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PG] [겁스] [무한세계] 모두의 지구

TRPG 룰 합작때 겁스 : 무한세계를 소개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취미글 by 은

이 글은 2019년에 TRPG 룰 합작용으로 쓴 글입니다. 합작 페이지는 없어졌지만, 애정을 담아 쓴 글이라 겁스를 좋아하는 분에게 닿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업로드합니다. 겁스 무한세계가 절판이다보니 최대한 이런 룰이란걸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 쓴 기억이 나네요.

이하 [겁스] [무한세계]를 소개합니다.


겁스 소개 : 겁스는 보편적인 게임 룰로 특정 세계나 별도의 이야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겁스는 가능성입니다. 내가 꿈꾸는 가상의 세계를 어떻게 게임으로 구현해야 좋을지 고민이 된다면 두 번 고민하지 마시고 겁스를 펴보세요. 겁스는 당신 머릿속에만 있는 이야기를 균형 잡힌 게임으로 만들어 줄 겁니다. 인류에게 불이 있다면, TRPG인에겐 겁스가 있습니다. :D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부단한 상호 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겁스 무한세계 룰북 6페이지

이 룰북이 나온 때가 2006년이니 벌써 13년이 지났습니다. 그때는 아직 상상 속에만 있던 최첨단 기술이 2019년인 지금에는 흔하게 쓰이는 기술이거나, 심지어는 옛날 기술이 되어 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그런 부분을 배경에 맞게 개인적으로 수정해서 적었습니다. 그래서 기술적인 세부 내용이 룰북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삑삑거리는 알림 소리에 눈을 떴다. ‘6:00’이란 빨간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언제나 정시에 하루를 시작한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라디오를 켜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래된 유행가가 흘러나온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채널이 하나뿐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곧바로 주방으로 가서 커피 머신부터 켰다. 주룩주룩 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진한 커피 향이 감돌았다. 주방이 새카맣게 어둡다. 나를 키워준 사람은 해가 지면 자연스럽게 어두운 게 좋다고 생각하는 분이셨다. 이런 시대에 자연스러움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도 그분의 영향을 받아서 밤에는 불을 켜지 않는다.

커피로 시작하는 하루와 어두운 밤은 내가 그 사람에게서 받은 대표적인 유산이다. 부엌 창문 가장자리가 창틀을 따라 희미하게 밝다. 나는 창문을 가볍게 두드려서 창을 가린 외부 셔터를 열었다.

바깥은 샛노란 모래와 밝은 회색빛의 바위가 가득했다. 모래에 부딪혀 조각조각 깨어진 햇살이 창을 통해 냉큼 굴러들어왔다. 주방은 순식간에 환한 금빛으로 가득 찼다. 유리 성분이 많은 모래로 인해 사방이 스노우 볼처럼 반짝였다. 이곳의 새벽은 늘 혼란스러울 정도로 밝다.

나는 커피를 담은 컵을 들고 아무것도 없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매일 아침이면 커피를 한잔하며 해가 중천에 오르기 전까지 밖을 바라본다. 이것이 내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문득 식탁 위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곁눈으로 보니 갑자기 밝아진 데 놀란 거미 한 마리가 열두 개의 다리를 바쁘게 놀려 식탁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거미를 조심스럽게 들어서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내보냈다. 미지근한 바람에서 마른 모래 냄새가 났다. 거미는 해를 피해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숨었다. 나는 거미의 뒤에 대고 외쳤다.

“집에는 들어오지 마. 시간마다 청소 로봇이 돌아다니니까.”

아마 못 알아들었을 거다. 이 별에는 대화를 이해할 만큼 지능이 높은 동물이 남아 있지 않다.

바깥 온도는 아직 견딜만했다. 하지만 버석거리는 모래바람에 집이 강제 환기를 시작하며 윙윙 소리를 냈다. 나는 집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창을 닫았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삼십 분쯤 지나서, 커피잔 바닥이 보일쯤에 사방에서 삑삑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주방에 달린 스피커를 켜고 조용히 말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절차에 따라 신분을 확인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진짜 사람 목소리였다. 그는 건조한 목소리로 프로토콜에 따라 내가 누군지를 물었다. 커피가 거의 다 떨어질 무렵이라 곤란했었는데 적절할 때 일이 생겼다. 나는 반색했다.

“0620-3005-ST. EVE-Q7C 1330-6. 그리고 개인 구분 코드는 ALL입니다.”

[신분 확인했습니다. 오늘 긴급 일정이 있습니다. 30분 후에 셔틀이 도착할 예정이니 승선 후 이벤트를 확인해 주세요. 닥터 박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따로 준비할 건 없나요?”

[이번 일은 수신자 기준으로 ‘먼 세계’ 일입니다. ‘역사계’에 가깝게 붙어 있는 곳이니 자료를 보고 규정을 잘 지켜주세요.]

“알겠습니다. 절차 이행하겠습니다.”

[네.]

“아! 거기 시간으로 몇 시인지는 몰라도, 좋은 하루 되세요.”

그는 별 대답 없이 통화를 끝냈다. 다른 사람의 음성이 사라지자 갑자기 집이 고요하게 느껴졌다. 나는 창문 셔터를 닫고 방으로 가서 짐을 꾸렸다.

과학자들은 우주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거대한 에너지였던 우주의 씨앗은 어느 날 폭발하며 거품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그 거품이 모두 별개의 우주가 되었다고 했다. 우주는 한 나무에 달린 장미꽃처럼 만발해 펼쳐져 있다. 각각은 같은 나무에 핀 꽃처럼 멀리서 보면 비슷하고 가까이서 보면 서로 다르다.

처음 차원 이동 방법을 개발한 이들은 자신이 살던 우주를 기준으로 삼아 ‘홈라인’이라고 불렀다. 거기가 내 ‘집’은 아니지만, 홈라인을 위해 일하는 자들은 모두 그곳을 ‘홈’라인이라고 부른다.

