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축복의 저주를
메리 크리스마스!
#1 서아
"여기는 크리스마스 안 챙겨?"
"엄청 옛날에는 챙겼었거든? 근데 어쩌다가 내가 그 땅을 만든 존재라는 게 밝혀지고 나서는 내 생일을 묻더라고."
"아, 설마."
"매일매일 죽고 태어났는데 그걸 어떻게 말해, 그러다가 여러 문제가 생겼어. 아무튼 당사자랑 합의했고,
이젠 크리스마스같은 종교적 기념일은 없지만 국가적 기념일이나 필수 공휴일같은 건 제정해서 쉬고있어. 그쪽보다 공휴일은 더 많을걸."
"당사자, 랑 합의를 했다고?"
#2 서아
"어차피 너도 종교 없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다들 모여서 크리스마스랑 연말 분위기를 함께 내는 건 좋지 않아?"
"여기도 잘 찾아보면 희고 붉고 파란 것, 케이크, 사슴, 순록과 전나무, 그리고 빨간 옷을 입은 망태할아버지가 있긴 할거다."
"산타를 저렇게 말 하는 것도 재주인데."
#3 서아
"그래도 공원에 전구 다는 건 괜찮지 않나?"
"그렇지, 매 년 해오던 거니까. 이번 해에는 좀 색색들이로 해도 되고."
"좋아, 산신 아저씨랑 같이 가서 사야지."
"그래 뭐, 사는 건 좋은데 그 아저씨 아직 외관상 어린아이라서 뭐 사달라는 거 다 사주면 안된다."
"아니 정신은 성인이잖아."
"기억만 많은거지 성장기라서 육체도 정신도 아직 미숙해. 휘둘려서 또 이상한거 사오면 호수에 던져버린다."
#4 서아
"그래서 이 고무 오리는 뭔데. 크리스마스 에디션?"
"호수에 던져."
"너 진짜."
#5 유인
"서아 왔다더니 색색들이로 공원 꾸몄네?"
"손에 든 건 뭐냐?"
"이제 여기선 잘 안 쓰는 에너지 자원."
"석탄."
"못된 아이에겐 석탄을!"
#6 케이
"어머니, 뭐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어요? 이게 다 뭐람."
"서아가 연말 즐기고 싶대서."
"아~. 거기는 그런거 챙긴다 그랬지. 생각해보니 초토화된 그 환경에서도 리스같은 걸 만들어서 기념하고 그러던데.
그렇게 한시름 덜 수 있다면 정신에도 좋은거죠."
#7 카일
"뭐야, 누나도 있잖아. 좀 뒤에 올까요?"
"넌 또 무슨 일이냐."
"답지 않게 올해는 꾸미셨길래요. 심경의 변화가 있으신가 했죠."
"내 심경은 아니다."
#8 유진
"다들 모여계시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케이크를 더 많이 사올 걸 그랬나."
"케이크는 또 왜?"
"서아씨가 까먹었다 그래서요. 또 그 산신님이랑 해서 네 명이서 조촐하게 먹나 해서 하나만 사 왔는데. 좀 부족해보이네요."
#9 이윤
"제가 제일 늦었네요."
"서아, 네가 부른 거야?"
"그럼. 없으면 섭하잖아. 윤이 오빠도 케이크 한 조각쯤 먹을 시간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럴 줄 알았죠. 그리고 선물도 가져왔습니다. 별 건 아니지만요."
"아날로그 탁상시계네. 예쁘긴 하다. 대학교 이름은 왜 적혀있는 거야."
"대학교 비품이구만."
"그건 총무과에서 가져가라고 한 거라, 따로 상품권 가져왔어요. 근처 어디든 쓸 수 있는 거니까 가져가세요."
#10 리현
축사를? 내가 뭐 축사 할 게 있다고……. 그래도 좀 읊어보자면,
난 꽤나 오랜 시간 침잠하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건 생로병사의 원을 돌았지만 나는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로 그대로였지. 박제된 채로 너희들의 생애를 지켜보기만 하고,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말고 멈춘 게 내 죗값을 갚는 것이라 생각했거든. 하지만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지켜보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고, 망설임도 적당히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 자명한 사실을 언제나 이끌어준 건 너희와 같은 존재들이었지. 특출나지 않으면서도 특별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별들이. 나는 그런걸 동경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언제나 희망차진 않다. 이기적인 인간들은 언제나 있고, 자기 잇속이 먼저인 건 누구나 그렇다. 하지만 지금처럼 모두를 사랑해라. 이 땅, 이 우주, 이 세계에 우리가 이렇게 타인과 자신을 구분해 있는 이유는 모순적이게도 타인과 자신은 같은,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 모두를 사랑하고, 친절해라. 언젠가 그것을 돌려받을 거란 이기적인 마음이라도 좋다. 나쁜 척을 하다 끝을 맞이하면 나빴던 모습으로 끝나지만 착한 척을 하다 끝을 맞이하면 적어도 착했던 모습이 있었다고 취급받는다. 그런 두려움이라도 가지도록 해라. 그렇게 해서라도 주변인들을, 또 나아가 모두와 상생할 수 있다면 좋겠지. 어디까지나 내 소망이라 일축할 수 있지만 그 소망이 가져올 거대한 희망을 상상해봐라.
동경하는 아이들아. 너희들에게 축복이란 이름의 저주를 주마. 희로애락의 소용돌이에서 혼돈을 가지도록 해라. 나를 가까이 한다는 건, 그 옆에 질서또한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아, 케이크 묻히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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