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처음 보는 교수랑 싸운 썰 푼다

교수 당보와 학생 청명

1.

이능력이 세계 인구의 극소수에게 발현된 미래. 지구의 질서는 이능력자들의 손에 의해 재편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수가 이능력을 가지지 못한 대다수보다 훨씬 적은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지닌 강력한 이능력 앞에서 각국의 정부들은 손쉽게 무력화되었고, 뒤이어 무소불위의 권력이 이능력자들에게 이양되었다. 뒤이어 이능력자를 중시하고 이능력이 없는 자들을 무능력자라 부르며 천대하는 분위기가 전세계에 널리 퍼졌다.

대다수의 무능력자들은 이능력자들의 이러한 행태에 분노했다. 이능력자들이 아무리 뛰어난 이능력을 지니고 있어도 그들이 사람인 이상 한계는 존재하는 법. 무능력자들은 이능력자들 몰래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능력이 없다고 해서 무능력자들이 본래 지니고 있었던 자원들, 이를테면 탱크나 미사일, 생화학 무기나 핵무기 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결국 무능력자들은 이능력자들을 내쫓기 위해 손을 대선 안되는 방법에까지 손을 뻗고 말았다.

생화학 무기가 온 세계를 덮쳤고 미사일 폭격은 예삿일이었다.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은 게 그나마 천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 수준이었다. 세계는 온통 아비규환이 되었다. 그런 세상 속에서 마교라는 사이비 집단마저 득세했다. 이 세계에 재림한 천마를 모신다는 그 종교는 가뜩이나 망가진 세상을 더욱 망가뜨리고 부수면서 천마만을 부르짖었다.

혼란스러운 세상과 제3의 존재인 마교. 이들 앞에서 이능력자들과 무능력자들은 극적으로 타협을 보는 데 성공했다. 이능력자들과 무능력자들이 연합한 범국가적 임시 정부가 세워졌으며, 그들은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온 것에 대한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단 우선 마교부터 뿌리를 뽑기로 결의했다.

그렇게 마교를 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이 있었으나 번번이 마교의 우두머리인 천마를 잡진 못했다. 결국 마지막 결사대가 꾸려져 마교의 본거지인 십만대산으로 보내졌고, 그 결사대원들 중 한 명이 천마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것에 성공했다. 그의 이름은 청명. 무능력자임에도 본인이 지닌 검술 실력이 대단하여 매화검존이라는 칭호를 가진 이였다.

그러나 매화검존은 십만대산에서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임시 정부 측에선 하다 못해 그를 포함한 결사대원들의 시신이라도 가져오려 했으나 천마를 잃고 분노한 마교도들의 난동으로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임시 정부가 십만대산에 파견했던 이들의 무덤엔 모두 시신 없는 텅 빈 관이 놓이게 되었다.

매화검존의 묘비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혔다.

매화검존 청명. 십만대산에서 천마의 목을 베고 영면.

그리고 매화검존이 사망한 뒤로 100년이 흘렀다.


2.

"아, 그러니까 요새 누가 무능력자란 말을 쓰냐고. 그 단어는 비능력자로 고쳐 부르기로 한 지가 몇십 년이 흘렀어!"

"아니, 무능력자를 무능력자라고 하지 뭐라고 해? 비능력자? 거 참. 세상 많이 좋아졌네."

"당장 그 말을 하는 너부터가 비능력자잖아. 임마! 네가 비능력자가 아닌 채로 방금 그 말을 했다면 벌써 짱돌 맞았어!"

"어어, 그래. 시끄럽고."

자칭 무능력자. 타칭 비능력자 청명은 같은 과 동기인 조걸의 말에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귀를 후볐다. 매화검존이었던 자신이 죽고 100년 후가 지난 지금, 전생의 기억을 갖고 다시 태어난 청명은 검술 특기자 전형으로 명문 화산대학교에 입학해 평화로운 대학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분명 전생의 자신도 현생의 자신도 딱히 이능력을 갖고 있진 않은데 어째서 기억을 가진 채로 환생이 가능했던 걸까?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설마 기억을 갖고 환생하는 게 자신이 지닌 능력인가에 대해 고민도 했지만, 이건 지금으로선 도저히 확신할 방도가 없어서 금방 포기했다. 이번 생에서 한 번 더 죽고 다음 생에 또 기억을 가진 채로 환생한다면 그땐 정말로 이게 제 능력임을 인정해야겠지만 어쨌든 그 시기가 지금 당장인 건 아니지 않나.

아, 머리 아파. 청명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귀찮으니 그냥 내가 무능력자인 걸로 치자. 무능력자가 아니라 비능력자라느니, 조걸이 종알종알 떠드는 소리들을 청명은 싹 무시했다. 비능력자라는 단어가 입에 안 붙는데 어쩌라고. 그래도 남들 앞에선 말실수 하지 않도록 유의해야겠네,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과방을 나오던 도중 저 멀리서 꺄악거리는 환호성이 들렸다. 뭐지?

"당보 교수님 나오셨나 보다."

청명의 뒤를 따라 과방을 나온 조걸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왜, 그 이능력자 있잖아. 매화검존이랑 동시대에 살았다는 사람. 이능력이 엄청 뛰어나면 쉽게 늙지도 않는다는데 엄청 부럽더라. 당보 교수님 아직도 젊은 사람처럼 보이는 거 알고는 있냐? 그래서인지 학생들한테 인기도 많아.

청명은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서 들을 거라 예상하지 못한 이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 교수, 여기서 일한 지 오래 됐어?"

"어어? 그렇지? 우리 태어나기도 전부터 여기 교수였을걸. 참, 그거 아냐? 당보 교수님은 화산과 관련된 건 다 하시기로 유명해. 화산에 그린벨트 지정하는 것도 저 교수님이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매년 매화검존 기일만 되면 화산에 찾아간다잖아. 뭐랄까⋯⋯. 진짜 역사가 살아서 숨을 쉰다면 그게 당보 교수님 아니겠냐? 100년 전 당시의 십만대산엔 아쉽게도 가지 못하셨다지만 말야."

그랬다. 십만대산으로 파견된 마지막 결사대에는 당보가 없었다. 아무리 그 무위가 뛰어나다 한들, 배에 칼을 맞고 크게 부상을 입어 움직일 수조차 없는 이를 결사대에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크게 다친 당보에게 십만대산으로 떠나는 내 걱정 말고 네놈 몸조리나 잘하라고 퉁명스레 말을 건넸던 것이 전생에서 당보와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였다.

"나 잠깐 다녀올게!"

"엉? 야, 청명아! 야! 어디 가는지는 말해주고 가야지! 어이!"