이번에 가게 될 곳의 정보가 초차원 통신을 거쳐 망막 스크린으로 흘러들어왔다. Q6에 있는 우주다. 홈라인이 있는 Q5와 꽤 가까운 차원이었다. 나는 행성의 이름을 확인하고 순간 멈칫했다. 나는 ‘지구’로 가야 한다. 이번 일은 꽤 중요한 일일 것 같다.

회사 표준 규정에 따라 한손에 딱 맞게 잡히는 에너지 총과 예비 배터리, 껌 통처럼 생긴 구급 약품, 그리고 현지 화폐를 챙겼다. 다 합쳐도 현지 여성들이 흔히 사용하는 작은 가방 안에 쉽게 들어갈 크기밖에 안 된다.

패션 도록을 뒤져 시대에 맞게 레깅스와 티셔츠를 입고 야구 점퍼를 걸쳤다. 디스플레이 콘솔을 이용해 홍채와 머리카락 색은 검은색으로 보이게 조정했다. 작전지는 단일 인종이 90%가 넘는 국가라 최대한 평범해 보이는 게 중요했다.

집 밖으로 비행선이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멀리서 황갈색의 용오름이 보였다. 모래 폭풍이 다가온다. 혹시라도 비행선이 말려들지 않게 서둘러 비행선에 올랐다.


푸른색의 선실 안은 서늘하고 조용했다. 오가는 선원 중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걔 중 몇은 정보과 소속이고 몇은 병참과 소속이다. 역시 심상치 않은 일이구나 짐작하는 동안 누군가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삼 년만이던가요?”

차분하고 단아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나는 내게 인사를 해온 닥터 박, 박영신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잘 지내셨나요?”

나는 영신의 문명권에 맞춰서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를 한 후에 옆자리에 앉았다. 차원 점프를 대비해 두껍게 만든 X자 모양 안전벨트가 내 몸에 뱀처럼 감겼다. 영신은 버릇처럼 수줍게 웃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쉽게도 저는 저녁을 먹다 불려 왔지만요. 그래도 여기서 아침 햇볕을 받으니 잠이 깨는 느낌이라 좋네요.”

팔 부분이 비치는 긴 팔 시폰 블라우스와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치마를 입은 영신은 현지 기준으로 평범한 학부모처럼 보였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영신의 머리카락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흰색이 더 많이 섞여 있었다.

영신은 그물 모양 진주 장식이 달린 작은 손가방을 들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학부모 모임에 갈 때 어울릴 것으로 보이는 가방에는 진주로 위장한 초전도체 축전지가 40개 이상 달려 있었다.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 많은 화력이 필요한 걸까? 이런저런 상황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 보았지만,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영신은 “음-.”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반톤 높여서 오늘 방문할 나라의 언어를 연습했다. 그녀는 Q6 위에 존재하는 다른 우주에서 왔다. 그녀가 사는 행성의 이름도 ‘지구’이다. ‘지구’라고 불리는 행성이 모두 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영신이 온 곳과 오늘 갈 곳은 거의 똑같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영신은 모국어가 아닌 현지어에도 능숙해 보였다.

원래 우리 회사는 지나치게 동일한 역사를 가진 다른 우주로 요원을 잘 보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구’에서 다른 ‘지구’로 갈 수 있는 영신은 특별한 인물이다. 영신을 멍하니 바라보며 옛날 생각을 했다. 영신은 그 시선에 의아해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눈 색이 너무 어두워요.”

나는 퍼뜩 놀라 주의를 돌렸다. 그런 내 모습에 영신은 살짝 웃으며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요원님 홍채 색이 너무 어두워요. 편의상 검은 눈이라고 부르지만, 그렇게 새카맣진 않거든요. 조금 더 밝은 갈색인 게 자연스럽겠네요. 머리카락 색도요.”

“지적 감사합니다.”

나는 재빨리 색채를 재조정했다. 검은색에 갈색을 섞고 색감을 흐리게 만들었다. 적당한 색이 되자 영신이 고개를 끄덕여 내게 알려주었다. 체구가 작은 편인 영신은 거대한 X자 안전벨트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영신은 가느다란 손목시계에 설치된 영사기로 거대한 발전소 건물을 공중에 투사하며 계획을 설명했다.

“센트럼은 행성 기술 발전단계를 가속하기 위해 사고를 일으키려 해요. 동아시아 각 국가를 위기상황에 빠뜨린 다음 정치를 불안정하게 만들어서 군국주의적으로 강제 통일하는 게 일차 목표로 보입니다. 센트럼이 다른 세계의 역사를 인위적으로 수정하려는 계획을 막는 것이 우리의 목표에요.

“역사동역학 계산은 끝났나요?”

영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다시피 나비효과와 역사 탄력성 때문에 미래를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는 일은 몹시 어려워요. 역사동역학 전문가라고 해도 먼 미래를 정확하게 계산하긴 힘드니까요. 그래서 센트럼은 역사 복제를 시도하고 있어요. 다른 우주의 사건을 이 우주에 덮어쓰려는 거죠.”

문화적으로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고, 지리적으로 같은 위치에 있는 두 나라에서 우연히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면 결과 또한 비슷할 확률이 높다. 일란성 쌍둥이를 같은 양육자가 똑같은 방법으로 양육한다면 남들이 보기에 한 사람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된다는 그런 이론이다.

홈라인의 역사동역학 학자들은 부인하는 이론이다. 물론 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엘리트주의를 신봉하는 센트럼은 국민 개인의 힘을 지나치게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영상에 첨부된 타임라인을 확인하며 물었다.

“시작은 강한 지진과 뒤를 이은 해일이었죠?”

“네. 이번에 갈 행성은 제가 있던 우주와는 달리 해일에 대한 대비가 충분한 상태였어요. 그래서 센트럼은 미리 특수 요원을 잠입시켰다가 사건이 일어날 시각에 그곳을 긴급 정전 상태로 만들 겁니다. 정보요원이 확인해본 바로는 점검이 뜸한 편인 건물 외부 비상 발전기는 이미 다 손을 썼다고 해요. 모두 고장 난 상태랍니다.”

