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기로기

라벤더

숙적 앵커에게 고백받은 마법사가 있다?!

3,261자 / 함께 썰풀면서 놀아주신 조사님, 하닐리님께.

특정 시나리오 스포일러 없음!

라벤더의 꽃말은 침묵, 대답해주세요.


주권을 빠져나오며 주위를 둘러보자, 봉인 결계가 해제되는 것이 보인다. 어니스트는 한 손으로는 머리를 가볍게 털고, 다른 한 손으로는 봉서를 완료한 금서를 안주머니에 갈무리했다. 이번 임무는 이걸로 끝. 시야가 조금 흐릿하다. 예상대로 이 정도 빈도로 임무에 나서는 건 영혼에 부담이 가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번엔 곧바로 다음 임무에 가지 않아도 되니까. 급한 것도 없으니 어디서 잠시 누워있다 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밤이 깊은 숲을 둘러보던 어니스트는 천천히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달이 없어 시야를 확보하기 쉽지 않다. 평범한 인간이었더라면 확실하게 조난당했겠지. 하지만 어니스트에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다. 기억과 경험, 그리고 약간의 마법을 사용하면 도심을 걷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저쪽이 조금 밝은 것으로 보아 트인 장소인 모양이다. 방향을 약간 꺾고, 걷는 속도를 올리자 금방 시야가 넓어진다. 밤바람이 익숙한 향을 싣고 온다. 이건…

“윽! 야생 라벤더가 자생 중인 군락인가?”

라벤더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색깔이 좀. 다른 곳으로 갈지 고민하던 어니스트는 괜히 심술이 나 일부러 라벤더 꽃밭 안으로 쿵쾅쿵쾅 걸어 들어가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공기가 너무 달아.”

투덜거리기가 무섭게 한숨이 나온다. 감은 눈을 뜨자 별이 가득 찬 하늘이 펼쳐진다. 사색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다. 그 핑계로, 어니스트는 부러 미뤄두었던 생각 몇 가지를 마무리 짓기로 마음먹었다. 예를 들면, 라벤더색 눈동자의 외전에 관한 것이라거나.

 

빛과 그림자가 어룽거리던 이경에서 복귀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어니스트는 연구에 쓰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닥치는 대로 임무를 받아왔다. 가장 공을 들이던 연구를 폐기한 탓에 시간이 남아버렸다는 핑계로. 사비나에게 증인을 해 달라 부탁까지 해 가며 쓰다 만 논문을 태우던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쓰리다. 그나마 사비나가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아 주어 고마웠었지. 어니스트는 공방 책장 한 편에 잘 보관해 둔, 사비나가 직접 마력을 엮어 적어준 폐기 확인 증서를 떠올렸다. 그리고 논문을 태우게 만든 원인 또한.

…솔직히 아무리 임무와 현장 연구를 핑계로 밖으로 나돌아도, 아예 마주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당연하지. 생활 공간을 공유 중이니까. 마주칠 때마다 그는 할 말이 있다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쪽에서 일부러 무시했었다. 아마 그도 알고 있겠지. 어니스트는 모든 일에 계획을 세워두는 만큼, 상황이 달라졌을 때를 대비한 계획들 또한 세워두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본 계획은 물론, 그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를 상정하고 마련해 둔 다른 계획들까지 모두 폐기해야만 했다. 거기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이 변하는 건 처음이다. 이런 상황에는 아무리 해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이건 제어할 수 있는 범위 안의 것이 아니었다. 이러니 밖으로 나와 그를 보지 않는 게 그나마 안정을 찾을 방법이었다.

