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에서 추방되다
시베라이트 평전 - 인간의 나이로, 대학교 2학년 즈음.......
리아흐스와 시베는 아주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없으면, 이만 끊겠다.
할 말이 없다? 아니다. 아주 많았다. 시베는 묻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그걸 물으면 어떻게 될지 시베라이트는 가늠할 수 없었다. 통신은 일방적으로 끊겼고, 시베라이트는 하티가 불법개조한 통신기를 보며 침대에 엎어졌다. 왜? 왜 나에게? 서클에서 한 학생이 신입생을 성추행했다. 그 사건이 드러나자마자 범죄자는 쫓겨났고, 신입생의 고소 준비를 위해 소정의 후원금을 모금했다. 서클의 회장, 뮬 루이터 다운 일처리였다. 그리고 그 일처리 방식은 시베와 그의 친구들에게로 돌아갔다.
야……. 이게 네 집이라고?
하티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어른이 되고 정식으로 공장에 취직했다. 도제식으로 엘릭스니 선임에게 기술을 배우고 있다는데 팔 둘 갖고서도 엘릭스니들의 생산량을 따라잡는 뛰어난 수습공이라고 하티는 한참 자기 자랑을 했다.
초청에 응해줘서 고마워.
시베는 하티의 말을 끊었다.
뭘. 네가 와달라면서 잘 곳에, 교통편에, 다 제공해줬잖아?
지금 시간이 애매하긴 한데, 간단히 씻고 뭐라도 먹을까?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티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나 잠 좀 잘 수 있을까.
잠?
당연히 안 될 것은 없었다. 시베라이트는 많이 피곤했겠거니하고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시베라이트의 집에 있는 물품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고급진 것이었다. 하티는 난생 처음으로 깃털 이불을 덮어보고는 키득거렸다.
아주머니들께서 아직도 널 아끼나봐.
시베가 콧웃음 쳤다.
그 살인마들은 나한테 속죄하려고 돈을 엄청 뿌려대거든. 속죄를 하려는건지, 나한테 이용가치가 있는 것인지…….
나도 너네 아주머니들 싫지만, 그래도 너무 그러진 마.
하티와 자신은 상황이 달랐다. 그러나 시베라이트는 하티에게 더 얘기하지 못했다. 하티의 어머니들은 하티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세 사람은 서로를 그리워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시베는 자신의 어머니들을 생각해봤다. 남을 착취해보기만 한 사람들이었다. 시베라이트는 그런 사람들 밑에서 자신이 태어나 자랐다는 것이 너무 역겨웠다.
하티, 근데.
시베는 입을 다물었다. 그 짧은 사이에 하티는 잠에 들었다. 공장에서 어제도 일을 하고 왔다니, 피곤할 만도 했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고 일과 상관없이 하티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티는 거의 10분마다 한 번씩 깼다. 두려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등 뒤를 힐끗거리더니 곧 안심하고 잠들었다. 자는 동안에는 앓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두 시간을 자다 깨다 하다가 더는 못 자겠는지 하티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시베라이트는 시간을 확인했다.
안 늦었지?
하티가 폭신한 이불을 온 몸에 둘둘 말고 앉았다. 시간은 넉넉했다. 시베라이트는 하티에게 머리라도 빗으라며 화장실을 가리켰다. 하티는 그 새 덥수룩한 머리를 기르기까지 해 완전한 부랑자로 보였다. 시베는 불만족스럽게 그를 쳐다보다가, 단정하게 꽁지머리로 만들었다. 하티는 그게 어색한지 머리 꽁지를 툭툭 건드려보며 장난쳤다.
근데 그 서클은 어쩌다 들어간거야? 급진적인 정책에 대해 논하는 서클이라며? 막……. 친구의 친구를 통해 몰래 들어가고, 암구호를 외워야하고-
화장실에 전단 붙어있더라.
회장은 뮬 루이터라는 깐깐한 졸업 학년 학생이었다.
뭐? 몰락자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한 적 있다고?
뮬이 안경을 추켜올렸다. 눈 증강 시술을 받지 않아, 안경은 보는 사람 눈이 뱅글뱅글 돌 지경으로 두꺼웠다. 시베라이트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장 접수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래……. 네 친구라는 애를 초청해서 한번 토론회를 열어보자. 계급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섞여서 토론을 하는 것은 진귀한 경험이니.
시베라이트는 하티가 동물원 원숭이가 되는 것이 아닌지 불안했다. 그러나 하티에게 이 곳을 보여주고 싶었다. 각성자들 중에서도 약자를 위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하티의 어머니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서클원들은 하티와 시베라이트에게 맞춰서 분리정책에 대해 가벼운 의견 교환을 하기로 했다.
근데, 사실 나 뭘 준비해야할지 모르겠어서.
