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멱데 2차 창작

[유건태현]나를 사랑해 주세요

카이로스 이유건 생일(09/01) 늦은 축하글

로티 by 르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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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유건은 탄식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필 지상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놔가지곤. 밖에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목덜미에서는 땀이 주르륵 흘렀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유건은 눈살을 찌푸렸다. 눈을 찌를 듯한 햇살과 온몸을 뒤덮는 더위는 여름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차마 이 무더위에 마스크를 쓸 엄두가 안 나 볼캡을 최대한 눌러쓰며 차로 바삐 발을 옮겼다.

아침부터 유건이 숙소에서 나와 차를 타고 향한 곳은 대형서점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더위를 식혔다. 땀으로 엉망이 되었을 머리를 정돈할 겸 볼캡을 벗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유건은 연예인이었다. 나름대로 변장을 위해 도수 없는 안경을 썼다지만 허술한 변장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날씨에 마스크를 쓰기에는 오히려 눈에 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행히 서점 안의 사람들은 책을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잠시 입구에 서 있던 유건은 오늘의 외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기 계발 도서 책장으로 걸어가면서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서점 알바 경험 상 분명 여기에도 있을 앨범 코너에 가서 상황을 외면할까도 고민했지만, 시선을 끌고 싶지 않은 자신에게 앨범 코너란 지금 가장 피해야 할 장소였다. 대놓고 앨범 표지에 얼굴이 박혀 있을 텐데 거기서 서성거리다가 누군가 알아차리는 일이 생기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웠다.

자기 계발 도서들이 꽂힌 책장으로 다가가 책등의 제목을 읽어내렸다. 고백이나 연애, 사랑 등 그 비슷한 단어들이 들어간 제목의 책들을 꺼냈다가 꽂기를 반복했다. 연애 백과사전, 플러팅의 정석, 연애 백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 찼는지 고르기도 어려웠다. 힘들게 3권을 골라냈다. 엄청난 집중력으로 찾아낸 책들을 손에 들고 연신 살피며 유건은 자괴감에 휩싸였다.

원체 책과는 연이 없던 유건이 서점에 나온 것은 답도 없는 짝사랑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포털 사이트에 연애 관련 검색어를 치고, 자신과 같은 사례를 찾아보고, 전자책 목록을 찾아보기까지 했지만, 여태껏 겪어본 적 없던 짝사랑이라는 감정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의 질문 글에는 그냥 고백해라 혹은 포기하라는 내공 냠냠의 장난스러운 글만 달려 있었고, 전자책은 영 안 읽혔다. 조언자는 아이돌인 자신의 직업 특성상 찾아볼 엄두도 못 냈다. 차라리 서점에 와서 무작정 책들을 살펴보다 보면 도움 될 만한 것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 위험을 무릅쓰고 서점으로 온 것이었다.

계산하기 위해 걸어 나오면서 본 추천 도서 책장에는 책이 순위별로, 분야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눈에 들어온 것은 소설이었다. 미스터리 추리소설부터 로맨스 소설까지 다양한 소설들이 순위에 올라 있었다. 책 위로 이리저리 움직이던 유건의 시선이 누가 봐도 로맨스 소설이겠구나 싶은, 분홍빛 편지가 그려진 표지에 박혔다.

<나를 사랑해 주세요>

홀린 듯이 책을 집어 들어서 뒤표지를 보니 작품의 대략적인 줄거리가 적혀 있었다.

친한 친구를 사랑하는, 너를 향한 나의 연애편지.

사랑이 끼어들 틈이 없었던, 그저 친구 사이였던 우리 사이를 바꾼 것은 나였을까, 너였을까. 같은 학교, 같은 동네, 가장 친한 친구 사이. 언제나 함께할 것으로 생각했던 너는 어느 날 내 곁을 떠났다. 네가 남긴 흔적들을 보며 나는 너를 그리워한다. 그렇게 너만을 그리다 너를 향했던 내 감정이 사랑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너를 내 마음속에서 지워냈다.

―지워냈다고 생각했다. 너를 그곳에서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유건은 다시 책을 돌려 표지를 바라보았다. 원래 소설을 사러 온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자신의 상황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 한번 읽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책들을 품에 안은 채 다른 소설책을 뒤적거렸지만, 이 책만큼 썩 마음에 드는 책은 없었다.