“그걸 우리 요원들이 고치면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그랬다간 우리가 이 계획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센트럼이 알게 되겠죠. 그들이 갑자기 계획을 바꾸면 그걸 알아내는데 시간이 추가로 들어요. 그사이에 더 큰 사고가 생길 수도 있으니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수밖에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행스럽게도 센트럼은 우리가 이번 작전을 알고 있단 걸 전혀 몰라요. 그들은 사전 준비를 위해 발전소 내부에 작전 요원 세 명을 심어두고 바깥에 전투 요원 다섯 명을 배치했어요. 우리는 원전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견학하러 방문한 시민단체 회원인 것처럼 행동해서 발전소 안에 잠입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해일이 닥치기 직전에 내부에 있는 센트럼 요원 셋을 처리하고 해일 후 현지 구조 인력이 도착할 때까지 십 분 동안 발전소 계기판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지켜야 해요. 그게 우리가 오늘 해야 할 일이죠.”

셋 그리고 다섯, 총 여덟이다. 협공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전투 요원 다섯 명은 무시할 수 없는 무력이다. 나는 그제야 회사가 나와 박영신 씨를 부른 이유를 이해했다. 그녀는 필요한 학문적 배경과 무력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위험한 순간에 누구보다 먼저 움직이는 대범한 사람이기도 했다. 영신은 여전히 옅게 웃으며 말했다.

“상대가 방심하고 있어서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끝나고 세 시간, 잘 부탁드릴게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요원은 특약사항에 따라 임무가 끝난 후 원한다면 그곳에 세 시간까지 머물 수 있다. 그건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우리에게 회사가 주는 약간의 보너스였다.

양쪽 우주의 균형을 깨뜨리는 물건이 아니라면 기념품도 가져올 수 있다. 박영신 씨는 작전을 끝내고 받을 보수보다 작전 이후의 세 시간을 더 바라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 세 시간을 얻기 위해 그녀는 삶의 십년을 바쳤다.

브리핑이 끝나자 비행선이 시동했다. 천둥소리처럼 요란한 엔진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들렸다. 곧 공간 점프가 있을 예정이니 안전 손잡이를 잡아달라는 안내가 들렸다. 선체가 칵테일 쉐이커처럼 흔들렸다. 턱관절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귀 안쪽으로 들으며 우리는 우주를 건넜다.


창밖으로 파랗게 빛나는 행성이 보였다. ‘지구’다. 이곳의 지구는 좀 특별했다.

역사는 우연과 필연으로 복잡하게 짜인 직물과도 같다. 이곳에는 다른 지구에 없던 중요한 우연이 있었다. 작은 친절이 궁지에 몰려 절박한 테러범의 마음을 돌렸다. 한 정직한 공무원의 고발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부정을 막았다. 고작 몇 표 차로 유능하고 양심적인 정치가가 선출되었으며, 국가적 음모가 악인의 사소한 실수로 인해 헛수고로 돌아갔다. 이곳은 최선의 결과로 이루어진 아름답고 평화로운 지구였다.

센트럼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평행 우주를 입맛대로 개조하고 착취한다. 나는 착취 할 수 있는 힘을 가졌기에 그럴 권리가 있다는 그들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물빛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행성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요. 오늘 저는 ‘사토 마유미’, 당신은 ‘야마모토 미츠키’상입니다.”

“네. 사토 상.”

영신은 웃으며 강하용 포켓에 올랐다. 나는 파란 행성이 주는 강렬한 인상에 집착하다 뒤늦게 포켓에 올라탔다.

우리는 정해진 좌표에 정확하게 내려앉았다. 항공 레이더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포켓은 표면만 살짝 그슬려 있었다. 우리는 포켓을 잘 말아서 탐사부 요원들이 미리 준비한 장소에 적당히 숨긴 다음 산을 내려갔다.

산에서 벗어나자 눈앞에 압도적인 질량을 가진 물이 보였다.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졌다. 하얀 갈매기들이 비린내가 섞인 습한 공기를 타고 놀았다. 철썩철썩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생명이 살아 부글거리는 수프다. 내가 지나치게 오랫동안 정신을 팔자 영신이 눈치를 주었다.

“야마모토 상. 미안하지만 약속 시각이 얼마 안 남았어요.”

“아! 죄송합니다.”

어느새 검은색 뿔테 안경을 꺼내 쓴 영신은 이곳 여자들처럼 보폭을 좁혀 조심스럽게 걸었다. 나는 발소리를 내며 따라가기 위해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탐사부 요원들이 미리 준비해둔 덕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우리 이름으로 미리 방문 예약을 해두어서 간단한 확인 절차를 통해 곧바로 발전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평범하게 나이가 들어가는 여자와 젊은 여자로 보이는 우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소장이 자부심을 담아 우리를 안내했다. 으슥한 장소까지 가자 나는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그분의 목 뒤를 수면 침으로 찔렀다. 그리고 코를 골기 시작한 소장님을 손님용 여자 화장실 구석 칸에 넣고 안에서 문을 잠갔다. 잠긴 문 위쪽 공간을 넘어 나오자 영신이 웃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귀찮은 일은 다 맡겨서 미안하네요.”

“괜찮습니다. 제게는 별로 힘든 일도 아니고요.”

“여기서 3분만 대기하다 시간에 맞춰서 제어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죠. 지진까지는 10분 남았어요.”

영신은 반투명한 소매를 찢고 치마를 벗어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소매가 없는 조끼 모양 상의와 몸에 딱 붙는 반바지만 남긴 영신은 진주로 장식이 된 손가방을 열어 전자기 방어장 생성 장치와 초소형 드론을 꺼냈다.

“뭔가 했더니 EMP 대비였나요?”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요. 이 시대 제어장치는 전자기 펄스에 취약해요.”

“에너지 건은요? 제거라도 빌려드릴까요?”

“그런 건 급하면 바로 써야 하니까 가방에 넣어 다니지 않죠.”

