 전달되고 전달되어서 E가 있는 밑까지 하달된, 그저 그런 평범한 임무 중 하나였다.

스파이 임무라니. 말단 경찰에 가까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임무였다. 목표는 마약 유통과 관련해서 최대한 정보를 빼내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장도 처리하면 더 좋고. 과자 봉투에서 감자 칩을 꺼내 먹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정말이지, 너무 쉬워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수장도 덤으로 처리하면 좋겠다고? 무슨 마피아의 보스를 잡는 걸 어린애 손에서 사탕 빼앗듯 이리 쉽게 말한단 말인가. 아무리 자신을 쉽게 봐도 유분수지. E.G는 자신이 속한 조직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경찰청장의 아들이었다. 경찰청장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인생을 쉽게 살아오진 않았다. 오히려 무시받았으면 무시받았지.

낙하산 취급하며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무시하는 말투로 업신여기거나 일부러 중요한 일정을 알려주지 않아 공지를 놓치게 만드는 일도 허다했다.

그럼에도 E는 꿋꿋이 업무를 수행했다. 비록 신뢰하는 동료 하나 없는 직장 생활이었지만, 나름 열심히 일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떨어진 건 결국 이런, 이용해 먹다가 수틀리면 바로 버릴 수 있는 장기말 같은 임무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까이라면 까여야지. 경찰이란 원래 상부가 굴리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직업 아니던가. 새어 나오는 한숨을 갈무리할 새도 없이 임무에 투입됐다.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연기에는 자신이 없는데, 마피아들 앞에서 표정 관리는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아니,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려나. 유약한 내면을 숨기기 위해 날카롭게 외면을 가장하며 다녔던 E였다. 하던 대로 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신입 마피아로서 A 조직에 입사하던 그날. 놈을 만났다.

“신입?”

“어, 음. ...당신도 신입?”

“O라고 합니다~. 나도 이제 막 A에 들어온 신입이지. 그쪽은 이름이?”

“...E. E.L.”

“E구나. 그럼 E라고 부를게. 말 놔도 되지?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아니면, 나이에 비해 영한 인상인 건가?”

“...상관없어. 그럼 나도 말을 놓지.”

O.S. 이것이 녀석과의, O와의 첫 만남이었다.

*

분명 어영부영 친해진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O라는 녀석은 붙임성이 좋았고, 자신은 그런 그에게 끌리듯 경계를 조금씩 허물었다. O는, 아니 O는. 어느새 잠입이라는 본래의 목적조차 잊게 만들고 있었다. 그만큼 둘은 가까운 사이로 변모했다.

“─E, 위험해!”

“...!”

위험한 상황에 처한 자신을 구하려다 상처를 입거나.

“함정이야.”

“뭐?”

“딱 봐도 우릴 미끼로 큰 걸 낚으려는 모양인데. 순순히 당할 수는 없지.”

위기를 기회로 살려 상황을 타개하는 등, 수많은 상황에서 O는 E를 도왔다. 이 모든 게 계획된 상황이라는 걸 몰랐던 그는 그저, 친우에게 고마움을 느꼈을 뿐.

그래. 이제는 그를 그저 그런 동료가 아닌 벗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날씨가 좋았던 어느 오전, 드디어 ‘그’ 사건이 발생한다.

*

“...하아...”

꼴사납기 짝이 없다. 마약 관련 임무를 받고 마피아 조직에 잠입한 경찰이 도리어 마약에 중독되다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E는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서는 느리게 한숨을 토해냈다. 땅이 몸을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는 느낌이었다.

간신히 푹 숙인 고개를 들어 떨리는 시선으로 소파 앞 낮은 앉은뱅이 탁자 위를 훑었다. 새끼 손톱만한 하얀 종이 조각이 이리저리 놓여 있었다. 전부 E가 복용한 LSD의 흔적이었다.

목이 말랐다. 입을 벌리자 색색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야에 존재하는 모든 빛이 번졌고 동시에 강한 흥분과 마비감을 번갈아가며 느껴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래서는, 임무는커녕 진짜 범죄자가 되어버리게 생겼다.

갑자기 O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녀석은 지금 뭐하고 있으려나. 조직 어딘가에서 또 농땡이 피우고 있을까. 아무리 말단이라지만 너무 여유로워 보이는게 왠지 마음에 걸렸다.

“흐윽... 아, 안되겠다...”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신음성에 반사적으로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바닥에 발을 딛자 몸이 기우뚱하더니 실 끊어진 인형마냥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미치겠네...”