계산대에 책을 올려놓고 볼캡을 푹 눌러쓰며 민망함을 감췄다. 직원은 남에게 관심이 없는 성격인지 수많은 손님을 대응하기 지쳤는지는 몰라도 유건의 얼굴에는 관심이 없었다. 책을 종이봉투에 담아 서점을 나오고서야 나중에 온라인 서점에서 주문하든지 할걸 하는 후회가 몰아쳤지만, 이미 종이봉투는 조수석에 올려져 있었다.

무사히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층을 눌렀다. 책을 들고 가는 내내 마음이 술렁거렸다. 이 답도 없는 짝사랑이 해결될까 하는 생각부터 혹시 들켰으면 어쩌지, 하는 후회 섞인 생각까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서점 내에서는 근처의 누군가가 폰을 들어 사진을 찍는 기색은 없었고, 워낙에 볼캡을 푹 눌러써 눈이 안 보였을 것인 데다가, 오가는 것은 차를 타고 이동했으니 크게 눈에 띌 만한 짓은 하지 않았지만 호기롭게 저지른 일치곤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현관문을 열자 불 꺼진 실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커튼을 쳐두지 않은 거실은 강렬한 햇빛이 들어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유건은 곧장 부엌 옆에 위치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하나와 책장을 결합한 책상 하나, 옷장과 행거 몇 개로 이루어진 방이 보였다. 유건 혼자만의 방이었다.

올해로 7년 차에 접어드는 카이로스는 멤버의 이탈 없이 재계약이 결정되었으나 전원이 숙소 생활을 지속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가장 먼저 숙소를 나간 것은 태현이었다. 극한의 인도어파인 태현은 잦은 개인 활동으로 인해 숙소를 나간다는 핑계를 댔지만 유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로 나간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숙소 생활을 정리하는 태현을 보고 하진에게 넌지시 말했더니 하진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태현의 성향상 숙소 생활이 힘들었겠지, 하는 평이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유건은 그런가…, 하며 일부 수긍했다. 유건이 알고 있는 태현은 미로의 연습생 시절부터 숙소 생활을 해왔으니, 이제는 독립해서 살고 싶을 만도 했다. 그런데도 왜 일부만 수긍했냐 하면,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찝찝함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바다에서 놀고 나와 이미 물기는 말랐는데 소금기는 남은 느낌…….

종이봉투를 침대 옆에 내려놓고 환기를 위해 나가기 전에 열어뒀던 창문을 닫았다. 오늘은 방 안에 계속 있을 계획이었으므로 방 안에만 에어컨을 틀면 되겠다 싶어 리모컨을 찾아 전원을 켜고 문밖을 나섰다.

태현을 시작으로 도하, 하진이 숙소 생활을 청산했다. 의외로 시우가 숙소를 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입대를 앞뒀는데 독립해 살아봤자 관리도 안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도하는 작곡 작업을 이유로, 하진은 1인 가구 라이프를 즐기겠다는 이유였지만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상한 짓을 많이 하는 형이긴 했어도 나쁜 짓은 안 하는 형이니 떨떠름하지만, 큰 걱정 없이 유건은 숙소를 나가는 하진에게 반찬을 들려 보냈다. 막내들은 외로움을 많이 타 숙소에 남았다.

그리고 유건은…… 숙소를 나가지 못했다. 멤버들의 밥을 책임지던 습관 탓인지 긴 숙소 생활을 벗어난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던 탓인지는 몰라도 당시 유건은 숙소에 남기로 결정을 내렸다. 마음을 자각한 지금에서야 어렴풋하게 짝사랑이 돌아올 곳을 지키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자신에게 멀어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그래, 짝사랑이…, 태현이 제일 먼저 숙소를 나간 이유가 유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모르는 새에 흘러나온 마음이 태현을 부담스럽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태현은 섬세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

우습게도 태현이 나가고서야 유건은 감정을 자각했다. 일상이었던 탓에 마음이 커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감정은 눈을 굴리듯 조금씩 커져 있었다. 친한 친구 사이를 포기할 수 없어 마음을 정리하려고도 해봤지만 결국 유건은 그럴 수 없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고 시간을 확인하니 점심시간이 훌쩍 다가와 있었다. 숙소 멤버인 시우는 군백기를 대비해 여러 콘텐츠를 찍느라 바빠 밖에서 챙겨 먹기 일쑤였고, 은찬과 하루는 하진과 예능 촬영 중으로 저녁 늦게야 돌아올 예정이었다. 오늘 점심은 혼자 먹어야겠군. 반찬을 꺼내 세팅한 뒤 선풍기를 틀며 자리에 앉았다. 온 숙소가 조용하니 생활 소음마저 크게 들려왔다. 달그락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냉장고의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 선풍기 팬이 회전하는 소리 등 여러 소리가 숙소에 가득 찼다.

