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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지기님(@stargazer_commi) 커미션

원피스 크로커다일 드림

든프 by 정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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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을 사막으로 만들어서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누구나 한 번쯤 가질 법한 소망.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 그런 걸 우리는 흔히 꿈이라고 부르곤 했다. 염원이라기에는 가볍고, 환상이라기에는 잔인하며, 소원이라기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셀 수도 없는 세상에서 꿈은 말 그대로 이상과 희망을 꾹꾹 눌러 담은 헛된 현상.

개중 평생 스쳐 지나간 수많은 무의식의 장면 속에서 이번 꿈은 가장 기분 나빴다. 크로커다일은 그렇게 단정 짓기로 했다. 왜, 가끔은 잠에서 깨면 분명 기분이 나빠지다 못해 독한 위스키 한 병을 찾아 잔에 털어 비워낼 것 같은 꿈 있지 않은가. 딱 그 꼴을 하고 있는 꿈이다.

어린 시절 위에서 살다 싶이 했던 흰 수염 해적단 배의 갑판. 흐려지긴 했어도 특징들이 하나하나 기억나는 선원들 하나 없는 그 위에서 크로커다일은 그리운 사람을 본다. 체임벌린 윈프레드 - 혹은, 그에게는 위니라 불리던 사람. 두 사람이 루키라고 불리는 시절이었을 적의 그 모습으로 나타난 악몽은 뱃머리의 갑판 앞에 기대어 파란 하늘과 바다 사이 자리하고 있다. 마치 그곳이 처음부터 자신이 있었던 곳이라는 듯.

“위니...”

젠장. 부르기만 했는데도 절로 아련해지는 목소리에 크로커다일은 금방 입을 다문다. 아무리 이것이 꿈이라 해도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듯한 소리를 내게 된다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다. 어차피 저 위니는 자신을 보지도, 자각하지도 못하는 것 같다. 무시무시한 키와 덩치의 사람이 제 근처에 있다는 것 하나 모르는 것처럼 여전히 갑판의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위니, 거기서 뭐 해.”

“이거 봐. 오늘은 별이 잘 보여, 크로.”

이윽고 들리는 또 다른 목소리. 먼 과거에 일어난 어느 밤의 이야기. 같은 배 위에서 잠시나마 보냈던 시간의 이야기. 이젠 그게 정말 있었던 현실인지, 이 꿈이 만든 환상인지도 모르겠지만 - 지금보다 한참 어린 모습의 크로커다일이 윈프레드의 옆에 다가와 섰다.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리고 퉁명스레 말했지만, 크로커다일에게 그건 들리지 않았다.

너무 환하게 웃고 있는 위니 - 신입 해군 시절의 위니의 미소가 보였기 때문에, 과거의 자신이 무어라 말했는지 기억할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이상해. 이상했다. 자신을 보고도 잘 웃을 줄 아는 여자였다. 그래, 분명 그랬어.

그런 위니가, 언제부터 저렇게 웃지 않게 되었더라.

“맨날 보는 별이 무슨 대수라고... 얼른 들어가.”

“크로, 너는 감성이 뭔지 몰라? 사람이라면 자고로 가끔 이렇게 맑게 갠 하늘의 별을 보고 싶기도 한 법이야.”

저런 투의 말도 할 줄 알았던가. 하도 멀리 있는 세월의 꿈이 더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도 되지 않는다. 어쩌면 있었을 수도 있을 법한 일이 너무 선명하다. 눈이 아플 정도로.

이윽고 소년은 왼손으로 소녀의 손목을 덥석 잡는다. 흰 수염이 달린 졸리 로저가 그려진 손. 지금은 더는 없는 손으로 잡고는 고개를 까딱인다. 들어가자는 신호에 소녀는 불만을 표하면서도 순순히 들어간다. 밤의 바다 - 그것도 해적선에서는 무슨 일어날지 모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지키는 법을 알았던 소년. 단지 수많은 별이 뜬 하늘을 보는 걸로도 행복할 줄 알았던 소녀. 두 사람이 사라지는 와중에도 크로커다일의 시선은 여전히 소녀에게 닿아 있었다.

“별 따위보다 네가 더 예뻐.”

지금보다 한참 더 겁쟁이던 소년이 하지 못했던 말을 크로커다일이 중얼거린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 있어도 네가 있으면 비할 것도 아니라고 하지도 못했던 시절. 그때는 줄 수 있는 것도, 주려고 했던 것도 많지 않았다. 전하지 못했던 꽃들을 모으면 나라 하나를 가득 채울 수 있다고 자신한다. 하지 못했던 말들을 다 모은다면 일생일대의 고백이자 프러포즈가 될 거라 믿었다. 해묵은 감정 하나하나 전부 꺼내 놓는다면 감히 이 위대한 바닷속을 뚫고 세상을 뒤흔들 것을 알았다. 전부 다 저 깃털 같은 걸음으로 멀어지는 소녀에게서 향하는 마음이란 건 변하지 않는다.

한 걸음. 갑판 위에서 발을 내딛는 소녀의 발치가 안개처럼 서서히 흩어진다. 가장 처음으로 자신을 당황하게 만든 여린 울음소리가 울린다. 겁도 없이 레이피어를 들고 덤벼들었던 여자아이. 실력도 없으면서 진 걸로 울은 녀석. 첫 기억 속 그녀는 그랬었다. 분한 건 참지 못하는 약한 녀석. 거기서부터 수많은 감정이 태어나 지금까지 자라고 있다는 걸 안다.

