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2학년인데 종업식때 남사친이 꽃다발 들고 옴 ㄷㄷ;

현재 학교 관습과 다를 수 있음.

햇살이 아플만큼 창창했던 여름과 찬 바람이 부는 겨울, 그 해 나는 유난히도 절절한 청춘을 보냈다.

짝사랑하던 선배에게 한 고백은 '소중한 후배' 라는 말로 대차게 까이질 않나, 그 와중에 친구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졸업식 직전에 모두 커플이 되어 학교는 완연한 핑크빛을 만들어냈다. 허망했던 나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 끝난 이후에 남겨진 것은 김연우의 손수건에 추하게 눌러붙은 내 눈물자국 뿐이었다.

내가 우울해져서 모두가 집에 간 이후 텅 빈 방과후에 계단에 쪼그리고 앉으면, 김연우는 내가 좋아하는 젤리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아무말 없이 옆에 앉아 내가 다 울고 아이스크림을 입에 가져갈때까지 기다려주곤 했다.

고백한지 15분만에 문자로 거절받은 그날도 아마 그런 날이었을 것이다.

"야, 그 선배 여자문제 때문에 어차피 사귀어도 골치만 아팠어."

"허엉... 허어어엉..."

"아, 진짜 곽유연 진짜 더러워 죽겠어. 코 좀 풀어."

내 손에 닿으면 본인의 손수건의 행보가 어떻게 될 지 뻔했으면서도 김연우는 아랑곳 않고 손수건을 기껍게 내 손에 들려주었다.

생각해보면 김연우는 다정했지만 그만큼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이제 진짜 공부만 하려고."

"... 그래. 그래라."

"그래도 좀 낫다. 너 있어서."

사춘기 여학생이 기분 풀 데가 유달리 있었을리가 없었다. 공부만 하느라 또래 여자친구들과 노는것을 놓치고, 그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겉돌았던 여학생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그래서 나에게는 김우연이 제법 소중한 존재였다. 우연히 학교 동아리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동급생 이었기에, 김우연과 이야기 하고 맛있는 걸 먹으면서 내 마이너스 감정들이 고여있지 않고 해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걸까? 그 때 김우연에게 느꼈던 감정은 단순한 우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했다.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추하게 울고 있는 나를 웃겨주기 위해 툭툭 나를 건들면 그 소년이 그때부터 좀 더 소중하게 느껴진 것도 그맘때 쯤이었나.


시간은 좀 더 빠르게 흘렀다.

우리는 곧 수능을 준비해야하는 고등학교 2학년들이었다. 동아리 활동을 안 하는 건 아니었지만 만나도 뭔가 특별한 걸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영화 감상부인 두 사람이 영화를 보는내내 하는 것이라곤, 영화의 재미도나 오늘 급식의 평가나 방과후의 활동예정에 관한 것들이었다.

나는 그 시간이 오래 가길 빌었지만 김연우는 그냥 있어도 그런 듯, 아닌 듯, 하는 표정이었기에 아쉬워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영화를 전부 감상하고 독후감 종이를 챙겨 나가는 길에 김연우는 나를 불러세웠다. 앞으로는 동아리 활동을 하기가 어려우니 혹시라도 동아리 활동 때 자신이 보이지 않더라도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왜? 뭔 일있어?"

"아니, 다른 건 아니고... 공부 해야한다고 말씀드리니까 빼주시던데."

"너 공부 따로 안 하잖아."

"어, 그렇긴 한데... 우리 곧 고3이잖아. 공부량 좀 늘릴까 싶어서."

김연우의 말은 논리적이었지만 나는 그 소리에 서운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나는 영화감상을 하는 그 시간도 소중했는데 너는 공부한다고 쉽게 버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는게 조금 야속했다. 만난지 그렇게 오래된 우정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랑 부활동을 하는게 재미있길 너도 바랐는데 너는 있건 없건 상관없었을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말 없이 사라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야하나? 복잡한 마음이 공존했지만 김우연에게 티를 낼 순 없었다.

"너 없이 나 누구랑 영화 봐..."

"부에 친한애들 많잖아. 걔네랑 보면 되지."

"나도 공부한다고 빠질까?"

"됐어. 너 그런거 안해도 성적유지 되잖아."

"아니야, 나 슬슬 성적도 떨어지고..."

"..."

내 변명을 듣지 않겠다는 듯 김우연은 내 말 뒤로 울리는 종소리에 몸을 이미 떼어내곤 '잘 가.'라는 입모양을 내고 있었다.