뒷정리를 마친 뒤 샤워를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선선한 에어컨 바람이 열심히 말려놓은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평소라면 연습실에 가겠지만, 오늘 외출하기 전부터 유건은 간만의 휴일을 누리기로 마음먹은 터였다. 침대 옆에 놓아둔 종이봉투 안에서 책을 꺼냈다. 손에 잡힌 책은 우연히 발견하고 산 소설책이었다. 이거부터 읽어볼까…. 몸을 움직여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표지를 넘겼다. 이내 방은 책을 넘기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정신없이 소설을 읽던 유건이 정신을 차린 것은 저녁 시간이 다가왔을 때였다. 점심을 해치웠다고 생각했더니 바로 저녁이 오는 상황이 조금은 어이없었다. 휘적휘적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위에 올려둔 책을 내려다보았다. 제목 옆에는 살 때만 해도 못 봤던 1이 붙어 있었다. 단권으로 소설이 끝날 줄 알았는데, 몇 장 남지 않았는데도 끝나지 않으니 무슨 일인가 했는데. 그래도 소설 자체는 꽤 몰입해 읽었다.

소설은 편지글이 적당히 섞여 있었다. 작품의 화자는 여주인공인 이유리로, 소꿉친구인 신이현을 짝사랑하게 된 이야기였다. 1권의 내용은 고등학교 졸업 후 갑자기 연락을 끊고 잠적을 한 이현을 그리워하는 유리의 편지로 시작되었다. 사랑을 자각하게 된 유리는 자신의 마음을 이현이 알고 떠났다고 생각하고, 괴로움을 지우기 위해 편지에 감정을 덜어내기로 한다. 편지와 유리 시점의 과거 회상을 통해 이야기가 진전되다 이현과의 재회를 기점으로 현재 시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직 후 새 회사에서 만난 이현과의 오해와 갈등이 1권의 주 내용이었다.

편지라…. 유건이 집중한 부분은 작중 유리의 편지였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주인공처럼 감정을 글 속에 봉인하든 말든 한 번 써볼까 혹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간 김에 편지지도 사 올걸 그랬나.

고민하다 침대 위에 던져둔 휴대폰을 들었다. 쇼핑몰 앱에 접속해 편지지를 골라 담았다. 얼마나 쓸진 몰라도 행동의 갈피를 잡으려면 꽤 오래 걸리지 싶었다. 책을 한 권 읽고 나니 무작정 고백해야겠다 하는 마음도 진정되어 있었다. 그래, 태현과 자신 사이에는 신경 쓸 게 많았다. 아이돌, 같은 그룹 멤버, 동성이라는 점까지 벽이 많았다. 태현을 사랑한다면 고려해야 할 것들이었다.

다음 날, 편지지가 도착하자마자 유건은 책상에 앉아 편지를 써 내려갔다. 아니, 쓰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사랑하는’이라고 썼다가 낯간지러움에 지우개로 지우고 ’서태현에게‘로 고쳤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썼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아 편지지를 구기고 새 편지지를 꺼내기도 몇 번 반복했다. 태현에게 전해 줄 자신은 없었지만, 속내를 털어놓는 것은 부끄러웠다.

그날의 편지는 결국 날것의 감정이 고스란히 쓰였다. 태현의 어떤 점이 좋고, 감정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어떤 관계가 되고 싶은지 생각나는 대로 꾹꾹 담았다. 편지봉투에 넣고 스티커를 붙여 봉인한 유건은 빈 서랍에 넣었다.

이후로 편지는 종종 일기처럼 쓰였다. 태현과 겹치는 일정이 있는 날이면 글 쓰는 재주가 없는 유건이지만 쓰인 편지는 평소보다 두툼할 정도였다. 편지를 쓰면 쓸수록 감정은 쌓여만 갔다. 편지에 다 털어놓고 잊으려는 용도로 쓴 소설 속의 여주인공에게는 다른 방법을 권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감정이 글이 될수록 형태가 명확해져 마음에 박혔다.