하티는 아카데미의 넓은 광장을 걸으며 주위를 힐끗거렸다. 뭔가 잘못한 학생 같았다. 시베는 리아흐스도 초청하고 싶었다. 리아흐스는 거절했다. 하티도 잘 지내냐는 여상한 질문에 리아흐스는 대충 그래, 라고만 말하고 연결을 끊었다.
리아흐스가 가르친거 닥닥 긁어왔는데…….
그거면 충분해. 어차피 각잡고 토론하는 것도 아니고, 의견 교환이라고. 서클 돈으로 저녁 회식도 할거야.
오, 공짜 밥? 이 날을 위해 내가 뱃 속을 텅텅 비워왔다는거 아냐.
두 사람은 키득거렸다. 서클은 볕이 잘 드는 강의실을 하나 빌려서 가벼운 토론을 위해 책상을 둥글게 배치해놨다. 뮬 루이터 선배와 참여하겠다고 말한 다른 서클원들 반 정도가 와 있었다.
남자애였네?
뮬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아, 맞아. 하티. 여기서 너만 남자야.
시베라이트가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하티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자인 적도 있었는데, 뭐.
그랬나. 시베는 잠시 눈을 굴렸다.
일단 앉지 그래. 오늘은 토론까진 아니고, 의견 교환 정도만 할거야. 앞에 놓인 종이 한번 읽어보고 있어.
뮬의 말에 따라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주제가 간단히 적혀있는 인쇄물을 읽었다. 종족적 분리주의 정책에 대한 의견 교환. 하티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 눈썹이 묘하게 처졌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다 모였다. 원래 모이기로 한 시간보다 30분 늦은 시각이었다.
사실 몰락자에 대해서는 우리가 무지한 쪽입니다. 하티 웨인즈 씨, 실례지 않으시다면 먼저 운을 떼어주시지 않겠나요?
시작을 하며, 뮬 루이터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티는 머뭇거리다 일어났다.
말주변이 없지만, 잘 봐주시길 바라요.
서클원들이 까르륵 웃었다. 하티는 항상 그렇게 겸손을 떨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릴 때도 그랬다. 시베라이트는 의무교육 시절의 하티가 떠올라 살짝 미소지었다. 하티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한번 크게 내뱉었다.
일단, 몰락자가 아니라 엘릭스니입니다. 몰락자는 그들이 멸망한 자들이라고, 얕잡아 보기 위한 단어입니다. 그들의 정식 명칭은 엘릭스니에요. 엘릭스니.
몇몇은 자신의 공책에 받아적었고, 몇몇은 그냥 팔짱을 끼고 듣고 있었다.
저는 사정이 있어 엘릭스니들 밑에서 자랐습니다. 자세히 얘기하기 곤란한 사정이니, 양해를 구합니다. 그 곳에서 저는 분리정책의 실체를 마주했습니다. 각성자와 엘릭스니들이 각자의 구역에서 살며 한 국가를 운영하는 그런 것은 허상이에요. 각성자들은 언제든 분리주의의 탈을 쓰고 엘릭스니의 구역을 침탈할 준비가 되어있는 수탈자입니다. 리아흐스가 제게 말해준 바에 따르면,
잠깐요.
뮬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리아흐스요? 리아흐스는 엘릭스니 지명수배범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 사람, 아니 엘릭스니의 말을 인용하겠다고요?
시베라이트가 손을 들었다.
왜 지명수배가 됐겠나요? 각성자들의 침탈에 저항하다 범죄자라는 이름을 뒤집어 쓰게 된겁니다.
시베라이트, 리아흐스의 죄목 중엔 각성자 살해도 있습니다!
각성자들도 엘릭스니를 죽였지. 아주 많이.
하티가 비아냥거렸다.
리아흐스가 왜 각성자를 죽였는지 압니까? 분리주의 정책으로 리아흐스는 자신의 자손들과 강제로 떨어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폭력이 오갔으며, 엘릭스니 측이 다섯, 그 중 셋이 자손이었고, 각성자는 하나가 죽었죠.
한 서클원이 빠르게 사건을 검색해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었다.
해당 사건은 테러로 나옵니다. 리아흐스는 테러범이고, 조직적으로 각성자를 한 사람 죽였다고 합니다. 그들의 폭력에 어린 개체를 포함한 몰락자들의 사망 피해가 나온거고요.
조직적으로 각성자 놈들이 자손들을 “교육” 하겠다고 납치했다니까!
하티, 발언을 중지하십시오.
뮬 루이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너 임마, 너 각성자야! 몰락자가 아니라!
너도!
서클원에게 뮬이 쏘아붙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뮬이 다잡을 수 없이 불타고 있었다. 하티가 책상을 넘어 서클원에게 갔다.
내가 각성자라고? 난 엘릭스니들이 거둬서 키운 엘릭스니야. 몰락자라고. 너희들에겐 유감이 아주 많은 몰락자.
