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여왕이 다스리고 왕족과 귀족이 활보하던 한 가상의 국가에서.......

까마귀가 딱 잘라 말했다.

우리 세계는 죽어가고 있어.

하지만 그럴만도 했다. 세상은 죽어가고 있었다. 에녹도 알고 있었다. 당장에 온 세계를 뒤흔든 끔찍한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그런 전쟁을 겪은 사람이라면 종말론에 심취하여 미쳐버릴 수도 있는 법이다. 까마귀는 에녹의 눈빛을 보았다. 에녹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까마귀는 급박한 표정이 되었다.

전쟁 이야기가 아니야, 해류는 약해지고, 자연재해는 늘어나고 있어.

까마귀는 두툼한 양장 공책을 하나 꺼냈다. 모퉁이마다 금장으로 장식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왕가의 문양이 크게 찍혀있었다.

지금은 1920년, 전쟁은 3년 전이었지. 해류에 이상징후가 포착된 것은 10년 전이었다. 해양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 왕실 학회는 바다와 날씨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그 때부터 해류를 측정해 관리했다. 그런데 포착된건…….

에녹은 해군이었다. 그 정도의 흐름은 읽을 수 있었다. 해류는 주기적으로 몸을 뒤채인다. 그러나 이건, 이건 그런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에녹의 표정이 점차 심각해졌다. 이것은 과학이다. 까마귀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해류는 멈춰가고 있었다. 에녹은 기상학자가 아니라 해류가 멈췄을 때 기후가 어떻게 될지는 자세히 몰랐지만, 엄청난 재앙이 닥쳐올 것이라는 건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이로 인해 자연재해의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 이번의 세계대전도 복잡한 정세가 뒤엉켜있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모든 것 뒤에는 식량난이 있다고 나는 봐.

까마귀. 아니……. 왕세자 저하라 불러드려야하나.

까마귀라 불러. 지금의 나는 실종된 상태이니, 그 칭호를 감히 사용할 수 없네.

그렇다면 경칭도 생략하도록 하지. 까마귀, 분명 저하께서만 알고 계실 타겟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했지.

그래. 에녹, 너도 알다시피 이건 중요한 문제다. 만일 나의 말에 한 치의 거짓이라도 보인다면 나를 죽여도 좋다.

에녹은 말을 않고 까마귀를 진중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까마귀는 긴장된다는 듯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매섭게 몸을 움직여 에녹의 의자에 둘러져있던 외투를 잡아챘다. 에녹은 흠짓 놀라 고개를 움직였다. 사관생도의 교복 외투였다. 그 곳에는 푸른색 실로 페이 올슨이라는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올슨도 네 타겟이었지.

그렇다. 저하의 명으로 올슨을 찾았지, 하지만 네가 정말로 왕세자 저하라면 그 다음은 알고 있지 않나?

까마귀는 옷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에녹은 잠시 이성을 잃었다. 크로우 박사가 축 늘어질 때 까지 얼굴을 후려갈겼다. 박사의 코가 부러지고, 이빨이 깨져 튀어오르고, 눈알이 짓뭉개졌다. 페이 올슨은 거만하게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에녹이 숨을 몰아쉬며 크로우 박사의 멱살을 놓았다. 쿵. 박사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다 했어?

페이 올슨이 물었다. 에녹은 자신이 한 짓을 보고 어쩔 줄 몰라 덜덜 떨고 있었다. 페이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에녹의 얼굴에 튄 피를 닦아주었다.

얼굴까진 닦겠는데, 손은 안되겠다. 주머니에 숨기도록 해.

에녹은 페이 올슨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정신병원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주머니는 없었다. 페이 올슨은 다 안다는 듯 자상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기가 입고 있던 생도복 외투를 벗어 에녹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여자인데도 에녹과 키가 비슷했다……. 페이 올슨이 더 컸다. 급하게 나가는 에녹의 어깨를 페이가 잽싸게 잡아챘다.

세상 돌아가는 꼴은 알고 가.

에녹은 얼결에 페이 올슨이 내민 신문을 받았다. 왕세자 저하께서 사라지시다. 헤드라인은 그렇게 적혀있었다. 에녹은 저하를 한번 뵌 적 있었다. 큰 영광이었다. 벅차오르고 떨리는 마음이라 자세한 부분은 흐릿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그래도, 왕가 초상화는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이 국가를 다스리는 전하, 이제는 실종된 왕세자 저하, 차남이신 대군마님, 그리고 막내이신 공주마마까지. 그래서 에녹은 자신의 집 앞을 얼쩡거리던 까마귀의 뺨을 쳤다.

군인이라 그런가,

까마귀가 찢어진 입술에 엄지 손가락을 댔다.

손이 맵긴 맵군. 하지만 나도 군인으로 복무하였다, 왕실의 규칙대로 말이야.

그래서 맞서 때릴건가?

아니. 나의 백성을 해할 수는 없다.

아직도 왕세자를 사칭하는건가, 멍청한 놈. 왕가의 초상화를 들여다는 보았나?

까마귀와 왕세자 저하 간의 공통점은 샛노란 눈, 그것 하나 뿐이었다. 노란 눈은 왕세자 저하의 특징이었다. 어릴 때 무슨 병에 걸려 눈에 철분이 쌓이는 바람에 노란 테가 생기셨다. 왕실에서 노란 눈은 왕세자 저하 하나 뿐이다. 지금 그것 하나만 믿고 자신이 저하라고 주장하는 애송이가 바로 앞에 있었다.

네 이름이 뭐냐?

에녹의 질문에 까마귀는 큰 소리로 웃었다.

멍청한 것은 너로다, 에녹! 왕실의 구성원들은 신성한 핏줄이기에 태어나서 이름을 받으면 평생 그것을 숨긴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모르는게 왕실의 이름이다. 그걸 네가 제일 잘 알텐데 나에게 그걸 묻다니.