그리고 태현은 이전과 같았다. 유건의 마음이 점점 커지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유건의 감정은 몰랐던 것일수도 있다. 적어도 태현의 겉모습은 유건을 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친구의 탈을 쓴 자신과는 다르게 친구로서, 동료로서의 잔소리도 여전했다. 달라진 것은 유건뿐이었다. 잠깐의 스킨십에도 애써 태연함을 꾸며내고, 태현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그럴 때마다 유건의 행동을 보며 태현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아무래도 친구의 이상함을 감지하고 한 마디 하려는 모습이었다. 그 상황마다 유건은 다른 멤버들의 핑계를 대며 도망쳤다.

두툼한 편지봉투는 서랍 안에 차곡차곡 쌓여 더는 안 들어갈 지경이 되었다. 사다 둔 편지지도 바닥을 보였다. 7월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벌써 무더운 8월이 막바지였다. 그렇게 되기까지 유건은 태현과 몇 번의 스케줄을 함께 소화했다. 이제는 컴백 준비에 본격적으로 들어가야 할 때였다. 그리고 유건은 여태껏 아직도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앞뒤 재지 말고 고백할지, 그냥 없었던 감정인 것처럼 묻어버릴지 그 어느 것도 정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더 이상 편지는 쓰면 안 된다. 쓰면 쓸수록 감정에 취해 가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할지 정하지 못한 지금은 적어도 친구로라도 남아야 했다.

편지를 쓰기 시작하고 두 달 만에 서랍은 열쇠로 잠겼다. 이 서랍이 열릴 일은 앞으로도 없었다. 그때 유건은 그렇게 생각했다.


9월 1일, 유건의 생일이 돌아왔다. 큰 감흥이 없었지만, 아이돌에게 생일은 특별한 일정이 있을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컴백 컨셉 회의가 있던 날이었고, 저녁에는 생일 기념 라이브 방송이 있을 예정이었다. 라방에는 하진과 태현이 유건과 함께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다른 멤버들은 당일 스케줄이 있어 전날 간만에 멤버 전원이 숙소에 모여 미리 축하 파티를 했었다. 팬들한테서 온 팬레터와 선물도 건네받아 읽다가 일정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갈 때 들고 갈 생각으로 보관을 부탁드렸다.

서랍을 잠근 뒤로 유건은 그나마 평정심을 지킬 수 있었다. 멤버 모두가 모인 생일 파티에도 어색한 티를 내지 않았고, 오늘 회의에서도 하진을 사이에 두고 태현과 투덕거렸다. 관계가 달라지기 전 둘 사이처럼 티격태격하다 하진에게 혼났다.

유건은 회의가 끝나자, 점심을 챙겨 먹고, 라방을 준비 중인 연습실 한구석에 털썩 주저앉아 멍때리다 막내 매니저가 사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주욱 빨아 마셨다. 시작까지는 꽤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어디 따로 갈 곳도 없었다. 라방에 참여하지 않는 멤버들은 이미 스케줄을 하러 간 지 오래였고, 태현은 예능에서 러브콜이 와서 사전미팅에 간 차였다. 한참 전에 나갔으니, 곧 돌아오겠지. 그리고 하진은 유건의 옆에 앉아 아이스티를 마시고 있었다. 사람들이 오가며 책상을 놓고, 그 위에 채팅 확인용 태블릿을 놓고, 촬영 세팅을 하고, 생일 파티 분위기를 내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유건은 옆에서 오는 찌를 듯한 시선에 고개를 돌려 하진을 바라보았다. 언제 다 마셨는지 빨대를 질겅질겅 씹으며 삐딱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하진이 있었다.

“왜요, 형.”

유건은 하진이 이럴 때면 꼭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던 터라 절로 움찔했다.

“너 체리랑 싸웠냐?”

체리. 하진이 태현을 부를 때 쓰는 말이었다. 상큼한 체리 보이는 이제 20대 중후반의 성숙미 있는 청년이 되었음에도.

하진의 질문에 눈을 미미하게 찌푸린 유건은 고개를 내저었다. 태현과의 관계는 오늘만 해도 평범했지 않았던가. 평소처럼 투덜거렸고, 서로 잔소리를 했다. 사소한 티격태격함은 일상이었다. 싸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걔랑 싸우긴 무슨….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안 싸우긴 무슨. 서태현이 너를 뚫릴 듯이 보더만.”