영신의 손에서 잠자리만 한 드론 넷이 소리 없이 날아올랐다. 둘은 화장실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고 나머지 둘은 우리 주변을 빙빙 돌며 명령을 기다렸다. 영신의 안경 안쪽으로 복잡한 표시가 떠올랐다. 영신은 잠시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올림머리에 장식으로 꽂아두었던 긴 머리핀을 뽑아 손에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반인들이 상황을 눈치채지 못하게 가능한 한 빨리 움직였다. 제어실에 있던 센트럼 요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셋 다 에너지 건을 맞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일반 사원에겐 수면제가 담긴 바늘 총을 썼다. 나는 사원들 몸에 꽂힌 바늘을 회수하며 깊게 잠든 사람들을 책상 아래로 일일이 밀어 넣었다. 영신은 복도와 계단에 띄워둔 드론으로 상황을 주시하며 날 엄호했다.

작전 타이머가 팅-하고 진동하는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이 크게 흔들렸다. 1차로 찾아온 강진이다. 나는 재빨리 벽에 붙어서 다친 사람이 없나 주변을 살폈다. 영신은 긴장한 표정으로 제어판에 다가갔다. 잠시 전기가 끊겼다가 돌아오며 화면이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내부 발전기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영신은 구형 USB 커넥터가 달린 메모리를 손에 들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다른 세계의 역사를 바꾸지 않으려면 너무 빨라서도 늦어서도 안 된다. 타이머가 곧 두 번 울렸다.

해일이 발전소를 집어삼켰다. 건물이 우르릉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책상 위에 있던 집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바퀴가 달린 의자들이 제멋대로 굴러가 뒤엉켜 넘어졌다. 큰 충격에 현기증이 났다. 복서의 주먹처럼 묵직하게 나를 때리던 소리가 지나가자 귀를 찢는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뒤를 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격리 셔터가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영신은 내게 눈짓으로 신호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에너지 건을 제어실 입구에 겨눈 채로 영신을 엄호했다. 영신은 메인 제어판에 메모리를 꽂아 발전소 내부 네트워크를 해킹했다. 발전소 프로그램이 삽시간에 외부 콘솔의 지배 아래로 들어왔다. 영신은 해킹과 동시에 주변에 EMP 방어 실드를 쳤다. 그물 모양으로 정교하게 병렬 연결해둔 진주 모양 축전지가 희미하게 빛을 냈다. 우리에게 의미 없는 장식이란 없다.

삽시간에 전자기적 수성전 준비가 끝났다. 어설프게 만든 충차로는 흠집을 내기도 힘들 거다. 영신이 활약했으니 그다음은 내 차례다. 마침 영신이 손을 들며 외쳤다.

“계단으로 적들이 올라오고 있어요. 숫자는... 넷!”

하나는 어디 있는 걸까? 고민하는 사이에 제어실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예측 사격을 했다. 기습을 예상하지 못한 상대방은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순식간에 상대편 셋이 쓰러지고 하나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센트럼 요원은 침착하게 에너지 건을 겨눠 내게 발사했다. 나는 그것을 오른팔로 쳐냈다. 요원은 뭔가 잘못 본 사람처럼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쓴 어두운 고글 안으로 실패를 직감한 눈빛이 희미하게 보이는 듯했다. 상대도 사람이란 걸 인식하게 되면 아무래도 싸우기가 힘들다. 그 순간 영신이 재빨리 상대를 쏘아 마무리했다. 내 마음을 짐작한 걸까? 알 수는 없다.

모든 일이 이야기처럼 쉽게 끝났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이상해요. 한 명은 어디 있는 거죠?”

“드론으로 찾아보고 있는데, 안보여요. 계속 찾아볼게요.”

영신은 메인 시스템에 침투하려는 코드와 싸우며 드론을 바쁘게 조종했다. 나는 내가 느꼈던 희미한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떠올리기 위해 기억을 점검했다. 문이 열리고 네 명의 요원이 들이닥쳤다. 곧바로 셋이 쓰러지고, 추가로 하나가 쓰러졌다. 제어실 문은 어쩐지 열린 채로 계속 덜렁거렸다.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은 나는 재빨리 에너지 건을 제어실 문 쪽으로 겨누고 연달아 발사했다. 반쯤 열려 있던 제어실 문이 새카맣게 그을렸다. 내가 착각한 건가? 머뭇하는 사이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내 가슴을 강하게 때렸다. 나는 뒤로 쭉 미끄러져 밀려나다 벽에 처박혔다.

“야마모토 상!”

영신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장이 온통 뒤섞이는 느낌이 들었다. 잇달아 올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옆으로 굴러 책상 뒤로 몸을 숨겼다. 애써 자세를 바로잡으려고 했지만, 충격이 쉬이 지나가질 않았다. 시야가 흔들렸다. 통증이 신경을 타고 스파크처럼 일렁였다. 나는 신체가 알려주는 위험신호를 무시하려 애썼다.

“사토 상! 복도 드론 제어권을 제게 넘겨주세요.”

“네!”

곧 망막 스크린에 시야가 하나 더 생겼다. 또 하나의 나는 재빨리 날아서 제어실로 들어왔다. 원래 눈보다 화소는 많이 떨어지지만, 제어실 안을 한눈에 보기엔 충분했다.

책상 옆으로 손을 내밀어서 공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에너지 건을 난사했다. 대부분의 광선이 의미 없이 허공을 날아서 벽을 그을렸다. 하지만, 드론의 감지기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굴절하며 날아가는 빛줄기를 찾아냈다. 에너지 소모가 극심한 광학 베리어를 휴대용으로 만들다니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긴 전쟁의 역사를 가진 센트럼의 무기 기술은 이렇게 종종 우리를 앞선다.

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문득 아래를 내려 보니 윗옷이 까맣게 타서 부스러지고 있었다. 타버린 옷을 털어내듯 벗었다. 오른손으로 왼손 손목을 잡고 강하게 당겼다. ‘철컥’하는 소리가 나며 자뼈(팔 안쪽 뼈)로 위장되어 있던 핸드건 총신이 튀어나왔다.