청명은 늘상 소지하던 목검을 꼬나쥐고 달음박질쳤다. 조걸의 외침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저 멀리서 나는 환호성만이 청명의 귀에 들어올 뿐이었다. 저 환호성 속에, 당보가 있다. 그 사실 하나가 청명을 달리게 했다. 꺄아아! 와아아! 달릴수록 함성이 나는 곳은 점점 가까워졌다. 마침내 군중의 틈새 사이로 당보와 눈이 마주쳤을 때, 청명은 제 심장이 크게 쿵 뛰는 소리를 들었다. 살아있었구나. 정말 살아있었어!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청명은 발을 내딛고, 목검을 들어올려 허공 위로 도약했다. 주위의 사람들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청명의 양 옆으로 흩어졌다. 목검이 내려칠 곳은 명백했다. 당보의 정수리! 비록 목검일지라도 정수리를 이 높이에서 가격당하면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제가 알던 당보라면 이것쯤은 당연히 가뿐하게 막아낼 수 있을 터였다. 청명은 지난 100년간 당보의 무위가 녹슬진 않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무인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그냥 살아있었다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지니고 있는 무위 또한 살아있는지를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게 바로 매화검존, 청명이었다.

쉬이익! 목검이 공기를 가르고 당보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땅을 박차고 허공에 도약했던 청명의 몸도 목검과 함께 아래로 추락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당보의 정수리에 목검이 부딪힐 상황임에도 청명은 피하지 않았다. 이 정도도 막지 못하면 당보가 지닌 암존이라는 칭호가 울 것이다. 100년이 지났어도 그 실력 여전한지, 어디 한 번 보여보라지!

그 때 당보가 품에서 비도를 꺼내들었다. 총 열 한 개의 비도가 허공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청명을 향해 날아갔다. 정확히는 청명이 쥐고 있는 목검을 향해서였다. 팅! 티딩! 비도들이 목검의 옆면에 주르륵 박히며 목검의 검로를 옆으로 살짝 휘게 만들었다. 청명은 쳇, 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매화검존 시절의 자신이라면 이런 알량한 잡기술에도 끄떡 없이 검로를 유지할 수 있었겠으나, 지금 현재 청명의 무위로는 암존이 던지는 비도를 힘으로 막아낼 수가 없었다. 당보로 하여금 독의 이능도, 열 두 번째 비도를 꺼내게 하지도 못했으니 말 다했지, 뭐. 현재의 자신이 암존을 이기기 어려우리란 생각은 했다만 그게 눈앞에서 증명되니 입맛이 썼다.

비도에 의해 검로가 뒤틀린 청명의 목검은 결국 당보의 정수리가 아니라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히고 말았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목검에 금이 갔다. 목검이 부딪힌 아스팔트도 무사하진 않았다. 청명의 힘에 의해 약간이지만 아스팔트에 금이 간 것이다. 이번 생에서 부단히 수련한 결과였다. 그런데도 암존을 넘지 못하다니⋯⋯.

"검이 매섭군. 하지만 다짜고짜 교수에게 검을 들이대는 버릇은 어디서 배운 거지?"

당보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옆에서 당보의 조교가 청명의 목검에 박힌 당보의 비도를 낑낑거리며 뽑아내는 꼴을 지켜보던 청명은 충동적으로 말을 건넸다.

"몸조리는 잘한 것 같네."

"그게 무슨 말⋯⋯."

당보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몸조리나 잘하라는 말. 그건 분명 십만대산으로 떠나기 전에 매화검존이 제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이었다. 100년 전에 들었던 그 말이 어째서 지금 눈앞의 학생에게서 나오는가? 당보는 급히 청명에게 물었다.

"학생, 자네 이름이?"

이름이라도 들으면 무언가를 깨달을 것처럼 구는 당보의 모습에 청명은 어쩐지 웃음이 났다. 당보와 청명을 둘러싼 채로 이 모든 상황을 구경하고 있던 학생들 틈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쟤 이름은 청명이에요! 맞아요! 검술 특기자 전형으로 입학한 애! 수군수군. 한 명이 말하니 다른 한 명이 말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술렁이는 학생들 속에서 청명은 귀를 후비적거렸다. 남들이 무능력자에 불과한 청명 자신에게 이토록이나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건 또 처음 안 사실이었다.

당보는 제 앞의 학생이 이름마저 청명이라는 것을 알자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기쁜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단 얼굴 같기도 했다.

"그래⋯⋯. 청명 학생. 잠시 내 연구실로 따라오도록. 아니, 부탁이니 따라왔으면 좋겠군."

청명은 아스팔트에 떨어진 목검을 도로 주워 허리춤에 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도 할 말은 많았으니 당보가 먼저 이야기를 하자고 초대를 한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조걸이 과방 근처에서 저를 기다릴 것 같지만, 그것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중에 잔소리 좀 듣고 말지.

그렇게 교수 한 명과 학생 한 명이 자리를 옮겼다.

3.

"도사 형님. 정말 도사 형님이오?"

연구실 문을 닫자마자 당보가 한 말이었다. 그럼 설마 내가 누군지도 제대로 확신하지 못한 채로 데려온 건가. 청명은 미간을 좁혔다.

"내가 청명이 아니면 누가 청명인데?"

"이 인성을 보아하니 도사 형님이 맞군!"

이게 장난하나? 청명은 들고 있던 목검으로 당보의 머리를 딱! 때렸다. 당보는 그걸 피하지도 않고 맞으면서 마냥 좋다고 웃었다. 웃어? 뭐가 좋다고 웃어. 청명의 미간이 팍 찡그려질수록 당보의 표정은 환해지기만 했다. 아니, 표정은 환한데 눈에서 맑은 눈물 방울들을 뚝뚝 떨어트리는 것이 아닌가. 청명은 당황했다.

"야, 지금 우냐?"

"⋯⋯늙으니 느는 게 주책밖에 없어서 말이오. 살아 생전에는 다시 보지 못할 거라 여겼던 도사 형님을 이리 다시 뵙게 되니 기뻐서 그럽니다."

젊은 이삼십대의 모습으로 자기가 늙었다고 말하는 당보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낄 법도 했지만, 청명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매화검존이던 시절 청명 본인도 나이와 맞지 않는 젊은 모습을 유지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청명은 픽 웃으면서 당보의 연구실에 놓인 소파 위에 길게 몸을 뉘였다. 다리까지 꼬고 누운 모습이 마치 제 집 안방이나 다름없었다. 당보는 아까 전 제 조교에게 한동안 연구실로 들어오지 말라고 한 건 참으로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조교가 와서 지금 연구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입에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갈지도 몰랐다. 일개 학생이 교수의 소파에 드러눕다니!

하지만 청명이 새로이 살아 돌아왔는데 소파에 드러눕는 것쯤이 대수일까. 지금 심정 같아선 당보는 청명에게 제 무릎을 내주고 베개 대신 쓰라고 할 용의도 있었다. 물론 실제로 할 생각은 없고, 그만큼 반가웠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번 생에도 이능력 없이 검술 하나로 여기까지 오셨소?"

"오냐. 왜, 불만 있냐?"

"불만이 아니라 기뻐서 그러지. 역시 도사 형님은 다시 태어나도 도사 형님이시구려. 능력도, 검술도⋯⋯. 정말 백 년 전의 도사 형님을 보는 것 같아서 반갑기 그지 없소."

"녀석. 싱겁긴."

당보는 청명의 맞은편 소파에 걸터앉아 청명을 바라보았다. 두 눈에 청명을 한가득 담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청명은 손을 내저었다. 그만 봐. 닳는다. 당보는 웃으면서도 청명을 향한 시선을 거두진 않았다.