그렇게 내 두번째 짝사랑도 끝나는 건가 싶었다.

내가 포기만 안 했다면.


3학년 선배를 짝사랑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럼 김우연을 짝사랑하냐고 물으면?

짝사랑... 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우연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는 단언할 수 있었다. 이걸 짝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는건가? 가슴이 뛰는 것도 아니고 매일 생각나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손이 닿으면 전기가 통한듯 두근거리고 닿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닌데.

이딴 허접하고 낡았지만 집요한 감정을 감히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지 구분은 되지 않았지만 김우연을 보지 못하는 기간동안은 이따금 한번씩 김우연의 여상한 목소리가 뇌내를 맴돌면서, 동시에 화가 나기도 했다.

'공부해야해서 동아리에 못나와. 잘 가.'

'공부해야해서 동아리에 못나와. 잘 가...'

'공부해야해서 동아리에 못나와. 잘 가... ...'

"하..."

그렇게 통보하듯이 공부한다고 해버리면 내가 거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느냔 말이야.

공부한다는 고등학생 잡아봤자 놀자고 유혹하는 꼴밖에 안되는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김우연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 한마디 정도는 쏴줬어야 한다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다.

뭐... 예를 들어 '너는 내가 중요해 공부가 중요해!' 라던가. '나 버리고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라던가... 이런 이야기 꺼낼 수 있을리도 없고 하나같이 진부하고 유치한 대사들이었지만 그 앞에서 그냥 떼를 쓰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짜증났다. 공부하는 애 방해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연락도 안하고 쉬는 시간에도 안 찾아가고 방과후에 계단에서 쪼그려 우울해하는 짓도 그만뒀다. 그러면 김우연이 달려올 걸 알아서 안했다. 그런데 이런 배려도 모르고.

그렇게 참아왔던 것들이 종업식 날에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책상이랑 사물함 다 비워라. 안가져가면 다 버린다. 끝나고 반 정리 도와줄 애들 있으면 끝나고 남고. 청소 다 끝나면 햄버거 사줄게."

"나머지 애들은 학기 끝났다고 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책가방도 무거울텐데 퍼뜩 집에 들어가라."

"한 해 동안 우리 2학년 8반 정말 고생 많았고, 내년 새학기는 수험생으로서 마음 다잡고 공부해서 원하는 진학을 목표로..."

선생님의 애틋하고도 걱정이 담긴 훈화는 창가에 있는 난로와 섞여 훈훈하게 마음에 스며들었다.

훈훈함과 비례되는 무거운 책가방은 오래 들고 있으면 어깨가 나갈 것 같았지만 주변의 쇼핑백과 간이 책꽂이채로 들고가는 다른 반 아이들을 보니 자신은 그렇게 무겁지도 않다는 위안도 함께 생겼다.

그래, 오늘은 짐도 많고 부모님도 바쁘다고 못 오셨으니까 김우연 생각 할 새도 없다. 어차피 나하고 사진찍을 애들은 없을거고, 이대로 집에 무사히 잘 도착해서 교과서 정리하고 종업식 이후에 방학이니까 공부 플랜도 좀 짜고 그 전에 낮잠 좀 자고...

그런 생각으로 종업이 끝난 이후 나는

... 방과후 중앙 문 기둥에 기대어 있었다.

"... ..."

종업식이다보니 평소처럼 완전히 학교가 비질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는 학생들이나 학생들을 데리러온 학부모님, 선생님들이 무어라 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이런 날에 계단에 앉아있으면 치이거나 다칠 위험도 있었다.

그렇게 고른곳이 본관 중앙문이 있는 1층 기둥 뒤였다.

... 멍청한 곽유연, 여기서 뭐 어쩌자고? 김우연이라도 부를거야? 두손은 다른 학생들의 비해 자유로웠지만 두 손은 주머니 안에서 닫힌 핸드폰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오늘이 종업식인데 김우연은 연락도 없었다.

방학되고 새학기에 반 정해지면 진짜 그땐 부활동도 못할텐데. 진짜 공부한다고 헤어질 인연이었다고 생각하기 싫었다. 나만 이 우정에 절절 맨 거 같아서. 우정이라도 부르기도 민망한 관계에서 나만 고민한것 같아서.

그 생각과 동시에 나는 핸드폰을 쥐었다. 나 혼자만 억울할 바엔, 그냥 김우연한테 내지르고 차단당하자. 그게 낫겠다.

나는 주머니에서 머뭇거리던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익숙한 연락처에 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을 기다렸다.

