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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지기님(@stargazer_commi) 커미션

원피스 크로커다일 드림

든프 by 정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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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의 사막에서 정적이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함께 파열음이 적막을 가른다. 화난 남자의 목소리가 하나 들린다. 바람과 하늘에 흩어지지도 않고 곧바로 내리꽂아지는 목소리는 그의 앞에 있는 여자를 가르듯 꽂혀버리고, 여자는 순간 몸이 얼어붙는다.

“왜, 우린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정말이지, 꼴도 보기 싫다. 남자는 여자의 저런 얼굴을 싫어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저 표정. 세상 모든 근심과 걱정과 우울을 다 흡수했으면서도 쥐어짜 내지 못하는 표정. 차리리 여느 머저리들처럼 펑펑 울고 화내면 상관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항상, 항상 저런 얼굴로 자신을 바라봤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다 흔들릴 것처럼, 그리고 그게 세상의 전부라는 것처럼- 그리고 그가 그것을 알지 못하게 숨기려는 것처럼. 전혀 그런 적도 없으면서. 나한테 흔들리지도 않았으면서.

평소와 오늘이 하나 다른 점이라면, 여자가 남자의 예상을 뒤엎고 주저앉은 것이다. 무릎까지 꿇고 매달리는 모습. 몇 번이고 봐왔던 눈물이 찬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보자마자 크로커다일은 간만에 가슴이 철렁했다. 몇 시간 전 최악의 감옥과 지옥 같던 전장을 누비며 느낀 터질 것 같은 심장의 박동도 지금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리라. 놀랐나. ‘인제 와서 무서워하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가장 최악의 결론에 도달하기도 전, 평소보다 빠르게 돌아가는 생각들이 윈프레드의 목소리로 끊겼다. 언제나처럼 그는 그녀의 목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했다. 하물며 그것이 서글프다 못해 절망감을 품고 있다면, 더더욱.

“이제 네가 날 싫어한다는 건 알지만.”

아니야. 전혀 아니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한다는 것도 다 알고 있지만.”

아니야. 틀려. 이 여자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지?

크로커다일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비록 황당할 정도로 당황함과 동시에 위기감이 몰려온 것이겠지만, 드러난 표정은 그를 가장 오래, 그리고 깊게 봐온 윈프레드조차도 혐오로 오해할 법한 모습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그녀 앞에서 웃지 않곤 했다. 더는 봐줄 수 없다는 듯, 제 눈앞에만 없으면 속에서 사막의 열기처럼 타오르는 감정이 식을 거라 단언했다.

그야 그렇지 않은가. 누가 감히 그가 타인에게, 그것도 자신과 지독히도 얽힌 존재와 사랑을 하리라고 믿겠는가. 윈프레드조차도 자포자기한 상태다. ‘그는 다시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녀를 이루는 모든 것이 그리 외치고 있었다. ‘크로커다일, 당신은 이제 아마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사랑하지 않으려고 할 거야. 이제는 내가 싫을 거야...’ 그게 아니라고 하기도 전에 윈프레드의 말이 쿵, 하고 그가 감히 부정할 수도 없는 묵직한 무게로 떨어진다.

“난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하고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간절함과 절망은 한 끗 차이의 목소리를 띄고 있더라. ‘이제 나는 갈 곳이 없어. 더는 민폐 끼치지 않을 게 그저 네 옆에만 있게 해줘. 아주 오래전부터 오로지 그것만 바라왔어.’ 코트 자락조차 잡는 것도 조심스러워 손이 덜덜 떨리는 윈프레드의 목소리는 비참했다. 수년간의 세월 속 내쳐진 자의 가련한 울부짖음. 사랑이라기엔 너무나도 초라했고, 서글픔이라기엔 무거웠다.

“제발, 네 옆에만 있게 허락해줘...”

하지만 우리 단 한 순간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날은 없다. 없어야만 한다고 중얼거리던 그 모든 시간은 이제 더는 없었다. 군림하되 지배하지 못하고, 스스로 만들어 내고자 한 외면을 통치조차 하지 않았던 왕. 그러니 누구도 경외하지 않을 왕에 불과했다.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그는 얕잡아본 애송이에 의해 가장 밑까지 내려가고, 그 모습을 그녀에게 보였으니까.

얼마나 비굴한 모습이었을까. 그래서 늦었다고 생각했다. 임펠다운의 가장 밑바닥, 자신이 갈 수 있는 가장 낮고도 비참한 자리에서도 원프레드는 자신을 찾아와 줬음을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세상 모든 것을 제 손안에 쥔 것처럼 두고 노는 오만함에 가려진 것들을 크로커다일은 보지 않곤 했다. 그러지 않아도 모든 것은 결국 그의 손아귀 안에 돌아왔으니까. 모래로 만들어진 늪이 모든 걸 빨아들이곤 했으니까.

하여 그녀가 지금 이리 울고 있는 모습은, 기쁘던가?