"나는 십만대산에서 도사 형님을 모셔오지도 못했는데, 도사 형님이 이렇게 다시 나타나 주셔서 얼마나 기쁜고 미안한지⋯⋯."

"됐다. 백 년 전 그때 다들 지치고 힘들었다는 걸 아는데 무슨 그런 말을 해? 무덤이라도 만들어 준 게 고맙기만 한데, 뭘."

"그 무덤 안에 유골이 없다는 걸 다 아시면서."

"됐다니까. 그 이야기는 거기까지만 해라."

당보는 어깨를 으쓱였다.

"차 한 잔 하시겠소?"

"곡차로 줘라."

"연구실에서 술을 찾는 사람은 도사 형님 뿐일 거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당보는 연구실 한쪽 구석에서 분주를 꺼냈다. 마치 누군가가 마시러 오길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준비된 술. 청명은 당보가 든 분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술이었다.

"병째 줘."

"어련하시겠소."

분주 한 병이 통째로 청명의 손에 들렸다. 청명은 술병의 마개를 뽑고 술을 입 안으로 꼴꼴 부어넣었다. 크으! 화끈한 술기운이 뱃속을 뜨끈하게 덥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당보야. 너는 내가 정말 매화검존이라는 걸 믿느냐? 사실 말도 안되는 일이지. 죽은 사람이 이렇게 살아 돌아온다는 건. 그런데도 네가 보이는 태도를 봤을 때, 이 일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어서 물어보는 거다."

당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청명은 술을 다시 한 번 들이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당보가 입술을 달싹였다. 금방이라도 사그러질 것 같은 목소리였다.

"도사 형님이 나보다 먼저 죽는다는 말도 안되는 일을 이미 한 번 겪었더니, 다른 모든 일들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느껴지더이다."

청명은 말없이 당보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먼저 죽어서 미안하다고 말할까? 아니, 청명은 매화검존이었던 자신의 죽음을 후회하지 않았으니 그건 빈말이나 다름없으리라.

"그래⋯⋯. 그랬군."

꼴깍꼴깍 마시던 분주도 이젠 똑 떨어지고야 말았다. 청명은 드러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분주 한 병을 다 마셨음에도 취기는 오르지 않았기에 그는 또렷한 두 눈으로 당보를 담았다. 당보는 서글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튼, 도사 형님이 이렇게 돌아오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오."

"⋯⋯."

청명은 텅 빈 술병을 당보에게 건넸다. 당보는 익숙하다는 듯 비어버린 술병을 받고는 소파 앞 테이블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으나 그건 어색함의 침묵이 아니었다. 백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대감이 침묵 위로 소복히 쌓여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던 중 청명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나도 네가 아직까지 살아있어서 기쁘다."

청명은 새로운 몸에서 눈을 뜨고 백 년 전 인연들의 소재지와 행적을 파악하는 데에 신경을 썼다. 그러나 그들 앞에 다시 나타나도 괜찮은가? 이 질문이 청명의 발목을 잡았다. 그래. 다시 태어난 청명은 매화검존은 이미 죽은 사람인데 과거의 인연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봤자 그들의 상처만 헤집는 꼴이 되지 않을까, 라는 걱정을 했더란다. 애초에 새 몸에서 눈을 떴다는 청명의 말을 그들이 믿어줄지도 의문이었다. 그래서 청명은 제가 매화검존의 환생이라는 것을 그 누구에도 밝히지 않았다. 오늘 충동적으로 당보의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백 년 전의 인연이 있는 이들의 앞에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보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청명이 피식 웃었다.

"고맙다. 살아있어 줘서."

당보의 눈이 크게 떠지고 이내 눈동자에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야, 야. 그만 좀 울어라. 청명의 타박에도 당보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가 살아 생전에 도사 형님한테서 고맙다는 소리도 다 들어 보고⋯⋯."

"어쭈, 이놈이?"

"그거 아쇼? 실은 도사 형님이 그렇게 가고 나서 나도 따라갈까 고민한 적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런데 나마저 그렇게 가고 나면 도사 형님을 누가 더 기억해주나 싶고, 저 성질 고약한 사람한테 벗이라고는 나밖에 없는데 내가 죽으면 도사 형님의 모습들도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지는 게 아니겠소? 그게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죽을 수가 없었단 말이지."

청명이 손을 뻗어 당보의 머리 위에 턱, 하고 손을 올렸다. 그 다음 엉망진창으로 헤집기야 했다만 그건 분명히 쓰다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보는 놀라서 울음을 멈췄다. 그 도사 형님이 제 머리를 쓰다듬는다고? 그러나 이는 분명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꿈이 아니었다!

청명은 엉망으로 헤집어진 당보의 머리에서 손을 떼며 혀를 쯧, 찼다.

"뭐하러 죽은 놈 뒤를 따라서 죽을 생각을 해? 대가리는 장식이냐?"

"도사 형님의 저 걸걸한 입담을 봐선 이게 꿈은 아닌데⋯⋯?"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당보의 머리통에 따악! 청명의 꿀밤이 날아와 꽂혔다. 당보는 얻어맞은 부위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청명이 한심하다는 듯 당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봐. 죽은 놈 따라가겠다고 따라 죽었으면 억울할 뻔 했잖아."

"그걸 굳이 머리를 때리면서 알려주실 필요는 없었소⋯⋯."

따아악! 꿀밤 한 대가 더 당보의 머리에 꽂혔다. 당보는 고통스러워하며 꿈틀거렸다. 청명은 고소하다는 듯 그런 당보를 바라보았다.

"말대꾸를 하면 한 대 더 맞는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암존인 당보보다 무위가 떨어지는 현재의 청명이 당보를 때릴 수 있다는 건 암묵적인 당보의 허락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보가 작정하고 그의 이능력인 독을 비도와 함께 사용한다면 지금의 청명 정도는 금세 무장해제가 될 것이다. 아닌 척 해도 당보가 제게 한 수 접어주는 게 제법 발칙하게 느껴지면서도 조금은 고마웠다.

"그럼 도사 형님. 앞으로 여기 화산대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낼 생각이십니까?"

"어어. 그럴 생각인데."

아참. 그러고 보니 조걸이 저를 기다릴 텐데. 에이, 모르겠다. 더 기다리라지.

"다름이 아니라 좀 더 도사 형님하고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말인데, 혹시 대학원에 관심이 있다면⋯⋯."

따아아악! 이번엔 목검으로 당보의 머리를 후려치는 소리였다. 청명은 질색팔색을 하며 외쳤다.

"재수없는 소리 하고 있어! 검하고도 상관없는 대학원을 왜 가!"

나는 졸업만 하면 십만대산으로 가서 결사대원들의 유골이나 수습하련다. 그 말에 당보가 정색했다. 

"마교도들의 잔당이 아직도 십만대산을 터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물론 백 년 전에 비하면 세가 약해지긴 했지만 아직 정부 차원에서 결사대원들의 유골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건 다 이유가 있단 거요. 마교도들은 아직도 강합니다, 도사 형님."

"그렇다면 너랑 내가 같이 가면 되겠네."

