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의 아이

1. 아이시스 제국 (5)

1-5

[정령의 아이]는 '공식적으로 저작권이 등록된 작품'이기에

작가의 허락 외의 개인 유포는 <저작권 침해>이며,

<저작권 침해는 형사 및 민사 고소를 받을 수 있음>을 명시해둡니다.


정령의 아이

1. 아이시스 제국 (4)

건물 안에서 비가 내리는 믿기지 않는 일이 지나가자 모두 홀딱 젖은 상태로 방을 나올 수 있었다.

연구실을 나온 에퀼은 엉망이 된 방 안을 보고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방금 내린 비 때문에……지금까지 연구해왔던 자료들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그를 뒤따라 복도로 나온 경찰 짐은 상심한 에퀼의 얼굴을 보고는 차분한 말투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교수님께서 피해를 보셨군요…….”

연구실을 보고 울상을 짓고 있는 에퀼을 본 짐이 제일 먼저 사과를 했고, 에퀼은 황급히 얼굴을 문질러 표정을 수습하고는 대답했다.

“아니에요, 경찰관님의 잘못은 전혀 없었는걸요!”

“하지만 제가 이런 일이 생겨날 계기를 가져온 것은 맞지요. 죄송합니다.”

말을 흐리면서 짐은 머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이곳으로 소년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이 연구실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만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이미 사건은 벌어졌고,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경찰관님은 레이크가 이만한 사건을 일으킬 힘을 가진 것을 모르셨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은 알면서 저질렀고요!”

이 사건은 롤레스가 고의로 벌인 짓이니 짐이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던 에퀼은 잔뜩 겁에 질린 눈빛을 알아차렸는데 시선의 주인은 ‘사람의 힘을 벗어난 힘’으로 연구실을 수몰시킨 레이크의 것이었다.

“잘……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사과하는 소년은 그에게 미안한 마음에 결국 울음을 터트리는데……그 모습이 에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어른도 감당하기 힘든 ‘죄책감’을 주다니!

“레이크……울지마, 괜찮아. 나는 네게 화나지 않았어.”

솔직히 방금의 일로 울고 싶어졌던 에퀼이지만 어린아이인데 ‘원치 않은 죄’를 지은 레이크가 가여웠고……‘어른’이기에 보여야 하는 어른의 체면이 있으니 속상한 감정을 홀로 삼키기로 결심했다.

“레이크가 원해서 저지른 일이 아니었잖니. 그 사람이 나쁜 거였잖아. 그러니까 울지 마. 괜찮아, 괜찮아…….”

침착함을 끌어내어 다정하게 말하면서 에퀼은 미안한 마음에 울고 있는 레이크를 끌어안고 토닥여주며 ‘친구는 괜찮은지’ 물었다.

“레이크는 친구를 구하려고 했잖니, 친구는 이제 괜찮아?”

여전히 보이지는 않지만 아픈 경험으로 정령을 믿게 된 에퀼이 묻는 말에 레이크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구나. 친구가 무사하다니까.”

생각해보면 가족과 헤어지고 홀로 제국에 오게 된 레이크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친구’라는 정령뿐일 것이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뿐인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믿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는 ‘부도덕한 제안’이라도 따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여러 상황을 고려해보았을 때……이 사태를 일으킨 주범인 롤레스의 행동은 더욱 악질처럼 느껴졌고 용서할 수 없었다.

‘당신은 정말 최악이네요! 롤레스!’

“저기……엘이 미안하다고 말해요.”

울음을 그친 레이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에퀼은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였다.

“레이크가 전해 줄 수 있겠니? 방금 일어난 일을 선생님이 용서해 준다고. 하지만 또 이런 사고를 치는 건 안 된다고 말이야.”

큰 사건을 저질렀지만 용서하겠다는 한마디에 죄책감으로 어두워졌던 레이크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네! 꼭 전할게요!”

큰 사건이었지만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레이크의 뒤편으로 짐이 창문 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왜 그러시죠?”

혹시나 또 다른 일이 생긴 것인가 걱정된 에퀼의 질문에 짐은 하늘을 보던 시선을 돌리면서 대답했다.

