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수작질은 신입생 환영회에서부터!

환생한 당보청명 현대 AU

함수(@dangboya)님께서 제공한 소재인 '둘 다 전생 기억 가지고 현대로 환생했는데 서로 기억 없는 줄 알고 1부터 다시 시작하는 삽질 당보청명'을 가지고 작성된 글입니다. 

0.

이 이야기는 현대에 태어난 당보와 청명이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마주치며 시작된다.

1.

청명은 눈앞에 불쑥 내밀어진 것을 보고 당황했다. 화산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장소에서 마주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물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아버지의 장롱 깊숙한 곳에 있던 걸 들고 뛰쳐나온 것처럼 보이는 '그것'은, 다름 아닌 분주였다.

"선배. 이거 좋아하시죠?"

당보가 말했다. 

맙소사. 대체 누가 신입생 환영회에 분주를 갖고 온단 말인가? 그것도 새내기가! 청명은 너무 어이가 없어 알면서도 물어보았다.

"이게 뭔데?"

물으면서도 그의 머릿속엔 혼란이 가득했다. 이 새끼, 설마 전생의 기억이 남아있는 거 아냐? 

"보시다시피 분주죠! 청명 선배가 이걸 좋아하신단 이야길 들었거든요."

"뭐? 누구한테."

⋯⋯뭐야. 기억이 있는 게 아닌가?

"글쎄요. 청명 선배 빼곤 이름을 아직 못 외워서... 아. 가슴이 큰 분이었습니다."

조걸이군. 청명은 조걸을 족치리라 다짐했다.

청명은 갑자기 목이 탔다.

"분주, 내놔."

당보는 청명의 손에 재깍 술병 주둥이를 바쳤고, 청명은 술병 주둥이를 움켜쥐었다. 하나의 술병에 사람 손은 둘. 둘의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스쳐지나갔다. 

쳇. 어디선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면 사람 좋게 웃는 신입생 당보만이 있을 뿐이다. 잘못 들었나?  청명은 분주 마개를 뽑고 술을 목구멍에 꼴꼴 부어넣었다. 캬! 술맛은 좋았다. 그때, 술을 다 마신 그의 앞에 무언가가 불쑥 들이밀어졌다. 당과였다. 

"입가심으로는 달달한 게 좋잖아요."

청명은 떨떠름하게 물었다.

"이것도 그⋯⋯ 가슴 크다던 선배가 알려줬냐?"

"에이, 아닙니다. 오늘 여기까지 오는 길에 보니까 당과 팔고 계시는 할머니가 계시더라고요. 어쩌겠어요. 제가 다 팔아드렸죠."

보세요. 이렇게나 당과가 많잖아요.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당보의 주머니가 당과로 미어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인 게 청명의 눈에도 보였다. 청명은 당보에게 전생의 기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접어두기로 했다.

"⋯⋯그래."

잊는 게 좋지. 전생 그런 거 기억해서 뭐 좋을 게 있다고. 청명은 다시 술을 마시려 병을 기울였으나, 더는 술이 남아 있질 않았다. 젠장. 술도 나를 안 도와주네. 청명은 씩씩거리며 당보로부터 받은 당과를 와삭와삭 입에 넣었다. 당보는 그런 청명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2.

신입생 환영회도 끝난 후, 이제 후배들이랑 연관되는 일 없이 살아야겠다 다짐한 청명이었으나 후배인 당보가 자꾸만 저를 불러내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통에 청명은 어느 샌가 당보의 페이스에 휘말려버리고 말았다. 오늘도 당보가 청명을 불러내어 교내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이었다. 아, 이 녀석은 자기랑 같은 학번인 애들이랑은 밥 안 먹나? 

그 때였다. 당보가 질문을 한 것은.

"선배. 검에서 꽃이 피어나면 어떨 것 같아요?"

"어엉? 검에서 꽃이?"

이 자식 진짜로 전생을 기억 못하는 거 맞아? 청명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당보를 쳐다보았다. 당보의 눈에는 무언가의 기대감마저 서려 있었는데, 그걸 보자 청명은 괜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검에서 꽃이 어떻게 펴. 그런 말을 하는 네 대가리에나 꽃이 피겠다!"

따악! 청명의 손이 당보의 정수리를 가격했다. 당보는 머리를 감싸쥐며 고통스러워했다.

"아니, 선배! 왜 자꾸 머리를 때리십니까?"

"네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자꾸 하니까 그런 거 아냐."

청명은 고개를 돌렸다. 때문에 뒤에서 당보가 씁쓸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3.

