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세월은 흘러갔다. 내일은 믿지 마라. 오늘을 즐겨라.

칠삼2033 by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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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근이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늘 똑같은 공관 침실의 천장. 벽지 구석에는 곰팡이가 슬어있었고, 조금 찢어져 있긴 했지만, 뭐 요즘 같은 서울에서 이 정도면 괜찮았다. 벽이 무너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물론 기관지에는 안 좋겠지만, 너나모두 배곯는 요즈음에 그런 걸 신경쓸 때가 있던가. 물론 언젠가 공관을 다시 지을 수 없냐고 물어본 적도 있지만, 동현은 그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대신 제가 조만간 보수해 놓겠습니다. 그 말을 들었던 게 3년 전 같은데…. 하지만 그러는 동현이 쓰는 숙소도 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동현과 수근은 같은 공관을 쓰지 않던가.

뭐,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수근은 그냥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잠에 들었다.


“-님, 일어나세요! 그러다 늦어도 전 모릅니다!”

동현의 목소리였다.

수근은 눈을 비비적거렸다. 매일 출근이 고역이었다. 그 분은 새벽잠이 없으셨다지만, 그런 부분은 수근이 모방하고자 하여도 할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수근이 몽롱한 정신으로 천장을 봤다. 깨끗하고 흰 천장. 깨끗한 창문 너머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

순간 잠이 달아난 수근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여긴 공관 침실이 아니었다. 보송보송한 이불, 침대 옆에 붙어있는 책상, 그리고 작은 책장….

수근이 벌컥 방문을 열었다. 녹슨 부분 하나 없이 깔끔한 문고리가, 역시나 깔끔한 이음쇠에 의해 소리 없이 열렸다. 수근은 얼떨떨하고 신기한 마음에 몇 번이고 문을 여닫았다.

뭔지는 몰라도 동현이 아무말 없다면, 수근이 걱정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얼떨떨하긴 했지만. 수근은 조용히 방을 나섰다. 밖의 풍경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말 흔한… 아, 물론 핵이 터지기 전 기준의, 평범한 가정집 풍경이었다. 벽지에는 찢어지거나 곰팡이 핀 곳이 없었고, 심지어 창문도 깨진 것 하나 없이 말끔했다.

요즘 같은 시국에 이런 집이 있을 수가 있나? 공관을 새로 짓는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주방에서 인기척이 났다. 동현일 것이다. 수근은 조심스레 주방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이게 다 뭔가?”

“무엇 말이십니까?”

동현이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그런 동현은… 군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수근이 그 부조화에 잠시 동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군복을 입지 않은 신동현이라는 존재가 실재할 수 있는 거였나? 동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식탁에 식기를 놓았다.

“잠꼬대하지 마시고 앉아서 얼른 드십쇼.”

“아, 그래….”

수근은 어색하게 식탁 앞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제 눈을 의심했다. 윤기 나는 밥, 된장국, 계란말이에 김치까지. 수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뒤적였다.

뭐지? 통조림도 라면도 즉석식품도 아니고, 무슨 반찬을 두개씩이나…. 게다가 국까지 할 건 뭐람. 밥에는 돌도 안 섞였잖아? 심지어 전부 쌀? 우리 형편이 그렇게 좋았을 리가 없는데. 아니, 애초에 요즘같은 때에 대체 어디서 이런 걸 구할 수 있-

딱!

“아얏."

수근이 제 이마를 부여잡았다.

"밥상머리에서 예의 없게 음식 뒤적이지 마십쇼.”

“미, 미안하네. 근데 그렇다고 때릴 것까진….”

수근은 태연하게 싱크대로 가는 동현을 다시 바라봤다. 저 놈은 저러고 출근할 심산인가? 동현이 싱크대에 프라이팬과 작은 냄비를 놓았다. 그리고 쏴아아, 물을 틀었다. 수전에서 깨끗한 물이 세차게 흘렀다. 뭐지? 요 근래에 정수시설이라도 점거했던가. 그렇게 생각한 수근이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마셨다.