적이 있을 방향을 계산해서 세발을 쏘았다. 1시 방향으로 한발, 그리고 두 걸음 우측으로 한발, 마지막은 1m 하단으로 한 발 더. “탕. 탕. 탕.” 다이아몬드 탄환이 붉은 궤적을 그으며 허공을 지나갔다. 상대는 무한경비대가 가진 총알로 센트럼의 최신 방탄복을 뚫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방심했으리라. 하지만, 내 팔에 숨겨둔 총은 센트럼에서 만든 최신 제품의 복제품이다.

상대가 급하게 물러나는지 사무실 의자들이 춤추듯 밀리는 모습이 보였다. 바닥에 붉은 발자국이 출입구를 향해 어지러이 찍혔다. 이제는 명백하게 보이는 퇴로 위로 영신의 단분자 비수가 지나가자 허공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무언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소리가 나며 곧 인기척이 사라졌다. 영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팔분만 더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면 이곳 전체가 다시 복구될 거예요.”

나는 드론의 제어권을 영신에게 넘기고 새카맣게 그을린 제어실 문을 바라보았다. 영신은 바닥에 쓰러진 직원의 겉옷을 벗겨서 내게 건네주었다.

“괜찮겠어요?”

나는 왼팔을 비틀어서 총을 제자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보다 덩치가 훨씬 큰 사람의 옷을 뒤집어쓰듯 입었다. 숨을 쉴 때마다 명치가 얼얼하게 아팠다.

“조금 아프긴 하지만, 당분간은 별 문제 없을거에요.”

마치 한 시간 같은 팔분이 지났다. 우리는 재빨리 기기를 회수해서 원자력 발전소를 빠져나갔다. 굳건한 시멘트 문밖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땅은 깊게 파여 너덜거렸다. 처절한 흔적 위로 파도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철썩철썩 밀려왔다. 물은 그렇게 자기가 저지른 일을 모른 척했다.

우리는 귀환을 위해 부지런히 포켓을 숨긴 산까지 걸었다. 어쩔 수 없이 뒤에 남은 증거는 이 세계에 사는 다른 요원들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우리가 포켓을 숨긴 위치 바로 아래까지 물이 왔다 간 흔적을 보며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재앙의 범위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면 그것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 없다. 이곳의 미래는 우리 것이 아니니까.

우리는 작전이 끝나면 늘 그랬던 것처럼 말없이 비행선으로 돌아갔다.


비행선에서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건강 검진을 받았다. 나와 아주 가까운 Q7 우주 출신인 비비가 내 검진을 도와주었다. 비비는 걱정스러운 음색으로 말했다.

“에너지 건에 정통으로 맞은 오른팔 실드가 완파되었어요. 그건 바로 교체했습니다. 하지만 몸에 큰 충격을 받은 흔적이 있어서 정밀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심각한 후유증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얼마나 걸릴까?”

“두 시간가량 걸립니다.”

“그럼 나중에 할게.”

“위험부담이 커요!”

“닥터 박이 잘 부탁한다고 했는걸.”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당신은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니까요.”

비비가 못마땅한 말투로 투덜거렸다. 나는 웃으며 그 말을 정정했다.

“아니야. 나도 거절은 해. 하지만 닥터 박의 부탁은 거절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알겠어요. 그러면 세 시간 후에 바로 검사할 수 있도록 본사에 이야기해둘게요.”

“고마워.”

“어쩔 수 없죠. 무엇보다 본인의 의지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비비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웃었다. 비비는 자유 로봇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불만이 있을 때면 자신을 설득하듯 늘 같은 말을 한다. 비비는 로봇이지만, 누구의 명령도 아닌 자신의 의지로 나를 돕는다. 새삼스럽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돌아올 때 석유 화합물 좀 사다 줄까?”

반색하는 화음이 들렸다. 복잡한 음률 아래로 즐거움이 담겨있었다. 거의 노래하듯 대답하려던 비비는 갑자기 침묵하더니 곧 침울한 음색으로 대답했다.

“아뇨. 지난번에 사주신 것도 출입과에 압수당했어요. 저희 우주에는 안전하지 않대요.”

“미안. 그럴 줄은 몰랐어.”

“괜찮아요. 저도 몰랐으니까요. 그냥 병뚜껑이나 가져다주시면 좋겠어요.”

“알았어. 그럼 세 시간 후에 봐.”

나는 옆으로 맬 수 있는 큰 가방을 챙긴 다음 선실로 이동했다.


선실에선 ‘지구’ 방문 준비를 마친 영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신은 어느새 어두운색의 바지 정장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진주가 달린 지갑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머리핀도 보이지 않았다. 초조한 표정으로 손목시계를 거듭 들여다보는 영신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갈까요?”

영신은 고개를 끄덕이곤 서둘러 새로운 포켓에 올랐다. 영신의 포켓은 닫히자마자 선외로 사출되었다. 포켓이 빠르게 지구로 강하하는 모습을 전망 창을 통해 지켜보았다. 한 사람이 빠듯하게 탈 크기의 포켓은 워낙 작아서 대기권을 지나가는 모습을 지상에서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 아마 운 좋게 포켓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해도 순간적인 반짝거림에 지나지 않는 그 빛을 별똥별이나 인공위성으로 착각할 것이다.

옛 동료 중 하나가 자조적인 농담으로 ‘우리는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별똥별’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 말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우리 회사는 개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다.

나는 잘 떨어지지 않는 발을 들어 새로운 포켓에 올랐다. 그리고 바닥을 알 수 없는 거대한 푸르름을 향해 곧바로 돌진했다.


삼면이 바다로 된 반도국가의 수도는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물이 국토를 포위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경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움직여서 한 오피스텔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계단 통 위아래를 ‘공사중’ 표지판으로 막은 후 삼층에 자리를 잡았다. 영신은 미리 준비한 망원경을 꺼내 창문에 설치하고 창 옆으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밖에서 잘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영신은 길 건너 건물 상가를 관찰했다. 나는 영신의 뒤에 서서 계단으로 오는 사람이 없는지 감시했다.