아무렇게나 꿇어앉은 자세 그대로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자 열이 끓는 것 같은 환상이 동시에 일었다. 시각과 촉각이 동시에 발현했다. 이게 공감각이라는 건가. 시각과 청각을 손으로 만질 수 있다니.

시간이 조금 지나자 시야 뒤로 무한한 색채감이 발현되었다. 그 환상 속에 몸을 맡기고 마약을 했다는 죄책감조차 잊은 채 푹 잠겨있는데, 갑자기 어떤 그림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E.”

“...아.”

고개가 부드럽게 들어 올려졌다. 아, 너는 O인가? 아니, 그가 아닌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E는 풀린 눈으로 헐떡이며 제 턱을 붙잡아 들어 올린 O를 간절히 올려다보았다.

“쯧, 너무 많이 넣었나.”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회전했다. 그러자 사방에서 형형색색의 빛이 폭발하고 동시에 흘러내렸다. O는 그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E를 안아 올려 안쪽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갔다.

“...경찰청장 아들이라고 해서 뭐 특별한 건 없었네.”

낮게 중얼거린 후 천천히 낡은 침대에 그를 눕혔다. 나무가 마찰해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트립 상태에 빠진 E가 힘에 겨운 듯 끙끙거리며 눈을 감았다. O는 그런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지금은 저대로 두어야 했다. 환각이 가라앉을 때까지.

***

“...으윽...”

분명 잠을 자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눈만 감고 있었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침대 위였다. 이불 위에 얌전히 누워있는 걸 보니 약을 하고 취한 상태로 방에 들어와 그대로 뻗어버린 듯했다.

환각이 사라지자 엄청난 자괴감과 후회가 들이닥쳤다. 심장이 느리게 뛰는 것마저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몸은 정적인 상태이건만, 머릿속은 이미 엉망이었다. 이제는 어쩌다 약을 하게 되었는지조차 불투명했다. 직접 할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내가 왜 중독이 된 거지...? 도저히 그 이유를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E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자책은 뒤로하고 일단은 밖에 나가봐야 했다. 자신이 멍청하게 약에 취해 뻗어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지 또 누가 알겠는가.

방을 나서자 거실 한가운데 놓인 소파에 앉아 느긋이 차를 마시고 있는 O의 모습이 보였다. 그 장면을 보니 왠지 마음이 놓이는 한편 불안감이 조금씩 치밀기 시작했다. 탁자 위를 급하게 훑으니 LSD가 묻은 종이 조각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치웠음에 분명했다.

“...O.”

“아, 드디어 일어났군. 우리 잠자는 공주님.”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며 O가 웃는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았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이제는 더 이상 소리가 시각으로 보이는 일은 없었다. 그걸 인지한 E는 인상을 찌푸렸다.

“공주님이라니. 농담이 심하네.”

“Acid? 초보자가 혼자서 하기에는 꽤 난이도가 있는 걸 하셨네.”

“...”

E는 아무 대꾸 없이 다가와 O의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손에 깍지를 낀 채 이마에 대고 한동안 말없이 부동자세로 있는데, O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나를 부르지 그랬어.”

“......”

“LSD는 반드시 여러 명이 있을 때 해야 하는 거, 몰라? 배드 트립에 빠지면 어쩌려고.”

“무슨 상관이야.”

자기도 모르게 말이 세게 나왔다. 아니, 내가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었는데. 갑자기 기분이 급강하했다. 나도 나를 모르겠어. E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나 O가 계속 말을 거는 바람에 다시 눈을 뜨고 그를 노려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으니까.”

“네가 뭘 도와주는데?”

“뭐, 여러 가지로... 나중에 플래시백이 터졌을 때를 대비해서?”

“필요 없어. 나는...”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사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분명 약을 직접 하려고까진 안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중독이 되어 있어서...”

“그게 마약의 무서운 점이지. 왜, 네 홍차에 독을 탔어 같은 말도 있잖아. 누군가 네가 마시던 차에 약을 탔을 수도 있지.”

“......”

대체 네가 그런 말을 왜 꺼내는지 모르겠다. E는 한숨을 쉬며 O를 향해 말했다.

“설마 O 네가 탔다는 소리라도 하고 싶은 거야?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니까─”

“내가 탔다면. 어쩔래?”

그 아무렇지 않은 말투의 말 한마디에 E가 대꾸할 말을 잃고 침묵에 잠겼다. 그런 말을 입에 담는 O의 얼굴을 감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이 약을 탔다는 소리에 당장 대답할 말조차 생각나지 않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분했다.

“E. 날 봐.”

“...”

“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냐. 너한테만은, 너한테만큼은 내가 거짓말 한 적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네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지금, 네게 기회를 주는 거야.”