당보가 할 말을 잃었다. 난처하다는 듯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던 사내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백 년 전에 함께하지 못했던 길을 이번엔 같이 하게 되겠구려."

백 년 전에 복부의 커다란 부상으로 인해 결사대원에 포함되지 못했던 건 당보의 마음 속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도사 형님을 그리 잃을 줄 알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결사대원에 포함이 되었을 텐데.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당보는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청명에게 웃어보였다.

"이번에는 저도, 도사 형님도 무사히 십만대산에서 돌아오기로 약속하는 겁니다?"

"당연하지!"

청명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아, 하지만 우선 도사 형님의 학부 성적부터 어떻게 잘 해야⋯⋯. 이거 보시오. 검 빼고 다른 과목들의 성적이 처참하잖소?"

"그런 것 따위 없어도 검 휘두르는 데엔 문제 없어."

"그러다 F학점을 받습니다, 도사 형님⋯⋯."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둘은 문득 서로를 빤히 응시했고, 뒤이어 웃음을 터뜨렸다. 백 년이 지나 다시 만난 벗과의 대화는 참으로 즐거웠다. 청명이 실실 웃으며 당보에게 말을 걸었다.

"당보 '교수님'. 앞으로도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한 80년 정도만 더 사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

"청명 '학생'의 의견을 받아 장수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둘은 다시 얼굴을 맞대고 킬킬 웃었다. 끊어진 줄로만 알았던 과거의 인연이 다시 이어졌으니 웃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아, 좋구나. 실은 오늘이 바로 청명이 다시 태어난 뒤로 가장 활짝 웃은 날이었다. 이걸 당보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좋다고 마주 웃어주고만 있었다. 바보 녀석. 네 덕에 내가 웃었다. 이 말을 청명은 마음 속으로만 꾸욱 삼켰다.

정말로, 정말로 좋은 날이었다.

4.

마교도들의 잔당이 여전히 십만대산을 터전으로 삼은 탓에, 천마의 머리를 베었던 매화검존의 시신은 물론 마지막 결사대원들의 시신 또한 수습하지 못한 지가 백 년이 흘렀다. 이쯤 되면 시신이 아니라 유해를 수습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시체 다 썩었겠다. 청명은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그걸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청명이 검술 특기자 전형으로 명문 화산대학교에 입학한 지 벌써 3년째. 이제 슬슬 스펙을 뭐 하나라도 더 쌓아야 사회에 나가서도 뭔갈 벌어먹고 살 수 있으리라. 사실 지금 준비하는 것도 좀 늦은 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검 말고 대체 무슨 스펙을 쌓을 수 있단 말인가? 청명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아⋯⋯. 십만대산에 가서 매화검존 유골이나 회수해 올까."

전생 매화검존, 현생 무능력자 청명이 내뱉기엔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말이었다. 전생의 자기 자신의 유골을 현생의 본인이 회수한다? 그러나 여기엔 청명 말고도 또 다른 이가 한 명 있었으니, 독을 쓰는 이능력자. 암존 당보 되시겠다. 당보로서는 청명의 우스꽝스러운 저 말에 도저히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화산대학교의 교수로 재임 중인 당보는 닦고 있던 안경을 떨어트리며 외쳤다.

"유골 회수라니, 그게 무슨 뒷산에 올라 산책하겠다는 말투로 내뱉을 말입니까?!"

청명은 당보의 연구실 소파에 길게 누우며 말을 이었다.

"아니, 스펙을 딱히 쌓을 방법도 안 보이고. 그냥 내가 내 유골 회수하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매화검존의 유골을 회수하면 제 경력에 한 줄이 더 늘어날 것이다. 정부도 해내지 못한 매화검존의 유골 회수를 성공시킨 자! 이 얼마나 취업 전선에 뛰어들기 좋은 매력적인 줄글이냔 말이다. 적어도 평생 칼밥을 먹으며 배 곯을 일은 없을 터였다. 청명의 머릿속에는 이미 매화검존의 유골 회수자 청명이 차린 검술 도장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놀랄 일이고 말고요. 정부 차원에서 시도했어도 번번이 실패한 일이니까요. 도사 형님이 지금보다 더 실력을 쌓지 않는 이상은 어렵습니다."

"너랑 내가 같이 간다고 해도?"

당보가 말을 잃었다. 청명의 목소리만이 조곤조곤하게 연구실 안을 울렸다.

"몇 년 전에도 말했을 텐데. 마교도들이 강하다면 우리가 뭉쳐서 가면 돼. 너랑 내가 같이 간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본다."

"그리 말하면 내가 이길 수가 없지 않소⋯⋯."

"게다가 이건 단순히 내 유골을 가져오는 데에서 그칠 일이 아니야. 마지막 결사대원들의 유골들이 아직도 저 십만대산에 잠들어 있다. 나에겐 그 사람들을 데려와야 할 의무가 있어. 내가 아직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했지? 그럼 그 준비는 언제쯤 되나? 이십 년 후? 그도 아니면 육십 년 후? 그 시간 동안 유골들은 저기 저 십만대산에 방치된 채 있고 말이지, 응?"

"⋯⋯."

"나는 그런 꼴 못 본다."

연구실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당보는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했지만, 입만 벙긋거리다가 닫길 반복했다.

 5.

정부 차원에서 다시 마지막 결사대원들의 유해를 회수하기 위한 사람들을 선별한다는 공문이 내려온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여기엔 분명 당보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일개 대학의 교수라기엔 당보는 백 년 넘게 살아가는 유명한 이능력자였고, 정치와 재계 쪽으로도 유명한 사천당가의 태상장로이기도 했다. 정부를 쿡쿡 찔러 다시 한 번 결사대원들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한 선발대를 조직하라고 하는 것 정도는 크게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런 대단한 일을 별로 어렵지 않게 한 것 치곤 당보는 으스대는 기색이 아니었다. 도사 형님. 제 능력이 이렇게나 대단하다는 거 아닙니까! 라며 자랑을 할 법도 한데, 사안이 사안인지라 자제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청명은 공문이 내려오자마자 일찌감치 유해 회수단원에 자원했다. 당보도 마찬가지였다.

"도사 형님이 가시는데 내가 어찌 안 갈 수 있겠소? 게다가 백 년 전에 함께하지 못했던 길을 이번엔 같이 하기로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엔 배에 칼이나 맞지 말아라."

"아, 도사 형님!"

뼈 있는 농담을 던지며 킬킬거리던 청명은 유해 회수단원의 지원자 목록 중에서 익숙한 이름들을 발견했다. 백천, 유이설, 윤종, 조걸, 당소소, 혜연. 권술과 소속 혜연을 제외하면 전부가 청명과 같은 검술과 소속 사람들이었다. 아니, 얘들이 여기는 왜 와?

6.

"왜 지원했기는요? 우리 선조들의 유해를 찾으러 가는 건데 이유가 더 필요해요?"

당소소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서 유이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유, 필요 없어. 청명은 머리를 싸맸다. 너희들 같은 실력으로는 십만대산에서 위험에 처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아, 이게 설마 당보가 현재의 청명을 보고 느끼던 심정이었을까. 무위도 매화검존보다 못한 놈이 사지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을 게 분명하다. 내가 미안하다, 당보야⋯⋯.