“여기에 올 때는 비가 올 것처럼 흐렸는데 순식간에 구름이 사라져서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분명 비가 내릴 것처럼 어둑어둑했던 회색빛 하늘은 순식간에 사라진 모습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뒤늦게 하늘의 변화를 깨달은 에퀼도 영롱한 노을을 바라보다가 하나의 생각을 떠올렸다.

“혹시……레이크가 바꾼 게 아닐까요?”

“예? 레이크가 바꿨다고요?”

“아까 겪었던 그 엄청난 물난리가 이 하늘과 관련된 것 같아서요.”

자신의 의견이 맞는지 궁금해진 그는 조심스럽게 레이크를 불러서 물었다.

“지금 갑자기 날씨가 맑아졌는데, 혹시 엘이 비를 내리게 한 것과 관계가 있니?”

질문을 받은 레이크는 놀라더니 이윽고 눈을 빛내면서 대답했다.

“우와! 어떻게 아셨어요? 맞아요! 엘이 그렇게 만들어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하늘에 있는 물’을 가져오면 구름이 없어진대요!”

“세상에…….”

놀라운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도 모자라 ‘자연 현상’까지 조종할 수 있다는 대답에 두 사람은 진심으로 놀랐다.

물론 레이크가 직접 하는 일은 아니지만,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와 소통한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었으니까!

 

 

 

“하아……실례가 아니라면, 이 학교에 있을 욕실을 빌릴 수 있을까요? 옷도 빌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젖어서 흘러 내려오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면서 짐은 새롭게 생겨난 고민을 털어놓았다. 씻고 싶고, 옷도 갈아입고 싶다고.

“물론이죠! 학생용 욕실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그럼……‘나중에’ 만나지요.”

“네? ‘나중에 만나자’고요?”

어째서 ‘나중에 만나자’는지 황당해 하던 에퀼은 뒤늦게 그가 자신을 계속 보지 않고 말하는 이유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자신도 물에 흠뻑 젖은 탓에 속옷이 비치는 모습이었던 것!

 

 

* * * * *

 

 

세 사람은 잔뜩 엉망이 된 모습으로 아수라장이 된 연구실 밖을 나오게 되었다.

“앗! 그러고 보니 루나가 없네요?!”

“저 여기에 있어요. 교수님.”

당황한 에퀼의 등 뒤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오기에 돌아보니, 언제 연구실을 빠져나간 것인지 ‘옷을 갈아입고 온 루나’가 대걸레를 들고 서 있었다.

“루나?! 언제 나갔던 거니?”

“……‘그 사람’이 나갈때 따라 나갔었어요. 지금 민원실에 교수님 연구실의 일을 말하고 왔습니다.”

“고마워! 역시 루나야!”

차분하게 뒷일을 준비해둔 루나의 준비성을 감탄하면서 에퀼은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에게 ‘나중에 보자’고 말하고는 부리나케 여성용 탈의실로 뛰어갔다.

“……두 분은 이 남학생이 안내해줄 거예요.”

“‘부학생회장’님이 제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한 분들이시군요. 저를 따라오세요.”

루나와 함께 온 남학생은 레이크와 짐이 씻을 수 있는 남성용 탈의실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밖에서 봤던 건물은 매우 크고 복잡한 길을 가지고 있어서, 레이크는 짐의 손을 꼭 잡고 남학생의 뒤를 따라 남성용 탈의실과 씻는 욕실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안에 들어있는 옷이 ‘학생용 체육복’뿐이지만……몸에 맞는 치수의 옷을 꺼내 입으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한 남학생은 두 사람이 씻을 욕실까지 안내하고는 남성용 탈의실을 떠났다. 짐은 학생이 떠나고 나서 탈의실이 신기해서 구경하는 레이크의 손을 잡아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오늘 하루 내내 물을 뒤집어썼던 어린 소년의 몸을 따뜻한 물로 깨끗하게 씻겨주었다.

레이크는 친구가 한 것처럼 물을 쏟아내는 욕실의 벽이 신기했고, 자기 몸을 깨끗이 씻겨주는 남자의 크고 따뜻한 손길을 믿고 몸을 맡겨 얌전히 씻었다. 화난 것처럼 눈매가 올라가고 무뚝뚝한 얼굴이지만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았으니까.