서태현이 나를? 유건의 삼백안이 세차게 흔들렸다. 이상함을 눈치채기라도 한 건가. 그렇지만 오늘의 자신은 정말 예전의 자신과 같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유건은 그렇게 생각했다.

“너도 오늘 이상했던 건 아냐? 아니지, 최근 몇 달간은 그랬을걸?”

마른침이 넘어갔다. 하진은 은근히 예리한 면이 있었다. 미로 메이즈 때부터 8년 정도 알고 지냈지만, 감을 잡을 수 없는 형이라고 유건은 판단했다. 자신도 모르게 빨대를 입술로 내리눌렀다. 어디까지 눈치채고 있는 걸까.

평소와 같았다고 생각하던 자신감은 사라졌다. 태현과 말하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자리도 꼭 한 명을 사이에 끼고 앉았다. 목소리가 떨렸을 수도 있다. 직접적인 접촉을 피했을 뿐, 서랍을 닫기 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넘실거리던 마음은 열쇠로 걸어 잠가도 구멍이 있는지 자꾸만 흘러나왔다. 그 사실을 유건은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고민하고 있을 때 직원들이 세팅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연습실에 오롯이 둘만 남은 것을 확인한 하진이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너 서태현 좋아하는 거 티 나, 이유건.”

빨대를 물고 있던 유건의 입술이 벌어졌다. 유건이 충격받든 말든 단호한 말은 계속되었다.

“은찬이가 ‘요즘 유건이 형이 이상해요.’하고 말할 정도면 어떤 상태인지 알지?”

7년 차 아이돌로서 눈치가 많이 성장했다 할지라도 카이로스의 주은찬 또 모름, ‘주또몰’인 것은 여전한 은찬이 이상함을 눈치챌 정도면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손이 파르르 떨려 쏟기라도 할까 봐 커피를 바닥에 내려놨다. 얼음이 찰그락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플라스틱 컵의 표면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려 연습실 바닥에 고였지만 신경 쓸 여력이 되지 않았다. 오른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찬 기운에 빙빙 돌던 머리가 조금은 진정되었다.

“어떡…, 어떡해요…….”

진정되긴 개뿔. 당혹감에 목소리마저 떨렸다. 시치미 뗄 기회마저 날렸다.

“…많이 티 나요?”

“…엉.”

당황스러워하는 동생이 그제야 안쓰러워 보이긴 한 건지 잠시 침묵하던 하진은 차마 거짓말을 할 순 없는지 긍정했다. …진짜 망했네.

“…서태현도 알까요?”

“…너 걔 눈치 빠른 거 잊은 건 아니지?”

유건의 자세가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바닥에 상체를 엎드리며 좌절했다. 끙끙 앓는 유건을 쳐다보며 하진이 중얼거렸다.

“뭐, 근데 모를 순 있겠다. 걔도 좀 말이 아닌 상태라.”

이건 또 무슨 얘기지. 고개만 들어 하진을 쳐다보니 하진이 다 마신 아이스티 컵을 흔들었다. 잘그락 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렸다.

“내가 보기엔 너네 둘은 대화가 필요하거든?”

“대화로 끝날 얘기였으면, 진즉에 했지…….”

좋아한다고 고백한다고 해피 엔딩이었으면 세상엔 커플로 넘쳐 났을 거다. 유건은 한탄하듯이 중얼거렸다. 하진이 컵을 내려놓으며 공감하는 듯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사랑은 원래 어려운 법이지. 말하는 하진의 모습은 말문이 턱 막히게 했다. 누가 보면 힘든 사랑을 겪어 봤는지 알겠어. …설마? 이 형 연애하나?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뀐 것을 눈치챘는지 하진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지었다.

“너나 신경 써, 인마. 내 연애 사정 궁금해하지 말고.”

“형, 너 연애해?”

익숙한 목소리에 유건은 바닥에 붙어 있던 상체를 일으키며 진원지를 바라본 순간 그대로 몸이 굳었다. 하진도 놀랐는지 유건을 향해 있던 몸은 그대로 고정되어 있고 눈동자만 도륵 굴러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고 있었다. 유건과 하진을 내려다본 태현의 얼굴은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어디까지 들었지, 화난 건가. 마치 뒷담화라도 하다 걸린 것처럼 둘은 태현의 눈치를 살폈다. 태현은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앞에 털썩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형, 이제 7년 차니 연애로 뭐라곤 안 하겠는데, 누가 들을지도 모르는데 그건 좀 조심하자.”