술래밖에 없는 꼬리잡기는 이미 수년이나 이어졌다. 윈프레드는 드디어 그를 잡았고, 그는 아직도 잡혀줄 생각이 없었다. 없었을 거라며 스스로에게 수십번 되뇌었다. 여자 하나 때문에 자신이 해적왕이 되는 길을 포기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나는, 난, 나는...”

드물게 그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에 자신이 없다. 평소와 같은 거만함과 여유 따위 다 날려버리게 되는 사람 - 그래, 너는 항상 날 비참하게 만드는 여자다. 언제부턴가 자신을 보면 마치 당장에라도 펑펑 울 것 같은 눈을 하면서도 우물쭈물하다 울 기회도 놓치는 여자. 눈을 크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눈에는 여전히 물기가 가득했다. 자신이 그리도 싫어하던 물이, 눈물이, 윈프레드의 울음이. 여전히.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적어도 내 마음이 뭔진 알아, 크로.”

여전히 그의 마음을 흔들곤 했다.

“넌 이 세상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위니.”

“하지만 그렇다고 이 마음이 틀린 건 아니잖아.”

평소 같으면 물러섰을 그녀가 오늘만큼은 자존심을 - 스스의 모든 것을 내버린다. 무릎 꿇고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외친다. 한다면, 속된 것이라 치부하던 이 애정은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제 옆을 떠나지 읺을 것이다. 확신이 들었다. 다시는 틀리지 않고, 변하지 않을 거란 확신은 드디어 완고하게 자리 잡는다.

“크로, 제발. 제발... 단지 옆에만 있게 허락해 줘.”

고향이라 부를 것 하나 없이 떠도는 삶이 싫지는 않다. 그는 바다 위의 군림자이지 않은가. 하지만 나의 집에는 이왕이면 네가 함께이면 좋겠단 생각 앞에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도망쳐야만 했다. 사람도 장소도 어느 하나에 잡혀버리면 그것은 자신이 걸어야 할 왕도를 방해하는 것. 이 모든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다분히도 노력했건만, 결국 돌고 돌아 이곳이구나.

“그걸로 만족해?”

소금기와 꽃내음을 한가득 머금고 그녀가 돌아오는 곳은 결국 버석한 사막의 곁. 아주 오래전의 사막은 한때 바다를 품었다지. 그러니 모래사장은 언제나 바다 아래에 가라앉아 짠 소금물이 말라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한껏 머금었던 그 소금기 가득한 물을 잊을 순 없을 것이다. 햇빛에 모든 것이 말라버린들 - 한때 자신의 바다를 기억하기 위해 하얀 소금 결정이 남겨져 있을 테니까.

“너는, 정녕 그걸로 만족할 거냐? 그거면, 그거면 되는 거냐고. 왜... 왜 항상, 그렇게 돼도 상관없다는 식이냐고, 너는.”

자신이 먼저 그녀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훅 오르다 가라앉는다. 자신과 그녀는 태생부터 전혀 다른 존재. 울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와 무릎이 꺾여도 되살아나곤 하는 근성은 너무 닮아있기에 오히려 거리를 두어야만 했다. 자신의 신념 하나 굴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여유가 크로커다일에겐 없었다. 체임벌린 원프레드에게서 그가 벗어나고자 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기회가 올 때도 저 여자를 죽이지도 못한 자신은, 더는 그녀의 앞에서 예전처럼 살 수 없을 것이다. 내치고, 떠나고, 욕보이며 싸운들 절대로 이길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진 게임이다. 단지 크로커다일이 그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을 뿐.

하지만 이제는 때가 되었다. 지금을 놓치면 게임이 이어지긴커녕 그녀가 사라질지도 몰랐다. 세상에서 증발한 듯 훅. 그에게 단지 오랜 시간 타오르던 감정만 남기고 또, 또다시 사라질지도 몰랐다. 누군가 잡아가겠지. 해군이든 해적이든. 복잡한 생각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결정에 감정을 앞세웠다.

다시는 그녀를 놓을 수 없다.

그게 오만한 왕조차도 사랑 앞에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체스에서 퀸이 그 무엇보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명분이다.. 가라앉지 않고 휘날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 범람한들 침수되지 못할 것. 바다는 기꺼이 사막의 곁에 있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전부 날려 가장 하얀 결정으로만 남을 것이다.

“사랑해.”

꾸미지도 포장되지도 않은, 하나도 다듬어지지 않은, 가장 숨기고 싶던 날 것의 말이 나온다. 인정하기 싫었던 것. 끝까지 숨기고 싶었던 것. 이제는 그러기 실패한 것.

“널, 너를, 나도 널 사랑해. 아주 오래전부터.”

그럼, 그제서야 비로소 사막과 바다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크로커다일은 20년 세월이 흐르는 내내 탁한 감정들에 섞여 머금어지던 갈망과 더는 싸우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그러지 말라 모든 것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흑심 가득한 계략도, 번뜩이는 대체법도, 모든 계획적인 행동들도 이제 더는 무용지물이다.