그 말에 문득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E는 퍼뜩 고개를 들어 O를 쳐다보았다. 소파 위에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회...?”

“응. 못 알아들은 것 같으니까 더 쉽게 말해줄까. 말하자면, 네게 선사하는 힌트 같은 거지.”

“...설마...”

신입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여유로운 자태와 행동. 종종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불투명한 행적. 초보답지 않은 전투 실력과 놀라운 두뇌 회전 속도. 그리고... 스파이로 잠입한 자신에게 약을 먹였다고 말하고 있는 그.

“정식으로 인사하지. O.S, 미진하지만 A 조직의 수장직을 맡고 있는 몸이라. 네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어, E.L. 아니지. E.G.”

“...S.”

네 진짜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보자, 날카로운 울림이 심장 속에 맺히는 기분이었다. 설마 조직 안에 잠입했을 적부터 이미 알고 있었을 줄은.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마약에 대한 정보는 얻었으나 중독자 너부랭이가 되어버렸고. 수장의 목이라도 따야 하나? 하지만...

믿었던 사람의 배신. 생각보다 크게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사실은 E 자신도 조금은 그를 의심하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으니 배신감 또한 없으리라.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자신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서.

“─E.”

“...아.”

갑자기 시야가 선명해졌다. 눈앞의 색채가 진해지면서 빛이 번지기 시작한다.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고, 온전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O는 제 앞에 무릎을 꿇은 E를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의 여유로운 미소는 어디 가고 무감각한 표정만이 그의 얼굴에 남아있었다.

“아... 흐윽...”

그리고 충격으로 인해 플래시백을 겪는 E를 감상하듯 주시했다. E는 지금 아린과 처음 만났을 적의 환각과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웃는 O의 모습을 번갈아 가며 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풍경이 흘러내리고 동시에 몸이 너무 뜨거웠다.

내가 이렇게 나약한 존재였던가. 약 하나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고 중독이나 되어서, 적 앞에 무릎마저 꿇어버리는. 역시 난... 경찰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었나. 신뢰 또한 잃어버리고, 무능력하게 약에 취해 임무 또한 실패해버리는.

희미해져 가는 정신 속에서 무감각한 표정의 O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짐승을 길들이려면 역시 약이 최고지. 그 말을 들은 순간 가슴 한구석에서 무언가 빠른 속도로 자라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자괴감도, 자책도 아닌. 이번에도 실패하기 싫다는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E는 더 이상 아버지 슬하에서 온전히 보호받지도 못하고 완전히 홀로 서지도 못하는 실패자가 될 수는 없었다.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자 비릿한 피 맛이 혀끝에 닿았다. 그러자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E는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들어 그대로 탁자 다리에 부딪혔다. 쨍그랑─ 컵이 산산조각이 났고, 부서진 컵 조각을 들은 E는 그대로 자신의 팔에 그것을 그었다.

“...!”

“...큭, 하아...”

LSD의 정신적 의존성을 차단하기 위해 자해를 한 E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O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올려다본 그의 표정은 놀라움에 잠식되어 있었다. 그가 흔들렸다. 어째서? 그에게 한 방 먹였다는 타격감 보다는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O의 시선은 피에 젖은 팔의 셔츠자락에 머물러 있었다.

“...나도, 혼자인 건 아니야.”

“...뭐?”

“너처럼 두뇌회전이 빠르진 않아도 대비책은 강구해 두었다는 말이야. 내가, 멍청하게 혼자서만 잠입했을 거라 생각했어?”

“...!”

E의 말이 끝나자마자 현관문이 거칠게 열렸다. 쾅─! 그리고 이어서 들이닥친 건 특임대 경찰들이었다. 이미 건물을 장악한 그들은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고는 일제히 총구를 O에게로 겨누었다. 넓은 거실이 사람들로 꽉 찼다. 그러나 O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야, E. 이건 날 위한 선물?”

“O, 네가... 졌어. 이제 인정해.”

마약 부작용으로 숨이 자꾸 찼다. E는 떨리는 호흡을 갈무리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해한 왼쪽 팔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몸이 뜨거우면서 동시에 차가웠다. 오른 손으로 피에 젖은 팔을 부여잡고 그에게 터덜터덜 다가갔다.

“G 가문의 사람들도 섞여있네. 하긴, 제 자식을 사지로 몰아넣는 부모가 어디 있겠어. 그렇지? E.”

“......”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굳이 대꾸하지는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여유로운 자세로 서 있는 O에게 가까이 다가간 E는 그를 올려다보며 넥타이를 쥐어 목을 압박했다.