영신이 사는 나라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부러 자세히 들을 필요도 없었던 게, 영신이 사는 곳은 이곳과 거의 같은 모습이라고 했다. 단지 일부 역사의 디테일만 달랐다.

시민들은 자유를 위해 투쟁했지만, 시대의 모순은 부정 부패한 위정자를 불렀다. 그들은 범죄를 부추기고 질서를 방기했다고 한다. 수많은 오류가 사회 내부에 쌓였다. 그리고 그것이 대규모 사고로 이어져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고 했다. 영신의 외동딸도 그중 하나였다.

영신은 자신의 딸과 똑같이 닮은 – 엄밀하게 말하자면 다른 우주의 같은 사람인 – 젊은 여자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유명 체인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중이었다. 영신은 그녀의 어머니와 거의 같은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영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회사가 허락한 시간 동안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다들 졸릴 오후라 카페에 손님이 꽤 많았다. 나는 영신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창밖에서부터 봄을 알리는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영신은 간간이 눈물을 훔쳤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마치 정지화면처럼 고요하게 망원경만 보던 영신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같이 와줘서 고마워요. 요원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았다면 회사에선 저를 이 별에 보내주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셔서 고마웠어요. 제가 이 별에서 규정을 어기면 저를 죽일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셨을 때 솔직히 처음에는 조금 놀랐지만, 곧 이해했어요. 요원님이 그렇게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시니까 회사에서도 우리를 믿고 함께 지구로 보내주는 거겠죠.”

영신은 다른 우주에 자기 고향별과 거의 같은 ‘지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곳을 방문할 수 있는 권한을 얻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했다. 회사는 그런 영신의 노력을 인정함과 동시에 두려워했다.

비슷한 우주로 요원을 보내면 요원들은 그곳에서 ‘또 다른 자신’을 만날 위험이 생긴다. 그리고 ‘또 다른 자신’이 요원의 삶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면 높은 확률로 본인이 대체하고 싶어 한다. 특히나 영신처럼 힘든 과거를 가진 사람은 그런 함정에 쉽게 빠진다. 하지만, 영신이 가진 잠재력을 포기할 수 없었던 회사는 영신에게 좀 특별한 파트너를 붙여 허락하기로 결정했다.

영신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지만, 만약의 사태가 일어날 때 영신을 제거하는 것이 내 임무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카페 아르바이트, 아마 학비 때문에 하는 거겠죠? 영신 씨가 원하신다면 정보과를 통해 금전적 지원을 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렇겠죠. 이곳에도 지사는 있으니까 그 정도는 쉽겠죠.”

영신은 애써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예요. 저 아이는 제 딸이 아니니까요. 저 아이의 미래는 제 것이 아니에요.”

죽은 딸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같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같은 표정으로 웃는다. 그리고 계속 살아서 나이를 먹는다. 그것을 보면서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마음이 어떨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나는 어쩐지 머쓱해져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영신이 작은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딸이 죽고 나서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연구고 뭐고 다 버려두고 버선발로 뛰어다녔죠. 제발 우리 딸만 살려주시면 뭐든 하겠다고 빌어도 봤어요.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제 안에서 넘치는 화를 견디지 못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영신은 조용히 울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다 죽이자. 아무도 내 딸을 돌려주지 못한다면 그 애를 그렇게 만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자고요. 저는 개발 중이던 차세대 동력원 코어를 폭탄으로 바꾸어서 이불에 싼 다음에 품에 안고 길로 나왔어요. 무고한 사람들이 사방에 넘쳐났지만, 그걸 볼 정신이 없었죠.”

맑은 영신의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내용이 너무 무거워 대답할 말을 찾기 힘들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영신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폭탄이 무거워서 팔이 빠질 거 같았어요. 양팔로 부둥켜안은 채 택시를 잡고 있자니 어린 딸을 데리고 외출하던 그때가 떠오르더라고요. 애는 울어서 사람들은 쳐다보지, 택시는 그냥 지나가지.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영신은 울음이 섞인 웃음을 토해냈다. 꾹 눌려있던 회한이 웃음을 따라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영신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조용조용했다.

“그때 회사에서 나온 사람과 처음 만났어요. 제발 삼분만 이야기하자고 사정하더라고요. 어차피 택시도 안 잡히는데 그러자고 했죠. 그리고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이야기해줬어요. 그대로 간다면 나는 수백, 수천의 사람을 죽인 악당이 되어 아주 오래오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거라고, 그래서 제가 그랬죠. 괜찮다고요.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날 욕해도 난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나는 더 잃을 게 없으니까.”

영신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영신의 뒤로 다가가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영신은 자기 안에 고여 있는 설움을 한숨처럼 길게 뱉어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랬어요. ‘영신 씨. 당신 이름 옆에 당신 딸 이름이 나란히 놓일 거에요. 사람들이 다시없는 비극의 이름으로 당신 딸 이름을 붙일 거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어요. 나는 그래도 돼요. 나는 그래도 되는데, 내 딸은 아니잖아요? 그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한숨에 자신을 조금씩 뱉어서인지 내 눈앞에 있는 영신은 텅 비어 보였다. 나비가 날아간 후에 남은 번데기 껍질처럼 얄팍하게 남은 영신이 봄바람에 날려갈까 봐 문득 두려웠다.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영신이 내 걱정에 대답하듯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폭탄을 안은 채로 한참 울다가 연구실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한 일 년은 밥 먹는 것도 잊은 채로 일에 매진했죠. 그렇게 만든 게 차세대 동력원인 코어-H에요.”

영신의 목소리에 조금씩 힘이 돌아왔다. 아지랑이처럼 옅던 영신의 뒷모습이 점점 그림자처럼 확실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나는 그걸 어떻게든 만들고 싶었어요. 센트럼이 보기 원하지 않던 그것을 내 손으로 꼭 완성하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이를 악물고 노력했어요. 나는 너희들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 내 기술로는 아무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죠.”