다시 한 걸음. 소녀는 해군복을 두른 여자가 된다. 천천히 나아가는 사이 그녀는 크로커다일이 알았던 체임벌린 윈프레드로 서서히 자라난다. 그가 모르는 시절의 모습들은 야속하게도 꿈속에서조차 나타나지 않지만 - 그가 그녀를 알던 모든 때의 모습이 스친다. 울고, 웃고, 분노하고, 사랑하는 모습이 전부 스친다. 그렇게 보면 이 꿈은 참으로 크로커다일에게 잔인할지도 모른다. 단 한 순간도 자신이 위니를 잊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듯 이렇게 모든 것을 보여주니까.

바다에서부터 올라오는 투박하고 진한 자연의 향. 소금기 머금은 바다의 공기, 오래됐음에도 풍파 되지 않은 갑판 나무의 향, 그리고 뜨거운 햇볕 아래가 합심해서 모든 공개를 꽉꽉 채워진 세상. 그사이 낯선 바람 하나가 분다. 바람. 네 개의 계절과 하늘과 땅과 바다 사이를 모두 스쳐 지나가는 바람. 크로커다일이 아주 잘 아는, 손에 한 번도 잡히지 않았던 바람이 분다. 손 대신 갈고리가 자리 잡은 손을 어루만지듯 스치며.

그 소녀는 - 위니는 - 마치 살풋 부는 봄의 꽃바람. 순식간에 지나가는 여름보다 화사한 빛을 언제나 발하니 여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가을보다 온화한 풍요로운 여유를 가지니 가을과 비교하지 않는다. 단 한 순간도 차갑지 못했던 그 온도를 겨울의 것이라고 칭할 수는 없다. 하늘처럼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지 않으나 땅처럼 낮은 위치에 둘 수 있는 인물은 전혀 아니다. 바다처럼 드넓은 사람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그 안에 품지 않는다. 사막처럼 매번 변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가 가장 아끼는 보물과 같은 면모는 변하지 않고 굳건하다.

차라리 쉽게 꺾어서 갈취할 수 있었더라면, 차라리 그랬더라면 이렇게까지 바라지도 사랑하지도 원하지도 않았을 거란 게 우습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자신과 다른 쪽에 같은 귀걸이를 건 순간부터 이리 깊게도 남았다. 현실에서 잊으려고 해도 꿈에서 이렇게 다시 나타날 정도로.

그런 따스한 바람에서 백합처럼 단아하고 고고한 꽃과 월하의 향이 퍼진다. 밤처럼 은은하게 퍼지는 그것은 - 바람. 체임벌린 윈프레드라는 이름을 가진 바람은 겁도 없이 거친 배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노스탤지어만을 남긴 체.

잡히지 않는 바람을 잡고자 했다. 그러면 금방 잡혀줄 것만 같았다. 영원히 자신을 따라와 줄 것만 같았다. 아니, 고집불통인 그 여자가 적어도 자신의 곁으로 자진해서 오게끔 만들려고 했다. 오로지 그녀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옆에 있겠다고, 다른 누구도 보지 않을 것이라고, 바로크 워크스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질 유토피아에 머물길 바랐다. 그녀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옆에서 떠나지 않을 거라고 말했으면 했다. 여전히 그것이 어리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는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장면을 보고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건 또 거짓말이겠지.

보고 싶어. 갖고 싶어. 사랑해 주고 싶어. 그런 말들이 부는 바닷바람 따라 흩어진다. 하지만 결국 가장 마지막에 머무는 것은 “사랑해,” 그 한마디.

여태까지 그녀에게, 저 소녀에게 해왔던 모든 일을 되돌아본다면 이만큼 이기적인 게 없다는 걸 안다. 난 이래. 원래 이렇게 태어났어. 합리화를 넘어선 긍정은 그대로 굳게 굳는다. 그 시선 하나라도 내게 떨어지지 않으면 오장육부가 뒤집어져. 설렘 담아 붉게 오른 뺨도, 서러움 가득한 분노도, 다신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절망도 다 나에게만. 네 몸도, 마음도, 손도,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다 내 거야. 내 것이여야만 해.

울음을 터트렸던 어린 소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입을 맞춰주고 싶었던 해군. 나는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던 우울하고도 흔들리는 목소리. 소식 하나 들리지도 않는 망할 여자. 변하지도 않는 이 연심의 주인. 만들어 낸 왕국에 가둬질 여왕.

사랑의 뜻을 수식하라고 한다면, 크로커다일은 아마 그 단어들을 문장으로 만들 것이다. 길고 긴 글을 써 내려가다 마지막에는 하나의 욕심을 더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처럼 완전히 무력한 상황에서, 가장 밉고 짜증난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가장 짙은 갈증을 보인다. 꿈속에서라도 저 두 손을 내가 잡아줄 수 있기를.

“차라리 모든 게 꿈이라면,”

우리가 겪은 모든 게 꿈이었다면. 그걸 단순히 밤이 준 고약한 악몽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만 있다면. 그러면 다시 당신을 두 손으로 안아줄 수 있을까.

나의 사람. 나의 사랑. 나의 사련砂漣. 하나의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다시 사라진다. 꿈에서 깰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리듯, 이 환상은 참으로 친절하게 그에게 일어나라며 여명이 떠오른다. 자신의 꿈인데도 그에 대한 통제권 하나 없는 크로커다일은 눈을 감았다. 간만에, 정말 간만에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이게 현실이었으면 좋을 뻔했어.”

눈을 떠도 잊히지 않을 미약한 온기가 서풍처럼 다정하게 다가오다 떠난다. 그 바람이 머물다 남은 자리가 차가워질 때까지, 크로커다일은 눈을 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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