“…네, 아니…, 나 연애한다고는 안 했는데….”

카이로스의 실세라고 부르짖던 하진의 목소리가 진짜 실세의 앞에서 점점 기어들어 갔다.

“그래서 있어, 없어?”

마음의 준비 좀 미리 해두게. 훗날 발표될 하진의 열애설을 상상이라도 하듯 태현이 한쪽 눈을 찡긋이며 말했다. 열애설이 난다면 들키는 것이 아니라 하진의 입에서 직접 나올 것이라 믿는 장난이었다.

“내 애인은 오천만 데스티지.”

장난으로 받아친 하진은 굳었던 몸을 그제야 움직여 반쯤 태현쪽으로 돌아앉았다. 오천만은 무슨. 태현은 피식 웃으며 핀잔을 건넸다. 그러고선 유건을 응시했다. 하진의 장난에 태현을 따라 웃던 유건이 다시금 돌이 되었다.

“이유건, 너는 이따 라방 끝나고 나랑 얘기 좀 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라방을 위한 헤메코는 어떻게 했는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려 보니 라방은 끝나 있었다. 끝나자마자 하진은 발랄하게 ‘진득하게 둘이 얘기 잘해 봐.’라며 사라졌다. 태현은 유건의 앞으로 온 선물 상자를 같이 챙겨 주차장으로 내려가더니 숙소까지 태워 준다는 막내 매니저도 집으로 보내고 태현 본인의 차 트렁크를 열었다. 아니, 차는 언제 가져왔대? 아침에 회사 차 타고 같이 오지 않았나? 머릿속이 황당함으로 가득 찬 유건은 트렁크에 차곡차곡 상자를 채워 넣는 태현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트렁크를 닫은 태현이 엉거주춤 서 있는 유건을 발견하고 조수석을 향해 고갯짓했다. 안 타고 뭐 하냐는 의미였다.

“너 차는 왜 회사 주차장에 있어…?”

유건은 조수석에 앉으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태현은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며 대꾸했다.

“어제 미리 주차해 놨어. 너 도망 못 가게.”

내가 도망을 가…?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내가 도망갈 정도의 얘기야…? 유건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거렸다. 유건이 그러든지 말든지 태현은 시동을 걸고 매끄럽게 운전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얼빠진 얼굴로 태현을 보던 유건이 차가 움직이자, 정면을 응시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양손으로 안전벨트를 꽉 움켜쥐고 엉성하게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태현이 혀를 찼다.

“내가 무슨 너 협박하기라도 했어?”

“나, 뭐 잘못했냐…?”

“잘못?”

되물음에 유건은 달싹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찔리는 게 너무 많았다. 어색하게 대한 것부터 하진이 라방 전에 한 얘기까지 떠올랐다. 너무 티 났나? 그것 때문에 따지려고 부른 건가? 왜 이렇게 어색하게 구냐고? 아니면 마음을 알아차린 건 아닐까. 그러면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고? 아니면 마음 접으라고? 친구로밖에 안 보인다고?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감정이란 게 원래 마음처럼 되는 게 아니잖아? 복잡한 생각에 휩쓸리던 유건은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 다문 입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잘못은 없긴 하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같이 삐딱선을 탄 태현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허, 참. 유건은 짜증을 담아 물었다.

“그럼, 뭔데.”

“뭐긴 뭐야, 네가 피하니까…!”

“…내가? 피하긴 네가 먼저 피했지!”

열 내던 불량 체리, 태현의 입이 꾹 닫혔다. 사실상 숙소를 나간 것이 유건을 피한 게 맞았음을 인정한 거나 다름없었다. 상대가 입을 닫자, 대화가 성사될 리 없으니, 유건의 입도 다시 다물렸다. 그 와중에도 착실하게 안전운전을 한 태현은 숙소 지하 주차장에 주차했다.

“내려. 숙소에서 마저 얘기해.”

여태껏 입 다물고 있었으면서. 왜 피했는데. 태현이 진짜 유건의 마음을 알아서였을까. 유건은 억울할 지경이었다. 태현이 숙소에서 나가기 전까진 자신의 감정을 자신도 알지 못했는데. 오히려 태현이 나감으로써 알게 되지 않았는가.