너 거울은 보고 사냐?
생김새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것이 아니란걸, 우리 모두 의무교육 시간에 배우지 않나요?
시베라이트가 끼어들었다. 서클원이 이거랑 그거랑은 다르다며 이야기할 때, 시베는 하티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하티. 너 흥분했어. 우리 잠깐 나갔다 오자.
뮬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하티는 눈살을 찌푸렸다.
제발. 내 얼굴 봐서라도, 응?
알았어. 그냥 돌아갈게.
하티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다들 준비가 너무 부족했어요. 우리는 강자고, 우리가 무지하게 던지는 질문은 명백한 도발일 뿐입니다, 동지들.
시베라이트가 말했다. 하티는 얌전히 시베를 따라가다 우뚝 멈추고는 서클원들에게 소리쳤다. 엘릭스니 언어였다. 뮬 루이터만이 그 소리를 듣고 안색이 창백해졌을 뿐이었다. 시베라이트는 못 들은 척 했다. 하지만 가슴이 쿵쿵거렸다. 핍박받는 이들은 누구든 오라, 여왕-켈의 목을 뽑아버릴 것이다. 하티는 도약선 표 시간을 앞당겨 집으로 돌아갔다. 시베가 사과하려고 하자, 하티가 고개를 저었다.
리아흐스가 날 쫓아냈어.
하티는 표를 꺼내 검표원에게 보여주었다.
왜 날 버렸는지 물어봐줘.
하티 사건 이후로 서클은 두 부류로 갈렸다. 하나는 시베라이트와 하티의 말에 감명받고 시베의 편에 선 사람들. 다른 하나는 시베라이트와 하티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고 뮬 루이터의 편에 선 사람들. 시베는 잠시 자기 편 사람들과 어울렸으나, 아무리 이야기를 해봐도 절박함보다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품은 나에 심취한 사람들 같아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뮬 루이터는 사실, 시베에게 별 감정이 없었다. 있었다면 하티와 하티를 자극한 서클원에게 있었겠지. 하지만 시베 밑에 모여든 사람들은 자신의 서클을 반으로 갈라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마침 성추행 사건이 터졌다. 뮬 루이터는 피해자를 할 수 있는 만큼 지원해주면서, 범인이 시베의 추종자 하나와 절친한 친구라는 것에 주목했다.
하지만 전 걔랑 절교했는데요.
범인의 친구는 억울하게 소리쳤지만 서클 회장의 결정이었다.
시베라이트. 이건 부당해요. 항의해야해요.
시베라이트는 피곤했다. 뮬 루이터가 시베에게 말했다.
하티랬나, 그 애의 말은 옳다고도 생각해. 하지만 시베, 우리는 걔가 아니잖아. 누구 편에 설지 확실히 정해둬.
누구 편에 서야하나? 시베는 하티의 편에도, 뮬의 편에도 서고 싶지 않았다. 시베라이트는 서클을 그만두었다. 공부해야했다. 여왕-켈의 목을 뽑아버리겠다는 하티의 말도, 자신의 알량한 권력에 목을 멘 뮬의 입장도, 하나도 이해 가지 않았다. 리아흐스는 엘릭스니 권익 향상 대회에 시베라이트와 서클원들이 와주기를 간곡히 요청했다. 시베라이트는 말했다.
미안해요, 리아흐스. 저는 이제 그 서클에 속해있지 않아요.
두 사람은 아주 길게 침묵했다. 하티는 잘 있냐는 물음에 리아흐스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통신이 끊겼다. 그 곳에서 주저앉아 갈등을 피할 수는 없었다. 시베라이트는 이미 한번 갈등을 피했다. 다시 통신을 걸었다.
하티에게 들었어요, 왜 하티를 쫓아냈어요?
리아흐스가 얼버무리지 못하게 시베는 다시 한번, 강하게, 소리쳤다.
왜 하티를 쫓아냈어요!
하티는!
리아흐스의 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아이는 각성자니까.
시베라이트는 뒷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와 계속 연락을 하던 이유는, 그래, 리아흐스는 나를 이용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있었구나. 하티는 각성자다. 각성자는 각성자 품에서 자라야한다. 하티는 엘릭스니다.
하티가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아세요?
리아흐스는 하티의 악몽을 들으려하지 않고, 십 분에 한 번 깨 등 뒤를 확인하던 모습을 못 본 척 했다. 왜냐면 하티는 각성자에게로 돌아가야하니까. 시베라이트와 하티는 한 가지 말 않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하티는 어떻게 리아흐스 일당을 구출해냈는가. 시베는 그것을 알아버리면 하티를 영원히 미워할 것 같았다. 하티는 옳은 일이었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얘기하겠지만, 시베는 준비되지 않았다. 그게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 시베라이트는 그래서 공부를 했다. 공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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