콜록, 콜록!

“괜찮으십니까?”

“아, 어어, 아무것도 아냐, 그냥 사레가 들려서…….”

수근이 변명하듯 말했다. 그리곤 다시 국물을 떠 마셨다. 따듯했다. 그러고 보니 식탁에서 국물 요리를 먹어본 게 얼마 만이더라? 재료도 재료거니와, 동현은 손 많이 가는 음식을 할 정도로 여유롭지 않았다. 수근도 국을 할 줄은 알았지만, 귀찮아서 별달리 차려 먹는 편이 아니었으니….

수근이 헛웃음을 지으며 제 볼을 꼬집었다. 아팠다. 그러고 보니 아까 동현이 이마를 때렸을 때도 아프긴 매한가지였다. 아니, 그러고 보니 이놈 자식은 잘도 상관을….

“오늘따라 왜 이렇게 늦장을 부리십니까? 얼른 학교 가셔야죠, 도련님.”

“뭐?”

수근이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방금 나한테 뭐라고 한 건가?”

“예? 어… 오늘따라 왜 이리 늦장을 부리시냐고….”

“아니, 그거 말고.”

동현이 수근을 곁눈질했다.

“…도련님, 혹시 지금 학교가기 싫어서 시간 끄시는 거라면, 관두십쇼. 이번 달만 벌써 병결을 세 번이나 쓰셨다고요. 여기서 더 빠졌다간 아버님께서 화내십니다?”

의외의 이름에 수근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님?”

수근이 주위를 둘러봤다. 금 간 곳 없는 집, 때 묻지 않은 가구들. 수근은 원래 제 공관을 떠올렸다. 바닥에는 끊어진 전선과 먼지가 가득했고, 욕실 거울도 반쯤 떨어져 나가, 어릴 적엔 공관으로 퇴근하느니 그냥 당직을 서겠다고 떼쓴 적도 몇 번인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동현이 저를 어르느라 고생 좀 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그 때의 동현도 서른이 채 안된 나이였던 것 같은데…. 수근이 뒤를 돌아봤다. 거실로 추정되는 공간에는 소파와 탁자, 텔레비전, 그리고 화분 몇 개가 놓여있었다. 텔레비전 뒤의 벽에는 커다란 액자가 하나 걸려있었는데, 그 액자 속 사진에는 수근과 어떤 여자, 그리고…

아버지.

순간 수근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등골에서 서늘한 감각이 올라왔다. 그러고 보니 이 집, 핵이 터지기 전 수근의 집과 똑같이 생겼다. 자각을 함과 동시에, 익숙한 거실의 풍경에 옛 기억이 덮어씌워졌다. 벌써 18년도 전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아하, 이제 알겠다.”

수근이 중얼거렸다. 분명 저는 로망을 먹은 것이다. 언제 어떻게 먹었는지는 몰라도, 이게 꿈이 아니라면 로망에 취해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현실의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허공을 떠 마시고 있는 건가? 그래, 아무래도 그렇겠지. 반쯤 폐허가 된 공관에 아무렇게나 앉아 허공을 뜨고 있는 사령관이라니. 뭐, 이미 수근이 사령관인 시점에서 더 우스꽝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렇다면 분명-

딱!!

“아얏.”

“정말이지….”

탐탁찮은 표정의 동현이 수근의 밥그릇을 가져갔다.

“오늘따라 왜 이러십니까? 자, 아 하세요.”

동현이 숟가락을 내밀었다. 수근은 반사적으로 넙죽 그것을 받아먹고는 스스로 놀라 주춤거렸다. 동현은 태연하게 다음 술을 뜨고 있었다. 입에 닿는 음식의 촉감이 허깨비라기엔 너무도 생생했다. 수근이 음식을 씹는 동안, 동현은 제 휴대폰을 힐끔댔다. 동현이 숟가락을 내밀고, 수근이 그걸 다시 받아먹기를 몇 번 반복했을까, 동현이 말했다.