태현은 차에서 내려 입술을 꾹 다문 채 짐을 챙겼다. 유건도 옆에서 울적해진 얼굴로 태현이 챙기고 남은 짐을 들었다. 숙소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둘은 침묵을 유지했다. 그 침묵은 숙소로 들어가서도 유지되었다. 숙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스케줄이 안 끝난 모양이었다. 짐을 유건의 방에 내려놓고, 유건은 열어뒀던 창문을 닫았다. 둘은 방 중앙에 서서 서로를 응시했다. 태현은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덩달아 유건도 비장해져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피하긴 했어.”

“거 봐, 네가 먼저잖아.”

짐작했던 사실이 말이 되어 흘러나왔다. 알고 있었건만 말로 듣는 것은 역시 타격이 컸다. 고개를 푹 숙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근데… 네가 싫어서는 아냐.”

유건은 고개를 들어 태현을 다시 바라보았다. 태현의 눈동자가 속눈썹 사이로 떨리고 있는 것이 보이자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었다.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하얀 태현의 피부가 살짝 달아올라 있는 것도 같았다.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머리가 새하얬다. 태현은 차마 얼굴을 보고 말은 못 하겠는지 고개를 살짝 돌려 시선을 책상에 뒀다. 그러다가도 한참 시선을 허공에서 헤매더니 유건의 의문점을 해소해 준 것은 눈을 살짝 내리깔고 나서였다.

“생각이 복잡해서 좀 정리하고 싶었어. …확실히 알고 싶었기도 하고. 그냥, …너랑 나랑 꽤 오래 붙어 있었잖아. 그러니까 이게 진짠지 아닌지 알고 싶었어. 가까우니까 착각하는 건가 싶어서. …그러니까, 음, 그런 거야. …미안, 이래서.”

“잘… 모르겠어.”

머리가 도통 굴러가지 않았다. 유건은 태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사과하는지도 몰랐다. 뭘 알고 싶었다는 거지? 뭘 착각했다는 거지? 턱이 덜덜 떨렸다. 목소리에서 이상함을 느낀 태현이 황급히 고개를 움직여 유건을 보았다. 태현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어갔다. 유건은 자신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태현이 손을 뻗어 유건의 뺨을 문질러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네가 내 마음을 알아서…, 그래서 나간 거라고 생각했어. 친구로 남고 싶어서…, 그래서 나간 거라고…….”

“…야, 울지 마.”

이렇게 운 적도 얼마 없었는데. 어릴 때부터 동생들을 육아해 온 유건에게 울 일은 극히 드물었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했다, 는 게 정확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커서는 동정을 받기 싫어서든 어째서든 울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지금처럼 처절하게 운 적이 없었다.

“네가 나가고 나서야 알았어…. 서태현, 나, 너 좋아해. 친구로 못 있어.”

수없이 편지를 써도 갈피를 잡지 못하던 마음은 말이 됨으로써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어떻게 해도 태현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을 비워낼 수 없었다. 태현은 그 자리에서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뺨에 얹어진 손을 붙잡아 내리면서 유건은 편지에 가둬놨던 감정을 열었다.

“나를 사랑해 줘….”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감정은 눈물이 되어 흘러 내렸다. 사랑은 왜 이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자신이 이렇게 매달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눈물 젖은 생일날에서야 알게 되었다. 몸이 무너져 내렸다. 유건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태현의 오른손을 붙잡은 채 고개를 숙인 채 숨죽여 울었다.

“…내가.”

물기 어린 태현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뚝뚝 끊어지는 말은 혹여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까 꾹꾹 눌러 담은 듯 강하게 들려왔다.

“너를.”

태현의 왼손이 푹 숙인 유건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껏 구겨진 태현의 눈가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 울리면 안 되는데. 유건은 멍하니 생각했다. 구질구질하게 사랑 고백을 하는 와중에도 태현의 눈물이 마음 아팠다.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그 말과 함께 태현은 일그러진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유건은 그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유건, 네가 좋아.”

그 한마디는 유건을 웃음 짓게 했다. 눈물로 범벅된 최고의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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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_티라노의_생일을_축하합니다

#내맘에_탕탕_즐거운_Death_Match

#240901_유건아_생일축하해

#유건이의_무대는_언제나_즐겁다

#호랑님의_생일선물로_사랑을줄게

결국 지각해버린 축하. 생일은 이용만 당했을 뿐이고….

퇴고도 못한 글, 어색한 부분만 좀 고치고 나중에 다 뜯어 고칠 것 같습니다. 둘의 이야기를 더 풀어서 쓰고 싶어요.

+1차로 오탈자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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