“내 목적은 너를 잡는 게 아니야.”

“아니었어? 난 또, 내가 인기가 많아서 다들 이렇게 차려입고 온 줄 알았지.”

“...이 조직을, 무너뜨리고. S거리에 흩어진 마약 루트를 차단하는 게 내 목적이다. 너 같은 건, 계획에 포함되지도 않았다는 소리야.”

“...”

그 말에 O의 눈썹이 꿈틀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고.”

“그래. 넌 아무것도 아니야, O.”

“그렇다면 반은 성공했네. 보스인 나를 잡았잖아? 축하해, 에릭.”

O가 싱글거리며 웃었다. 그 낯을 보니 왜인지 기분이 더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E는 조금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모든 모습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 네게 기회를 줄게.”

상황이 반전되었다. 이제는 기회를 운운하는 자가 O에서 E로 바뀌어 있었다. E는 붙잡고 있는 넥타이를 아래로 잡아당겨 그의 고개를 제 쪽으로 숙이게 만들었다. O는 저항 없이 순순히 얼굴을 내려주었다.

“선택해. 이대로 범죄자로서 연행될지, 이 자리에서 사살당할지.”

“...잡히거나 죽거나. 그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건가.”

O가 중얼거리듯 귓가에 속삭이자 E가 무언가 눈치채듯 황급히 넥타이를 놓고 고개를 떨어트리려 했지만, O 쪽이 더 빨랐다. O는 E를 그대로 마주 껴안고 번개 같은 속도로 소매 속에서 나이프를 꺼내 그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경찰들이 움찔하며 총구를 재정비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경찰청장의 사랑스러운 아드님의 목이 날아갈 걸.”

E는 그의 품에 갇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너무 꽉 끌어안은 탓에 호흡이 부족했다. 몸에 남아있는 마약의 잔흔이 혈관에 아직 남아있어서,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조차 없었다.

자신의 안일함 탓에 또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또, 내가... 가빠지는 호흡과 암전하는 시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야가 까맣게 물들면 동시에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또다. 플래시백이 재발하고 있었다.

몸을 벌벌 떨면서 축 처진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E를 흘끗 본 O는 그를 재차 끌어안았다. 그래도 별 반응이 없었다. O가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 제 앞에는 총구를 겨눈 채 고민을 하는 듯한 여러 쌍의 시선이 몰려 있었다.

고민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E는 그들의 아군이었다. 동시에 그가 현재 경찰청에서 처한 입장과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면.

“선택의 기회라. E, 네가 틀렸어.”

──선택은 내가 아니라, 네가 하는 거야.

콰앙─!

폭발적인 소음이 O의 뒤에서 쏟아지며 흰 연기가 자욱하게 깔렸다. 경찰들이 허둥지둥 하는 사이에 O는 E를 들쳐업고 현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런 그의 뒤로 마피아들이 들이닥쳤다.

곧이어 난파극이 시작되었다. 총소리와 칼부림 소리, 온갖 소음을 뒤로 한 채 O는 E의 상태를 살폈다. 좋지 않았다. 마약에 취한 몸인데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O는 숨을 색색 몰아쉬며 달뜬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E를 바닥에 뉘였다. 그리고 그의 등과 무릎 밑에 손을 넣어 다시 제대로 안아 올렸다. 품에 얌전히 안긴 E는 무방비한 상태 그 자체였다.

“보스. 이제 어떻게 할까요?”

E를 안고 있는 O의 곁으로 누군가 은밀히 접근했다. O는 E를 향한 시선을 떼지도 않고, 상대를 쳐다보지도 않은 상태로 무심히 말했다.

“알아서 처리해. 이 정도 인력도 커버 못 하는 쭉정이 집단이었나, 우리가?”

“알겠습니다.”

그림자가 빠르게 사라졌다. O는 E와 함께 현장에서 느긋한 자태로 벗어났다. 해가 빠르게 저물었다. 귓가에서 이명이 퍼졌다.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E, 이 바보같이 천진한 사람아. 네 간절함을 모르는 그런 곳에 속해있기보다는, 그냥 내 곁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예전처럼 지내자.

내가 너에게 실없는 농담을 건네고 네가 그런 내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던 그 때처럼. 나는, 나만은 너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수 있어.

고개를 숙여 E의 이마에 입술을 지긋이 누른다.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예전처럼. ─내가 내민 손을 네가 잡는다면.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곧 제 손에 떨어질 무언가를 기대하며, O는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일반 글 커미션]

오월의 도서관 - 마법 비전서 칸셰 타입

- 키워드 : 경찰 / 마피아 /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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