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기로기

슈뢰딩거의 양

연애 전 이야기

2830자 / 함께 끝내주는 썰을 풀어주신 조사님께.

특정 시나리오 스포일러 없음!


자, 여기 상자가 있다. 이 안에는 양이 한 마리 들어있다. 유감스럽게도 어린 왕자가 마음에 들어 한 그 양은 아니다. 그보다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가까운 상태이다. 상자의 뚜껑을 열었을 때 양이 어떤 상태일지는, 지금부터 가설을 만들어보기로 하겠다.

평소의 어니스트 애커먼은 집필 중일 때 책상 위에 관련 자료만을 둔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예외로, 메모지를 한 장 두었다. 메모지 맨 위에는 '횟수'라고 적혀있고 그 아래에는 날짜들이, 각 날짜 옆에는 작대기를 하나씩 그어 숫자를 표시하고 있다. 무엇을 기록하는 중이냐 하면.

"......"

아, 슬슬 들릴 때가 됐는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니스트는 메모지에 작대기를 하나 추가한 뒤,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예상대로 친구이자 관찰 대상인 외전, 바사고가 허둥지둥 떨어트린 것을 줍고 있는 게 보였다. 이번에는 소리가 묵직해 뭔가 했더니 빨래가 가득 찬 바구니를 떨어트린 모양이다. 어니스트는 도로 집필 중이던 원고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발등은 괜찮나?"

"예? 예. 괜찮습니다."

다행히 대답할 정신은 남아있나 보다. 이게 좋은 소식인지 아닌지는 좀 더 두고봐야 할 문제지만.

오늘은 추가 관찰 개시로부터 일주일째다. 어느 정도 데이터가 나오고 있다. 일평균 약 32회, 시간 평균 약 1.3회. '평상시 하지 않는 실수'의 범위를 좀 더 넓힌다면 횟수가 늘어나겠지만. 데이터가 안정적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어니스트가 이변을 눈치채고 관찰을 결정했을 때는 어느 정도 진행이 된 시점으로 보인다. 메모지 구석에 계산 결과를 적어넣은 어니스트는 집필 중이던 원고를 밀어놓고, 새 종이를 꺼내왔다. 이번 같은 경우에는 '어떤' 실수를 했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왜' 그런 실수를 하고 있는가에 집중하는 것이 원인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고는 명료하고, 가설의 완성이 저 앞에 아른거린다. 손에 익은 만년필이 종이 위로 유려하게 글자를 적어 내린다. 자 그럼, 결과를 출발점으로 삼아 원인을 추정해 보자.

- 우유를 데우다 끓어 넘치게 했었다: 바로 앞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고 있는데도 몰랐던 것으로 추측하건대, 다른 생각을 하느라 멍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창문을 닦다가 떨어질 뻔했었다: 평소와 달리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외부의 자극이 없었으므로 내부의 자극, 즉 어떤 생각에 골몰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책장의 같은 자리만 한 시간 동안 반복해 닦고 있었다: 우울한 표정으로 한숨 쉬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으므로, 이때도 특정한 사고에 빠져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그 밖에도 이전에는 평온하게 수행하던 일을 할 때 긴장한다거나, 외부 자극이 없는데도 깜짝 놀라곤 한다거나, 이유 없이 수시로 강한 감정의 변화를 보인다거나,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면 빤히 바라보고 있다거나(용건이 있는 듯한데도 눈이 마주쳐 정신을 차리면 고개를 돌린다), 평온을 가장하고자 애쓰고 있는 기색을 보이는 등의 모습이 보인다.

물론 이렇게 짧은 기간의 관찰 결과로 어째서 이런 이상 행동을 보이고 있는지 속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변화 이전에는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 최근 일상에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 관찰 대상이 미래 예지 능력을 잃었기에 근시일 내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거기에 비슷한 변화를 보인 지성체들의 공통적인 증언을 추가하면 한 가지 가설을 만들 수 있다.

어니스트는 추가 관찰 내용을 정리한 종이 맨 아래에 단어 한 개를 적고, 그 위로 동그라미를 하나 그렸다. 자, 이제 이 가설이 맞는지, 상자의 뚜껑을 열어볼 시간이다.

소파에 걸터앉은 어니스트는 담요를 털고 있는 바사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계가 바사고가 그 담요만 털기 시작한 지 정확하게 15분이 지났음을 알렸을 때 운을 띄웠다.

"최근 들어 이상해."

"...이 바사고가 말입니까?"

대답은 반박자 늦게 돌아왔다. 바사고가 들고 있던 담요를 빼앗아 각을 맞춰 갠 어니스트는 반듯하게 담요와 자신의 가설을 내려놓았다.

"자네 요즘 묘하게 멍한 게, 꼭 사랑에라도 빠진 것 같군?"

상자 뚜껑이 열리고 보인 양은 조금 충격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설이 맞았다는 희열은 없었다. 그저 그렇군. 하는 생각만이 드는 건 아마도 친우의 감정을 존중하기 위한 사회적 본능이겠지. 그런 사회성을 한껏 발휘해, 어니스트는 할 수 있는 한 차분하고 정중하고 다정하도록 말을 다듬었다.

"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늘 차분한 조수 군이 이러는 건지... 흠. 나라도 괜찮다면 언제든지 상담하러 오게."

예상과 달리 이 말을 건네 받은 이는 그다지 기뻐 보이지는 않았다. 어라. 어니스트는 작은 의문을 다정한 미소 뒤로 감추었다. 잠시 굳어있던 바사고는 힘겹게 입을 여는 듯했다.

"아닙니다... 모르는 척 해주십시오..."

그리고 바사고는 허둥지둥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어니스트는 괜히 뒤통수만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난 그런 조언을 구하기에 적절한 상대는 아니긴 하지..."

나보다 더 다정하고 사랑을 나눠줄 줄 아는 존재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자리로 돌아온 어니스트는 가설을 정리할 때 쓴 종이를 집어 들었다. 사랑. 사랑이라. 오래간만에 듣는 단어다. 말랑거리고 간지럽고 따듯하며 애절하고 심장을 쥐고 흔드는 강력한 감정. 그러니 바사고는 당분간 꽤 고생할 것이다. 그 성격에는 쉽게 고백을 하지도, 받지도 못할 테니. 웃으며 고개를 젓던 어니스트는 문득 깨달았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바사고가 연인을 만나 떠나면 퍽 쓸쓸해질 것 같다는 사실을. 어니스트는 그 결론을 종이와 함께 서랍에 넣어 잘 닫아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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