센트럼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평행 우주를 입맛대로 개조하고 착취한다. 분노한 그녀가 수백, 수천의 사람을 학살하는 것이 센트럼이 원하는 미래였다. 그들은 통일되고 질서 있는 강력한 국가를 만들겠다고 말하면서 사회를 불안하고 가난하게 만든다. 영신의 목소리가 한결 차분해졌다.

“저는 앞으로도 센트럼이 다른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려는 걸 전력으로 막을 생각이에요. 그러니 저도 누군가의 미래에 손을 댈 수는 없죠. 여기서 보는 건, 그냥 제 욕심이에요. 미련이기도 하고....”

영신은 조용히 말을 마쳤다. 영신의 뒷모습이 다시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내가 전부터 알던 박영신의 모습이다.

영신은 계속해서 망원경을 들여다보았다. 카페는 정신없이 바쁘고 영신의 딸을 똑같이 닮은 여자는 허둥지둥 서두르다 음료를 떨어뜨렸다. 영신의 손이 그것을 잡아 주려는 듯 허공에서 움찔했다. 그 손을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나는 혼자 살아요.”

영신이 나를 돌아보길래 다시 앞을 보라고 손짓했다. 영신은 망원경으로 자신의 딸을 닮은 여자를 바라보며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정확히는 내가 사는 행성에 지적인 존재는 나뿐이에요.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오래전에 더는 생물이 살 수 없는 곳으로 판정 나서 거주민들이 모두 우주로 이주했어요. 나를 키워주신 분은 행성에 마지막 남은 인류였죠. 그분은 죽을 때까지 자기 고향을 버릴 수 없는 그런 분이셨어요.”

“혼자라니 외롭지 않나요?”

영신은 반사적으로 그렇게 묻고는 미안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분은 돌아가시면서 내게 계속해서 미안하단 말을 반복했어요. 죽어가는 사람이 죽음을 모르는 내게 무엇이 그리 미안해서 계속 사과하는 건지 짐작도 할 수 없었죠. 그리고 아득하게 긴 시간이 흘렀어요. 매일 똑같았죠. 특징 있는 기억만 백업하는데 백업할 내용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 문득 어느 날, 회로를 꺼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알았죠. 그분이 이걸 미안해하신 거구나. 마지막까지 혼자 버티지 못해서 그 짐을 내게 떠넘기고 감을 미안해하셨구나.”

창 너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자동차 매연 냄새 아래로 희미하게 꽃향기가 났다. 텁텁한 먼지 냄새와 화한 풀냄새가 섞여 있었다. 이곳은 먼지 냄새조차 내가 사는 곳과 다르다.

“나는 매일 혹시라도 올지 모르는 방문자에게 이 행성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말해주기 위해 평생을 기다렸어요. 그러다 어느 날 진짜로 비행선이 나타났을 때 눈앞에 보이는 게 환상이 아니며 현실이 맞는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35가지 스캔을 했지 뭐예요. 손님들을 12분 48초나 세워놓고 말이에요. 믿어지세요?”

내가 웃자 영신도 따라 웃었다. 회사는 그렇게 뜬금없이 내가 사는 행성으로 찾아왔다. 회사는 내 의견을 물었지만, 애초에 내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회사 일을 하며 많은 걸 알게 되었어요. 제가 사는 행성은 운이 나쁜 곳이었죠. 작은 불친절이 원한을 만들고 욕심이 큰 재앙을 불렀어요.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테러하고 대기업은 사소한 이득을 위해 환경을 심각하게 오염시켰죠. 그리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부패한 정치가를 거물로 만들었어요. 행성은 점점 더 나쁘게 변해서 결국, 모래와 돌만 남았어요.”

한 행성의 멸망은 벼락처럼 순식간에 닥치지 않는다. 행성은 천천히 죽어가며 아주 많은 경고를 보여줬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살던 곳 사람들은 아무도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마침내 죽어버린 행성이 모든 생명체를 거부하게 될 때까지 그들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어요. 그때 영신씨를 처음 만났죠. 처음에는 순수하게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라는 사명감이 좋았어요. 하지만 곧 영신씨가 좋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되고 즐거웠어요. 그리고 이곳 ‘지구’에 같이 왔던 때를 기억하세요?”

“삼 년 전이었죠. 러시아의 겨울이 참 지독했어요.”

“손가락 관절이 얼어붙고, 말이죠.”

“그때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그렇다고 손을 모닥불에 그냥 집어넣으시다니.”

영신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기꺼이 함께 웃었다.

“평범한 사람과 달라서 장갑은 필요 없다고 말했던 걸 많이 후회했어요.”

우리는 공기 중에 우러난 추억을 천천히 음미했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렀다. 나는 망막 스크린으로 남은 시간을 확인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때 이곳에 와서 보고 알았죠. 운이 좋은 곳과 운이 나쁜 곳은 의외로 큰 차이가 없다는 걸요. 한 사람 한 사람이 평생 한 가지 좋은 일을 한다면, 수억 개의 행운이 쌓여서 그곳은 최고의 행성이 되는 거예요. 사실은 수억 개까지도 필요하지 않아요. 보통은 수만 개나 수천 개의 좋은 우연이 그곳을 아름다운 곳으로 만드는 거예요.”

“좋은 이야기네요.”

“그렇죠? 그런데 우리 행성에 남은 지적인 존재는 저 하나뿐이에요.”

“...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영신은 나를 위로하고 싶은 듯 돌아보았다. 나는 영신을 향해 웃었다.

“대신 저는 수천 년을 살 수 있어요. 하루에 하나씩 천년을 반복하면 삼십 육만 오천개가 되요. 천명의 사람이 일 년에 걸쳐 할 일이라면 저는 천 년 동안 하면 되는 거였어요. 그걸 깨달은 순간부터 매일 노력하기로 했죠.”

영신은 애써 웃다가 곧 얼굴을 가리고 조금 울었다. 영신의 슬픔이 체온으로, 호흡으로, 냄새로 모든 곳에서 느껴졌다. 나는 일부러 환하게 웃었다.