에녹은 반박하지 못했다. 전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까마귀는 그의 침묵을 파고들었다.

에녹, 너에게 타겟을 전달해야했다.

알겠다.

어쩌면 실종되신 저하께서, 아니면 다른 왕가의 일원분께서 까마귀라는 약간 시건방진 남자애를 통해 명을 내리시려는지도 몰랐다. 에녹은 집 문을 열었다. 응접실로 가 말없이 의자를 뺐다. 까마귀는 자연스럽게 에녹이 빼준 의자 위에 앉았다. 에녹도 자리에 앉자, 까마귀가 말했다.

우리의 세계는 죽어가고 있어.

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에녹은 까마귀의 말을 경청했다. 어쩌면 그가 왕세자 저하일지도 모른다는, 어쩌면, 어쩌면, 아주 불경한 생각을 했다. 해류가 멈춰간다. 폭풍이 아무때나 불어닥치고 물고기들은 방향을 잃어 해안에 떼죽음 당한 채 밀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왜 페이 올슨의 옷을 갖고 있는 것이지?

까마귀가 물었다.

페이 올슨이 나를,

에녹은 잠시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정신병원에서 일이 잘못 되었다. 페이 올슨이 날 정신병원에서 나갈 수 있게 해줬고.

그래?

까마귀. 올슨이 내 타겟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기억을 되찾았나?

에녹은 고개를 저었다.

질문을 하지. 해류의 흐름과 올슨……. 그러니까 타겟이 무슨 관계기에?

답은 한동안 없었다. 에녹의 마음에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것이 완연히 자라 까마귀의 목을 조르기 전에, 까마귀는 입을 열었다.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올슨이 해류의 흐름을 당분간 안정적으로 만들 열쇠를 쥐고 있어.

페이 올슨의 빙글거리는 미소가 갑자기 떠올랐다. 불쾌한 미소였다.

그가 과학자인가?

타겟. 왕세자가 그의 숨겨진 요원들에게 하달하던 암살 대상이다. 적국의 스파이, 왕실에 반기를 든 자, 테러범 등 이 국가를 위협하는 이들이 보통 타겟이 되었다. 에녹은 그 일이 떳떳하지는 않지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녹도 왕세자의 요원 중 하나였다.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자긍심에 흠을 내기 싫었다. 그러나. 보지 않으려해도 당연히 알게 되었다. 타겟들 간에는 어떠한 관계도 없었다.

나는 열 명의 타겟을 죽였다, 까마귀.

에녹이 자신이 껄끄럽게 입 안에서 갖고 있던 의구심을 꺼내놓았다.

타겟은……. 세상의 종말을 눈치 챈 자들인가.

까마귀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에녹에게서 등을 돌렸다.

네게 정직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등을 돌린 것을 용서해줘.

침통한 목소리가 들렸다.

맞다. 네 추측이 맞아. 그들은 모두 세상의 종말을 눈치 챈 자들…….

처음에는 정보 통제를 위해 여왕 폐하께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해류의 움직임이 좀 더 강해졌다. 그러면 안되는 것을 알았지만, 왕실은 세상의 종속을 위해 몸부림 쳐야만 했다. 타겟들을 좀 더 죽여보았다. 해류는 확실히 돌아오고 있었다. 둘은 상관관계가 있었다. 사형수들에게 세상이 죽어간다는 얘기를 들려주고 사형을 집행해보았다. 그런 경우는 소용이 없었다. 오로지 스스로 알아낸 자들. 스스로 무언가에 도달한 자들.

단순히 멸망을 깨닫는게 아니란 말이군.

어마마마께선 그렇게 말씀하셨다. “무언가에 도달한 자” 라고.

그럼 올슨을 죽인다면, 이 세상이 조금 더 연장되겠군.

까마귀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다시 에녹에게 눈을 보였다. 그의 샛노란 눈을.

타겟들을 모두 모아서 무언가를 한다면, 세상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을 고친다고?

무언가를 알고 있고, 어디에 도달했다면, 세상의 진리와 눈을 마주친 자들이다. 그들을 죽여 목숨줄을 연장하는게 아니라, 근본적인 것을 고치는거야.

까마귀는 의지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에녹은 그가 왕세자의 눈에 비친 의지를 읽었을 때를 기억했다. 평화는 올 것이다. 그 때 까지만 힘써다오.

너를 직접 보고 말해야했다. 아마 나의 일탈을 어마마마께선 좋아하지 않으시겠지. 그래서 실종 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요원들에게도 말해보았나?

현재 내 밑에 남은 요원은 너 뿐이다, 에녹.

에녹이 뭔가 물으려 했지만 까마귀는 그를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올슨이 널 정신병원에서 탈출하도록 도와준 것은 필경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에녹은 순간, 페이 올슨이 말한 편지들을 기억해냈다. 그는……. 피드, 라고 했던가. 그러나 에녹은 그 사실을 까마귀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를 충분히 믿을 수 있게 되면 드러내기로 했다. 비밀은 요원들에게 미덕이다.

그렇다면 날 도와라.

아직 기억이 안 돌아왔댔지. 올슨에 대해 차차 알려주도록 하마. 지금은 그를 먼저 찾는 것이 우선이다.

까마귀가 페이 올슨의 생도복을 들어올렸다. 올슨은 무엇을 보았을까. 그게 뭐가 되었든, 페이 올슨은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가 기꺼이 협력을 해 진리를 나눠준다면 아주 좋을 것이고, 거절한다면, 그를 죽여서 세상의 존속에 힘을 보태야한다. 이 세상은 누덕누덕 기워졌고, 기워진 곳에서부터 물이 새고 있다. 에녹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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