"어어, 그럼 앞으로 나서지는 말고 후방에서 칼 잘 휘두르고 있어. 눈 먼 칼에 다치면 뒈진다."

"청명 시주는 그렇게 험한 말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콱, 이게!"

혜연에게 주먹을 들어보인 청명이 협박을 시전했다. 혜연이 움찔하고 몸을 움츠렸다. 청명아, 백천이 말했다.

"혜연 스님께 그런 식으로 말하면 못쓴다."

"아하. 백천 선배도 맞고 싶다 이거지?"

"아니,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했어. 방금."

오늘 누가 죽는지 가보자고! 청명이 목검을 꺼내 백천을 두드려 팼다. 후배가 선배를 두드려 패는 모습에도 일행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청명과 함께 있다 보면 이런 일은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서 크게 다치는 사람 나오면 그날로 나한테 죽는 거야. 정신 똑바로 차려."

"걱정된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 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구나."

윤종이 잔잔히 웃었다.

"네가 무서워서라도 절대 안 다칠 테니까 걱정 마라!"

조걸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했다. 청명만이 한숨을 내쉬며 내가 앓느니 죽지, 앓느니 죽어⋯⋯, 따위의 말을 중얼거렸다.

7.

유해 회수단원들의 수는 꽤나 많았다. 듣자 하니 역대 최다 인원으로 회수단을 꾸렸다는 말이 있었다. 정말이지 마교의 잔당을 머릿수로 압도해버리겠다는 정부의 의지마저 느껴지는 인원수였다. 하긴 그게 아니더라도 마교의 잔당을 상대하고 유골까지 수습하려면 사람이 많이 필요한 게 맞았다. 청명은 목검 아닌 진검을 붕붕 휘두르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맑고 푸른 하늘이 무척 아름다웠다. 십만대산에서 천마의 목을 자르던 날도 저러했는데.

"도사 형님."

당보가 다가왔다.

"애들 본다. 또 애들 앞에서 너한테 교수님이라고 부르기 귀찮으니까 저리 가 있어."

청명의 속삭임에도 당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이쯤 되니 청명도 이 녀석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당보를 돌아보았다. 도사 형님. 당보가 다시 청명을 불렀다.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제가 배에 칼을 맞고 도사 형님 뒤를 따라가지 못할 일도 없을 거고, 모두의 유해도 반드시 가져올 겁니다. 그러니 도사 형님도 스스로를 너무 위험에 몰아넣지 마십쇼."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그런 말을 하려던 거였어?"

청명은 피식 웃었다.

"걱정 마라. 안 죽을 테니까."

"안 죽는단 말로 퉁칠 게 아니라, 스스로의 몸도 좀 아끼라는 뜻이지요."

"시끄럽다. 가서 할 일이나 해."

십만대산에 와서도 당보를 찾는 이들은 굉장히 많았다. 아무래도 당보의 위치가 유해 회수단의 대표자 급이기 때문일까. 몹시 바쁠 텐데도 어떻게든 짬을 내서 저를 찾아온 게 퍽 기특했다. 청명은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당보의 등짝을 짝! 하고 때렸다. 신음을 겨우 삼켜낸 당보가 원망스럽단 눈길로 청명을 봤으나 청명은 어깨만 으쓱이고는 저 멀리 유해 회수단의 선봉 부분으로 걸어갔다.

8.

콰직!

청명의 일검이 마교 잔당의 가슴을 베었다. 선봉에 선 채 일직선으로 튀어나가는 청명에겐 마교 잔당들의 공격이 쏟아져 내렸다. 청명은 검 한 자루로 제 주변에 쏟아지는 공격들을 전부 쳐냈다. 그 때 저 멀리서 번뜩이는 눈빛을 한 마교도가 청명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왔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쳇. 귀찮게. 청명이 검을 휘둘러 마교도를 베어 넘기려던 순간, 뒤에서부터 검은 물질이 청명을 감싸듯 튀어나와선 마교도의 머리를 집어삼켰다. 켁, 커헉, 쿨럭! 검은 물질에 머리가 집어삼켜진 마교도는 이 정체 불명의 물질을 떼어놓으려고 했으나, 물질이 액체에 가까웠던 탓에 손으로 잡지도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천마재림 만마앙복이라. 저 주문은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군요."

무표정한 얼굴의 당보가 오른손을 한 번 까딱이자 검은 물질들이 마교도의 전신으로 흡수되었다. 귀와 눈, 콧구멍과 입 등으로 시커먼 액체가 꾸물꾸물 기어들어가는 것은 꽤나 징그러운 장면이었다. 마교도의 혈관들은 크게 요동쳤고, 전신에선 경련을 일으켰다. 크아악! 얼마 지나지 않아 청명을 공격하려 했던 마교도는 몸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선 다 피를 뿜으며 절명했다. 당보는 탁탁 손을 털었다. 이내 마교도를 집어삼킨 검은 물질은 서서히 빛무리가 되어 사라졌다.

독을 다루는 이능력자, 당보. 그는 손에 비도를 든 채 청명을 보며 웃었다. 청명은 미간을 찡그린 채 그런 당보를 보며 말했다.

"내가 충분히 잡을 수 있는 녀석이었어."

"어쨌거나 잡은 건 도사 형님이 아닌 저 아니겠소?"

"다음 번에도 가로채면 가만 안 둔다."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가로채는 것일지, 이쪽에서 도사 형님을 구해 주는 걸지 어떻게 구분하려고 그러시오?"

"이 자식이, 보자보자하니까!"

아웅다웅 다투면서도 청명과 당보는 호흡을 척척 맞추어 가며 십만대산의 마교도들을 정리해 나갔다. 당소소와 유이설, 백천과 윤종, 조걸, 혜연은 그런 청명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당보 교수님께도 저렇게 행동할 줄은 몰랐어요."

"인정. 버릇 없어."

"그런데 청명이 녀석의 무위가 제법이구나. 우리도 어서 저놈 뒤를 받쳐줄 수 있어야 할 텐데⋯⋯."

"백천 시주께서 부단히 노력하시니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청명 시주의 뒤를 받쳐주실 수 있을 겁니다."

"청명이 녀석으로 국 끓여 먹으면 나도 저렇게 검을 잘 쓰게 되려나?"

"걸아!"

뒤에서 아이들이 쑥덕대든 말든 청명은 선봉에서 칼을 휘두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십만대산의 고지가 이제 머지 않은 만큼 다른 데에 한눈을 팔 시간이 없기도 했다. 그렇게 몸을 사리지 않는 청명과 그 뒤에서 백업을 한 당보의 활약으로 이번의 유해 회수단은 지난 번까지의 유해 회수단들보다 십만대산의 정상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것에 성공했다.

천마가 목숨을 잃은 십만대산의 정상에 발을 디디기 직전, 유해 회수단은 휴식을 위해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십만대산의 정상에는 수많은 유해들이 있을 테고 그것들을 온전히 회수하기 위해선 유해 회수단원들의 체력 또한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리고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제일 좋은 방법은 휴식이었다.