“우리 별에 거미가 돌아왔어요. 육식 곤충이 돌아왔다는 뜻은 그 곤충의 먹이가 되는 곤충이 많다는 뜻이에요. 제가 보지 못한 곳에서 이미 조금씩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이제 괜찮아요. 회로를 꺼버릴 일도 없을 거예요.”

영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가를 닦아내고 나를 보며 웃었다. 영신은 자기 우주에서 제일 부자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코어-H의 특허를 어떤 방식으로건 사람을 해치는 곳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무료로 공개했다. 영신의 선행을 시작으로 좋은 우연이 연쇄 반응처럼 계속 일어나 행성을 뒤덮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신의 우주는 결코 센트럼의 의도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약속했던 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가볍게 몸을 풀며 말했다.

“가서 커피 좀 사 올게요.”

“네.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나는 영신의 딸을 닮은 여자가 일하는 카페로 향했다. 대형 매장의 문을 열자 카페에 틀어둔 노래 소리를 지울 만큼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계산대 앞에 서 있던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야! 그럼 이거나 환불해 줘.”

“죄송하지만, 이 매장 영수증이 아니라서 여기서 환불은 안 되세요.”

“뭐? 내가 여기서 샀는데 왜 안 되는데? 여기 봐. 여기 이름 있잖아.”

“이 영수증 내용은 ㅁㅁ에서 사셨고요, 고객님 여기는 ㅂㅂ입니다.”

“뭐가 달라? 아무리 봐도 똑같구먼. 매니저 어디 있어? 사장 불러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무뢰배다. 상대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최대한 이곳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는 입장이라 먼저 나서기가 힘들었다.

나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계산대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무례한 손님은 직원에게 삿대질했다. 나는 상대가 계산대 너머로 폭력을 행사하려고 들면 손을 낚아챌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했다. 손님들도 모두 긴장했는지 가게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무례한 손님은 영수증을 손에 쥔 채로 주먹을 휘둘렀다.

“내 말이 말같이 안 들려?!”

계산대 너머로 날리는 주먹을 낚아챘다. 손님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내 손에서 자기 주먹을 빼내려고 용을 썼지만, 내겐 미약한 저항에 불과했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숨을 씩씩 몰아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대뜸 반대 손을 휘둘러 내 뺨을 치려고 했다. 나는 빈손을 들어 공격을 흘리고 이어지는 동작으로 상대의 얼굴을 향해 반사적으로 주먹을 겨눴다. 그때 “딸랑-.” 하며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상대의 코 바로 앞에서 주먹을 멈춘 채 뒤를 돌아보았다. 정복을 입은 경찰 두 명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잡고 있던 손을 재빨리 뿌리치고 나보다 키가 큰 남자 손님 뒤로 몸을 숨기듯 피했다. 경찰은 난동을 피우던 손님 쪽으로 똑바로 다가가며 말했다.

“업장에서 폭력행위 신고가 들어왔으니 저희랑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폭력? 누가 폭력을 휘둘렀다고 그래? 나는 환불 받으러 온 것뿐이야. 다치기는 내가 더 다쳤다고. 내가 피해자라고!”

무뢰배 손님은 벌겋게 붓기 시작한 손목을 보여주며 고함을 질렀지만, 경찰은 흔들림 없는 태도로 또렷하게 말했다.

“억울한지 아닌지는 경찰서에 가서 진술하시면 되고요. 여기서 난동 부리는 거 보고 신고하신 분들이 많아요. 그러니까 경찰서로 가시죠.”

“신고? 어떤 자식이 신고했어? 응?”

무뢰배 손님은 눈을 크게 뜬 채 주변을 돌아보았다. 가게에 있던 사람들은 지지않고 난동을 피운 손님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선생님. 협박하시면 처벌이 더 무거워집니다!”

경찰이 무뢰배 손님의 팔을 잡아당기자 손님은 순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주변에서 느껴지는 단호한 냉대에 기세가 눌린 듯 입속으로 중얼중얼 욕을 했다. 경찰은 그 손님을 반쯤 어르고 반쯤은 협박해서 가게 밖으로 데려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서 얼굴이 붉게 물든 직원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숨을 돌렸다. 주문을 위해 줄을 길게 서 있던 손님들은 직원들이 준비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몇몇은 가볍게 농담을 던져 위로하기도 했다. 그 모든 과정이 별일 아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불쾌한 해프닝 위로 일상이 차분하게 덮였다.

나는 어쩐지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져서 한참 서서 지켜보았다. 이곳은 살아있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다들 아름다웠다. 붉게 지는 해가 가게 쇼 윈도우를 통해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다. 머릿속에서 5분 남았다는 알림이 울렸다. 어쩔 수 없이 원두 10kg을 사서 영신이 기다리는 오피스텔 건물로 돌아갔다.

우리는 왔던 것보다 더 조용히 비행선으로 돌아갔다.


나는 다시 우리 별로 돌아왔다. 혼자뿐인 별에 ‘우리’라는 명칭을 붙이자니 이상하지만, 어쨌든 호칭은 그렇게 부르는 게 맞는다고 들었다.

비행선이 떠나자 금빛의 모래와 회백색의 바위뿐인 행성 위에 다시 혼자 남았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발밑에서 모래가 바스락거리나 싶더니 잠깐 사이에 운동화 바닥이 녹아 찐득거렸다. 집은 나를 알아보고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어둡게 그늘져 서늘한 집 안으로 들어가며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였어요.”

현관문을 닫자 집이 윙윙 소리를 내며 강제 환기를 시작했다. 나는 ‘지구’에서 사 온 짐을 풀어 정리했다. 커피 원두 10kg은 냉동실에 넣고 종이로 만든 노트는 책상으로 가져왔다. 나는 책상에 앉아 두꺼운 펜으로 표지에 제목을 써넣었다.

[모두의 일기- 다시 돌아온 지구 생물의 역사]

나는 무한 경비대다. 그리고 내 이름은 ‘모두’이다. 하지만 나는 하나다. 내가 다시 많은 사람 중 하나가 되는 날까지 나는 ‘모두’가 해야 할 일을 하며 이 노트를 채워 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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