... ... ... 달칵.

"여보세요?"

"...야, 너 왜 연락 안해?"

"어? 어. 왜. 무슨일 있어?"

용기내서 한 말이었음에도 김우연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였다.

괜히 여상한 목소리가 싫어서 불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종업식이잖아. 내 반에 한번은 들려줄 수 있었으면서."

"아, 오늘 나 학교 안 갔어."

"뭐? 왜?"

"감기 걸려서. 전날에 필요한건 다 빼서 오늘 안가도 되긴 하거든."

"감기? 괜찮아?"

폭발 시키겠다니, 투덜거린다니 말도 많았으면서 정작 김우연이 아프다고 하니 걱정됐다. 김우연은 뒤이어서 괜찮다고, 약도 먹었고 오늘만 쉬면 될 것 같다고. 애들얼굴 하고 너 못본 건 아쉽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근데 웬일이야? 막 보러오라는 소리도 하고?"

"...아니, 너.. 공부한다고...그래서 못보고... 나는 너 보고 싶었는데."

"...어?"

툭 쏘아붙이는 말투는 어디가고, 김우연의 장난기 있는 목소리에 결국 기어들어가듯 말하며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목소리를 들으니 안심되고, 또 밉고, 근데 보고 싶고. 그냥 그런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내가 울먹거리며 다른 말 없이 한참이나 코를 먹고 있자, 김우연은 약간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되물었다.

"너 어디야?"

"...나, 학교 중앙문. 건물 안에."

"... 너 가지 말고 있어봐. 잠깐."

"...왜."

"그냥 기다려 봐. 추우면 교실 안에 들어가 있어."

감기도 걸려서 종업식도 안 온 애가 온다는 소리를 하는 것 같아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나 왜 이런거에 기분이 좋아지지? 진짜 이상하네. 아픈애가 진지하게 와준다는데. 내가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고 우물거리자 김우연은 전화를 끊기 전 다른 것을 하나 더 물어왔다.

"너 무슨 꽃 좋아해?"


학생들과 부모님이 전부 빠져나가고 난 뒤에 시간은 아직도 3시가 되어있을 뿐이었다.

고요해진 건물의 분위기 덕에,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남아있던 나는 중앙문으로 숨을 헐떡이며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김우연은 감기에 걸렸다면서 목도리와 가벼운 갈색 코트만 걸친 사복으로 손에 작은 꽃다발을 든 채로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 거렸다.

"야, 너 그렇게 춥게 입고 왔어?"

내가 말을 걸며 모습을 내비추자 김우연은 빠르게 걸어 내쪽으로 와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받은 꽃다발은... 안개꽃이었다. 보통 다른꽃하고 같이 섞어서 주던데 이건 그냥 안개꽃이 많은 꽃다발이었다.

"...오는 길에 꽃집에 들를려다가...하아, 너 기다릴까봐... 학교 앞에 꽃마차에서..."

"나 주려고 샀어?"

"...어... 근데 이 계절에 장미가 무슨 3만원이더라. 나 급하게 나오느라 현금이 없어가지고..."

말을 하면서도 숨을 고르던 김연우는 내가 좋아한다고 했던 장미꽃이 없는 경위를 설명해주며 숨을 골랐다.

하긴, 이 날씨에 장미가 있는게 이상하지. 그것도 졸업식이나 종업식에 이벤트로 나오는 할머니들의 꽃트럭이나 꽃마차에서는 그런걸 잘 안팔기도 했다. 가격도 엄청 비쌀테고...

그저 작은 꽃다발에 안겨있는 안개꽃만으로도 내 기분은 충분히 좋았다.

"야... 내 걱정보다 니 걱정 먼저 하지."

"나? 왜?"

"목이 왜이렇게 휑해. 목도리 안 했어?"

"목도리 하면 갑갑해서 안 했지..."

김우연은 한숨을 푹 쉬고서는 제 목에 있던 목도리를 풀어 둘러매어주었다.

무슨 섬유유연제를 쓰는지, 기분좋은 향이 훅 끼쳐서 나도 모르게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을 뻔했다.

"감기 심해진다 너."

"너 보려고 왔으니까 네가 책임지면 되겠네."

"자기가 와놓고."

"보고 싶다고 해놓고."

유치한 말장난을 늘어놓으며 우리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로를 바라봤다.

무언가 말을 해도 괜히 어색해지는 기분이고,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냥, 내 2학년의 종업식이 그대로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는 것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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