밤이 되자 유해 회수단원들 중 전투 가능 인원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섰다. 운이 좋은 건지, 청명은 당보와 같은 시간대에 불침번을 서게 되었다. 짐승을 쫓기 위해 피운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것을 보며 청명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보야."

"예, 도사 형님."

"너라면 정부가 지금까지 파견한 역대 유해 회수단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읽어 봤겠지. 그걸 바탕으로 생각해 봤을 때, 십만대산의 정상엔 뭐가 있을 것 같냐? 아니, 정확히 묻자면 우리가 수습해야 할 시체들이 어떤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을 것 같으냐?"

당보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청명의 말대로 그는 역대 유해 회수단들이 쓴 유해 회수 결과 보고서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읽었다. 그 보고서들에 따르면 해가 갈수록 십만대산에서 발견되는 시신들은 시신이라기보단 백골의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걸 지금 자신의 입으로 말하라는 건가.

"도사 형님도 다 짐작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네게서 확실히 답을 듣고 싶어서 그렇다, 왜."

잠시간 침묵이 둘 사이를 갈랐다.

"⋯⋯백 년입니다. 천마를 베고도 백 년이 흘렀으니 시신들은 전부 살이 썩었을 테고, 남은 건 백골뿐일 겁니다. 유골들을 수습하여 차후 감식반에 의뢰를 넣기 전까지는 누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을 테지요. 백골들은 아마도⋯⋯. 죽음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담고 있을 겝니다. 어깨가 부서져 죽은 이의 어깨뼈는 나갔을 테죠. 목이 잘려 죽은 이의 유골엔 머리뼈가 없을 것이고, 팔이 잘린 채 죽음을 맞이한 이의 유골엔 팔 뼈가 사라지고 없을 겁니다."

그게 우리가 정상에서 목도할 광경입니다. 도사 형님.

"⋯⋯."

청명은 말없이 모닥불을 응시했다. 죽은 이들이 백골이 된 걸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이것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었다. 그는 일렁이며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다가 질끈 눈을 감았다. 당보는 그런 청명의 모습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조용히 눈에 담았다. 

마음이 술렁이는 밤이었다.

9.

"사실 정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정작 올라오니 별 일 없네요?"

당소소의 쾌활한 목소리가 십만대산 정상을 울렸다. 유이설은 당소소의 옆에서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래도 조심. 경계해서 나쁠 건 없음."

"아이, 참. 그렇네요! 이설 선배 말씀이 맞아요!"

언제나처럼 사이 좋은 유이설과 당소소의 모습이 유해 회수단원들의 마음을 편하게 풀어주었다. 조걸과 윤종은 혜연과 함께 십만대산에 널린 백골들을 주워 담고 있었고, 백천은 십만대산 정상 중에서도 꼭대기 부분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보는 중이었다. 청명과 당보는 그런 아이들을 제외한 다른 유해 회수단원들을 호위하며 갓 정상에 오른 참이었다.

"백 년 만에 찾아온 곳이면 감회가 새로울 줄 알았는데. 여기서 너무 많이 죽어서 그런가, 새로운 감회 같은 건 없고 마음만 무겁네."

청명이 중얼거렸다. 당보는 그런 청명의 말을 잠자코 들을 뿐이었다. 청명의 말이 맞았다. 지나치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여기서 죽어나갔다. 사방이 온통 새하얀 백골들 천지였다. 아무렇게나 쓰러진 백골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 많은 유해들을 도로 고향으로 데려가기 위해, 유해 회수단원들 중 유골 수습에 특화된 비전투인원들이 서둘러서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이변은 그 때 일어났다.

"어?"

십만대산 정상 중에서도 꼭대기 부분에 올라가 있던 백천이 그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어어, 저것⋯⋯. 저거, 저 유골들 말이다. 혹시 지금 움직이는 게냐?"

"에이, 백천 선배. 유골들이 무슨 수로 움직입니까? 잘못 보셨겠⋯⋯, 으악!"

"조심해라. 걸아!"

윤종이 외쳤다. 조걸은 기겁하며 주워 담고 있던 백골들을 땅바닥에 내팽겨쳤다. 정말로 뼈다귀들이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다! 땅바닥에 던져진 백골들은 달각달각 소리를 내며 움직이더니, 마치 과학실에 있는 전신 해골 모형처럼 형상을 갖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육도 살점도 없을 텐데 어떻게 움직이는 걸까요, 윤종 형?!"

"낸들 알겠냐! 어서 피해라, 걸아!"

이런 괴변은 한 군데에서만 나타나지 않았다. 곳곳에서 유골을 수습하던 비전투인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유골들을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청명과 당보 또한 사건이 발생했음을 알아차렸다. 

"여기, 이 해골이 가장 수상합니다!"

아직도 십만대산의 정상 꼭대기에 서 있었던 백천이 가장 수상해 보이는 해골을 향해 검을 빼들었다. 해골에서는 검은 기운이 넘실넘실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특이한 점이 있다면 목이 잘린 채 한 손에 두개골을 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해골을 발견한 청명의 눈이 커졌다.

"도망쳐. 진동룡!"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랬⋯⋯!"

백천은 청명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뒤로 펄쩍 뛰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큰일이 났을 것이다. 머리 없이 두개골만을 든 해골이 팔을 휘둘러 백천이 있던 자리를 내리찍었기 때문이다. 콰드득! 검은 기운을 두른 해골은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했다. 장소가 십만대산의 정상 꼭대기이니만큼 바닥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돌바닥이 부서지고 파편이 후두둑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목도한 백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내가 도망치랬지!"

청명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백천의 뒷덜미를 붙잡고 뒤로 확 던졌다. 청명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해골이 바로 천마의 해골이다. 검은 기운을 다루는 점도, 목이 잘려 두개골을 한 손으로 들고 다니는 점도 전부 천마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마는 죽은 지 백 년이 흘렀을 텐데 어째서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아악! 으아악!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유해 회수단원들 중에서도 비전투인원들의 비명소리였다.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는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에 바빴다. 청명은 흘낏 비전투인원들을 보곤 크게 소리쳤다.

"진동룡! 이설 선배! 윤종 형! 조걸! 소소! 가서 비전투인원들을 지켜!"

"그러니까 그 이름으로는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알았어. 접수."

"알겠다! 걸아, 가자!"

"예이, 예이! 갑니다!"

"한 분도 놓치지 않고 지킬게요!"

됐다. 병아리들을 아래로 보냈으니 사람들은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병아리들 외에도 전투가 가능한 인원들도 있으니 일단 아래 상황은 안심이었다. 이제 남은 건⋯⋯.

"또 네놈이냐."

청명은 천마의 해골을 향해 검을 겨눴다. 검은 기운을 뿜어내는 해골이 삐걱거리며 청명을 향해 몸을 틀었다. 해골이 들고 있는 두개골에선 시커먼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청명을 발견한 해골은 삐걱삐걱 몸을 움직이더니, 가부좌를 틀고 그 자리에 앉았다. 그래, 마치 백 년 전 십만대산 정상에서 천마가 그리했던 것처럼!