 

정말로 괜찮은 것 같다가도 불쑥불쑥 화가 나곤 한다. 어니스트의 입장만 놓고 보자면 당연히 화가 안 날 수가 없긴 하다. ‘기억’이란 곧 ‘정보’이고, 그 ‘정보’들을 모아 반복되는 규칙성을 찾아내는 것이 어니스트가 가장 사랑하는 일이다. 어니스트는 늘 자신의 연구를 진심으로 대하였고, 모든 연구는 관찰을 통해 쌓은 '정보'를 토대로 이루어지곤 했다. 그런데. 기억을 멋대로 은폐하다니.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오해 때문에! 그로선 그럴만한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생각해 주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그의 입장을 고려해 주기에는 너무 속이 상하니까. 함께 지낸 80년이라는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론, 80년 정도야 그가 살아온 세월에 비하면 눈 깜박하면 지나가는 순간이겠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슬픈 걸지도 모른다. 내게 소중한 것이 그에게는 별것 아니었던 모양이라서.

한참 아무렇게나 뒹구는 통에 줄기가 꺾인 꽃이 뺨을 간질인다. 어니스트는 아무렇게나 꽃을 밀어 치우며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얼마 전에는 간신히 용기를 쥐어짜 다가오는 것 같더니, 말을 건답시고 건넨 게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는 질문이었다. 뭐? 재편찬? 그럴 거면 왜!

“으아아악!”

황급히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통에 안경이 아무렇게나 밀려 올라갔다. 그러던가 말거나, 어니스트는 한탄 섞인 생각을 이어나갔다. 내가 한 대상을 향해 다양한 감정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생물종 출신이라 다행이다. 같은 것을. 가장 격렬한 감정 두 가지를 동시에 품고서도 그 대상에 대해 온전히 사고할 수 있으니까. 사실 증오는 좀 수그러들던 차에 ‘그 말’을 듣고 거의 사라지긴 했다. 자연스럽게 ‘그 말’을 하던 때의 그가 떠오른다. 새빨개졌던 얼굴, 갈피를 잃고 방황하던 눈동자, 그 와중에도 붙잡은 걸 놓지는 않던 손까지. 얼굴에서 손을 뗀 어니스트는 꾸물꾸물 돌아 엎드렸다. 그래 놓고 재편찬 될 거로 생각하다니, 대체 그는 어니스트를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물론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경우, 일반적으로는 외전을 재편찬해 기억을 지우곤 한다. 서공인 만큼 그런 일에 관한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닌 경우는 상대 쪽에서 받아줄 마음이 있는 경우 뿐이지. …그래, 맞다. 어니스트는 그에게 마음이 있다. 객관적인 사실은 깔끔하게 인정하는 편이 좋지. 화가 나는 와중에도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가 버린다. 그래서 더 밖으로 나돌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 정말이지 너무 화가 나지만 이미 마음이 가버렸으니, 그가 원흉이라곤 해도 그에게 화풀이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어니스트는 인간이었던 만큼 인간에 가까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아직 화가 다 풀린 것도 아니다. 뭐, 쉽게 말해서 당분간은 계속 심술을 부릴 거란 소리다. 그 이경에서 그가 말했듯이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거나 변하니까. 이 분노와 슬픔이 사라질 때까지 만이라도.

 

지금처럼 무리해 가며 들어오는 임무를 전부 받을 정도가 아니게 되면 걸어오는 말에 제대로 대답해야지. 기어스의 양 무늬는… 곧 진행할 다음 메인터넌스 때 다시 그려두기로 할까. 그럼 아마 그도 지금처럼 안절부절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화가 다 풀리면. 그러면, 그때는….

다시 똑바로 누운 다음 손을 펼치자 바람이 뻗어나간다. 몰아친 바람이 휘돌다 라벤더를 잔뜩 꺾어온다. 그때는, 이쪽에서도 마음을 전하러 가자. 의뭉스럽고, 거짓말쟁이에, 서슴없이 위험한 짓을 저지른 뒤 안 한 척 하는 데에 능숙하고. 그런데도 울보에 여리고 늘 자기 자신은 뒷전인, 사랑스러운 바사고에게. 꺾은 라벤더를 한 아름 끌어안은 어니스트는 그렇게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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