“늦었으니까 오늘은 이것만 드시고 가세요.”

그리곤 반찬을 정리했다. 수근은 그런 동현을 멀뚱하게 쳐다봤다

“…씻으러 안 가세요?”

“아, 응. 그래야지.”

수근이 머뭇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발바닥에 닿는 대리석의 느낌이 생경했다. 원래 있던 공관에서는 맨발로 다닐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잠깐, 원래 있던 공관?

수근이 욕실에 들어가 세면대 앞에 섰다.

원래 있던 공관이라니? 수근은 이 집에서만 10년이 넘도록 살아오지 않았던가. 명백한 어폐였다.

거울 속에 앳된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뭔가 목께가 허전했다. 수근이 제 목을 더듬었다.

잠이 덜 깼나 보다.

수근은 그렇게 생각하며 물을 틀었다. 쏴아아, 차가운 물이 세면대로 흘러나왔다. 수근은 양손 가득 물을 담아 얼굴을 닦았다. 물이 수근의 얼굴을 헹굴 때마다, 머릿속 어딘가가 천천히 비워지며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수근은 이빨을 닦으며 한참을 세면대 앞에 서있었다. 그리고 다시 거실로 나가 동현에게 말했다.

“이상한 꿈을 꿨어.”

수근은 방으로 들어갔다. 옷장에 교복이 걸려있었다. 수근이 주섬주섬 교복을 챙겨 입었다.

“어느 날 서울에 핵이 터진 거야.”

거울을 보며 교복 자켓까지 걸쳐 입으니, 왜인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질감이 들었다. 분명 내가 입어야 할 옷은 이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수근이 자켓 단추를 잠그고 제 가슴팍을 쓸었다. 학교 로고가 박힌 와펜만이 만져졌다. 원래 내 가슴께가 이렇게 휑했던가? 수근은 갸우뚱했다.

“핵이요? 그래서, 서울에 핵이 터져서 뭘 하셨는데요?”

동현이 하하 웃으며 물었다. 수근은 머뭇였다.

“그게….”

꿈의 내용이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나.”

수근이 침대맡에 놓여있던 책가방을 들었다.

“뭐, 꿈이 다 그렇죠.”

“으응, 근데 너도 나왔었어.”

“저도요? 저는 뭐였는데요?”

수근은 책가방을 맸다. 별로 무겁지는 않았다.

“군인. 나도 군인이었던 것 같은데…….”

“군인이요? 진짜 이상한 꿈을 꾸셨네요.”

동현이 또 하하 웃었다. 수근은 그치, 하며 함께 웃었다.

현관 앞에 서자 신발장에 신발 여러 개가 보였다. 수근의 운동화 몇 켤레, 초등학교 이후로 신은 기억이 없는 오래된 실내화, 동현의 스니커즈와 단화, 아마 아버지의 것일 골프화. 수근이 운동화 중 하나를 꺼내 구겨 신었다.

“그렇게 신지 마시라니까요!”

“그래, 그래.”

수근이 다시 신발을 고쳐 신었다. 신발의 깔창에 닿는 발의 감각이 어색했다. 마지막으로 운동화를 신어본 게 먼 옛날 일이라도 되는듯이…….

그리고 바닥에 신발코를 몇 번 툭툭 치자, 언제그랬냐는 듯 그런 감각은 사라졌다. 뭔가 아침부터 붕 떠있는 기분이었다. 아까 꾼 내용 모를 꿈 때문인지, 모든 것이 생소하고 어색했다. 마치 신기루처럼. 분명히 수근의 현실은 바로 지금 이것임에도….

수근이 눈가를 비볐다. 동현은 수근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셔츠 카라도 한 번 매만지고, 자동 넥타이도 다시 채웠다.

“다녀오세요.”

동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녀올게.”

수근이 대답했다. 도어락 손잡이를 잡는 손의 감각도 무언가 새삼스러웠다. 수근은 잠시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현관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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