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의 거주권
시베라이트 평전 - 인간의 나이로, 고등학교 1학년 시기에.......
엘릭스니 거주구역에 불이 났다. 시베가 들락거리던 건물도, 싸구려 네온사인도, 리아흐스가 마중나오던 길목도, 하티가 수줍게 보여준 판잣집도, 모두 불에 휩싸였다. 시베라이트는 얼굴이 잿빛으로 질렸다.
몰락자 거주구역에 화재가 났습니다. 현재 경찰과 소방관들은 화재를 진압하고 치안을 유지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각성자 주민 여러분은 안전하게 집에서 머물러주시기 바랍니다.
지방 뉴스의 아나운서가 마무리를 지었다.
하티.
시베라이트가 중얼거렸다. 리아흐스. 그 이름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리아흐스는 엘릭스니의 권리를 주장했단 이유로 범죄자가 되었다고 했다. 세상은 불합리하다는 것을, 시베라이트는 이제야 알았다. 시베는 급하게 가디건을 챙겨입고, 집 안에 비치되어있는 구급함을 들었다. 엘릭스니에게도 이게 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없는 것 보다야 나을 것 같았다.
시베!
급하게 집을 나가려는 시베라이트를 누군가가 뒤에서 꽉 껴안았다.
어머니, 이거 놔요! 지금…….
시베, 안된다.
다른 어머니도 시베를 안아주었다. 시베는 어머니들의 품에 갇혀 어쩔 줄 모르고 서있었다. 포근하고 익숙한 냄새는 시베라이트를 족쇄처럼 옭아메고 있었다.
저기는 지금 무법천지야.
아니요. 엘릭스니들은 무법자들이 아니에요.
우리가 널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너를 저런 데에 보내서 험한 꼴 당하게 할 순 없다!
시베라이트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걸 무시하고 싶었다. 시베의 머릿 속에 찬찬히 떠올랐다. 엘릭스니 투쟁가들이 거주권을 위해 시위할 때, 각성자 경찰들 뒤로 “조직위” 라는 각성자 단체들이 맞시위를 하며 그들을 조롱하던 것을. 리아흐스는 하티와 시베라이트가 시위장에 나가는 것을 금지했다.
우리도 싸울 수 있어, 리아흐스!
하티가 씩씩거렸다.
맞아. 너희, 싸울 수 있다.
리아흐스는 시베를 위해 스피치 어로 일부러 말했다.
같이 싸울 수 있다. 하지만 자손을 싸움터로 내보내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이 긍지다.
하지만, 하지만……. 하티는 결국 반론을 그만 두었다. 리아흐스의 긍지. 대신에 리아흐스는 하티와 시베에게 자료를 모아줄 것을 부탁했다. 리프의 분리정책으로 인해 몰락자, 즉 엘릭스니들은 각성자의 공공기관을 사용하지 못한다. 몰락자는 몰락자의 공공기관을, 각성자는 각성자의 공공기관을 사용한다.
우리, 각성자 상대로 소송한다. 그러려면 각성자들의 자료가 필요하다.
다음은 하티의 번역이었다. 시베라이트가 찾은 각성자들의 침탈에 대한 자료들이 더 자세하고, 더 많이 필요했다. 이 곳이 원래 몰락자 거주구역이었음과, 각성자들이 무단으로 개발을 시작한 것, 그 과정에 폭력이 있었던 것, 몰락자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폭력에 밀려 현재의 거주구역으로 쫓겨나 판자촌을 이루게 된 것…….
나의 기억은 그러하다. 이 기억을 증명하자.
리아흐스가 다시 스피치 어로 말했다.
맡겨줘요, 리아흐스.
시베라이트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시베는 학교에 수요일마다 병원에 가야한단 핑계를 대고 수업을 빠졌다. 하필 수요일인 이유는, 하티가 새로 취직한 패스트푸드점의 휴일이 수요일이었기 때문이다. 하티는 이번에도 나이를 속였다.
내가 엘릭스니였으면 시위에도 나가게 해줬을거야.
하티가 투덜거렸다.
우리를 보호하려 하는거야, 하티.
시베는 빠르게 자료들을 훑어보았다. 각성자 입장에서 서술이 되어있어서 각성자들의 개발은 곱고 고상한 어휘로 쓰여져있었다. 하티는 느리지만 꼼꼼하게 글을 읽었다. 어렸을 때와 똑같았다.
그들과 같이 살면서, 내가 각성자인게 부끄럽다. 수술같은걸로 엘릭스니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런 식으로 각성자의 죄를 피하려 하면 안돼. 그걸 안고 가야지.
신문 기사야. “몰락자” 무리가 공격을 당했대. 사상자가 나왔지만, 공격한 사람들은 거의 잡히지 않거나 잡혔어도 유야무야 풀려났나봐.
각성자들이 용역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법이나 경찰 쪽에 몸 담은 사람들이 뒤를 봐준거지.
너희 어머니들께 물어봐도 아는 것은 없겠지?
글쎄. 어머니들이 그 “조직위” 를 조직했다면 몰라.
시베라이트가 키득거렸다. 하티는 시베가 농담한 것을 알고 멋쩍게 웃었다. 남의 부모님을 갖고 한 농담에 쉽게 웃을 수 있으면 그것도 긍지가 없는 것일까.
조직위 놈들, 대체 정체가 뭘까?
돈독 오른 각성자들이겠지. 요즘에 우리 어머니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몰락자들이 나가야 우리가 더 큰 집에서 살 수 있대. 징그럽고 끔찍해!