청명은 조걸을 족치겠단 다짐을 잊은 적이 없었다. 조걸이 청명의 술 취향이 분주라는 것을 당보에게 일러준 탓에 신입생 환영회에서 하마터면 '당보가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거대한 착각을 할 뻔했지 않은가! 조걸, 네놈은 죽었다. 때마침 운동장 저 끝에서 축구 경기를 끝마치고 오는 조걸이 보였다. 청명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딱 걸렸어!

"여어, 걸이 형. 우리 함께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눠 볼까 하는데. 어때?"

"뭐, 뭐어? 아니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냐?! 왜 그러는데?!"

청명이 조걸에게 헤드록을 걸었다. 흉악하기 그지없는 학우의 옆구리에 머리가 끼인 조걸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살려줘! 뭔진 몰라도 내가 잘못했다! 그제서야 청명은 조걸을 풀어주었다.

"진작에 싹싹 빌었어야지."

"아니, 그런데 진짜 억울하다고! 내가 뭐 때문에 이런 고통을 받는지 제발 좀 들어나 보자. 응?"

어쭈, 이게? 자꾸 기어오르는 조걸을 주먹으로 대가리를 한 대 때린 청명은 손을 탁탁 털면서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당보 녀석 있지? 1학년 걔. 그 녀석한테 내 술 취향이 분주라는 걸 알려준 게 네 죄다."

머리를 감싸쥐고 방금 맞은 부위를 문지르던 조걸이 그 말에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난 걔한테 네 술 취향 알려준 적 없어, 인마! 난 정말로 억울하다고!"

뭐? 청명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그럼 대체 당보는 청명 본인의 술 취향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4.

[너네 집 앞이다. 당장 튀어나와.]

청명에게 문자 메시지를 받은 당보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당장 나오라니.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시계는 벌써 새벽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밤 늦은 시각에 온 문자이니만큼 무시하고 잘 수도 있었지만, 당보 사전에 청명의 말을 무시한다는 것은 없기에 그는 겉옷을 주섬주섬 꿰어 입고 집 현관문을 나섰다. 때마침 엘리베이터도 딱 당보가 사는 층수에 맞게 정지해 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채로 생각에 잠겼다. 당보, 그는 전생의 삶을 기억하는 이였다. 처음에는 자신이 미친 줄로만 알았더란다. 허나 제 기억은 지나치게 선명했고, 그 기억 속에는 언제나 화산의 청명이 있었다. 그래도 그저 환상 속의 인물인 줄로만 알았는데⋯⋯. 제 인생을 바꾼 만남을 통해 그 생각이 송두리째 바뀌고 말았다.

고등학생으로서 대학교 입학을 위해 면접을 보러 화산대학교에 왔을 때의 일이다. 면접 도우미들은 전부 해당 대학교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당보는 그 중에서 발견하고야 말았다. 바로 기억 속의 청명을! 청명이 더는 환상 속의 인물이 아님을 깨닫자 제가 가지고 있던 기억들이 자신의 전생임을 납득하게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당보는 다짐했다. 반드시 이 학교에 붙어서 청명의 옆에 다가가겠다고.

그리고 당보는 그 다짐을 이룬 셈이다. 누가 뭐래도 현재의 당보는 청명과 가장 사이가 가까운 후배였으니까. 당보는 지금까지 자신이 노력한 것들을 떠올렸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분주와 당과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든가, 청명에게 혹시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지는 않을까 하여 검에 꽃이 피어나면 어떻겠냐는 말로 스리슬쩍 떠 본 일이라든가. 아쉽게도 청명의 반응을 봐선 청명에겐 전생의 기억이 없는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당보에겐 그 기억들이 있으니 현생에서 다시 차근차근 가까워져 가면 될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 새벽에 무슨 일로 저를 불러낸 걸까. 띵!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당보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앞으로 나갔고, 거기엔 술에 취한 청명이 서 있었다.

5.

청명은 머리가 아팠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술을 마신 날도 처음이었다.

"세상에. 선배! 이게 무슨⋯⋯.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드셨어요?"

당보가 허겁지겁 달려와 비틀거리는 청명의 몸을 부축했다.

"놔!"

청명이 당보의 손길을 뿌리쳤다. 청명은 씨근덕거리며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지. 그게 아니야⋯⋯."

"뭐, 뭐가 아니라는 건지⋯⋯. 아니, 선배. 그보다 많이 취하셨어요. 부축을 받으셔야⋯⋯."

"그놈의 선배."

청명이 짓씹듯 말했다.

"선배라고 부르면 안되지."

다음 순간, 청명이 당보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도사 형님이라고 불러야지, 응?"

당보의 숨이 멈췄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아 얽혔다. 숨도 쉬지 않은 채 서로의 눈동자만을 보길 잠시, 당보가 신음하듯 애끓는 소리를 냈다.

"⋯⋯언제부터 아셨소?"

"바로 어제."