 

*

 

씻고 나온 짐과 레이크는 ‘자신을 기다리는 새로운 학생’의 뒤를 따라 다시 학교를 걸었다. 걸을 때마다 레이크의 배에서 천둥이 치는 것처럼 크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레이크. 배고파?」

“응.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까……배고파.”

어제 오후 산에 올라가 열매를 따 먹은 외에는 먹은 것이 없었던 레이크는 굉장히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다.

“하아……맛있는 냄새가 나네.”

코끝을 스치는 향긋하고 고소한 향기에 레이크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중얼거렸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레이크 이제 밥 먹는 거야?」

“그건 모르겠어……밥을 먹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는데…….”

배고픔에 절로 나오는 진심으로 혼잣말을 하던 레이크는 자신의 손을 잡은 짐이 멈추는 것을 보고 덩달아 자리에 멈춰 섰다.

“여기는……?!”

길을 안내하던 남학생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식당의 정문이었던 것!

“*** ** **** **** ***.”

“하……맛있겠다.”

레이크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아주 큰 탁자에 앉아 식사하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음식들의 향기가 코와 배를 한껏 자극하고 있기에 괴로운 순간!

“레이크 배고프지? 배가 많이 고플 것 같아서 여기서 만나자고 한 건데, 마음에 드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다정함이 가득 담긴, 레이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왕국의 말’로 말을 건네는 사람은 씻고 나타난 에퀼이었다!

“네!”

“후후…….”

에퀼은 깨끗해진 레이크의 빨간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접시에 담아 먹으면 된다’고 말한 다음 짐에게 레이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제국의 말’로 물었다.

“그나저나 경찰관님……이제 어쩌실 건가요? 레이크를 체포하실 건가요?”

경찰은 레이크가 한껏 밝아진 얼굴로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를 들고와서 옆에 앉는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글쎄요……이번 사건은 저 혼자서 결정할 사항이 아닌 문제 같습니다. 우선 보고부터…….”

“…….”

짐의 곁에 앉은 레이크는 탁자에 올라가 있는 포크와 나이프를 지그시 보다가, 다른 탁자에 앉은 학생들이 음식을 먹을 때 쓰는 것을 보고는 용기를 내어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서툴게 포크를 잡고 나이프로 고기를 자르려고 하는데!

 

끼긱! 끽!

 

생전 처음 써보는 도구가 낯설어서 레이크가 나이프로 접시를 긁는 소음이 식당에 울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에퀼은 재빠르게 레이크의 입에 들어갈 만한 크기로 고기를 자른 다음에 접시를 내밀어 주었다.

“미안해. 생각해보니 레이크는 이걸 어떻게 쓰는지 전혀 몰랐겠구나.”

나이프로 재빠르게 고기를 잘라준 에퀼은 ‘포크’라는 물건으로 자른 고기를 찔러 먹으면 된다고 알려주었고, 설명을 들은 레이크는 에퀼이 잘라준 고기를 빠르게 입에 넣기 시작했다.

마치 음식과 싸우듯이 식기를 거칠게 사용하는 레이크의 모습이 짐의 호기심을 불러왔다.

“카르타 왕국에는 ‘커틀러리’가 없습니까?”

“포크와 비슷한 조리용 도구는 있지만, 식사에는 쓰이지 않아요. 왕국은 스푼과 막대기 두 개로 식사하거든요.”

“그렇습니까? 신기하군요.”

“후후……신기하고 매력적인 나라죠. 자연이 가득 느껴지고, 어디를 가던 사람들의 인정이 가득한 나라거든요.”

레이크가 온 왕국은 멋지다고 말한 에퀼은 갑작스럽게 제국에 오게 되어 적응이 힘든 소년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아이와 같이 앉아 있으니 꼭 당신 아이로 보이는군요. 에퀼 교수.”

“네? 이 아이는 제 아이가 아니에요!”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놀라 오해를 해명하려고 뒤돌아선 에퀼은 등 뒤의 인물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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