"저 새끼가 지금 사람을 도발해?"

청명의 칼을 쥔 손에 힘줄이 부풀어 올랐다. 금방이라도 튀어나가 천마의 두개골을 깨부술 것처럼 굴던 청명은 다음 순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천마의 해골이 한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그걸 모른 채 무턱대고 칼질을 할 수는 없었다.

손짓의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십만대산에 흩어져 있던 해골들의 눈에도 검은 불이 켜지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부터도 사람을 공격하고 있던 해골들이었지만 눈에 검은 불마저 켜지니 더욱 전투적으로 사람들을 공격했다.

"천마, 이 새끼는 죽어도 곱게 죽질 않네."

백 년 전에는 목을 날렸지. 이번에는 두개골을 박살내주마! 청명이 이를 아드득 악물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10.

천마의 해골에 다가가기 위해선 여러 구의 해골들을 지나쳐야 했다. 천마의 손짓에 수십 수백의 해골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청명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죽어서 뼈만 남은 결사대원들을 이런 식으로 욕보이다니. 청명은 천마의 사지를 갈가리 찢고 그 뼈를 곱게 빻아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으르렁대며 해골들을 무력화시키던 청명은 검을 든 해골들을 발견했다. 무기를 든 해골들이야 지금껏 베어왔으니 딱히 당황스럽지도 않았으나 이번만큼은 다소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그 검들이 화산의 제자들이 지녔던 매화검이라는 게 문제였다. 청명은 파죽지세로 휘두르던 검을 우뚝 멈춰 세우곤 그 자리에 서서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화산의 아해들이냐⋯⋯? 설마, 장문사형도 거기에 계십니까?"

당연히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매화검을 든 해골들은 턱뼈를 덜그럭거리며 점차 청명의 주위를 좁혀 올 뿐이었다. 이젠 검을 들고 방어 태세에 돌입해야 하는데도 청명은 화산의 망자들이 제 앞에 백골로 나타난 충격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십만대산에 버려진 해골들이 움직인다면 당연히 화산 사람들의 유골도 움직이고 있단 뜻일 텐데, 어찌하여 화산 사람들만큼은 저런 모습이 되어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걸까. 게다가 화산 출신의 결사대원들은 죽어서도 검을 놓지 않았던 탓에 눈앞의 해골들은 전부 매화검을 들고 있었다. 아아, 화산이여⋯⋯.

해골들이 든 수십의 매화검들이 청명을 향해 쇄도했다. 청명은 고개마저 숙인 채 그 자리에 멍하니 있었다. 그 때, 누군가가 청명의 뒷덜미를 붙잡고 그를 그 자리에서 급히 끌어냈다.

"정신 차리십쇼. 도사 형님!" 

당보였다. 청명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당보를 응시했다. 당보는 청명의 시선에도 돌아보지 않고 청명의 앞에 서서 독물의 장벽을 높게 세웠다. 촤아악! 마치 분수대가 펼치는 물의 장막처럼 독물의 장벽이 높게 솟구쳤다. 해골들은 장벽을 넘어오려다가 독극물에 뼈가 부식되며 녹아갔다. 치이익! 뼈가 녹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후, 당보는 숨을 가볍게 몰아쉬었다.

"이런 상황에서 넋을 빼고 있는 건 도사 형님답지 않습니다. 대체 뭘 봤기에 그럽니까?"

"⋯⋯매화검을 봤다. 저 해골들, 매화검을 들고 있었어."

"⋯⋯."

어쩐지. 그 도사 형님이 혼을 홀라당 빼앗길 만한 건 화산과 관련된 일밖에 없지 않던가.

"그래도 이번엔 크게 다칠 뻔 하셨소."

매화검존으로서 죽은 지 백 년이 흘렀으니 청명이 화산에 대해 가진 감정과 기억들이 어느 정도 풍화되었으리라 여겼던 건 자신의 오판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청명이 그런 사람이었으니 백 년의 시간을 넘어서 이 당보를 찾아왔던 거겠지. 당보는 새삼스런 눈길로 청명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꽤나 엄한 목소리였다.

"정신 차리시오. 난 여기서 도사 형님을 다시 잃고 싶진 않습니다."

드높게 솟구치던 독물의 장벽은 차츰 그 위세가 잦아들었다. 매화검을 든 해골들은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독물에 전부 녹아버렸으리라. 당보는 손가락을 튕겨 독물을 도로 무(無)로 돌려보냈다.

"⋯⋯그래. 추한 꼴을 보였군."

청명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매화검을 들고 있는 해골은 응당 매화검존인 자신이 도로 저승으로 돌려보내줬어야 했다. 이번처럼 당보의 도움을 받을 게 아니라. 당보가 아무리 그 무위가 뛰어나다고는 해도 결국 화산의 사람은 아니지 않던가. 화산의 사람은 화산이 거두어야 하는 법일진대, 그것조차 하지 못하고 남의 손에 진혼(鎭魂)을 맡기다니⋯⋯.

청명은 검을 고쳐쥐었다. 두 눈에는 붉은 광망이 줄기줄기 흘렀다. 이 수치와 미안함은 천마의 두개골을 깨부수는 것으로만 씻을 수 있으리라.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당보는 그제야 작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래야 이 당보의 도사 형님이지.

"가자. 당보야. 저 천마 놈의 대가리를 부수지 않고선 내 성이 안 풀릴 것 같다."

"예에, 어련하시겠습니까. 후위는 도맡을 테니 앞만 보고 가십쇼."

검존과 암존이 백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다시 십만대산에서 그 무위를 펼치는 순간이었다. 청명이 앞으로 쏘아져 나가며 일직선으로 길을 뚫을 때마다 해골들이 산산이 부서졌고, 당보가 손짓으로 독물을 일으키면 그 부서진 해골들은 뼛가루조차 남기지 못하고 녹아 사라졌다. 그렇게 파죽지세로 천마에게 향하는 길을 뚫어낸 두 사람은 마침내 천마의 해골을 마주했다.

검게 타오르는 기운이 천마의 해골을 뒤엎고 있었다. 청명과 당보는 서로 시선을 마주친 후 동시에 천마를 향해 각각 검과 비도를 찔러넣었다. 그러나 역시 천마는 천마라는 걸까. 검과 비도는 천마의 해골에 작은 생채기만을 내고 튕겨나갔다. 아무래도 저 검게 타오르는 기운이 천마의 방어력을 높여준 듯 한데⋯⋯. 쳇. 청명이 혀를 찼다. 그런 그를 향해 천마의 두개골이 덜그럭거리며 입을 열었다.

[매화⋯⋯검존⋯⋯.]

"뭐야. 이 새끼 혀도 없는데 어떻게 말을 하는 거지?"

천마의 두개골은 청명의 의문에 답해주지 않고 자신이 할 말만을 계속했다.

[너는 이 몸이 인정한⋯⋯ 최고의 검수. 나와 함께 마도천하를 열자꾸나. 새 시대를 열자꾸나⋯⋯.]

"아,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새롭게 열리는 마도천하에는⋯⋯ 망자도 살아 돌아올 수 있다.]

"⋯⋯."