그렇게 석 달 정도 시베라이트와 하티는 정보를 모았다. 청소년들이 모을 수 있는 정보가 얼마나 고급질지, 얼마나 양적으로 풍부할지는 모르겠지만, 리아흐스와 함께하는 투쟁가들은 시베와 하티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고소장을 접수하러 갈 때는 나도 데려가줘, 리아흐스.
하티가 진지하게 말했다.
고려해보겠다.
리아흐스가 하티의 손을 아래 팔로 잡았다. 소장 접수 당일, 시베는 안타깝게 그들을 따라가지 못했다. 선생님이 병원에 가는게 진짜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시베라이트에게 겁을 주었다. 선생님께 밉보여 아카데미에 못 들어가는 것 정도는 무섭지 않았다. 두려운 것은 어머니들이 자신이 그 동안 뭘 했는지 알아채는 것이었다.
그래, 널 보호하기 위해서…….
어머니가 속삭였다.
저런 우범지역이 옆에 있으니, 네가 물이 든거야. 널 탓하는게 아니야, 우리 시베.
어머니들과 뜻을 같이하는 착한 어머니들은 우범지역에 들락거리는 귀한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위를 만들었다. 물론, 그 뒤에는 고급 주택과 멋진 풍광, 그리고 돈이 좀 얽혀있기는 했다.
어머니, 어머니들……. 정말, 정말 엄마들이 조직위 위원이었어요?
시베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럼, 저 불 지른건, 엄마들이 고용한 깡패인거고요?
그것까진 알 것 없단다. 하지만 우리들은 합법적인 행동만 했어.
거짓말!
시베라이트가 울부짖었다. 거짓말, 거짓말, 어머니들의 몸에서 나는 친숙한 향수 냄새에 질식할 것 같았다. 우리 어머니들, 착한 우리 어머니들, 돈독 오른 우리 어머니들. 하지만 울고 있으면, 뭐가 달라지는가? 이렇게 어머니들의 품 속에서 분노에, 배신감에, 절망감에 가득 차 잉잉 울기만 하면 뭐가 달라지는가? 시베는 소리쳤다.
엘릭스니의 거주권을 인정하라,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불 난 동네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서 함께 부둥켜 울부짖기라도 하는 것, 그것이 긍지다. 시베라이트는 어머니들을 거칠게 밀쳤다. 품 안에서 몸부림을 쳤다. 어깨를 이빨로 물어뜯었다. 그리고 친숙함의 감옥에서 뛰쳐나와 맨몸으로 울며, 울며 달려갔다. 그렇게 거친 숨을 내뱉으며 달렸다. 저쪽에서 하티가 달려오고 있었다.
하티!
시베는 비명을 지르듯 하티를 불렀다.
법원에 간 이들도 다 연행됐어,
하티가 토해내듯 말했다.
리아흐스는 원래 지명수배가 걸려있었어, 알다시피, 그냥 데려갔어 경찰 새끼들이, 다른 엘릭스니와 함께. 나는, 나는 각성자니까, 훈방조치 됐는데.
그럼 거주권 투쟁, 가들은 다 잡혀간거야?
굵직한, 인사들은…….
가자. 엘릭스니 거주구역으로 가야해.
시베.
하티가 통신기를 하나 꺼내 시베의 손에 쥐어주었다.
불법 개조해서 추적이 안 돼. 나에게 계획이 있으니, 날 믿어줘.
싫어. 피해를 입은 엘릭스니들을 구조해서 어디로 가버리자. 너희와 함께할래, 우리 어머니들이 범인이야, 진짜 돈독에 미친 사람들이었어.
시베. 시베라이트. 넌 내가 갖지 않은 것을 갖고 있어. 그걸 최대한 활용해줘.
하티는 자신의 귀에 걸려있던 귀걸이를 빼 시베에게 돌려주었다. 시베는 고개를 저었지만, 하티는 완고하게 굴었다. 시베가 귀걸이를 한쪽 귀에 차고서야 하티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주인을 다시 만났네. 네가 하니까 더 낫다.
하지만, 이거 우정 귀걸이잖아.
아카데미에 입학해. 그리고 논문을 쓰고, 뛰어난 학자가 되어서 엘릭스니 문제에 대해 곳곳에 알려줘.
내가 갖고 있는 것.
그래. 우리들 중에선 너만이 할 수 있는거야.
시베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티가 뒤돌았다. 그리고 뛰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시베라이트는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시베도 뒤돌았다.
멍청아. 맞아 죽지만 마.
시베는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중얼거렸다. 엘릭스니 거주권 침탈에 대한 자료를 찾으면서, 하티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난 우리 어머니들이 자랑스러워.
불의에 저항하다 잡혀가셨을거라곤 생각했어.
맞아. 언제 얘기할 수 있으면 얘기해줄게. 그런데, 시베.
하티의 뒷모습이 유독 우울해보였다.
가끔 나를 위한 일은, 엄마들이 나와 같이 사는게 아니었을까,
시베라이트는 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울고 있었고, 다른 어머니는 그 분을 달래주고 있었다. 시베라이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어머니들은 기쁨으로 환히 빛났다.
엄마들이 나랑 같이 밥먹고, 웃고, 울고, 가끔은 싸우기도 하면서…….
내가 가진 것. 네가 갖지 못한 것. 시베라이트는 어머니들의 눈길을 피했다. 그리고 차갑게 그들을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갔다. 넓은 방. 푹신한 침대. 쾌적한 공기. 수많은 책. 그리고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수백, 수천의 거주민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내쫓고 도망가는 이들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려쳐 깨뜨린다. 내가 가진 것이 좋은 것인지 모르겠어. 시베라이트는 이빨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어머니들을 마음 속에서 지웠다. 하티와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은 반 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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