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기로기

섬광

바사고가 전투 패배로 소멸한 직후의 이야기.

2023. 12. 20. 12:30 a.m. / 1,446자

특정 시나리오 스포일러 없음!


은빛 사슬이 춤을 추고, 파란 옷자락이 휘날리다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어니스트는 이런 현상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마법사의 소멸. 세계에게 미움받는 자들이 맞이하는 끝. 존재 자체가 소거되는 현상. 몇 번이나 지켜봤었을 테고(당연하지. 보았단 사실 자체가 지워졌을 테니). 몇 번인가는 직접 체험할 뻔하기도 했다. 청년 형상의 인영이 사라져 버린 자리를 바라보며, 어니스트는 과거의 어떤 날을 그 위에 겹쳐보았다.

마치 그가 달려 나갔던 삶의 궤적처럼 볕이 찬란한 날이었다. 날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어니스트는 묵묵히 유일한 친구가 영원히 잠든 곳을 바라보았다.

"훌륭하네. 자네가 만들어낸 길은 정말이지 아름다워."

더 일찍 해주었어야 하는 말을, 상대가 듣지 못하게 된 뒤에야 건네는 일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지만 어니스트는 그 말을 건네야만 했다. 본디 장례란, 산 자들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의식이므로.

"히아나. 나는... 자네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진심으로 기쁘다네. 빈말로라도 내가 좋은 친구였다곤 할 수 없겠지. 그런 내 곁을 마지막까지 지켜준 것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를 전하네."

그리고 시선은 근처에서 울고 있는 작은 아이에게로 향한다. 친우의 손녀. 그의 뜻을 이어갈 것이 분명한 아이. 궤적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뒷일은 걱정하지 말게나. 자네의 손녀는 현명하고 강인하니. 나도 저 애를 도울 거고. 자네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바람이 불어간다. 불꽃이 타오른다. 그 가운데에서, 불로불사의 마법사는 모른척하고 있던 의문을 꺼낸다.

"그런데, 히아나. 나는... 나는 이제 어쩌면 좋지?"

홀로 살아가야 할, 이 기나긴 날들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막막함에 숨이 막혀온다. 그렇게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다시 눈을 뜨면 패배한 전장 위. 남겨진 것은 영혼을 가로지르는 상처. 아니, 아직이다. 아직 그것은 상처가 아니라 닻의 형상을 하고 있다. 기회는 남아있다. 그렇다면, 도박이라 해도 쥐어볼 수밖에.

"어쩌면 좋냐니, 바보 같은 소리를. 세상은 넓어, 어니스트 멘젤 애커먼! 너무나도 넓어서 바라던 일이 생각하지도 못한 형태로 찾아오기도 한다고!"

자신의 판단 실수로 벌어진 일이라면. 무력해져 지켜보기만 했기에 일어난 비극이라면.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나. 심지어 그것이 기적처럼 만나게 된 두 번째 친우를 되찾기 위한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니 어니스트는 이번에도 상대가 듣지 못할 말을 허공에 건넨다.

"마법사 <어둠에 녹아든 번뜩임>이 고한다. 긴 시간 곁을 지켜준 <내다볼 수 있는 가장 먼 미래>에게 경의를 표하며, 나는 기꺼이 이 닻-인연-을 이 세상으로 다시 끌어오겠다!"

고독했던 마법사는 자신의 존재를 걸고 운명을 개찬한다. 설령 성공한다 해도 잊힐 것을 각오하고서. 몰아치는 인과의 격류 속에서도 기꺼이 미소 지으며.

그리고, 운명이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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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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