찰나라도 좋으니, 시간이 멈추고 둘이서 마음을 거듭할 수만 있다면. 그 눈동자 속에서 쉴 수만 있다면. 모래처럼 손에서 빠져나가던 세월이 다시 잡힐 수만 있다면 - 모든 것을 내다 버린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거란 착각.

“크로, 나 아마 당신을 사랑하나봐...”

하지만 그 착각 속 크로커다일의 마음은 윈프레드를 원했다. 그 피부에 제 하나뿐인 손이 닿길 원했다. 눈물이 스치고 지나간 입술에 자신의 입술과 이로 수많은 흔적들을 남기고 싶었다. 흐린 기억 속에서 스치듯 오르는 열의로 남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꺼지지 않을 아지랑이로 남고 싶었다.

“그거 잘됐네. 너도 아마 널 사랑하는 것 같아.”

“나는 너를 원해. 아주 오래전부터 원해왔어. 연인이라고 부르고 싶어.” 끝없이 이어지는 고백에 울음과 웃음 사이의 소리가 함께 흘렀다. 저리 많은 생각들을 어찌 꾹꾹 담고 살아왔는지가 의문일 정도로 많은 것들을 크로커다일은 읊조렸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함께라는 걸 알았으면 했어. 네가 내 곁을 떠나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으면 했어.” 하지만 너도나도 행복하지 않았던 때는 너무 많았고, 우린 그때마다 어긋나곤 했으니까. 그러면 네가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관계라면 차라리 모든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런 착각 속에서 참 오래도 나침반 하나 없이 헤맸었다.

비참하기 짝이 없는 고백들이 밤새워 계속해서 이어졌다. 천 일의 밤 동안 이어지는 이야기들처럼, 매번 위태롭게 끊길 것 같던 사랑은 결국 죽지도 않고 기어코 여기까지 와버렸다. 물러날 곳도 없는 마지막. 그 마지막에서야 크로커다일은 무너졌다.

인정하기로 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자신은 윈프레드를 사랑하고 있다.

“사랑해, 위니.”

고작 사랑 따위에 무너지지 않으리라 이를 갈며 모든 것을 내쳤던 남자는, 결국 그 고작이라 여겼던 질긴 사랑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운명의 장난이라 믿었던 모든 순간을 다시 되뇌며 그때의 마음을 말하게 된다. 그런데도 흐르는 눈물을 닦는 제 손 아래에서 웃는 윈프레드의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그는 단지 그녀를 다시 품에 안기로 했다.

많은 것들이 떠나고 사라진 오랜 세월 후에서야 다시 품에 안아보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이만한 시간이 지나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은 마음을 마주하면, 보이는 것은 자신을 끌어안으면서 사랑한다고 우는 윈프레드의 모습. 자신이 가장 바라던 모습. 오로지 그녀의 세상에 자신만 남은 모습. 다른 누구도 없는 듯한 세계.

오로지 나만이 너에게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있어. 그러니 너는 이대로, 내 품에서 겁먹은 채로 있어, 위니. 내가 있으니 만용도 용기도 몸에 걸치지 않아도 돼. 영웅이든 왕이든 되지 않아도 돼. 갑판에서 휘날리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웃던 그때처럼 있어도 돼. 날 지옥으로 몰아넣고 미안하다며 울어도 돼. 하지만 네가 주저 없이 앞을 향해 달려 나간다면, 분명 따라잡을 수 없게 될테니까. 다시 또 하나의 왕국을 세워서 너를 왕비로 앉힐 거야. 그렇게 될 거야.

다시 한번 자신의 왕비를 손에 잡은 왕이 웃었다. 지옥과도 같은 시절이 빠르게 스쳐도 그는 그 앞에서 미소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다시는 내 곁을 떠나지 마, 위니.” 여즉 거짓 하나 없이 간절함 가득한 목소리에 윈프레드가 고개를 끄덕였고, 크로커다일은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남겼다.

떠나지 마. 사라지지 마. 나의 옆에서 살아. 오래전 바다를 품었던 사막처럼 다시 네가 바다가 되어 나를 침몰시켜라. 가장 밑바닥에서 숨 쉬며 살아온 왕이 다신 자신했다.

나는 너의 해저 속에서도 숨 쉬고 살아가리라. 인제야 그 안에서 숨 쉴 수 있으리라. 가장 깊이 파묻어 뒀던 모든 것을 끌어올려 낸다. 그것은 바다 깊은 곳 잠겨 있던 보물. 그에게 있어 가장 귀하고도 아름다운 보물. 지옥에서 바라보는 한 송이 아름다운 백합과도 같은 것.

가장 깊은 지하에서 만개한 꽃은 이제 그의 손안에 있다.

다음은 그녀를 위한 걸맞은 왕국을 건설한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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