청명은 아무 말 않고 천마의 말을 듣다가 되물었다.

"⋯⋯그 말, 확실해?"

[그러하다.]

"그렇군."

청명은 고개를 끄덕였고, 검을 역수로 쥐어 천마의 두개골을 내려찍었다. 천마의 해골이 내는 기괴한 울음소리가 고막을 타고 퍼졌다.

[무얼 하는 건가?]

"보면 몰라? 안구가 없어서 못 보나? 네 대가리 깬다. 왜!"

천마의 해골에서 검게 타오르던 기운이 청명의 몸을 타고 올라가서는 끝내 청명을 집어삼켰다. 피부가 천천히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청명은 굴하지 않고 검으로 천마의 두개골을 내려찍길 멈추지 않았다.

"도사 형님!"

"오지 마!"

청명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선천진기까지 사용해야 이놈의 두개골을 깨부술 수 있을 성 싶었다. 청명은 숨을 몰아쉬고는 선천진기를 살살 풀어내어 검기로 발현했다. 매화빛 검기가 찬란하게 십만대산 정상을 뒤덮었다. 사방에 매화가 점점이 흩날렸고, 이는 곧 꽃잎의 바람이 되어 청명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폭풍이 되었다.

청명은 검기를 두른 검으로 천마의 두개골을 콱콱 내려쳤다. 두개골이 점차 깨져가는 게 청명에게도 보였다. 잠시 침묵했던 천마의 두개골이 턱뼈를 덜그럭거리며 물었다.

[후회하지⋯⋯ 않겠는가?]

"네가 죽인 사람들을 네가 살려낼 수 있다는 궤변은 둘째 치고."

콰드득! 검이 두개골을 다시 한 번 찔렀다. 두개골의 형체가 점차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내가 후회하더라도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이 개자식아!"

콰직! 마침내 마지막 일격이 천마의 두개골을 완전히 부쉈다. 동굴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려퍼지는 듯한 단말마의 비명이 함께 흘러나왔으나 청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는, 언제고 다시 돌아온다⋯⋯.]

천마의 두개골이 이내 파스스 흩어져 바람결에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십만대산에서 움직이던 해골들 또한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이설 선배! 괜찮으세요? 갑자기 해골들이 다시 죽었어요!"

"해골. 원래 죽어있는 것."

"아앗, 그렇죠. 역시 이설 선배 말씀이 맞아요!"

"걸아. 어디 다친 덴 없고?"

"에이. 저는 괜찮습니다! 윤종 형은 어떠세요?"

"나는 괜찮다. 그나저나 백천 선배께선 괜찮으실지 모르겠구나."

"나도 괜찮다. 내가 걱정하는 건 오히려 청명이 쪽이지. 그 망둥이 녀석이 또 이번에도 뭔갈 한 모양인데⋯⋯."

사방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청명은 희미하게 웃으며 천마의 두개골이 부서진 자리를 보다가, 이내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도사 형님!"

당보가 급히 달려와 청명을 부축했다.

"아이고, 죽겠다⋯⋯."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마쇼! 내가 도사 형님을 죽게 둘 것 같습니까!"

청명이 키득거렸으나 곧 그 웃음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로 바뀌었다. 천마의 해골에게서 옮겨붙었던 검은 불이 청명의 몸에 화상을 입혔던 탓이다.

"⋯⋯이번에도 나는 도사 형님께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소."

당보가 우는 소리를 했다. 당보로서는 당연한 말이었다. 백 년 전에는 배가 뚫려 십만대산에 함께 오르지도 못했고, 오늘은 청명이 선천진기까지 사용하여 검기를 일으키는 동안 도와줄 새가 없었다. 청명은 그런 당보를 힐끗 바라보았다. 우중충한 얼굴이 심히 보기에 좋지 않았다. 청명은 엄지와 중지로 당보의 미간에 딱밤을 하나 먹였다. 미간 펴라.

"⋯⋯지금껏 살아 있어준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다. 이 녀석아."

그 말에 당보의 얼굴이 멍하게 변하는 것을 보며 청명이 킬킬거렸다. 자식, 멍청한 표정 짓기는. 그나저나 어지럽네. 잠깐만 쉬었다가 일어날까⋯⋯. 

청명의 몸이 휘청거리며 땅으로 쓰러졌고, 당보는 급히 그런 청명의 몸을 받아들었다. 이내 청명의 시야가 암흑으로 물들었다. 암전이었다.

11.

"사후(事後) 처리는 저와 사천당가가 도맡았습니다. 제 독에 녹아버린 유골의 경우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게 아니라 단순히 검에 베여 형체를 유지한 유골들은 유전자 감식을 통해 신원이 밝혀졌고요."

청명은 당보의 자택에서 요양을 하는 중이었다. 안경을 쓴 채 청명에게 이런 저런 내용의 보고서들을 읽어주던 당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천마한테는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겁니까?"

"있어. 개소리."

청명은 길쭉한 소파에 드러누워 기지개를 폈다. 죽은 이들을 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말이 유혹적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죽은 이들이 정말 그런 부활을 바랄까? 천마를 죽이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마저 버렸던 이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이 천마로 인해 부활하길 정말 바랄까? 천마의 손을 잡았다면 그건 망자들에 대한 모독이 아니었을까. 그리 생각하니 도저히 천마의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꽤나 성공적으로 유해 회수를 끝마친 청명에겐 스펙 한 줄이 더 늘어났다. 유해 회수단원 중 가장 큰 공로자라는 타이틀이 그것이었다. 이 나이에 이 정도 경력을 쌓았으면 어딜 가든 취직 걱정은 덜 해도 되겠지. 청명은 안심했다.

"그런데 도사 형님. 정말로 대학원 생각은 없습니까? 제가 잘 해드릴⋯⋯, 아악! 도사가 사람 잡는다!"

"너는 맞아도 싸! 대학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청명이 소파에 있던 쿠션으로 당보를 내려쳤다. 부우욱! 얼마나 세게 쿠션을 잡고 쾅쾅 내려쳤는지 쿠션의 바느질이 터져 깃털이 이리저리 휘날릴 정도였다. 깃털로 뒤덮인 방 안에서 당보와 청명은 서로를 빤히 보았고, 낄낄 배를 잡으며 웃었다. ⋯⋯아, 행복하다.

"이게 행복인가⋯⋯."

청명이 중얼거렸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냐. 아무것도."

청명은 미소지으며 제 머리에 쌓인 깃털들을 털어내었다. 이제 정말 백 년 전과는 안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가 백 년 전의 행복한 추억이나 인연들을 잊을 리는 없다. 그러나 십만대산에 있던 이들의 유골을 데려오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개운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천마의 두개골도 박살냈겠다, 이제 과거의 악연과는 정말로 작별을 고해도 좋을 것이다. 만일 천마의 마지막 말대로 천마가 다시 돌아온대도 그땐 또 어떻게든 될 테지.

청명은 당보를 보고 웃었다. 당보도 그런 청명을 보곤 좋다고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이 웃는 방 안으로 환한 햇살이 흘러 들어왔다. 앞으로의 나날들을 비춰주는 것만 같은 햇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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