"나는, 난⋯⋯. 도사 형님이 전생의 기억이 없는 줄로만 알고."

"나도다. 이 새끼야. 네가 전생을 기억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형님. 도사 형님⋯⋯."

"새끼가. 다 알면서 나를 속여?"

청명이 손에 붙잡은 당보의 멱살을 더욱 단단히 틀어쥐었다. 당보의 눈가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도사 형님,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다시 관계를 쌓아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랬소. 이왕이면 좋게 보이고 싶어서 도사 형님이 좋아하는 분주도 들고 갔고, 입이 심심하실까 싶어 당과도 들고 갔지요. 혹시라도 도사 형님께 전생의 기억이 있진 않을까 싶어 떠보기도 했는데 그건 아시다시피 실패했고⋯⋯."

사람이 울면서 웃으면 좀 꼴사나워야 할 텐데, 당보의 타고난 얼굴은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 자식. 지금 자기 얼굴이 써먹을만 하다고 내 앞에서 질질 짜고 있는 건 아니겠지. 청명은 미간을 찡그렸다.

"도사 형님 앞에서는 항상 이렇게 됩니다. 자꾸 무언가를 준비하고, 한다고 하는데도 항상 엉망으로 꼬여버려서 내 부끄러운 모습을 전부 들키게 되지 않소⋯⋯."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당보의 모습은 꽤나 볼만했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좋은 쪽으로.

그나저나⋯⋯. 아, 젠장. 청명은 올라오는 술기운에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도사 형님? 당보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력을 운용하여 술독을 날려보내는 건 전생에나 가능했던 묘기고, 현대를 살아가는 청명에게 그런 재주가 있을 리 없었다.

"우욱⋯⋯."

"⋯⋯도사 형님?"

"우우웨에엑!"

결국, 청명은 그 자리에서 속을 게워내고야 말았다. 청명에게 멱살이 잡혀 있던 당보의 옷 앞자락에 토사물이 묻은 건 당연한 일이다.

6.

"⋯⋯거, 토한 건 미안하게 됐다."

"그건 미안해 하셔도 되오."

청명은 당보의 집 안 소파에 드러누웠다. 당보는 술 냄새와 토사물 냄새가 나는 청명의 옷과 토사물을 고스란히 맞은 그 자신의 옷을 세탁기에 함께 넣고 돌렸다. 탈탈탈탈⋯⋯. 고요한 집 안에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울렸다.

"집 안에 뭐가 많이 없네. 왜 이렇게 을씨년스럽냐. 좀 채워라."

"도사 형님이 앞으로 많이 찾아오셔서 이것저것 좀 채워주시면 될 듯 합니다."

"오호라. 이렇게 은근슬쩍 집으로 초대한다 이거지?"

"바로 보셨소."

청명과 당보는 누구랄 것도 없이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이런 시답잖은 대화를 할 수 있기를 얼마나 바라왔던가. 전생의 인연이 현생에도 이어진 것이 참으로 기쁘고 소중했다. 도사 형님. 당보가 먼저 운을 띄웠다. 청명이 누운 채로 고개만 까딱였다.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이번 생에는 우리 모두 천수를 누리다가 갑시다."

"⋯⋯."

"하고 싶었던 것도 다 하고, 후회 없이 살다가 갑시다."

"⋯⋯그래, 인마."

전생에 검수로서 살다가 천수를 누리지 못한 것이 이제 와서 아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더는 검수도 아닌 지금,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으면 그건 좀 아쉬울 것 같았다. 청명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아예 감아버렸다. 소파의 푹신한 감촉이 그를 수마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하긴, 술을 처마시고 야밤에 토하고 뭘 참 많이 한 밤이기는 했다.

"이거라도 덮고 주무십쇼."

당보가 어디선가 담요를 가져다가 청명의 위에 덮어주었다. 도사 형님. 자장가라도 불러 드리오리까? 자장, 자장, 우리 형님. 자장, 자장. 잘도 잔다⋯⋯. 청명은 이미 반쯤 잠에 빠져들어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당보의 자장가를 들었다.

당보는 잠에 빠져든 청명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리 보면 도사 형님은 참으로 번듯하게 생기셨단 말이지. 눈썹도 곱고, 속눈썹도 길군. 그렇게 청명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자 지금껏 이번 생에선 느끼지 못했던 충족감이 당보를 가득 채웠다. 그는 담요를 하나 더 가지고 와 소파 아래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아, 이게 행복이라는 거구나.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이 당보를 웃음짓게 했다.

지금 눈을 감고 잠들면 도사 형님과 같은 꿈 속을 노닐 수 있을까. 아아, 그럼 좋을 텐데⋯⋯. 당보는 살며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보도 금세 잠이 들었다.

달빛이 두 사람을 따스히 비추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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